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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의 자라남 (창 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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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자라남 (창 4:1-15) 
 
 
아담의 첫 범죄 이후 죄가 어떻게 자라는지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에덴에서 추방된 이후 하와는 가인을 낳고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했습니다(1). 이 아이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여자의 후손”(3:15)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졌겠지요. 그런데 아벨을 더 낳게 되어 누가 여인의 후손인지 궁금해집니다.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는데 직업만 봐서는 전혀 구별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난 후에” 현격한 차이가 생기게 됩니다. 그 차이는 제사, 곧 구약적 예배의 현장에서부터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셨습니다(3-5a). “열납했다”는 ‘관심을 가지고 바라봤다’는 뜻입니다. 왜 여호와께서 두 사람과 그 제물에 대해 상반된 태도를 취하셨는지 호기심이 생깁니다. 히브리서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하시는 증거를 얻었”다고 말합니다만(히 11:4), 올바른 종류의 제물을 드린 믿음을 말함인지,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제물을 구별한 믿음을 말함인지 여전히 모호합니다.

모호한 중에도 본문은 자신과 그 제물이 열납되지 못했을 때의 가인의 태도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5b). 여기서 하나님께서 선악의 기준이 되지 못하고, 가인이 선악의 기준이 되어 있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어떤 이유로든 예배가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았다면 좋지 않은 이유를 찾아서 고치려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가인은 자기 보기에는 좋은데 하나님이 무관심하신 것에 성을 냈고 성난 얼굴을 떨어뜨렸습니다. 가인 기준으로는 하나님이 악하게 차별하셨으니 하나님이 고쳐야 한다는 태도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가인에게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라고 지적하셨습니다(6-7a). 하나님 기준으로는 가인이 선을 행치 않았습니다. 악행을 받아주면 악을 더 키우게 되겠지요. 마땅히 악을 거절하고 선을 장려해야 합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잘못을 시인하고 선을 행하기 위해 돌이켜야 했습니다.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7b)는 말씀은 문 뒤에 웅크린 채 호시탐탐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 같은 죄의 속성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죄란 사람이 선택해 줄 때까지 얌전히 있지 않습니다. 죄는 사람을 공격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는 적극적인 세력입니다. 달리지 않는 자전거가 쓰러지듯 선을 행치 않으면 중립상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죄의 먹이가 되고 맙니다. 하와도 적극적으로 감사치 않다가 사단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고 말했습니다. 성도는 죄가 늘 나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경계해야 합니다. 나 보기에는 옳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잘못이 발견되면 적극적으로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7c)고 말씀하셨습니다. “소원”은 ‘사모’, ‘갈망’ 등으로 번역됩니다. 아담 이후 인간은 백지처럼 하얀 상태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인간은 죄를 사모하는 마음, 죄를 갈망하는 마음을 내부에 지닌 채 태어납니다. 하지만 죄의 소원이 있기 때문에 죄에 굴복당할 수밖에 없다고 변명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외부의 유혹뿐만 아니라 자기 내부에 웅크린 죄의 소원을 다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수지만 은혜를 핑계로 인간의 힘써야 할 책임까지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을 통해 볼 수 있는 죄인의 특징은 첫째로 죄를 잘 깨닫지 못합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죄를 지적하셔도 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셋째로 죄에서 돌이켜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려는 소원을 가지지 않습니다. 넷째로 마음속에 있는 죄의 소원을 다스리기보다 죄의 소원이 시키는 대로 하려합니다. 죄에 대한 무관심과 말씀이 지적하는 죄를 인정하지 않음과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려는 의지의 결여는 맹수에게 먹이를 주듯 죄의 세력을 키웁니다. 결국은 죄가 주도권을 잡고 그의 삶을 통제하면 괴로워하면서도 죄가 시키는 대로 죄에 끌려다니게 됩니다. “다스릴지니라”는 문법상 미완료인데, 이는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다스려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죄를 다스리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두렵고 떨림으로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첫 여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겼고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합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8). 싸움 끝에 우발적으로 발생한 살인이 아니라 죽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죽였습니다. 죄를 다스리지 못하자 죄가 가인을 삼켰습니다. 21세기에도 형이 동생을 고의적으로 죽였다면 경악할만한 범죄사건입니다. 그런데 이미 첫 가정에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시대든 범죄들의 이면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거나 무시하는 태도가 있습니다.

가인이 살인한 이유에 대해 현대 심리학은 동생 때문에 관심을 받지 못한 가인의 트라우마(정신적 장애)를 언급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성경은 가인을 변호하지 않습니다. 사도 요한은 가인이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요일 3:12)고 했습니다. 가인은 이미 ‘악한 자’에게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악한 자의 소유가 되어 있었으므로 그에게서는 계속 악한 것이 나옵니다. 악한 자신이 선악의 기준이 되어 자기 마음에 좋지 않으면 사형을 내리는 것이지요.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아담에게처럼 가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9a). 아담은 수치감과 두려움 속에서 엉성한 핑계로 둘러댔지만 숨었다는 사실은 인정했었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뻔뻔스러움과 대담함 속에서 하나님을 기만하며 범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9b). 범죄 후에도 가인에게 아벨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꼴도 보기 싫은 녀석’에 불과했던가봅니다. 아담과 하와는 범죄의 결과로 관계성의 단절을 맛보았으나 가인은 스스로 관계를 파괴해 나갑니다.

가인이 숨겼지만 여호와께서는 그의 죄를 폭로하셨습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10). 그리고 형벌을 선고하셨습니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11-12). 아담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았는데, 가인은 그 땅‘으로부터’ 혹은 그 땅‘보다 더’ 저주를 받았습니다. 저주받은 가인은 죄의식을 안고 일생 동안 도망자의 심정으로 방황할 것입니다.

가인은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라고 불평합니다(13). ‘견딜 수 없다’는 단어는 감당하기에 역부족이라는 뜻이 아니라 ‘받들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벌을 말없이 수용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죄벌이 과하다고 항의합니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14). 가인의 말 속에서는 조금의 뉘우치는 기색도 없습니다. 다만 앞으로 고생할 일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만 있습니다. 갈수록 태산이라는 표현이 이런 상황에서 적합하겠지요.

여호와께서는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하셨고, 가인에게 표를 주어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셨습니다(15). 구제불능의 죄인에게도 변함없는 여호와의 사랑하심이 기이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의인 아벨이 무참히 죽은 상황에서 왜 이토록 흉악한 죄인을 보호하시며 살려두실까요? 하나님의 사랑을 다 헤아릴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 다만 죄가 이미 죄에 대한 형벌이라는 어거스틴의 주장을 생각해봅니다. 사실 죄로부터 돌이키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형벌은 없고 해결되지 못한 죄를 안고 살아가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도 없습니다. 살려두시는 기간이 가인에게는 회개의 기회인 동시에 회개치 않을 때는 고통스런 형벌의 기간이 되는 셈이지요.

죄란 한 번쯤 지을 수도 있는 가벼운 사안이 아닙니다. 아담의 첫 범죄는 자식 세대에 이르자 거의 가공할만한 수준으로 증폭되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기 시작했으나 시간이 지나자 죄가 사람을 삼켰습니다. 죄는 범할수록 독해지고 뻔뻔해지고 대담해졌습니다. 이와 함께 죄인은 스스로를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소외시켰습니다. 가인은 결국 “여호와 앞을 떠나”지요(16). 이 모든 사건을 겪으며 아담과 하와는 피를 토하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죄란 이토록 무서운 것입니다. 성도는 죄의 문제를 가볍게 지나치지 않아야 합니다. 죄의 무서운 결과와 후세대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죄에 대해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두렵고 떨어야 합니다.

끝내 회개치 않았던 가인과 죄를 지적받자 곧바로 돌이켰던 다윗을 비교하면, 죄를 지적 받았을 때 회개하는 것이 큰 은혜임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 심령에 죄를 지적하실 때 진실하게 인정하고 진지하게 회개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변명하거나 성령의 찔리게 하심을 무시합니다. 죄를 직면해서 해결하기보다 외면하고 회피하려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자세가 죄를 자신을 삼킬 맹수로 키웁니다. 죄에 대한 지적이 당장에는 아픔이지만 즉시 회개하는 것이 이미 범죄한 상황에서는 최상의 선택입니다.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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