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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용서는 용광로입니다 (행 6: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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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는 용광로입니다 (행 6:8-15)


예루살렘 교회에서 7명을 집사로 뽑았습니다. 그 중에 한 분이 스데반입니다. 평신도 최초의 순교자입니다.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입니다. 예수를 반대하는 이들이 스데반을 성밖으로 끌어 내어 돌로 쳐 죽였습니다. 스데반이 죽을 때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행 7;55-56)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59-60)

그 때에 결론을 성경은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행 6;15)
자기를 돌로 쳐 죽이는 자를 용서하며 죽는 스데반의 모습은 용서의 감동을 우리에게 전하여 주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키워드는 용서입니다.

정신과 의사 메닝거(K. Menninger)는 모든 질병의 70%는 스트레스에서 온다고 진단하였습니다. 그런데 스트레스의 90%는 미움, 다툼, 용서의 결핍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헤밍웨이 소설에서 용서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스페인 사람 이야기입니다. 어느 집의 아버지와 아들이 다투었습니다. 아들이 마드리드로 가출하였습니다. 아버지는 후회하고 아들을 찾는 광고를 가장 큰 신문인 엘리베랄 신문에 실었습니다.
<파코야! 화요일 정오에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다 용서하였다. 아빠.>
그 날 정오에 호텔에 간 아버지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파코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들 800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파코는 스페인에서 가장 흔한 이름입니다.

용서를 기다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 가요? 아픔속에서 자기를 용서받기를 갈망하며 기다리는 이들이 많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용서란 무엇인가요?

1. 용서란 자기 치료제입니다.

용서를 하면 가장 치료받는 사람이 자기입니다. 용서를 하면 가장 유익을 보는 사람이 자기 자신입니다. 용서받는 사람보다 용서하는 사람이 더 이득을 보게 됩니다.
스데반은 자기를 돌로 쳐 죽이고 있는 사람들을 용서하였습니다. 그렇게 용서하는 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천사의 얼굴같았습니다. 돌로 쳐 죽이는 사람들은 악마같이 대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돌로 죽는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같았습니다. 용서하는 사람이 승자입니다.
딕 티비츠(Dick Tibbits) 심리학자는 용서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용서는 당신을 다시 삶의 운전석에 앉게 하여 준다. 용서는 틀을 다시 짜서 당신의 삶의 이야기를 바꿀 수 있게 하여 준다. 무엇보다도 용서는 당신을 치료한다.
용서는 과거의 상황이 당신의 현재를 지배하지 않도록 가르친다..
타인을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용서는 시작이 된다. 
다른 사람에게 거는 기대치를 낮추라.
겸손과 공감의 기술을 터득하라.”

용서는 자기 아픔이 씻겨지는 자기 치료제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따라 다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기가 다윗에게 몰렸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겼습니다. 사울이 3,000명 군사를 이끌고 다윗을 찾으러 다녔습니다. 왕이면 왕의 권위를 지키면서 신하들에게 다윗을 잡아 오라고 하여도 충분하였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직접 다윗을 잡으러 3,000명을 이끌고 다니는 것을 보면 대단한 결의였습니다.

꼭 잡고 말겠다는 각오가 보이고 있습니다. 다윗이 엔게디 굴속으로 도망가서 숨었습니다. 나는 약 두 시간 정도 등산하여 엔게디 그 곳을 가보았습니다. 더운 날씨에 이 종진 목사님과 둘이 엔게디 산을 올랐습니다. 험한 산이었고 더운 날씨라 올라가는 이도 없고 내려 오는 이도 없었습니다. 사막인 데 물이 철철 흘렀습니다. 둘이서 물속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산을 올랐습니다. 물론 옷입은 채로 물속에 들어가서 가냥 걷는 맛도 좋았습니다. 젖은 옷이 금방 말랐습니다. 올라가기만 하여도 피곤한 곳입니다.

다윗이 자기 사람들 몇 명과 함께 굴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사울이 굴속에 들어와서 피곤을 이기지 못 하고 자기 시작하였습니다.
다윗의 신하들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입니다. 죽이십시오.”
굴속에서 자고 있는 사울을 죽이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용서하였습니다. 그리고 옷자락만 벴습니다. 사울이 푹 자고 일어나 나갈 때 뒤따라 나갔습니다. 그리고 멀리 떨어져 엎드려 절하며 외쳤습니다. 손에는 옷 자락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나의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자락만 베었은즉 나의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 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삼상 24;11-14)

사울이 말했습니다.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붙이셨으나 네가 나를 죽이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안다"(삼상 24;16-20)
하나님은 용서받는 사람보다 용서하는 사람을 더 크게 사용하십니다. 다윗은 왕이 되었습니다. 사울은 왕자리를 빼앗겼습니다. 용서받는 기쁨보다 용서하는 기쁨이 더 큰 법입니다.
용서하면 자기가 더 커 집니다. 용서는 자기 치료제입니다. 

2. 용서는 용광로입니다.

용서는 서로의 허물을 용광로와 같이 다 녹여 줍니다. 그렇기에 용서는 희망이요 축복입니다. 스데반이 자기를 돌로 쳐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하였습니다. 그 때 모습을 성경은 확실히 증언하여 주고 있습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행 6;15)

공회중에 앉은 사람들은 모두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자고 결정한 사람들입니다. 다 모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두 스데반을 보았습니다. 자기를 죽이는 이들을 위하여 용서의 기도를 하며 죽는 모습이 천사같았습니다.
그래서 모두 다, 한 명도 안 빼놓고 주목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목하였다는 말은 너무나 놀라서 자세히 뚫어져라 보았다는 의미입니다. 모두가 심령이 녹아지고 있는 순간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얼굴로 복음을 전한 사람입니다.

어느 그리스도인 장례에 한 사람이 와서 구슬프게 울고 있었습니다.
“누구십니까?”
“나는 이 분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무슨 말씀을 전하셨나요?”
“아니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이 분 얼굴만 보면 예수님을 보는 것같았어요. 말씀없이 얼굴로 복음을 주신 분이세요.”
이 분이 바로 스데반입니다. 용서하는 얼굴은 복음이요 용광로였습니다. 모든 것을 녹일 수 있었습니다.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참전 용사 기념비 앞에 세 사람이 나란히 앉아서 사진을 찍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자네는 자네를 붙잡아 고문했던 사람을 용서하였는가?”
이 말이 떨어지자 말자 다른 사람이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렇게 나를 고문하였던 사람을 용서할 수 없어.”
이 말을 듣고 물었던 사람이 말했습니다.
“자네는 아직도 그 사람들의 포로 수용소에 갇혀 있구먼. 용서를 못 하면 용서하는 순간까지 그 포로 수용소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딕 티비츠(Dick Tibbits) 심리학자는 <살기 위해 용서하라>(forgive to live)라는 책에서 용서의 유익을 세 가지로 말했습니다.

1. 평화를 경험하기 때문에 용서하여야 합니다.
2. 희망을 보기 때문에 용서하여야 합니다.
3. 하나님이 예비하신 길로 바로 가기 때문에 용서하여야 합니다.

국제 정신 분석가 이 무석 교수가 말해주는 용서 이야기입니다.

신학 박사 교수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극히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였습니다. 날마다 술에 취하여 살았습니다. 항상 식구들에게 폭행을 가하고 난동을 피워서 하루도 가정이 평안할 날이 없었습니다. 어린 시절에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술 심부름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돈을 주지 않고 술을 사오라고 호령을 내렸습니다. 가난하여 돈이 없었습니다. 술을 사오지 않으면 그 날은 폭행에 난동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술을 사오라고 하면 빈 술병을 들고 주막으로 갔습니다. 돈이 없어서 문에서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주인이 불쌍하다고 하면서 술병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공짜로 반 병을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술병을 받아 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놈아! 왜 반밖에 없나? 네가 반을 마셨지?”
그리고 마구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아프게 맞았습니다. 억울하였습니다. 눈물이 핑그르 돌았습니다. 그 후 아버지를 원망하며 아버지와 인연을 끊고 살았습니다. 모든 식구가 아버지와 담을 쌓고 살았습니다.
결혼하고 나서 아버지를 찾아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화가인 아내가 연탄재를 방안으로 가지고 와서 물감과 섞어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버려진 연탄재가 좋은 재료가 되는 것을 보면서 깨달았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쓸모없는 연탄재같은 분이시다. 그러나 내가 오늘 여기에 있기까지는 아버지가 꼭 필요하였다. 아버지가 있기에 내가 있다.”
그는 곧 아버지를 용서하였습니다. 그리고 전화를 드렸습니다.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자기 집으로 모셨습니다. 홀로 살고 있던 아버지와 한 식구가 되었습니다. 용서는 새 출발입니다.

향나무는 자기를 찍어내는 도끼에 향을 묻혀 줍니다. 향나무를 찍은 도끼에서는 향냄새가 피어납니다. 자기를 괴롭힌 사람을 용소하며 향기를 묻힐 때 새로운 생활이 시작됩니다.

요셉이 그랬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애굽에서 죽자 형님들은 요셉이 자기에게 복수할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요셉에게 가서 무릎을 꿇고 말했습니다.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창 50;16-17)
이 말을 들은 요셉은 울면서 말했습니다. 왜 울었을 가요? 형들이 벌벌 떨고 있는 것이 가엽게 보여서 울었을 것입니다.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창 50;19-21)
요셉은 용서하였습니다.
모두가 울었습니다. 용서는 모든 허물을 다 녹여 버리는 용광로입니다. 

속상한 일, 억울한 일, 모욕을 당한 일로 인하여 밤 잠을 자지 못 하고 새벽까지 뒤치락이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 가요?
수면제가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 가요?
그러나 그 모든 영혼의 쓰레기를 태우는 소각제가 용서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나면 벌들이 윙윙 거리고 날라 옵니다. 나비가 두 날개를 여유있게 날리며 다가 옵니다. 매미와 쓰르라미가 우렁차게 노래하는 환희를 맛보게 됩니다.

펜실바니아에 피터 밀러라는 나이 많으신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는 온 교우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교회 이웃에 교회를 핍박하고 목사님을 헐뜯고 모욕하는 악질 이웃 한 명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살인죄를 짓고 사형언도를 받았습니다. 목사님은 이 소식을 듣고 60마일 약 100 km나 되는 먼 곳을 걸어 갔습니다. 워싱톤 장군이 살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는 사면권을 행사할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 분에게 사형을 면하여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끈질긴 요청에 목사님에게 워싱톤이 물었습니다.
“왜 살려 달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목사님이 대답하였습니다.
“저 사람은 나의 가장 큰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감동을 받고 사면장을 써주었습니다. 목사님은 15 마일 약 23 km 떨어진 사형 집행장까지 뛰었습니다. 마침 교수대에 묶이고 있었습니다. 그는 목사님을 보자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 늙은 목사가 내가 교수형을 당하는 꼴을 보고 기뻐하려고 오는구나!”

목사님은 사명장을 찢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참았습니다. 목사님은 사람들을 헤치고 들어가 사면장을 보여주며 악질 원수를 살려 주었습니다. 그 후 그는 목사님과 교회와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용서는 용광로라는 사실을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김 구 선생님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였습니다. 일본 헌병이 한국 청년을 매수해서 김구 선생을 암살하도록 지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얼마 안 가서 붙잡혔습니다. 사람들은 그 일본 앞잡이 노릇을 한 청년을 처형하려고 김 구 선생님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청년을 잡았습니다."
김 구는 여유있게 말했습니다.
“풀어 주어라.”
그리고 그 청년을 안고 말했습니다.
"내가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 못하는 한국 청년을 여기서 만나니 실로 감격스럽다."
이 청년은 김 구 품에 안겨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리고 소리쳐 말했습니다.
“독립군으로 끝까지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김 구 독립운동에 생명을 걸고 충성을 다 하였습니다. 용서는 용광로입니다. 모든 것을 녹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가 없는 곳은 살벌한 곳입니다. 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으로, 상처에는 상처로, 죽임에는 죽임이로입니다. 어느 운전수가 실수로 부잣집 아들을 치어서 죽게 되었습니다.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재판장이 물었습니다.
“벌금을 원하십니까? 이 사람을 감옥에 넣기 원하십니까?”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나는 부자라 돈이 필요없습니다. 이 사람 감옥에 앉아 있는 꼴도 못 보겠습니다. 아들을 죽인 대로 죽여 주십시오.”
그래서 길거리에 눕혀 놓고 자동차를 운전하여 치어 죽였습니다. 용서가 없는 곳은 살벌한 곳입니다. 용서가 있는 곳은 푸근한 사랑이 넘치는 곳입니다.

미국에서 되어진 이야기입니다.
미국 사우스캐로라이나 주에 교도소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독방에 20대 남자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감방 주변에는 온갖 오물들이 널려 있었고, 벌레들이 우글거리고 있었지만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벽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리스터 웰본이라는 남자인 데 네 명 여자를 죽인 사건에서 한 명을 죽인 죄로 잡혀 사형언도를 받고 사형을 기다리고 있는 남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교도소에는 밥 맥얼리스트라는 교도관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영접한 지 1년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리스터가 교도소로 들어오는 순간 연민의 정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감방을 찾아 갔습니다. 벌레가 우굴거리고 냄새가 코를 찔렀습니다. 밥은 리스터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이야기를 하여 주었습니다. 성경 이야기도 하여 주었습니다. 듣던지 아니 듣던지 혼자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기도도 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교도관 밥이 그 방을 방문하였을 때 달라진 모습을 보았습니다. 방이 깨끗이 청소되어 있었습니다. 둘이는 손을 잡고 같이 기도드렸습니다. 그 날부터 성경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는 바쁘다고 아들 러스티를 방치하여 두었었음을 알았습니다. 러스티는 동네에서 그리고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며 살았습니다. 보살펴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하지 못 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문제아가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결국은 학교도 그만 두었습니다. 다리 밑에서 잤습니다. 때로는 공중 화장실에서 잤습니다. 마약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교도소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러스티는 성경공부를 통하여 놀랍게 변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성경 공부를 하던 러스티가 어느 날 자기의 고로운 심정을 토로하였습니다. 자기가 살해한 여자의 가족을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가 없다는 고백을 처음으로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죄를 예수님을 통하여 용서하여 주셨다는 확신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족들에게 입힌 피해를 보상할 길이 없어서 아프다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자기를 괴롭혀서 너무나 힘들다고 하였습니다. 자기가 저지른 죄에 대하여 가족들을 만나 용서를 구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며칠 후에 러스티는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자기가 살해한 여자의 오빠가 보낸 편지였습니다. 이 오빠 역시 러스티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복수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러스티가 괴로워하고 있던 그 순간에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동생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주님이 주셨습니다. 그래서 러스티를 용서한다는 장문의 편지를 써서 보낸 것이었습니다. 

사형 집행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이었습니다. 오빠 부부가 러스티를 찾아 왔습니다. 둘은 부둥켜 안고 울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용서하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가 되었습니다.
얼마 후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러스티는 하늘 나라로 갔습니다. 
용서는 용광로입니다.

3. 용서는 새로운 출발입니다.

용서하면 새로운 출발이 됩니다. 용서를 하고 용서를 받는 순간부터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마르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용서는 신선한 시작이며, 새로운 출발에 필요한 분위기를 창출하는 매체다.”
용서받은 사람은 다시 시작하게 됩니다. 용서하는 사람도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됩니다. 용서는 시작입니다.

스데반은 자기를 죽이는 사람을 용서하였습니다. 그의 얼굴은 천사같이 빛나며 새로운 천국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람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로 새로운 출발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용서받은 사람 가운데 바울이 있습니다. 바울도 스데반을 죽이는 데 옆에 있었습니다. 8장 1절에서 바울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그가 죽임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바울은 9장에서 변화되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이 갑자기 다메섹 도상에서 변화된 것은 아니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을 죽을 때 동참하였습니다. 그 때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같이 빛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그 때 이렇게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저렇게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천사같이 평안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일가?”
그 때부터 바울에게는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용서받으면서 새로운 출발이 되었습니다. 
용서는 새 출발입니다. 용서받는 사람이나 용서하는 사람이나 같이 새롭게 출발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용서는 자기 치료제입니다.
용서는 용광로입니다.
용서는 새로운 출발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이야기 하나 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한 젊은 부인이 어두운 밤 으슥한 골목에서 어떤 청년에게 큰 봉변을 당하였습니다. 핸드폰 전화 신고를 받은 경찰들이 즉시 현장으로 달려왔습니다. 
"어떻게 생긴 사람입니까?”
부인은 정신 없이 외쳤습니다. 
"곱슬머리였습니다. 곱슬머리!"

그때 마침 그 옆을 지나가던 곱슬머리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 곱슬머리 청년은 즉시 경찰에 연행되었습니다. 뒤늦게 경찰서로 달려온 부인의 남편은 너무나 곱슬머리 청년을 보자 말자 죽을 정도로 잔인하게 패기 시작하였습니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입니다. 말려도 소용없었습니다. 경찰들이 빨리 뜯어 말리지 않았으면 죽었을 지도 모릅니다.
며칠 후 곱슬머리 진짜 범인이 잡혔습니다. 이 청년은 무협의로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곱슬머리 청년은 이를 갈며 복수를 하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기회만 보면서 칼을 가슴에 품고 다녔습니다. 기회만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을 품었습니다. 오직 복수였습니다. 이런 모습을 어머니가 알았습니다. 
“아들아! 너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지?” 
"어머니! 나 너무 억울해 견딜 수가 없어요. 확인도 안 하고 나를 죽일 듯이 팼어요. 변명할 틈도, 이야기할 여유도 주지 않았어요. 그 놈을 기어코 죽이고 말겠어요.”
"아들아! 그 사람 입장으로서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라. 예수님은 자기를 죽인 사람들까지도 용서했단다."
"어머니, 말리지 마세요. 나는 너무 억울해요." 

어머니는 아들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막무가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이상한 소리에 곱슬머리 청년이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옆방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였습니다. 나가 보았습니다. 어머니가 울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제 아들의 마음을 돌이키셔서 원수를 사랑하게 하소서. 용서하게 하옵소서." 

어머니는 밤을 지새우며 아들이 그 사람을 용서하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소리를 한참 듣던 아들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달려가 어머니를 으스러져라 끌어 안았습니다. 그리고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어머니, 제가 잘못했어요. 그 사람을 용서하겠어요.”
어머니도 울면서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 주셨구나."

모자는 끌어 안고 울었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갑자기 방문이 열렸습니다. 한사람이 뛰어 들어와 두 사람을 끌어 안았습니다. 그리고 통곡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을 사정없이 패던 남자였습니다. 그 사람이 칼을 내려놓고 말했습니다.
"내가 당신을 팬 사람이지요. 나는 틀림없이 당신이 복수를 하기 위해 나를 죽일 것이라 생각하였지요. 그래서 내가 먼저 당신을 없애 버리려고 생각하였지요. 오늘밤 숨어 들어 와서 기회만 보고 있던 중이지요. 이 칼로 당신을 죽이려 했습니다. 이제는 이 칼로 나를 죽여도 좋습니다. 용서하세요."

그는 칼을 내밀었습니다.
세 사람은 다시 끼어 안고 울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아름다운 순간이었습니다. 세 명은 새 출발하였습니다.
용서는 서로에게 축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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