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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의 참 가족 (마 12:4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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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참 가족 (마 12:46-50) 

(마12:46-50)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1.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마지막으로 아담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담을 돕는 배필로 남자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여자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와를 아담에게 데려오자 아담이 하와에게 말합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이를 여자라고 부르리라’ ‘그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두 사람이 한 몸이 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가정을 에덴 동산에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담과 하와의 가정과 함께 하셨습니다.(창2:18-25) 

B.C. 1100년경, 베들레헴에 살던 나오미와 그녀의 남편 엘리멜렉이 두 아들과 함께 흉년이 들자 모압 지방으로 이주했습니다. 이방인의 땅 모압에서 잘 사는가 싶었는데 이내 남편이 죽고, 두 아들들이 모압 여인과 결혼해서 10년쯤 되었을 때 두 아들마저 죽고 말았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와 청상과부(靑孀寡婦) 둘만 덩그러니 남았습니다. 

그즈음에 고향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오미가 두 며느리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고향 베들레헴으로 가는 도중 나오미가 아무래도 두 며느리가 낯설고 물설은 타향에서 가서 청상과부로 살아가게 될 것을 생각해보니 불쌍해서 두 며느리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모두 친정으로 돌아가거라. 너희는 죽은 너희 남편과 나를 정성껏 섬겼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너희가 행한 대로 갚아 주시기 원하며 또 너희가 재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기 원한다.’ 그러자 두 며느리가 처음에는 시어머니를 따르겠다고 했지만, 나오미가 거듭 돌아가라고 하자, 첫째 며느리 ‘오르바’는 시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친정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둘째 며느리 ‘룻’은 계속 시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오미가 ‘얘야, 네 동서는 자기 백성과 신들에게 돌아갔는데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거라.’ 고 말하자, 룻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에게 억지로 어머니 곁을 떠나라고 강요하지 마시고 어머니와 함께 가게 해 주세요.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저도 가고 어머니께서 사시는 곳에 저도 살겠습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저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저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는 곳에서 저도 죽어 묻힐 것입니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기 전에 만일 제가 어머니 곁을 떠나면 여호와께서 저에게 무서운 벌을 내리시기 원합니다.’ 

피붙이 하나 없이 남편이 죽어 사실상 시어머니 나오미와는 돌아서면 남이나 다름없는 룻이었습니다. 그러한 룻이 죽기까지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섬기며 약속의 땅에서 살겠다고 굳게 결심한 것을 보고 나오미는 더 이상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와 룻은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룻은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겁니다.’는 고백대로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로 베들레헴에서 나오미의 친족 보아스를 만나 자식을 낳았습니다. 그 아들이 ‘오벳’인데 바로 다윗 왕의 아버지 이새의 아버지였습니다.(룻1:1-16, 4:15-22) 

이방 여인 ‘룻’이 나오미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섬기므로 영광스러운 다윗 왕의 고조할머니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룻의 하나님이 되므로 다윗 왕가의 가족,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가족, 하나님의 가족이 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참 가족이 되었습니다. 


2. 오늘 본문에 예수께서 가버나움 어느 집에서 식사하실 겨를도 없이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시고 계실 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입추의 여지가 없었습니다.(막3:20,31) 무리들은 제자들과 더불어 예수를 중심으로 빽빽이 둘러 앉아 있었습니다. 이들 무리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 주셔서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된 것”(마 12:22) 등 많은 능력을 보고서 몰려들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의 소문이 유대 온 전역에 파다하게 퍼지자,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예의주시하고 있던 곳이 있었습니다. 유대 최고 의회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있는 말씀과 능력에 수많은 무리들이 따르게 되자 자신들의 기득권에 타격을 입을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있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의 언행을 세밀히 살펴 그 범법(犯法) 여부를 알아보도록 하기 위해 일종의 종교 감시단(막7:1,마 15:1)으로 서기관들을 급파했습니다. 

이들 서기관들이 무엇보다 먼저 행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부정하게 만들고자 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가 귀신을 쫓아내 눈멀고 벙어리된 사람을 고친 것은 사탄의 힘을 빌려 귀신들을 쫓아냈다고 반박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지지하며 추종하는 여론을 차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막3:23-26)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하느니라.” 는 말씀으로 그들의 논리와 반박이 잘못된 것임을 바로 깨우쳐주셨습니다. 

그러나 감시단으로 파견된 사람들의 목적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미친 사람이나 귀신들린 사람, 사탄으로 몰아 종교 재판으로 처형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들을 축출한 것을 부정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미쳤다.’, ‘귀신들렸다.’는 말로 매도했습니다. 

이러한 소문에 가장 민감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족들이었습니다.(마3:21,30) 그래서 예수의 가족들이 급히 나사렛에서 올라와 예수를 데려가려고 한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람들의 말만 듣고 예수의 정신적 상태를 의심했고 심지어 예수의 형제들은 그를 비웃기까지 했었습니다(요7:2-5). 

예수의 가족들은 예수로 인해 연좌제의 피해를 입을까 두렵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가족들의 행동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이신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메시야이신 예수께 대한 그들의 불신앙을 반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요 7:5). 

예수 그리스도의 가족들은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형제들인 야보고, 요셉, 시몬, 유다와 그 누이들이 있었습니다.(마13:55-56) 이들 형제자매들은 요셉과 마리아가 약혼한 상태에서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출생한 예수 그리스도 이후, 요셉과 마리아가 정식 결혼한 후 태어난 예수의 동생들입니다. 예수의 성령의 잉태를 알리도 없고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예수의 형제자매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혈연관계에서만 형, 오빠로 지낸 것이었습니다. 

사실 마리아와 약혼한 요셉과는 전혀 무관한 가운데 성령으로 잉태하셔서 세상에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태어났다는 면에서 예수의 형제자매들과 혈연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엄격히 말하면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전혀 배제된 가운데 태어나셨기 때문에 온전한 혈연관계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마1:18-25) 예수 그리스도는 요셉의 ‘혈과 육’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그들과의 혈연관계를 부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3. 그럼에도 예수께서는 오늘 본문 48절에서 “(마12:48)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마리아와 그 형제들이 예수를 데려가려고 찾아왔지만 빽빽하게 모여든 무리들 때문에 헤집고 들어갈 수 없자, 사람들이 “(마12:47)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며 그 사실을 예수께 전했을 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2:49-50)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이는 어머니와 동생들의 존재, 즉 혈연관계를 부인하려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9:26-27)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그리고 또 그 제자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부터 그 제자가 마리아를 자기 어머니로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말씀들을 통해 예수께서는 출생과 유전(遺傳)으로 이뤄지는 혈연관계보다 영혼의 거듭남으로 이뤄지는 하나님과의 영적, 신앙적 관계가 더 중요함을 보여주는 것일 뿐입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세워진 교회와의 관계를 두고 ‘남편과 아내’, ‘신랑과 신부’로 비유하셨습니다.(엡5:22-32) 또한 예수 믿음으로 성찬에 참여하는 일을 두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몸’을 함께 나누는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고전 10:16)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그래서 이제 “누구든지” 예수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는 영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참 가족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의 참 가족이 되도록 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예수의 참 가족이 되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몸된 교회를 세우시고 영원히 영광스러운 영적 가족관계를 이루기 위해 이 땅의 한 가정, 마리아의 몸을 통해 태어나 혈연관계를 맺으셨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어느 민족이든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기준과 제약에도 구애됨 없이 “누구든지” 예수 믿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는 하나님의 거룩한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 가족이 되는 핵심요소는 바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마 12:50;눅8:21).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예수를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심을 믿음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새 가족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제 예수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가족이 되었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된 것입니다.

(롬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예수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참 가족이 되어 그의 형제들이 된 것입니다.

(롬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고 한 분 하나님의 자녀로 한 근원에서 낳은 형제들입니다.

(히2: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러므로 이제 예수 믿는 성도들은 한 믿음으로 한 분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한 가족들인 것입니다. 비록 성도들 가운데 나약한 본성에 의해 넘어지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여전히 끊을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로 예수의 참 가족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장가들어 이스라엘의 남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호2:16-2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남편으로서 아내를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내된 이스라엘이 남편의 사랑을 배신하고 음행했습니다. 이같은 사실을 깨우치기 위해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에게 말씀하십니다. 

(호1:2)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거룩한 선지자이지만 하나님 명령에 따라 음란한 여인 고멜을 데려다 아내 삼고 자식을 낳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정한 호세아의 신부는 품행이 불량하고 음란한 여인 고멜이었습니다. 고멜은 신부라기보다는 창녀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창녀와 결혼해서 자식까지 낳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식들을 낳자 하나님께서 직접 이름까지 지어 주셨는데 그 세 자녀의 이름을 ‘이스르엘’과 ‘로루하마’, ‘로암미’였습니다. 이들 이름은 각각 ‘하나님께서 흩으시다’, ‘사랑을 받지 못하다’,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뜻으로 축복이 아니라 저주의 이름들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호1:9)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이제는 아내된 이스라엘의 음란으로 남편과 아내로서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탄되었다는 선고입니다. 호세아의 결혼은 한 마디로 비극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인지라 버릴 수도 없고, 사랑할래야 도저히 사랑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 여인과의 결혼생활이 어찌 행복할 수 있었겠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도대체 왜 거룩한 선지자에게 뼈아프고 비극적인 결혼을 명령하셨겠습니까? 

고멜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슬프고 괴로운 마음을 체험해보라는 것입니다. 남편의 사랑을 배신하고 음탕한 여인으로 변한 아내로 인한 남편의 괴롭고 아픈 마음을 경험해보라는 것입니다. 온갖 우상숭배로 영적으로 음탕한 여인과도 같은 이스라엘 백성을 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아픈 사랑’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아내를 버릴 수 없는 남편의 아픈 사랑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또 명령하십니다. 자식들을 주렁주렁 낳고도 옛 생활을 끝내 버리지 못해 집을 뛰쳐나가 창기로 돌아간 고멜을 몸값을 지불하고 다시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호세아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하나님 명령에 순종합니다. 이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호2:19)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호2: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여기, “내가 네게 장가들리라”는 것은 가출하여 탕녀가 되어버린 아내를 다시 받아들이겠는 것이 아니라, 음탕한 아내를 순결한 처녀로 만들어 장가들겠다, 받아들이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백합화같이 순결하고 아름다운 처녀로 삼아 결혼하여 영원히 함께 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과 은혜로 아내된 이스라엘의 모든 죄악을 용서하여 죄를 씻어 순결한 아내로 맞아 하나님의 참된 가족으로 회복시키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이제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그가 과거에 어떠한 삶을 살았든지 불문하고 백합화같이 아름답고 순결한 처녀로 삼아 하나님과 백년가약, 아니 영원한 가약을 맺어 행복한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를 아가서 4:7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 

또한 아가서 2:2은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 며 노래하고 있습니다. 

백합화는 아름다움과 순결을 상징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의 아름다움과 순결함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통을 통해 고멜과 같이 더러워진 우리가 아름답고 순결한 처녀로 사랑을 받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신앙 안에 있기만 하면 제 아무리 고멜같은 사람일지라도 아름답고 순결한 백합화가 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 믿음으로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예수의 참 가족이 되었습니다. 


4. 고멜과 같은 인생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 순결하여 아름다운 예수의 신부가 되었으면, 거룩하게 사는 것, 깨끗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우상숭배하는 더러운 애굽 땅에서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레 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하고 복된 하나님의 가족이 되려면 거룩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거룩함’보다는 ‘성공’이나 ‘긍정적 사고’, ‘건강’이나 ‘재 테크’, 그리고 ‘행복한 가정생활’ 등의 주제가 단골 메뉴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거룩’과 거의 동떨어진 시대 풍조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교회와 성도들이 ‘거룩’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성령은 흘러넘치는 데도, 디지털과 3D 등 첨단 영상기재들로 ‘똑똑해진’ 예배 툴(tool)을 사용해서 영감있는 기도와 웅장한 찬양이 폭발하고 있음에도 ‘거룩한 삶’이 없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으로 가는 ‘영성’이 아니라면 그것은 빈수레와도 같이 요란한 것입니다. 부정부패가 판을 치는 세상에 ‘정의’라는 단어가 화두가 되어 새롭게 외쳐지고 있지만, 그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하며 요청되는 것은 ‘거룩’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거룩하게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고, 거룩한 삶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만 부정한 삶은 그 분을 분노하게 하며, 거룩함이 없으면 아무도 주님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히 12:14, 벧전1:15-16) 

요즈음 설교가 시작되면 두꺼운 성경전서 대신 ‘스마트폰’을 꺼내 해당 구절을 찾는 일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고 합니다. ‘스마트’ 시대가 되어 스마트폰의 ‘성경 앱(어플리케이션)’이 내려받기 순위에서 상위권을 차지하는 등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다고 합니다. 성도들의 편의를 돕기 위해 경조사나 교회 기념일에 맞는 성경 속 문구를 쉽게 검색해주는 댜양한 ‘앱’이 등장해서 절찬리에 팔리고 있습니다. 

스크린이나 3D TV를 보며 예배를 드리고 온라인으로 헌금하는, ‘스마트 시대’에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 ‘거룩’을 추구해야 할까. 거룩한 주일예배를 드린답시고 스마트폰을 깨끗이 닦은 다음 성경 앱을 수평계로 맞춰 바른 자세로 열어 성경구절을 찾으면 과연 거룩해지는 것일까. 그래서 교계에서 스마트폰과 관련해 다양한 의견을 내놓고 있습니다. 목회자와 신학자들은 대체로 스마트폰 성경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지만, 집중이 필요한 예배 시간에는 되도록 성경책을 사용하는 것을 권장하면서 성경을 읽는다는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입니다. 

평상시 가끔 스마트폰 성경을 이용한다는 어느 교수는 “설교하는 입장에서는 스마트폰으로 성경구절을 찾는데 킥킥거리는 성도들, 옆 사람과 함께 스마트폰 성경을 보면서?뭔가 이야기를 나누는?성도들이 있으면 조금 당황스럽다.”며 “예배드릴 때는 전체적인 분위기 면에서 문제가 될 수도 있지 않나 생각한다.”고 전합니다. 

또 젊은이들 예배를 인도하는 어느 목사는 “스마트폰으로 성경을 보는 것에 반대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프로젝트로 성경구절을 보여주는 경우도 있으니 그 자체로는 문제가 없다고 본다.”며 “아직은 거의 없지만, 예배를 인도할 때 젊은이들이 스마트폰으로 말씀을 검색한다 해도 기분이 나쁠 것 같진 않다. 우려되는 건 역시 성경을 깊이 알려 하거나 성경공부를 할 때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 어플들은 다소 불편한 점이 있다. 성경책은 읽다가 자유롭게 표시도 하고 할 수 있는데, 스마트폰은 생각나는 구절을 빨리 찾아볼 때는 괜찮지만 묵상할 때는 종이책이 낫다고 본다. 

성경을 공부하거나 예배 시간에는 성경책을 사용하는 게 좋겠다. 한 구절 묵상이나 급히 말씀을 찾거나 검색할 때는 성경책이 스마트폰을 따를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가하면 예배학자인 조기연 교수(서울신대)는 “예배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면전에서 하는 것”이라며 “하나님 백성들이 취해야 할 태도는 두렵고 떨림인데, 예배자에게 그런 마음 없이 문명의 이기에 따라 가볍게 의존해서 예배드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는 볼 수 없다. 조금 깊은 차원에서 말하자면, 예배 시간에는 성경봉독 할 때 회중들은 자기 책을 보는 게 아니라 선포되는 복음을 들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신앙인으로서 ‘거룩’과 경건을 위해 읽는 성경, 스마트폰이든 책이든 그 마음가짐과 생활이 중요합니다. 태블릿 PC이든, 스마트폰이든 그것들이 ‘거룩’과 ‘거룩한 삶’에 이르는 모습을 잃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거룩’이란 정결함과 부정함을 분별하여 정결함을 지킨다는 뜻입니다. ‘거룩함’이란 습관적으로 하나님과 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룩한 삶’이란 하나님의 판단에 동의하고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며,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며, 세상 모든 것을 하나님이 담긴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사는 것입니다. 성(聖)과 속(俗)의 구별 기준이 애매모호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일수록 ‘거룩’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명령에 더욱 더 깊이 집중해서 살아야만 합니다. 

‘거룩한 삶’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스마트 시대에 ‘거룩’과 ‘거룩한 삶’에 더욱 더 스마트, 똑똑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축복과 행복은 ‘거룩’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축복과 행복은 ‘거룩한 삶’에서 맺어지는 열매들입니다. ‘거룩’한 신앙생활로 영원한 축복과 행복을 누리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가족으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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