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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의 영, 해방의 영 (롬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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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영, 해방의 영 (롬 8:1-2)


어떤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이분은 주민등록 등본을 볼 때마다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몇십 년 전 교회 사택에 들어가면서 전세금에 여유가 생겨서 다른 사람의 조언을 듣고 농지를 구입했던 적이 있습니다. 농지는 아무나 매입할 수 없고 현지인만 가능하기 때문에 주소를 잠깐 이전을 했습니다. 소위 위장전입을 한 것입니다. 공직자들 청문회에서 가장 많이 지적되는 죄목입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문제가 생겼습니다. 

옛날 주민등록 등본에는 과거 주소를 이전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등본을 뗄 때마다 그 주소가 눈에 띄었고 마치 자기를 죄인으로 정죄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목사님이 등본을 떼었다가 뛸 듯이 기뻐했습니다. 과거의 주소 기록이 깨끗이 사라지고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그 해에 주민등록 전산화가 되면서 옛 주소의 흔적이 사라졌던 것입니다. 물론 여전히 기록들은 컴퓨터 안에 다 남아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게 된 것, 그것만으로도 기뻤던 것입니다.

이것이 정죄함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과거의 기록이 깨끗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죄가 잠시 감추어지는 것도 이처럼 기쁜데 우리 인생이 지은 수많은 죄들을 다 용서받는다면 그 기쁨은 얼마나 더 하겠습니까? 성경에서는 죄를 빚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께 빚을 지는 것과 같습니다. 빚이 조금만 있어도 마음에 걸리는데 어마어마한 빚을 평생 동안 갚아야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인생에는 더 이상 기쁨이 없고 우울함과 무거움만이 지배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빚을 다 무효로 한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그때의 기쁨과 자유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정죄함이 없는 은혜입니다.

정죄함이 없는 은혜에 대해서는 일찍이 다윗이 경험한 바 있습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와 불륜을 행하고 그 남편된 우리야를 살인교사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 죄에 대한 대가로 불륜의 아이가 죽었고 자신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키고 몹쓸 짓을 하는 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의 죄가 다윗의 인생을 무겁게 짓눌렀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던지 다윗은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선물은 죄사함의 복이며, 죄사함은 우리에게 더할 수 없는 자유함을 가져다줍니다.

죄를 짓는 순간부터 우리를 정죄하는 자가 따라붙습니다. 어떤 어둠의 세력을 거론하기 전에 우리 양심이 우리 자신을 고발하고 괴롭힙니다. 오늘 말씀에서 ‘법’이란 단어가 그런 뜻이 있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 죄와 사망의 ‘법’이라 하는데 ‘법’은 ‘지배한다’는 뜻입니다. 죄를 짓는 순간 죄와 사망이 우리를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최근에 어떤 살인자가 죽기 전에 자기의 살인죄를 자백하여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10년전에 자기 회사 사장을 회사 동료와 함께 죽였습니다. 미궁에 빠졌던 이 사건은 살인자가 위암 말기의 죽음을 앞두고 자백함으로써 해결의 실마리가 풀렸습니다. 끊임없이 추격한 경찰의 집요함이 이룬 성과입니다. 이 살인자는 자기 죄를 자백하며 “눈만 감으면 사장 얼굴이 떠오르곤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평생 얼마나 괴로움을 당했겠습니까? 경찰은 자기를 추적하고 자기 양심은 스스로를 괴롭힙니다. 이것이 죄와 사망에 지배를 받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죄와 사망이 우리 인생을 콘트롤합니다. 내가 지은 죄를 덮기 위해서 더 큰 죄를 짓도록 만듭니다.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우리 삶은 망가지고 무기력해집니다.

성령의 법

그런데 오늘 말씀은 놀라운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정죄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제는 생명의 성령의 법의 지배를 받는 인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2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다” 죄사함의 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모신 자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1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라는 명백한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란 말과 성령 안에서란 말을 동격으로 사용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곧 성령 안에 있는 자이고, 성령의 지배를 받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2천년 전에 팔레스틴 땅에서 살다가 십자가에 달려돌아가시고 다시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반면에 성령은 그 그리스도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도록 현존하도록 만드시는 분입니다. 교회 공동체와 내 안에 임재한 성령이 바로 내가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생생한 증거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9절에서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선포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서는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예수를 주로 고백하게 된 것은 우리의 의지만이 아닌 성령의 역사입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의 존재보다 내가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났다는 더 강력한 증거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선언은 확실합니다. 느낄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 것에서 우리 구원의 근거를 잡습니다. 우리 가운데 성령의 은사가 있고, 성령께서 말씀하시며, 성령의 감동을 체험하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이제 죄와 사망의 왕국에서 벗어나 생명의 성령의 왕국으로 옮겼습니다. 우리 의지가 아니라 성령이 다스리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로마서 7장에서는 이를 다른 식으로 설명합니다. 전 남편의 법에 얽매여 살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남편이 살았을 때는 마음대로 할 수 없고 남편의 법에 매여 삽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이 여자는 자유를 얻습니다. 다시 결혼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 또한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남편이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한 편이 죽음으로 이제 그 법적 관계는 청산되었습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의 지배에서 벗어나 성령이라는 새 남편을 맞았습니다. 그 안에서 이제는 생명과 해방의 자유를 누리며 삽니다.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시기에 생명의 성령입니다. 죄와 사망에 얽매여 살던 우리를 자유케 하였기에 해방의 성령입니다.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은 이 생명과 해방의 성령입니까? 아니면 아직도 여전히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선언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우리는 새로운 왕국으로 옮겼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왕국의 지배를 받습니다. 전쟁과 독재와 기근으로 불안했던 나라에서 평화와 풍요와 자유와 존엄성이 살아있는 나라로 옮겼습니다. 우리 과거 또한 끝이 났습니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남편을 맞아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과거의 가난하고 불안했던 삶에서 이제는 좋은 신랑 만나 안락하고 존귀한 삶으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우리 안에 부어진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 생명의 성령에 대해서 좀 더 깊이 묵상하기를 원합니다.

생명의 영

성령은 생명의 영입니다. 사망의 법과 정확히 반대쪽에 있습니다. 사망은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은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시면 우리 영이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과거의 우리는 마치 꺾인 꽃과 같았습니다. 자체 안에 양분과 수분이 있어 당분간은 살지만 서서히 죽어갑니다. 그 전 인생이 이런 죽음의 공포를 안고 살아갑니다. 사망이 지배하는 인생입니다. 우리가 성령 하나님 안에 산다는 것은 꽃이 원래의 나무에 접붙여진 것과 같습니다. 뿌리로부터 충분한 양분과 수분을 공급 받습니다. 생명의 근원과 함께 하기에 우리 안에는 더 이상 불안이 없습니다. 늘 풍요로움과 기쁨이 있습니다. 죽음은 멀리 떠나고 생명이 우리를 지배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안에 있는 부정적인 태도와 두려움들이 사라집니다. 어린아이의 모습에서 이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생명의 덩어리입니다. 어린아이가 염세적이던가요? 어린아이가 한숨을 쉬던가요? 그들에게는 늘 기쁨이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그 전 삶이 놀이이고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팔팔 뛰는 생명의 힘입니다.

지난 번에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두 가지 종류의 인간형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하나는 낙타 유형입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온종일 사막을 걸어갑니다. 낙타는 ‘너는 해야만 한다’는 의무감으로 가득 차 괴롭게 걷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사자 유형입니다. 사자는 반항하며 ‘나는 원한다’는 자유정신으로 이제는 자기의 길을 갑니다. 좌충우돌합니다. 그런데 니체가 가장 이상적인 유형으로 들었던 것은 세 번째의 어린아이 유형이었습니다. 니체는 어린아이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어린아이는 천진난만이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으로 굴러가는 수레바퀴이고, 최초의 운동이자 신성한 긍정이다.” 온갖 미사여구를 갖다 붙이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놀이’라는 단어입니다. 즐긴다는 것입니다. 무리가 없이 자연스럽습니다. 억지로 하지 않습니다. 갈등이 없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힘입니다. 생명은 의지력을 발휘하지 않아도 안에서 자연스럽게 솟아오릅니다.

생명의 영은 우리 안에 있는 상처들과 우리 육신의 연약함을 치유합니다. 인간 안에는 면역력과 치유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프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아파야 신경이 쓰이고 그래야 우리 몸이 자가 치유를 시작합니다. 생명의 영은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무한한 힘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 하셨던 중요한 일들 중 하나는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들린 자를 자유케 한 일이었습니다. 

이 생명의 역사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에 의해서 여전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생명의 영이 임할 때 우리 마음의 상처들을 드러내고 치유하기 시작합니다. 이 은혜가 넘치면 우리 육신의 질병도 치유하시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1:2) 이것이 생명의 영이 간구하는 바이며 행하시는 사역입니다.

생명의 영은 우리로 성장하도록 만듭니다. 살아 있는 것은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한참 성장기의 아이들은 매번 운동화를 사줄 때마다 그 치수를 늘려가야 합니다. 발이 크고 키가 자라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생명의 영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도록 만드십니다. 로마서 8장 29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우리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자라가고 있습니다. 오래 예수를 믿었어도 내 안에 여전히 완고한 자아와 아집만이 살아 있다면 그것은 성령 안에 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이 되기까지 성령은 우리의 인격을 자라게 하십니다.

해방의 영

성령은 또한 해방의 영입니다. 우리를 얽매는 죄의 법과는 정확히 반대 선상에 있습니다. 해방은 곧 자유를 뜻합니다. 내 안에 자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속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 안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이 오른쪽으로 가라 왼쪽으로 가라, 밥 먹으라 말라 하고 지시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우리가 노예입니까? 이래라 저래라 하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선택을 존중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네가 가는 곳에 나도 함께 갈 것이다. 내가 도와주리라’ 이렇게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렇게 믿으니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을 마치 자유를 제한당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냐 자유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것을 요구합니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믿음은 인간을 모든 것의 자유로운 주인으로 만들며 누구에게도 예속시키지 않는다” 실제 사람들은 무언가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자기는 ‘자유다’라고 외치는 사람들도 뜯어놓고 보면 무언가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고상하다 하여도 이념이나 사상의 노예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민족이나 국가가, 아니면 어떤 인간이, 더 노골적으로는 물질의 노예가 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이념이나 사상보다 더 크신 분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자유를 믿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주의 성령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습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3:17) 사람들은 저에게 자주 묻습니다. 왜 한신대를 선택하고 기장을 선택했느냐고 말입니다. 저는 그럴 때마다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곳에는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교단은 작을지 몰라도 그곳에는 신앙과 양심의 자유가 있고, 학문의 자유가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의 구호가 “자유, 평등, 형제애(박애)”였듯이 인간에게는 자유가 매우 소중합니다. 교회가 권위와 질서의 수호신처럼 된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권위와 질서 이전에 교회는 자유의 정신이 그 근본바탕입니다.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선언을 들어보십시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초대교회의 자유의 정신은 유대인과 헬라인이라는 민족적 구속을 깨뜨리고 있습니다. 종이나 자유인이라는 신분제도를 철폐하고 있습니다. 남자나 여자라는 고질적인 가부장적 제도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이 우리를 부자유하게 만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를 이렇게 비유하고 싶습니다. 기차가 자기가 달리고 싶다고 하여 마음대로 달려서는 속도도 낼 수 없고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어렵습니다. 기차는 레일 위에서 달려야 빠른 속도로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말씀은 자유를 위한 구속이요 제한일뿐입니다.

자유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풀어놓으면 무너질 것 같고 배가 산으로 갈 것 같이 염려합니다. 아닙니다.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자유도 소중한 것을 압니다. 무질서한 것 같지만 결국 합일점을 찾아갑니다. 그렇게 형성된 합의는 그 무엇보다 강합니다. 그러니 자유를 좀 지켜보는 여유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독재와 비민주처럼 약하고 비효율적인 것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처음으로 만났던 하나님은 바로 이 자유와 해방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출애굽에서 경험한 하나님은 해방의 하나님입니다. 바로 앞에 선 모세는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왕에게 보내어 이르시되 내 백성을 보내라” 애굽의 압제로부터 내 백성을 해방시키라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해방의 하나님입니다. 파라오의 압제로부터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시키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자유가 감당하기 힘들었던지 끊임없이 애굽의 노예로 돌아가기를 원했습니다. 배부른 돼지가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배는 좀 고플지언정 자유로운 소크라테스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 하셨던 일에 대해서 누가복음에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4:18-19) 주님은 죄의 포로된 자들을 자유케 하셨습니다. 주님은 삶의 무게에 짓눌린 자들을 자유케 하셨습니다. 가난하고 죄인으로 정죄된 자들을 삶의 무기력에서 끌어내어 역사의 주체로 삼으셨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자유는 단지 우리를 과거로부터 풀어놓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자유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능력이 없는 자유는 더 괴로운 뿐입니다. 루즈벨트가 네 가지 자유를 역설한 바 있습니다. 언론의 자유, 종교와 신앙의 자유, 가난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온전한 자유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들입니다. 이중 가난과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가슴에 닿습니다. 아무리 자유를 외쳐도 가난과 전쟁과 파괴의 공포 가운데 있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해방의 영이신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해방시키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해방의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벙어리 귀신들린 자 앞에서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능력 주시는 자는 바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8:32) 모든 것을 허락해 주시고 우리 자유함은 바로 이 풍요함에서 기인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가진 사람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서도 자유케 하십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주님의 사랑이 우리와 함께 하기에 우리는 어떤 사람과의 만남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다른 생각과 적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함께 있어도 두렵지 않습니다. 과거에 메이지 않고 장래 일에 대한 두려움도 없이 우리는 창조적으로 현재를 돌파하며 미래의 그림을 그려갑니다. 그 용기와 확신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우리 안에 부어진 해방의 성령님이 우리를 모든 무기력으로부터 자유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는 성령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우리를 의롭다하신 이는 내 의지의 결정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십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롬8:33)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모든 싸움에서 “넉넉히 이깁니다.”(롬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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