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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손을 내밀어 (막 1:4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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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내밀어 (막 1:40-45)
 
하나님의 손길은 생명의 손길입니다

르네상스 3대 화가 중의 하나인 미켈란젤로가 그린 ‘천지장조’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이탈리아 로마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그려진 그림입니다. 여기에는 특별히 아담의 창조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는 4년에 걸쳐서 이 그림을 완성합니다. 오른쪽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왼쪽에는 아담이 있습니다. 큰 폭의 구름과 천사들은 하나님을 떠받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침묵의 정적을 깨뜨리며 아담을 향해 오른 손을 내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손은 아주 역동적입니다. 생기를 불어넣는 모습이 느껴집니다. 왼편에 있는 아담은 생기를 받는 존재입니다. 그윽한 눈으로 기다리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왼손은 왼쪽 무릎에 기대고 있지만 힘이 없이 축 늘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생기의 근원과 생명을 주시는 자이시고, 아담은 그것을 기다리고 받는 자임을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처럼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미시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창조의 능력입니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돕거나 일으켜 세울 때 손을 내민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미시는 것은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는 것과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창조의 행위를 예수님께서 친히 이 땅에서 행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손을 내미셨다는 것은 나병환자를 치유하시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미 준비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내 생각을 이제는 실천하겠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창조와 치유의 역사, 회복의 역사가 네게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손을 내미신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유명한 손을 내미는 장면이 있습니다. 출애굽의 여정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침내 바로의 압제를 피해 가나안 땅을 향해 출발하게 됩니다. 그런데 앞에는 거대한 홍해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뒤에는 바로가 군사들을 동원해서 추적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찌할 줄 몰라 부르짖었습니다. 모세 역시 당황하면서 하나님께 “어찌해야합니까?” 외칩니다. 그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출애굽기 14:16)

네가 가지고 있는 지팡이를 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 바다를 향해서 손을 뻗으라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바다를 갈라지게 하셔서 마른 땅으로 인도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앙에는 단순함과 간절함과 신뢰함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의 나병환자는 어떤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왔습니까? 그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향해서 경배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이 나병환자의 모습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 나아올 때 아주 단순하고 간결하게 나왔습니다. 복잡하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생각을 갖지 않고 한 가지 마음으로 나왔습니다. 

신학이란 단순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 때는 복잡합니다. 이것저것 잽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를 어떻게 보는가? 어디에 투자해야 될 것인가? 이처럼 우리의 삶의 내용은 복잡 미묘합니다. 그러나 신앙을 갖는 것은 단순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에는 가장 단순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겠다고 결심하고 나아오는 것입니다. 내 문제를 그대로 가지고 나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주인이요, 치유자요, 구원자인 것을 고백하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그렇습니다. 우리의 찬양이 그렇습니다. 나병환자에게는 이러한 단순한 신앙이 있었습니다. 나를 고쳐달라고 하는 것 외에는 다른 구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또한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는 엎드렸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뜻대로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또한 그에게는 예수님에게 전폭적으로 맡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신뢰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예배드릴 때에 이 세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 내가 내 모습 이대로 단순하게 나왔습니다. 그러나 간절한 마음으로 나왔습니다. 하나님께 무릎을 꿇습니다. 하나님께 내 인생 전체를 드리기 원합니다. 주님을 신뢰합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의 이러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린 아이처럼 해맑고 단순하게 기다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말씀이 나병 환자에게 들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마가복음 1:41)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기 전 예수님의 마음상태가 그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의 연약한 모습을 보면서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예수님의 마음이 생명의 사건을 창출합니다. 치유를 만들어 냅니다. 사람을 위로합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본래 히브리어로 창자, 내장, 자궁과 관련된 어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몸으로 아파한다는 뜻입니다. 몸이 끓어질 것 같다는 것입니다. 몸으로 고통을 받아들인다는 뜻이 긍휼이 여기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어머니가 10달 동안 우리를 뱃속에 붙들고 있었습니다. 계속해서 쓰다듬었습니다. 그리고 아파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우리가 태어났을 때 우리를 향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어머니에게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우리를 불쌍히 여기지 않으셨다면 누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었겠습니까? 모든 생명의 사건은 불쌍히 여김 속에서 나타납니다. 불쌍한 마음이 없으면 내동댕이칩니다. 나하고 상관이 없다고 버려버립니다. 생명의 사건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속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연약하고 고통 받는 사람을 보면서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동정심입니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영적인 교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이 자주 나옵니다. 2가지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마태복음 14:14)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치유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네가 고통 받고 있구나! 얼마나 힘들었느냐? 얼마나 외로웠느냐? 네가 그것 때문에 얼마나 답답해하면서 탄식했느냐?’ 예수님에게 이 마음이 있을 때 치유의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 무렵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마가복음 8:1~2)

예수님을 쫓아다니던 많은 사람들이 이제 먹을 것이 떨어졌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의 생존권이 위협받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들판에 앉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기적을 위해서 기적을 만드신 분이 아닙니다. 인간을 불쌍히 여기셔서, 인간의 기본권과 생존권이 파괴당하는 것을 그대로 볼 수가 없어서 그 일을 행하셨습니다.

인간이 사회적인 맥락에서 고통 받고 떨어져나갈 때 예수님은 아파하십니다. 인간이 질병에 들어서 건강한 삶의 모습을 상실 할 때 아파하십니다. 인간이 희망을 잃어버리고 죄책감 속에 억눌려 있을 때 예수님께서 탄식 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아픔입니다. 예수님의 불쌍히 여김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의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손을 내미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를 만지셨습니다

그런데 그것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를 친히 만지셨습니다.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나병환자를 만지지 않았습니다. 제사장도 나병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때 멀리 떨어져서 확인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나병이 전염될까봐 그랬습니다. 두려웠습니다. 만지면 부정 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나병은 하나님께서 큰 죄에 대한 대가로 치르시는 형벌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누구도 나병환자를 불쌍히 여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대화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접근하기조차 꺼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내밀었을 뿐만 아니라 만지셨습니다. 고름이 나는 병자의 손에 몸을 대셨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손이었습니다. 치유의 손이었습니다. 희망의 손이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진다는 것은 친밀한 관계에서 나타나는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사람들은 오랜 친구를 만나면 손을 잡고 악수를 합니다. 때로는 포옹을 합니다. 연인들이 왜 포옹을 하고 키스를 할까요? 서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싫은 사람이 내게 와서 만지려고 하면 그것은 폭행인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걸 허락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만지시는 행동 속에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내게 있어서 매우 소중한 존재란다. 내가 너를 귀히 여기겠다. 내가 너를 회복시키겠다. 축복 속에 너를 동참시키겠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불쌍히 여겨서 나타나는 마음입니다. 

한국 교회가 자랑하는 두 분의 목사님이 있습니다. 한 분은 주기철 목사님이시고, 한 분은 손양원 목사님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여수 예양원에서 나병 환자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정상인들이 출입할 때는 입에 마스크를 썼고, 손에는 소독한 장갑을 꼈고, 발에는 장화를 신었습니다. 그러나 손목사님은 맨손으로 나병환자를 만지셨습니다. 그리고 대화하셨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제일 처음에 그들은 놀랐습니다. 경계의 눈빛으로 보았습니다. ‘이것이 대체 무엇인가? 나와 피를 나눈 부모님과 형제들도 나를 꺼려해서 쫓아냈는데, 100년 해로를 하겠다고 약속한 아내와 남편도 나와 함께 살지 못하겠다고 나를 버렸는데, 내 자식들도 나를 보면서 무섭고 더럽다고 나를 쫒아냈는데, 저 사람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손양원 목사님의 진실한 마음을 그들이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것을 알게 되고 나서부터 오히려 손양원 목사님을 거절합니다. 그들 스스로가 도망갑니다. “목사님, 제게 가까이 오지 마세요. 그러면 목사님도 나병 걸려요. 목사님, 그냥 멀리서 기도해주세요.” 환자들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손 목사님이 이렇게 고백한 말씀이 있습니다. “차라리 내가 나병에 걸렸으면 좋겠다. 그리되면 저들처럼 가까이 오지 말라고 뒷걸음치는 환자가 없지 않겠는가? 언제라도 그들과 함께 웃고 떠들고 뛰놀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면서 오히려 자기가 나병에 걸리기를 원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손양원 목사님에게는 예수님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때 새로운 믿음의 역사와 생명과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고 사랑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사고방식을 뒤바꾸셨습니다. 어떻게 뒤바꾸셨을까요? 사람들은 나병의 불결함이 전염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불결함이 정결함을 이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정결한 사람들은 도망가기 바빴습니다. 불결함이 내게 가까이 오지 말라고 숨기에 바빴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것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아니다. 정결함이 불결함을 이기는 것이다. 사랑과 불쌍히 여김을 가지고 불결함 앞에 나아가면 불결함이 정결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삶을 방식을 새롭게 바꾸셨습니다. 이것은 은총이요, 사랑의 혁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시는 곳마다 연약한 사람을 만지셨습니다. 그들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새로운 기회, 새로운 생명, 새로운 치유를 허락해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만지시기만 하지 않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래서 나병환자에게 확인시켜주셨습니다. “나는 네가 깨끗함을 입기를 바란다.” 나병환자가 듣기 원했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왔던 나병환자에게 기쁨이 충만해졌습니다. 더 이상 드릴 다른 소원이 없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나를 받아 주지 않았는데 바로 예수님이 나를 받아주고 계십니다. 어느 누구도 나에게 관심이 없었는데 이 분이 내게 관심을 주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나에게 사랑의 눈빛을 주지 않고 나를 비난하고 조롱하고 미워했는데 이분이 나를 사랑해주십니다. 이것을 나병환자는 감사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러자 성경은 말씀합니다.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마가복음 1:42) 

이제 예수님께서는 깨끗해진 나병환자를 다시 돌려보내십니다. “이제 네 자리로 돌아가라. 이제는 따로 있지 마라. 너 혼자서 슬퍼하지 마라. 사람들과 함께 있어라. 가족들에게 돌아가라. 그동안 얼마나 굶주리고 얼마나 열망했는가? 이제는 세상 속에 나아가 네 삶을 펼쳐나가라. 네가 가진 사명을 감당하라.” 그렇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십니다.

예수님 앞에 우리의 모습 그대로 나아오십시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나병환자는 예수님으로부터 이 일을 사람들에게 먼저 말하지 말라고 경고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다니면서 자신이 치유 받았음을 선포하며 다녔습니다. “저분이 나를 고쳐주셨어! 저분은 나를 사랑하셔! 내 몸에 손을 대셨어! 나는 이제 깨끗해!” 그가 예수님을 증거 하는 복음 증거자가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까? 어떤 모습에 예수님의 마음이 감동 되었습니까? 그가 쌓아 놓은 지식이었을까요? 그가 행한 업적이었을까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내 소원을 들어 달라는 그 한 가지 요구였습니다. 하나님에게 약한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연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사랑 때문에 연약해지십니다.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십니다. 그런데 죄를 지은 인간이 너무나 불쌍해서 인간이 주님 앞에 용서를 요청하면서 다가오면 하나님은 언제나 마음을 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연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 앞에 우리의 모습 그대로 아뢰면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파할 때 하나님도 아파하십니다. 우리가 외로워할 때 하나님도 외로워하십니다. 우리가 답답해할 때 하나님도 답답해하십니다.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올 때까지 그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나병환자처럼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합니다. 전폭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단순하게 나아와야합니다. 신뢰하면서 나아와야합니다. 내 소원이 주님의 소원이 되기 원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이것이 예배이고, 기도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축복입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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