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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너진 성과 백성을 위한 기도 (느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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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성과 백성을 위한 기도 (느 1:1-11)


느헤미야는 남의 나라 땅에서 살다가 바벨론을 정복한 페르시아에 의해 해방되고 모국 땅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다 백성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첫 번째 귀향민은 아니었습니다. 첫 번째 귀향민 그룹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지(기원전 586년) 거의 반세기가 지나(기원전 538년) 스룹바벨이 이끌고 돌아왔습니다. 그 80년 후(기원전 458년) 에스라가 이끄는 두 번째 그룹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또 13년 후(기원전 445년) 느헤미야가 세 번째 그룹을 이끌고 고국 땅으로 온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미 70년 전(기원전 515년)에 재건되었지만 그 성전을 보호해야 할 예루살렘의 성벽은 아직도 황폐한 채로 내버려져 있음을 알게 된 느혜미야는 성벽 수축에 나선 것입니다. 그는 온갖 어려운 여건과 방해와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공사를 시작한지 52일 만에 성벽을 완성했습니다. 

느헤미야라는 이름의 뜻은 “주께서 위로하신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포로생활로부터 돌아왔지만 낙심한 채로 지내던 유다 백성의 마음에 활력을 불어넣어주고 희망을 가져다주는 데 느헤미야를 사용하셨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깊이 의존한 신앙의 사람이었고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폐허가 된 성벽을 재건할 뿐 아니라 무너진 민족공동체를 재건하고 그 공동체를 주변 나라들과 혼합주의로부터 막아낸 지도자입니다. 한 마디로 그는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어떻게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왕의 신임을 얻어 그의 앞에서 일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그가 기슬르월에 수산 궁에 있을 때 유다로부터 온 동족들을 만나보게 되었습니다. 수산은 티그리스 강 동쪽 지역에 있는 페르시아 제국의 주요 성읍 가운데 하나였고 수산 궁은 페르시아 왕의 겨울 주거지였습니다. “기슬르월”은 현대력으로는 11월에서 12월 사이에 해당합니다. 

그러니까 겨울 궁전에 와 있었을 것입니다. 유다에서 온 사람들을 보자마자 느헤미야는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이 어떠한지를 물었습니다(본문 2절). 여기서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이란 전에 바벨론으로 사로 잡혀가지 않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기보다는 사로잡혀갔다가 살아남아 포로생활을 면하고 유다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느헤미야에게 말하기를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했습니다(본문 3절).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것은 이미 140년 이상 지난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때 함께 성벽도 허물어지고 성문들도 불타 버린 일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이 다시 성벽을 쌓던 일이 그곳에 유다 백성 대신 와서 정착하여 살던 이방인 대적들의 방해로 중단되고 다시 헐렸음을 가리키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아무튼 아직도 예루살렘 성벽은 중수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황폐하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성벽은 안전과 평안의 상징이었습니다. 특히 일국의 수도의 성벽은 그 도성의 위엄과 자존심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이 성벽도 없이 황폐한 채로 방치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뿐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더렵혀진 채로 내버려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것을 느헤미야는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몇 날 동안을 밥도 먹지 않고 슬피 울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본문 4절). 

오늘 본문 5절 이하는 거의 다 그의 기도문입니다 먼저 본문 5절을 봅니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초월적이시며 동시에 내재적이신 하나님으로 믿는 균형 잡힌 신앙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하나님”이시면서도 당신의 백성 가운데 계시고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계속해서 그의 기도를 들어봅니다. 본문 6-7절입니다: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먼저 하나님 앞의 죄를 자복했습니다. 그는 자기 조상과 민족의 모든 죄까지 끌어안고 기도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기도하며 먼저 하나님께 조상과 민족의 죄와 악을 자복한 느헤미야는 그러나 하나님이 언약의 하나님이시며 은혜의 하나님이시고 이미 놀라운 은혜와 권능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내신 일이 있으신 하나님이심을 상기합니다. 본문 8-10절을 읽습니다: “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을 것이요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 이들은 주께서 일찍이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들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 “주께서 일찍이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셨다”는 것은 출애굽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은혜와 권능의 하나님을 고백한 느헤미야는 그의 기도의 끝에 가서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본문 11절을 봅니다: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느헤미야가 마지막에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한 것이 그의 기도의 단 한 가지 구체적인 간구입니다.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한 데서 “이 사람”은 아닥사스다 왕을 가리켜 한 말일 것입니다.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한 것은 그가 오랜 기도 끝에 자기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았고 그것을 “오늘” 결행하기로 마음에 정하고서는 왕 앞에 나아가기에 앞서 하나님께 기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하고자 하는 일을 왕 앞에서 행할 때 왕이 진노하지 않고 자기가 청하는 대로 왕이 허락하도록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여주시기를 빈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하나님께 드린 자기의 기도를 글로 기록하기를 마치며 덧붙인 글 또한 눈여겨 볼만합니다. 본문 11절의 맨 끝입니다: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 느헤미야가 왕 앞에 나아가 그에게 은혜 입기를 청하기로 결심한 이유가 다름 아니라 그 때 자기가 왕의 술 관원으로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입니다. “왕의 술 관원”이란 왕의 신임이 두터운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술 관원은 단지 왕에게 술잔을 올리는 일만 아니라 왕이 드는 모든 식물과 음료의 품질과 안전을 책임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왕을 가장 가까이서 항상 모셔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왕과 직접 대면할 기회가 가장 많은 사람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자기 민족과 예루살렘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응답을 주신 것입니다. 느헤미야에게 “네가 지금 갖고 있는 직책이 무엇이냐? 그 이점을 최대한 살려 왕의 마음을 움직이면 예루살렘 성벽과 네 민족을 다시 일으키는 일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 말씀하신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그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아, 그렇지. 내가 왕의 술 관원 아닌가? 나를 그토록 신임하고 아끼는 왕이라면 내 청을 들어줄 지도 모르지 않는가? 왕에게 나아가 청원을 해봐야지. 하나님, 좋은 생각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왕에게 청원을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을 움직여주셔서 제 청원을 받아주게 해주옵소서.” 하는 기도를 드리기에 이르렀던 것이라 생각됩니다. 느헤미야는 여기서 하나님께 그 일에 직접 간섭하시고 행동에 나서주시기를 구했음을 봅니다. 

본문 마지막 절에서 느헤미야가 쓰기를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 한 것은 그가 하나님께서 자기를 왕의 술 관원이라는 자리에 오르게 하신 것이 바로 오늘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을 위해 중요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미리 예비하신 것임을 깨닫게 되었음을 밝힌 글로 보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실행하기로 마음먹은 일을 느헤미야가 어떻게 실행에 옮겼는지를 우리는 오늘 본문을 바로 뒤따르는 2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2:1에 보면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니산월에 왕 앞에 포도주가 있기로 내가 그 포도주를 왕에게 드렸는데 이전에는 내가 왕 앞에서 수심이 없었더니” 합니다. “니산월”은 오늘날의 3-4월에 해당하는 달로 “기슬르월”에 유다에서 사람들이 방문하고 간 뒤 넉 달 후입니다. 

니산월은 페르시아의 연력으로는 새해의 첫 달이었습니다. “왕 앞에 포도주가 있었다”는 말은 그 날이 페르시아에서 새해 첫날이었거나 아니면 신년의 어떤 축제날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포도주를 왕에게 드렸다”는 것은 축제일이므로 왕에게 올라온 포도주를 느헤미야가 먼저 맛보고 축하주로 왕에게 한 잔 따라드렸다는 말입니다. 계속해서 2:2를 봅니다: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하더라. 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합니다. 그 누구든 왕의 면전에서는 기쁘고 밝은 표정을 해야 했습니다. 왕 앞에서 슬픈 기색을 해서 왕의 마음을 우울하게 하거나 불편하게 하는 것은 죽어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달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느헤미야가 왕 앞에서 “얼굴에 수심이” 있었다는 것은 고생하는 자기 동족들과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에 대한 소식 때문에 느헤미야가 가졌던 슬픔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말해줍니다. 왕이 느헤미야에게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묻자 느헤미야는 크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죄로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루살렘 성벽 수축 공사를 중지시킨 장본인이 바로 아닥사스다 왕인데 그의 교서를 철회시켜줄 것을 청원하는 대단히 위험한 일을 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던 느헤미야라면 왕이 자기의 청을 거부할지도 모르고 왕이 진노할 수도 있기에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왕의 물음에 느헤미야가 대답했습니다. 2:3-5입니다: “왕께 대답하되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내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심이 없사오리이까?` 하니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건축하게 하옵소서.` 하였는데”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느헤미야의 지혜를 봅니다. 첫째, 그는 그가 말하는 황폐하고 성문이 불탄 채 방치된 성읍이 예루살렘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유다 백성이 돌아와 그들의 성과 성전을 재건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대적하는 자들의 악의적이고 거짓된 고발에 따라 아닥사스다 왕은 불과 얼마 전에 예루살렘 성벽 건축을 금지시킨 바 있기 때문입니다(스4:21-22). 예루살렘이라는 말을 꺼내 그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듯이 보일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둘째, 느헤미야는 자기의 마음에 근심을 준 성읍이 자기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라고 말했습니다. 조상의 무덤이 훼손되거나 위태로워지는 것은 누구에게나 큰 동정을 얻을 수 있는 일이었기에 왕이 망설이거나 지체함이 없이 그를 보내줄 수 있었을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이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었을 때 그에게 대답하기에 앞서 “하나님께 묵도”했다고 합니다. 순간 순간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그의 신앙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과는 만족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왕의 허락과 그의 조서를 받아 들고 유다의 총독으로 보냄을 받아 예루살렘 성벽의 수축과 민족공동체의 재건을 위해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그가 구하는 모든 것을 왕이 허락하자 그것이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므로” 된 일이었다고 썼습니다(느2:8). 자기에 대한 왕의 신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이 왕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믿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안일함보다 나라와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기를 선택한 느헤미야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는 페르시아 왕의 궁중에서 왕의 신임을 독차지하며 안락하게 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험난하고 고달픈 조국 재건 사역에 뛰어든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온갖 어려운 여건과 방해와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공사를 시작한지 52일 만에 성벽을 완성하자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반대하고 방해한 모든 대적은 그 완공의 소식을 듣고는 그 역사를 이루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알고 다 두려워하여 크게 낙담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6:15-16). 

북한 공산군의 기습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한지 61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역사와 오늘날까지 아물지 않는 그 역사의 상처와 그 역사가 주는 교훈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적화통일의 위기에서 우리를 구해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잿더미로 변했던 이 땅에 전 세계가 경이로운 눈길로 바라보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서게 해주신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는 대대로 기억하며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온전히 하나님께 돌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아니 날이 갈수록 더 황폐해져가는 우리의 반쪽 저 북녘 땅의 불쌍한 동포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포악한 권력자와 그를 둘러싼 일부 집권층 때문에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신음하는 나머지 북한주민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북한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느헤미야가 유다 땅에서 찾아온 동족으로부터 고국 땅의 소식을 듣고 며칠 동안을 슬피 울고 금식하며 기도하던 그 마음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페르시아 왕궁에서의 안락한 삶을 선뜻 버리고 무너진 성과 민족공동체의 재건을 위한 자기희생의 길을 택한 것과 같이 우리도 무너진 동양의 예루살렘 평양과 북한의 재건을 위한 생각을 저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의 피할 수 없는 사명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 일도 하나님이 하셔야 될 일입니다. 느헤미야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손이 움직이는 것만이 북한 재건에 있어서도 확실한 열쇠입니다. 

느헤미야의 예루살렘 성벽 완공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인 줄 알아야 우리의 통일을 달갑게 여기지 않을 주변 모든 나라가 두려워하고 함부로 거역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우리 교회와 국민과 나라가 되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롭고 평화로운 통일과 무너진 북한의 재건과 하나 된 민족공동체의 회복을 이루시도록 더욱 힘써 우리의 믿음을 바르고 튼튼히 세우고 지켜가야 할 것입니다. 통일의 그날까지 북한의 무너진 성과 백성을 위한 기도를 그치지 않는 우리가 되기를 빕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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