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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다 나은 삶을 위하여 (고후 13: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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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나은 삶을 위하여 (고후 13:11-13)   


아직 6월 중순인데... 벌써 기온이 30도를 웃돌고 있습니다. 아마도 30도라고 하면 그것이 우리의 한계를 결정하는 심리적인 분기점이 아닌가 합니다. 날씨가 더우면... 여름인데 더우려니.. 이렇게 생각하다가도 30도가 넘으면 그 때부터는 좀 견디기가 힘들어지는 것 같은데... 벌써 기온이 30도를 넘어서고 있으니... 도대체 올 여름은 얼마나 뜨거울까... 생각하면, 벌써부터 몸이 지치고 힘이 빠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더위에 지칠 때... 식물들은 무섭게 성장하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파릇파릇하면서도 아직은 연약해 보이는 가지들이 이제는 푸른빛이 점점 더 짙어지고 있고, 무성해지면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힘과 양분을 축적하면서 준비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 교회 마당에 심겨진 감나무를 보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지를 많이 쳐주어서 볼품도 없고 앙상한 느낌이었는데, 어느 사이엔가 잎사귀도 무성해지고 많은 줄기들이 다시 자라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이 시기가 얼마나 치열하고 생명으로 풍성한 절기인가... 하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그것은 아주 자연적인 현상일 것입니다. 식물들이 자라나고 열매를 맺는 것... 이렇게 뜨거운 열기와 이따금씩 쏟아져 내리는 비를 통해서 공급되어지는 충분한 수분... 아마 이런 것들이 더운 계절을 보내는 우리들에게는 그다지 달가운 것이 아니라고 하여도, 이렇게 식물들이 자라나는 데 있어서 아주 좋은 환경과 조건을 조성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도 우리가 맞이하는 시간을 이렇게 받아들이는 것은 어떠하겠습니까? 

오늘이라는 시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겉으로 보기에는 점점 더 견디기 힘든 시절이 다가오는 것 같아도... 우리가 보내는 지금이라고 하는 시간이 내가 더 성숙하게 되고... 부족하고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가며, 아름답고 좋은 열매로 변화되기에 충분한 조건과 환경을 갖추었다고 생각해 보지는 않았는지요? 어쩌면 지금 내가 힘들어 하는 것... 지금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 지금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 때로는 이런 것들이 내가 변하고 더 나은 삶을 지향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동기가 되기도 하고,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오늘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여기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우현 씨가 쓴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른다’라는 시가 있습니다. 
이십대에는 
서른이 두려웠다
서른이 되면 죽는 줄 알았다
이윽고 서른이 되었고 싱겁게 난 살아 있었다

마흔이 되니
그때가 그리 아름다운 나이였다

삼십대에는
마흔이 무서웠다
마흔이 되면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다
이윽고 마흔이 되었고 난 슬프게 멀쩡했다.

쉰이 되니
그때가 그리 아름다운 나이였다.
예순이 되면 쉰이 그러리라
일흔이 되면 예순이 그러리라

죽음 앞에서
모든 그때는 절정이다
모든 나이는 아름답다
다만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를 뿐이다
   
만일 우리가 내가 맞이한 오늘이 나의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야... 이렇게 생각을 한다면... 우리는 내가 살아가는 한 평생을 그런 기분으로 살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오늘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은 절대로 아니라고 간주해 버리고... 어떤 다른 세상... 다른 시간을 그리워만 한다면... 우리에게 그런 날은 결코 오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오늘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맞이하면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주어진 일을 통해서 보다 나은 삶을 지향하며 산다면... 나의 모습은 그 자체로만도 참 아름다운 것이고... 우리에게는 오늘 보다 더 나은 세상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우리들에게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항상 가져야할 마음이 어떤 것인가...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이 좀 자라나기를 바란다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이 더 나아지기를  희망한다면... 우리가 귀를 기울이고 의식적으로라도 노력해야할 삶의 소중한 덕목들... 그것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과의 길었던 대화를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그들에게 당부하는 말씀을 통하여 세상을 살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막 살지 않고... 그저 기분 내키는 대로 생각하며 행동하지 않고, 의식적으로라도 추구하려는 삶의 작은 원칙들... 하지만, 그것들을 잘 지키게 될 때에는 하루 하루 달라지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며 신기해 할 수 있는 그런 신앙생활의 소중한 덕목들을 여기에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 기뻐하십시오(v.11) 먼저 바울은 우리들에게 기뻐할 것을 권합니다. 어쩌면 기뻐하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은 우리에게 그다지 신선하게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도 기뻐하라는 그의 충고를 이미 여러 번 들었습니다.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그는 기쁨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빌4:4) 그런가하면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그는 기쁨을 이야기합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살전 5:16) 어쩌면 오늘의 말씀은 다른 두 곳의 말씀보다는 그 정도가 덜 할 수도 있습니다. ‘항상’이라는 말이 빠졌으니까요. 
지금 기쁘십니까? 기쁘다면 무엇 때문에 기쁘신가요? 최근에 기쁘다고 느껴본 것은 언제였고... 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사실... 기쁜 일이 점점 더 없어지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인 것 같습니다. 어쩌다가 가끔씩 기쁠 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기쁨도 오래 가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도대체 사도 바울은 무엇 때문에 기뻤을까요? 그는 항상 기뻐하라고 하였는데... 정말 그는 항상 기뻤는지... 뭐가 그를 기쁘게 하였는지... 참 궁금해집니다. 
   
바울이 여기에서 기뻐하라고 하였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기뻐하라는 충고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다 다른 형편 가운데 있는데...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기쁜 일이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고통이고 슬픔일 수도 있는데... 그런 것을 다 무시하고 기뻐하십시오...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그 기쁨은 예수를 통해서 찾게 되고 누리를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예수가 모두에게 기쁨의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간에 함께 나누었던 속회 공과의 주제가 그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들어 오면서... 다윗은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웠는지... 그는 하나님 앞에서 왕으로서의 권위를 벗어 버리고서는 제사장들이 입는 에봇이라는 모시옷으로 갈아입고는 언약궤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춥니다. 옷이 벗어지는 것도 모르고 말이지요... 그래도 그는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내 미갈은 달랐지요. 그녀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보다는 왕으로서의 체면이 구겨진 것이 더 속상했습니다. 미갈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누리를 기쁨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솟아 나오는 기쁨이었고,. 미천한 자신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일군을 삼으신 것에 대한 기쁨이었습니다.
   
물론 우리들과 다윗을 비교한다면 그 정도는 다를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 중에 왕이 된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다윗처럼 목동이라는...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비천함을 딛고 일어서서 왕이 된 사람은 우리들 중에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돌보심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오늘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다윗도 아무런 아픔이나 고생이 없이 왕이 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마다 그런 섭섭하고 아팠던 순간 보다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의 순간을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언약궤 앞에서 이렇게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춤을 출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저절로 기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다면 바울은 우리들에게 ‘기뻐하십시오...’ 이렇게 말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설혹 기뻐할 일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도... 그래도 기뻐하십시오. 기쁠 이유를 찾아보십시오. 예수는 우리가 언제나 기쁠 수 있는 분명한 비결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하신 일을 기억하면서... 기뻐하십시오... 그렇게 바울은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 온전하게 되기를 힘쓰십시오(v.11) 바울은 또 이렇게 우리에게 권합니다. 온전하게 된다는 것... 이것은 생각해보면 우리들에게는 감당하기가 어렵고 부담스러운 권면으로 다가옵니다. 우리들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문제가 참 많고 부족한 것뿐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이런 부족함은 점점 더 많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현상만 유지할 수 있어도 다행이다...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온전하게 되기를 요구한다면... 어쩌면 우리는 그나마 가지고 있었던 의욕마저도 꺾이게 되고 맙니다. 하지만, 오늘 사도 바울이 우리들에게 ‘온전하게 되기를 힘쓰십시오...’ 이렇게 권면하고 있는 것은 참 중요한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무기력하게만 삶을 다 흘러 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제가 한 번은 ‘나는 도대체 언제쯤 은퇴라는 것을 하게 될까?’ 아주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계산해 보았습니다. 만일 제가 정해진 대로 70세에 은퇴를 한다고 치면 지금 감리교회의 법에 의하면 2029년 봄이 되어야 은퇴를 할 수 있습니다. 아직도 17년이나 남았습니다. 어쩌면 저보다 여러분들이 이 사실을 더 끔찍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고 저는 생각하는데... 과연 그 때까지 잘 할 수 있을까? 이제는 신체의 리듬이나 모든 것이 내리막길일 텐데... 하나님은 왜 목사들에게 70세까지 목회활동을 하라고 하셨을까? 진지하게 그런 고민을 해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저와 비슷한 또래의 목사들에게 이런 제 고민을 털어 놓았습니다. ‘무엇인가 돌파구가 있어야 하지 않겠어?’ 그런데... 아무런 반응도 없어서 당황하기도 하였습니다. 
   
창세기 17장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서두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나에게 순종하며, 흠 없이 살아라...’(창17:1) 놀랍게도 하나님은 99세가 된 아브라함에게 더 높고 존귀한 삶을 촉구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개역성졍에는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7:1) 이렇게 번역되었습니다. 나이가 99세인데... 이제는 인생에서 내리막길에 들어 선 것도 오래 전의 일인데... 그냥 이렇게 살다가 가는 거지...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는 없는 나이인데도 하나님은 더 높은 삶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할 수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단지 이렇게 살다가 가기에는 너무 아쉽고 안타까우니까... 더 멋지게 살 수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들에게 그런 요구를 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좀 더 높은 꿈과 희망을 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향하서 부단하게 자기를 채찍질 하고 결단하면서 보다 나은 삶을 향하여 발돋움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서 원하시는 바로 그 삶이라고 하는 것! 우리가 이렇게 살려 한다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우리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 서로 격려하십시오...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격려하는 것... 혹시 남을 격려한다는 것은 내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시는지요? 내가 격려할 수 있는 대상이란 단지 나의 자녀나 가족에게만 국한 되어 있지, 이런 범위를 넘어서는 것은 주제를 모르는 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시는지요... 그런데 오늘 사도 바울은 우리들에게 서로 격려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격려한다는 것...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의기소침하고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아픔을 달래주고 용기를 북돋워 주는 것... 그래서 그가 실패를 딛고서 다시 일어나도록 힘과 용기를 주는 것... 이것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이 우리가 서로에게 해야 할 많은 일들 중에서 격려할 것을 권한 것도 참 중요한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저마다에게 세상을 살아오면서 겪었던 많은 고통과 실패에 대한 경험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어떤 것들은 상처가 너무 깊어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잊지 못하고 가슴에 품고 있게 되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서로를 향하여 염려와 걱정과 사랑을 담아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격려의 말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다시금 일어 설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괜찮아...’라는 말.. 이것은 서로를 격려할 수 있는 좋은 말입니다. 너의 잘못을 파헤쳐서 아픈 마음을 더 아프게 만드는 것보다는 ‘괜찮아’이렇게 말하면서 허물을 덮어 준다면... 그 말이 얼마나 힘이 되겠습니까? 
    
‘너는 잘 할 수 있어...’ 이 말도 격려하기에 좋은 말이지요. 실패해서 주저하고 머뭇거리는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해봐...’ 이 말도 격려의 마음이 담겨 있는 좋은 말이지요. 자신감을 잃고 포기하려는 사람을 다시 일어서게 하고 다시 시도하게 하는 말입니다. 그 외에도 너를 격려하기에 적합한 말들은 참 많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를 언제나 가능하게 하시고 다시 일어서게 하시는 주님을 향한 믿음과 너를 향한 사랑을 담아서 서로를 격려하면서 힘을 얻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 같은 마음을 품으십시오... 바울은 우리들에게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다른 사람을 격려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만일 상대방이 내가 하는 말을 잘 이해하고 선뜻 동의해 준다면... 우리는 금방 같은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을 만나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물론 상대방이 내게 하는 제안이나 생각이 내 것보다 더 좋고 훌륭한 것이라면... 우리는 그의 생각을 인정하고 쉽게 따를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도 못하면서 고집을 부리게 된다면... 그럴 경우에 서로가 생각을 모으고 같은 마음을 품는 다는 것은 힘든 일일 수밖에는 없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서로를 인정해주고 참아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를 중심으로부터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가 품고 있는 마음의 생각이 어떤 것인지... 이것을 알아가는 것... 여기에서부터 같은 마음을 품을 수 있는 길은 열리는 것이지요. 저의 경우도 그런 것 같습니다. ‘아 이 사람이 나를 인정해 주는 구나... 이 사람이 나에게 대하여 참 진지하구나... 이것을 알게 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열리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처음에는 받아들이기가 힘들다가도 그런 생각의 차이를 넘어 서서 같은 서로가 공감하는 것이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서로에게 경청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신학계의 원로이신 은준관 박사님이 한 강연에서 목사들에게 이런 충고를 하는 것을 듣고 깊은 공감을 하고 있습니다. 목회자가 잘 들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분은 그것을 ‘제사장적인 들음(priestly hearing)'이라고 표현 하셨는데... 제 마음 가운데 깊이 다가왔습니다. 이제는 말하기는 그만하는 것... 너를 향해서 내 입장을 이해시키려 하고 받아들이기를 주장하는 것... 이것을 그만하고 네가 하는 말을 들으려 하는 것... 너의 마음을 읽으려 하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가 직면한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극복하고 한 마음을 품게 하는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화평하게 지내라는 것... 싸우지 말고 잘 지내라... 이런 권면으로도 받아들일 수가 있겠지요... 그러면 그 방법은 참 간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주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니까요. 그러면 싸울 일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 마음이 평화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어딘가 모르게 불편한 구석이 있습니다. 화평하다는 것... 그것은 단순히 싸우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좋은 상태...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 느낌... 그것을 우리는 평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행복’이라는 더 적합합니다. 
  
물론 혼자서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행복이란 다른 사람들과 그것을 나눌 때에 더 풍성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고, 나누고, 소통하면서 누리는 행복은 혼자서는 도저히 누릴 수가 없는 것이지요. 우리가 이렇게 서로 화평하게 지낼 때에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신다는 것을 바울은 이야기하였습니다.(11절) 
   
이렇게 나눔과 대화와 소통을 통해서 행복을 찾는 것!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추구하시는 존재양식이기도 하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오늘은 우리가 삼위일체 주일로 지키는 날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유일하시고 한 분이시지만, 그 분은 우리들에게 성부이신 하나님,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여기에는 자기 안에서 서로 다른 모습을 존중하시며, 소통하시고, 나누심을 통해서 더욱 행복해 하시고, 힘차게 미래를 헤쳐 나가시는 하나님의 성품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같은 교회에서 주님을 믿고 섬기는 성도들을 통해서 소통하고, 삶을 나누며 행복해할 때... 바로 그 자리에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럴 때에 우리가 누리는 평화는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느끼거나 경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복이 오늘 우리들 가운데 충만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 좀 더 풍성하고 깊은 세계로 나가는 출발점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히 우리가 살면서 겪는 여러 가지 사건이나 일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여러 사람들과의 만남들... 이것이 결코 우리를 뒤로 물러서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 자신이 좀 더 성숙하고 온전한 믿음과 인격을 가지기 위하여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 기뻐하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기쁨이란 주님으로부터 와지는, 삶에 대한 밝고 건강한 태도를 말합니다.  
   
* 온전한 삶을 추구해야 하겠습니다. 그냥 이런 식으로 삶이 끝나버릴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멋진 꿈을 가지고 그것을 위하여 성실하게 도전하는 마음을 항상 잃지 말아야 합니다. 
   
* 오늘 이 시대에 만나게 하시고 함께 하며 살게 하신 사람들... 그들을 정말 소중히 여기며, 사랑과 위로를 담아서 격려하는 것...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그들과 소통하는 일은 정말로 즐겁고 행복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너를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그 자리에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들에게 드러내시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오늘에 머무르지 않으며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하여 부단히 도전하며 전진해 가십니다. 자신의 내면 가운데 있는 서로 다른 모습들이 서로 대화하고 소통하며 그것을 통해서 사랑과 평화를 누리십니다. 
이러한 삶의 양식은 결국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추구하는 삶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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