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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천국백성의 징표 : 용서 (마 18: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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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백성의 징표 : 용서 (마 18:21-35)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최후의 만찬" 작품을 시작하기 전 동료 화가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분개한 나머지 그의 얼굴을 가룟 유다의 얼굴로 그려 복수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가룟 유다의 얼굴을 그리고 난 다음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리려고 하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릴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의 얼굴에서 친구의 모습을 지우고 다시 시작해서 그 작품을 완성했다고 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형제나 자매들과의 관계에 어떤 어려움을 갖고 있습니까? 더구나 그 형제나 자매가 금전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깊은 상처를 준 경우에 그를 용서하는 마음이 쉽게 생깁니까?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우리를 보시는 시각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며 용서하며 화해할 것을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죄를 지어 '빚을 진' 사람들에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비유를 통해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그분이 직접 우리에게 보여주신 넉넉한 태도이며 우리 또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주님의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실수하거나 죄를 범한 형제와 자매들을 의의 길로 돌아오게 하도록 힘써야 하며 가능하면 그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는 천국 백성의 가장 기초되는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갈등이 있게 마련이고 심지어 제자들 사이에도 부딪치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곁에 계셔도 “누가 더 큰가”하는 논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도대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열두 제자의 대변인이 되어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형제가 내게 죄를 지었을 때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그 당시 유대인 랍비들은 동일한 범죄에 대하여 세 번까지는 용서하되 같은 일이 네 번째 일어나면 용서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반복하는 것은 그가 뉘우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그 당시의 용서규율보다 더 너그러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용서의 횟수를 7번으로 늘립니다. 아마 그 질문을 인하여 주님의 칭찬을 기대하며 내심 회심의 미소를 띠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의 답변은 뜻밖입니다.  주님은 일곱 번만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용서를 베푼 정확한 숫자가 아닙니다. 끊임없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이게 가능합니까? 이러려면 얼마나 내 감정을 죽이고 또 죽여야 합니까? 속이 끓는 것 같을 텐데 어떻게 참습니까? 

누가복음 17장 4절에는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용서에 인색합니다. 열 번 잘하다가도 한번 잘못하면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면서 비판합니다. 

십년 전에 들었던 섭섭한 말도 잊지 않고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하루에 일곱 번"은 고사하고 평생 한 번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라는 말은 도저히 실천하기 어려운 말처럼 들립니다. 과연 실천하기가 도저히 불가능한 말을 주님은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자신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부활하신 후 그에게 나타나 제자로서 회복시켜 주시며 십자가 사랑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당해 보지 않아서 이런 말을 하지 당해보면 용서라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못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지 않습니까? 신자의 일상생활에서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는 동안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됩니다.(마 5:7, 6:14,15, 약 2:13).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기도의 통로가 막히고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말씀의 통로가 막히며(벧전 3:7, 사 59:1-2), 형제와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서 자신이 만든 감옥에 자신이 갇혀 고통을 당합니다. 

예수님의 대답에 난감해하는 베드로의 기분을 아시고 주님은 22절에 말씀하신 원리를 설명하시려고 비유를 도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천국에 대하여 가르치시면서 왕이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종들이 하나씩 왕 앞에 나아와 결산을 합니다. 마침 왕에게 무려 일만 달란트 빚을 진 자가 불려나왔습니다. 

한 달란트는 약 6000데나리온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 품삯입니다. 일 년에 300일을 일한다고 가정하면 노동자가 20년은 쓰지도 않고 벌어야 되는 액수입니다. 일 년에 2만 불을 번다고 생각하면 20년이면 40만 불입니다. 그렇다면 만 달란트는 40억불에 해당되는 거액입니다. 로마가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거둬들인 세금이 800달란트였는데 그보다 열배도 더 되는 금액입니다. 

당시에 종이나 빚진 자가 빚을 갚지 못하고 노예로 팔려가는 것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이러한 노예는 모세 율법에 따라 50년이 되는 희년마다 다시 자유를 얻게 하였습니다. 빚진 자가 그 빚을 갚을 능력이 없으면 그 식구들과 모든 소유물들까지 팔리기도 했습니다. 그 종은 자신의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물"을 다 팔아도 갚을 수 없는 빚을 왕에게 졌습니다. 

그 종은 왕에게 엎드려 절하면서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그러면 다 갚아 드리겠습니다'하며 간청을 합니다.  천문학적인 액수의 빚을 다 갚겠다는 그의 약속은 궁지에 처한 사람의 입에 발린 말일 뿐 사실 실현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왕은 그를 불쌍히 여겨 그를 놓아 보내며 그가 진 빚을 전부 탕감해주었습니다. 왕이 엄청난 액수의 빚을 전부 없는 걸로 속해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기분이었을 겁니다. 

28절에 보면 개역성경에 "그러나"라는 단어가 빠져 있습니다. 원문에는 "왕이 탕감하여 주었다. 그러나 그 종이 나가서" 라고 시작되면서 앞의 사건과는 다르게 전개될 것을 예고합니다. 불쌍히 여김을 받은 종이 궁궐을 나오다가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빚을 진 동료 종을 만났습니다. 일백 데나리온은 일반 노동자의 백일 동안의 품삯입니다. 

첫 번째 종은 그보다 육십만 배 더 많은 금액의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왕의 자비를 본받지 않고 도리어 동료 종의 멱살을 잡았습니다. 물론 두 번째 종이 첫 번째 종에게 지은 100데나리온이 개인적으로 적은 금액은 아닙니다. 일 년 수입의 거의 3분의 일에 해당됩니다. 빚진 자에게 빌린 것을 갚으라는 것이 무리한 요구는 아닙니다. 다만 첫째 종은 이미 엄청난 빚을 탕감 받은 상태였기에 문제가 됩니다. 

두 번째 종의 말과 행동은 26절에 나오는 첫 번째 종의 그것과 거의 비슷합니다. 이 종 역시 겸손히 땅에 엎드리어 참아줄 것을 바라고 빚을 꼭 갚겠다고 합니다. 동료가 애걸하는 데도 그의 간청을 뿌리치고 빚을 갚도록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 집안의 다른 종들이 첫 번째 종이 두 번째 종에게 저지른 악행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보고 크게 마음이 아파서 모든 것을 왕에게 상세하게 보고했습니다. 화가 난 왕은 첫 번째 종을 불러다가 자비로운 왕의 모범을 따르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게 합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33절)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당신의 자녀들이 해를 받거나 다른 이들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아 자리를 빼앗기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왕은 첫 번째 종이 두 번째 종을 학대한 것에 대해 너무도 화가 나서 첫 번째 종을 풀어주고 그의 빚을 용서해주라는 앞의 명령을 철회합니다. 그리고 그를 옥에 가두고 빚을 다 갚도록 옥졸들에게 붙였습니다. 그 종은 용서해주는 그 "마땅한" 일을 하지 못했습니까?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는 엄청난 은혜를 체험하고도 그가 가진 이기적인 가치관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은혜를 받았을지라도 자기에게 빚진 자는 여전히 자기에게 빚을 갚아야 한다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왕이 베푼 큰 용서 때문에 살게 되었으면서 자기가 빌린 돈과는 차원이 다른 작은 액수의 돈을 빚진 자에게 돈을 갚지 않는다고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옥에 집어넣는다면 이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18장을 마무리하는 예수님의 결론은 진지합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5절) "너희가 각각'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아마 예수님은 이 말씀을 마치시며 제자들의 얼굴을 쭉 둘러 보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용서의 사람이 될 것을 주장하십니다.  

이 비유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기서 왕은 하나님을 가리키고 종은 우리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처럼 도무지 갚을 수 없는 죄의 빚을 졌던 자들입니다. 탕자같이 아버지를 떠난 우리들인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물로 삼으셔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소속을 바꾸어주신 것은 만 달란트 빚을 면제 받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은혜입니다. 비유의 핵심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용서를 베푸신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향해 용서를 베풀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용서는 내 자신의 인간적인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용서를 내가 베푸는 행위로 생각한다면 정말 몇 번 용서해주었는지 세어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큰 용서를 바라보는 사람은 헤아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처럼 무한정으로 용서하는 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이런 용서는 언제나 무조건적으로 먼저 행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상대방이 먼저 용서를 빌면 용서를 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무슨 미안한 표정이라고 짓는지 살핍니다. 자기는 먼저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하면서도 절대로 먼저 용서하지 않습니다. 

문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쪽이 먼저 잘못 했다고 수그리고 오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용서하자 그러나 잊지는 말자"는 말도 사실은 맞는 말은 아닙니다. 참 용서는 다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상대가 변해야 용서하지' 그것도 맞는 말이 아닙니다. 참 용서는 무조건적으로 먼저 용서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한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집행유예입니다.

용서의 기적을 이끌어내는 방법이 있습니다. 죄는 미워하지만 죄인은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원수를 향하여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행위와 그들 자신을 구별하셨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용서받지 못할 죄악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영혼을 보셨습니다. 자기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 어두워진 영혼들을 보셨습니다. 그럴 때 죄는 밉지만 죄인은 불쌍히 여길 수 있습니다. 

몇 년 전 저희 교회에 탈북자 이순옥 집사가 와서 간증한 적이 있습니다. 그를 심문하며 국정원 직원으로부터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할 때 가장 어려웠던 것이 용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단란했던 우리 가정을 파괴하고 남편을 죽인 원수를 어떻게 용서하느냐 생각해보면 가슴이 메어졌습니다. 용서가 전제라면 나는 예수님을 안 믿겠다고 버텼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주님의 사랑에 압도되어 원수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참 용서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첫째는 용서하는 자에게 놀라운 평안과 자유를 안겨줍니다. 다른 성도들 사이에 냉랭할 때 얼마나 마음이 아픕니까? 하나님의 식구들 사이에 존재하는 그러한 불화는 하나님 아버지께 큰 슬픔을 안겨줍니다. 우리도 우리 왕의 베푸신 은혜를 잊어버리고 우리 자신을 향한 작은 공격들조차도 용서하기를 거절합니다. 

우리가 형제들을 용서하기를 거절한다면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상처 때문에 계속 상대방을 원망하고 미워하고 있으면 괴롭고 답답한 것은 나 자신입니다. 해결책은 내가 먼저 용서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그 아픈 상처로부터 해방됩니다. 고통의 포로로부터 놓여나게 됩니다. 신약에서 나오는 용서라는 단어의 본래 뜻은 '자신을 풀어주다, 자유하게 하다'라는 것입니다. 용서를 인해 자유를 얻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용서의 최대 수혜자는 용서하는 자기 자신입니다.

둘째로 용서는 상대방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경찰이 사제관에서 은잔을 훔친 장발장을 데리고 와서 신부의 집 문을 두드립니다. 그를 평생 감옥에 쳐 넣으려고 끌고 왔습니다. 

그런데 신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입니다. "다시 오셨군요 참 다행입니다. 제가 은잔하고 촛대까지 드렸던 것을 잊으신 모양이지요? 그것도 족히 200프랑은 나갈 텐데 깜박 놓고 가셨나요?" 은잔은 신부가 준 것이라는 말에 경찰들은 떠나버립니다. 아예 말을 잃고 떨고 선 장발장에게 신부는 촛대를 주며 말합니다. "그 돈을 정직한 사람이 되는 데 쓰기로 정한 약속한 것을 절대 잊지 마십시오." 그 용서의 위력 앞에 그 얼어붙었던 마음은 여지없이 허물어져 내렸다. 그때부터 그는 180도 변화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사람들은 어떤 피해를 당하면 복수하려고 합니다. 복수심은 상처받은 만큼 갚아주고 싶은 욕망입니다. 그러나 복수의 문제점은 원하는 바를 결코 얻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용서만이 어둡고 병든 마음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회개를 전제로 합니다.

그렇다고 은혜만을 강조하다가 원칙을 잃으면 안 됩니다. 주어진 본문을 잘 해석하려면 앞뒤 문맥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앞에 있는 15-20절은 본문의 비유를 보완해줍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회개하도록 권고하라는 교훈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우리의 죄를 무한히 용서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통치원리는 자비와 용서이며 평화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남의 잘못을 정죄하고 징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용서받은 죄에 비하면 우리 이웃이 우리에게 지은 죄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가 받은 용서도 취소되고 우리는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남을 용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신앙생활은 없습니다. 그러나 용서에는 회개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15-20절은 본문의 비유의 교훈을 무책임한 용서로 오해하지 않도록 돕습니다. 누군가가 죄를 지으면 회개하도록 권고해야 하고 권고를 듣지 않으면 징계를 통하여 회개를 촉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범죄한 형제를 바로 처리하지 않고 네 단계로 처리하게 하신 주님의 배려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모든 성도는 범죄한 형제나 자매를 의의 길로 돌아오게 하도록 힘써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만일 범죄한 성도가 개인적인 면담 이후에도 응답하지 않는다면 두세 사람의 형제나 자매들이 함께 그를 설득해보아야 합니다. 만일 그 범죄한 형제나 자매가 그 권고에도 응답하지 않는다면 온 교회가 동원되어 그 범죄한 성도를 설득하고 되돌아오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만일 그가 교회의 권고에도 응답이 없다면 교회는 이것을 그의 선택으로 인정하고 그를 성도들과의 교제 가운데서 추방해야 합니다. 

권고와 징계의 목적은 정죄가 아니라 회개를 촉구하여 용서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용서할 마음으로 이웃을 권고하고 징계해야 하며 이웃이 회개할 때에는 무한히 용서해야 합니다. 죄는 정직하게 다루지 않으면 누룩처럼 퍼지게 마련입니다. 

여기서 권징의 대상은 사소한 실수가 아니라 교회 전체를 오염시키고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손상시키는 범죄입니다. "두 세 증인"이 있고 교회 전체 앞에 알려도 당연한 처벌이라 생각할 정도의 범죄가 권징의 대상입니다. 권징의 목적은 사랑과 회복입니다. 이렇게 15-20절은 잘못을 고쳐주는 자세와 징계에 대해 말해주고, 비유는 한없는 용서에 대해 가르쳐 줌으로써 징계와 용서의 관계를 서로 보완해줍니다. 

교회가 건강한 공동체가 되려면 겸손, 순결, 그리고 자비가 필요합니다. 특히 구성원들 가운데 실수하거나 죄를 범했을 때 어떻게 대해야 하는 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에게 잘못을 저지르는 이를 대함에 있어서 우리 역사 주님의 용서를 받은 자라는 사실을 인식하며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크리스찬 리더십은 거룩한 영향력을 의미하는데 그 리더십이 잘못되어 형제나 자매들이 죄에 물들어가거나 부정적인 영향을 끼쳐서는 안 됩니다. 그런 좋지 못한 영향이 교회 전체에 퍼지지 않는지 면밀하게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순결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자비를 본받아 죄를 범한 형제나 자매를 사랑으로 돌이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비와 순결은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무조건 품자'며 나타나는 순결하지 않는 자비는 방임이고, 자비 없는 순결은 경직된 자기 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기 전에 하나님과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다고 고백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회개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회개하지도 않은 아들을 무조건 품은 것이 아닙니다. 회개한 아들을 하나님이 용서하셨고 하나님이 아버지의 마음을 주장하여 아들을 품게 하였습니다. 

주님이 주신 말씀처럼 순종하면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됩니다. 부패한 본성을 가진 인생들인지라 서로 마찰이나 갈등 없이 살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서로에 대하여 시기심과 경쟁심을 가지고 교만을 부리지 말고 겸손하게 서로 섬기면 아름다운 공동체가 이루어집니다. 소자를 실족하게 하지 않게 하고 영접하며 잃은 자를 찾으며 범죄한 자를 사랑으로 권징하고 회개할 때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진 죄의 빚은 너무도 많아서 우리는 그것을 갚을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갚기 위하여 바로 당신의 아들을 주셨습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지은 그 어떤 죄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용서해주신 죄의 빚에 비교하면 너무도 작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용서하지 않을 때 분노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너그러운 마음은 바로 예수님을 따뜻하게 대접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믿음의 형제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드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를 당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빠져 방황하는 성도 한 사람을 회복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십니다. 그러다가 그 성도가 죄에서 돌아오면 그를 인하여 크게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한 성도라도 멸망에 이르는 죄의 길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공동체로 들어가는 문을 열고 닫을 권세를 위임받았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정, 교회, 삶의 현장에서 겸손하고 순결하고 화평하고 행복하게 신앙생활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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