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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6.25] 생명을 살려내는 신앙 (에 4: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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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살려내는 신앙 (에스더 4장 12절~17절)
  
6.25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이 나라가 세계 무역 12대 나라가 되었다. 최근 반세기 동안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 나라가 단 하나 생겼는데 그 나라가 바로 KOREA다. 나는 어렸을 적에 남아있는 기억은 아버지께서 찐빵 사오라고 하시던 날이다. 중국집에서 파는 단팥 찐빵은 언제나 그림의 떡인데 1년에 한 두 번 그 찐빵을 사다 먹은 기억이 난다. 춥고 배고프던 시절이 이젠 풍요의 세상이 되어 동남아시아에서 코리안 드림을 가지고 사람들이 달려온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6.25의 동족 전쟁을 통해 흘린 피가 강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피를 흘린다는 것은 목숨을 바쳤다는 것이다. 인생의 꽃을 피우지 못한 젊은이들이 나라를 위해 전쟁터에서 죽었다는 말이다. 이 피흘림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세워질 수 없었을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감리교회는 몇 년 전부터 6월 마지막 주일을 순교자 주일로 정하였다. 한국 교회가 성장하고 해외 선교사를 내보내는 일에 미국 다음의 교회가 된 것은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한국 교회의 밑바닥에 스며들어있는 순교자의 피흘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요사이 감신대 출판부에서 출판한 

「6.25와 한국 감리교회 순교자」란 책을 읽어보았다. 순교한 사람들의 간략한 인명록이라 할 수 있는데 김유순 감독을 비롯해 약 135명의 사람들이 소개되고 있다. 물론 목사, 장로, 평신도들로서 공산당 반대 운동을 하다가 죽은 이들도 있고 전쟁 속에서 체포되어 납북되어 행방불명된 이들도 있고 집단으로 학살을 당한 이들도 있다. 

이 민족의 역사 속에 감리교회가 자리를 잡고 서는데도 이렇게 많은 피흘림이 있는지 새삼스럽게 놀랍기도 하고 숙연하고 미안한 마음도 든다. 오늘 우리가 목회하며 복음의 영광을 보는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피 흘리는 이들의 희생의 열매라는 사실이다. 알고 보면 세상의 성공 원리나 신앙의 성공 원리나 남다른 헌신과 희생 없이는 되지 않는다. 

바사 나라에 소수 민족으로 살아가는 유대 민족이 최고의 권력자인 하만에게 말살되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대대적인 학살의 날이 정해지고 하만의 뜻대로 모든 일이 진행될 때 죽음에 처한 유대 민족이 살아나게 되는데 그 민족을 살리는 열쇠 역시 희생 정신이었다. 에스더서를 가만히 읽어보면 민족 구원의 중요한 열쇠는 피 흘리는 희생을 각오하고 실천에 옮겼다는 것이다.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주인공으로 되어 있는 에스더서는 죽음의 위기에서 생명을 살려내기 위한 뚜렷한 신앙이 꿈틀거린다. 
  

1. 청직이 신앙이다. (에4:14)

청직이란 일을 맡아보는 사람이다. 주인의 재산과 주인의 창고를 주인의 기쁨이 되도록 지키고 사용하고 관리하는 이다. 청직이는 자기의 것이 없다. 오늘 모르드개는 에4:14에서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라고 하였다. 왕후가 되어 왕궁에 있으니 동족이 죽어나가도 왕후이기에 안전한 것이 아니며 잠잠하여 있다면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즉 왕후의 자리에 앉아있는 것은 이런 위기의 때에 어떤 희생을 치르서라도 민족 구원에 쓰여지기 위해 주신 것이라는 의미이다. 

에스더는 이 전언을 듣고 수용했다. 왕후의 자리는 내 부귀 영화, 내 개인의 영달을 누리라고 준 것이 아니다. 나를 위해서 쓰여져야 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의 역사를 만들어가기 위해 쓰도록 왕후의 자리를 맡겨준 것이다. 임금님과 소통할 수 있는 제일 적합한 자, 왕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왕후의 자리는 마땅히 쓰여져야 한다.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이 때, 이 기회를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청직이 신앙이다. 내가 국회의원이 되고 내가 큰 기업의 총수가 되고 내가 재능있는 연주가가 되었을 때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내 몸, 내 마음, 내 영광을 위해 누리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맡겨주심이다. 철저한 청직이 신앙을 가지고 구원 역사를 이루는데 써야 한다. 

우리 크리스챤은 모두 구원을 위해 일하도록 부르심 받았음을 알아야 한다. 시간도, 건강도, 재물도 다 맡겨주신 것으로써 죽음에 떨어질 자를 구원해내는데 써야 한다. 항상 내가 누리고 있는 축복은 자랑할 것이 아니고 책임이다. 바로 이 때를 위해서, 내가 사는 오늘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해야 한다.
  

2.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기도 신앙이다. (에4:15~16)

에스더는 모르대개에게 답을 전한다. 왕후의 자리가 주어진 것은 동족을 위해, 구원을 위해, 원수와의 싸움을 위해 쓰기 위함이라고 했을 때 유다인을 모아 금식해 줄 것을 요구한다. 에4:16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왕후 에스더는 금식을 부탁했고 본인도 본인을 돕는 시녀와 더불어 금식할 것을 다짐한다. 

금식은 하나님께 매달리는 기도의 몸부림이다. 금식은 하나님께만 집중하고 하나님의 도움만을 기대하는 영혼의 표현이다. 금식은 육체가 굶주리나 하나님을 움직이려는 영혼의 향연이다. 그리고 3일은 무엇인가? 숫자 3이란 축복도 배가 되고 순종도 배가 되고 의지하는 것도 배가 된다는 의미이다. 즉 3일은 완전수로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배나 더한다는 의미이다.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기에 왕후의 자리만 가지고 왕을 대면하고 움직이는 일을 할 수 없기에 하나님만 방법이라고 하나님이 도우셔야 한다는 믿음으로 3일 금식을 하는 것이다. 3일 금식은 간절함이다. 방법이 오직 주께 있음을 고백하며 삶의 경영 전체를 맡겨드리는 간절함이다.
  

3. 희생 신앙이다. (에4:16)

희생은 삶의 실천이다. 마음 먹은 결심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몸을 바치는 일이다. 희생의 최고가는 생명을 드리는 일이다. 오늘 에스더는 에4:16에서 “죽으면 죽으리이다”고 결단한다. 에4:16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 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죽고자 하는 마음, 그것이 실천으로 옮겨질 때 죽음 아닌 것은 두려울 것이 없다. 죽기를 각오한 이에게 아무도 당해내지 못한다. 

우리 교회는 오직 예수를 위하여 목숨을 다해 천국 일하는 교회다. 왜 이런 섬뜩한 삼행시가 오목천이란 이름이 되었는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주신 예수가 교회의 머리이시기 때문이다.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이다.’하는 태도를 가질 때 왕에게 나아갔다.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는 것은 곧 죽음일 수 있으나 윤허를 받을 수도 있다는 내어맡김으로 나아갔다. 결국 에스더는 은총을 입어 하만의 계교를 알림으로써 무서운 학살의 음모를 무위로 끝나게 한다. 죽은 것이 아니고 죽으려고만 해도 문제가 해결되었다. 

세상의 삶이란 목숨을 바쳐 일하기만 해도 그 사람을 당해낼 자가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다. 죽음의 문제, 사망의 원수를 정복하기 위해서 자신이 죽음의 제물이 되셨다. 인류의 최대 원수는 사망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드려 사망과 싸웠고 부활로 승리하셨다. 이제 사망을 정복되었다. 두려워할 것이 없다. 그 예수를 따르는 교회의 지체들은 당연히 희생 정신을 가져야 한다. 목숨을 다해 희생하려는 자가 되면 구원되는 역사가 일어난다. 

공부시키는 것도 지문이 닳도록 일하는 부모의 희생이 있을 때 그 결과를 본다. 훌륭한 예능인이 되는 것도 주야로 그 자녀를 돌보는 희생이 있을 때 세상살이가 다 희생하는 이가 있을 때 사람도 되고 나라도 된다. 결국 십자가 희생 정신만큼 강력한 삶의 에너지는 없다. 십자가를 봄으로써 우리는 도전을 받는다. 이기적인 내가 이타적으로, 부등켜 안고만 사는 내가 구제하는 손으로, 내 소원 성취 밖에 모르는 내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는 발로 변화된다. 

요사이 교회사랑헌금을 수 십 여명이 드렸는데 이것도 희생 정신 없이는 드릴 수 없다. 해외에 교회를 짓는다고 인도네시아, 중국, 미얀마에 드리는 헌금도 희생이다 무엇인가 살리는 일,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일, 거기에는 희생 정신 크게 말하면 십자가 신앙이 있어야 한다. 나 밖에 모르는 욕심 많은 내가 희생하는 것은 십자가 신앙, 그 십자가가 나를 희생 제물로 내어놓게 하는 힘인 것이다.
  

4. 협력 신앙이다. (에4:17)

에4:17 “모르드개가 가서 에스더가 명령한 대로 다 행하니라.”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말대로 하고 모르드개는 또 왕후 에스더의 말대로 행하였다.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분열하면 대패한다. 갈등이 일어나면 이길 힘을 상실한다. 10명이 일하든, 100명이 일하든 구원하는 일에는 협력해야 한다. 하나되는 역사,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서로 다른 이들이 한우리가 되고 한 마음이 되면 큰 산, 작은 산도 무너뜨리고 평지를 만들 수 있다. 

에스더의 이름은 ‘별’이란 말이다. 그가 반짝이는 별처럼 빛나는 이름이 되고 위기에 빠진 민족을 구원한 이 일에는 이렇게 협력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에스더, 모르드개 그들에겐 명예와 인기, 돈으로 살 수 없는 신앙의 일이 살아있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에게 십자가 예수, 창조주 하나님, 보혜사 성령은 이런 신앙을 갖고 살도록 은혜를 주신다. 순교자 주일에 피 흘린 저들을 흠모하며 우리의 신앙 생활의 태도를 바꾸자. 생명을 살리는 일, 죽음에 처한 개인이나 민족을 살리는 일은 아무 것도 안하는 요행수로 되는 것이 아니다. 무관심을 깨뜨리고 일어서야 한다. 나의 할 일을 찾고 너의 할 일을 찾고 희생을 각오하는 신앙으로 죽어도 된다는 십자가 신앙으로 하나가 될 때 되어지는 것이다. 

우리도 사람을 생명으로 이끌어 이 땅에 빛을 비추는 별이 되자. 하늘의 별빛 같이 빛나며 지워지지 않는 이름이 되는 제2의 에스더, 구원의 사역에 쓰임받는 크리스챤이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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