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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평생에 하나님을 찬송하라 (시 146: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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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평생에 하나님을 찬송하라 (시 146:1-10)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세상에는 크게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입니다. 전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아가지만, 후자는 하나님 없이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느냐, 하나님이 없이 사느냐, 하는 것은 각자의 자유로운 선택에 달려 있지만, 그 결과는 실로 천양지차가 있습니다.

전자는 인생의 목적을 알고 살아가지만, 후자는 무의미한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인생이 어디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며, 어디로 가는지 알고서 살지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이를 알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전도서 12:13에 이르기를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본분을 알고 사는 사람은 인생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살아가지만, 사람의 본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맹목적인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시간 살펴볼 시편 146편은 다윗 왕이 지은 것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늙어서까지 성실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므로 하나님의 은총을 한없이 받아 누렸던 사람입니다. 다윗은 이 시편을 통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인생을 가장 잘 사는 것인지 말해 줍니다.

첫 번째로, 일평생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사는 것이 인생을 가장 잘 사는 것입니다.

다윗은 말하기를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살아야 하는 까닭은 그것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신 이사야 43장 21절 말씀이 이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인간을 통해서 찬송을 받으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가 왜 가장 무서운 죄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 돌려할 영광을 우상에게 돌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상 숭배자들은 우상을 찬송하며 그 앞에 절합니다. 그러나 이사야 42장 8절에 보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종교개혁의 중심 사상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soli Deo gloria)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것, 이것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고 허탄한 것에 돌립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정치 권력자들이 자기들을 우상화한 경우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벨론 제국을 건국한 느부갓네살 왕은 두라 평지에 높이가 삼십 미터에 폭이 3미터나 되는 금신상을 세우고 모든 백성에게 숭배를 강요했습니다. 기실, 그 금신상은 느부갓네살 자신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스스로 차지하였을 때,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정신병자가 되어 숲에서 짐승처럼 지냈습니다.

공산주의는 유물론적 무신론을 주장하고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하면서 종교를 말살했습니다. 특히, 하나님을 섬기는 기독교 신앙을 적대시하여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사상의 노예가 된 자들입니다. 공산주의가 저들의 신입니다. 그뿐 아니라, 공산주의 국가들, 예를 들면, 쏘련이나 중국이나 북한을 보면, 권력자들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숭배를 받았습니다. 쏘련의 스탈린과 중공의 모택동, 북한의 김일성은 생전에 우상화 작업을 강화했습니다. 김일성의 주검은 방부 처리가 되어 금수산기념궁전에 있는 유리관에 안치되어 있는데, 북한 인민들은 지금도 그를  영세불멸의 신으로 숭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신으로 숭배하는 곳에는 진정한 자유와 인권을 찾아볼 수 없고, 모든 사람이 노예처럼 살아갑니다.

현대인들은 황금숭배사상 곧 배금주의(拜金主義)에 물들어 있습니다. 돈 앞에서는 신분고하, 남녀노유를 막론하고 다 굴복합니다. 현대인들에게는 돈이 우상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사람들 역시 돈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자유를 상실하고 노예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모든 우상 숭배자들의 숙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만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만 찬송을 돌려야 하는 이유를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 한 분 만이 그럴만한 자격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좀 더 설명하면,

첫째로, 하나님은 창조주시기 때문에 우리의 찬송을 받으셔야 합니다.

본문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것처럼 귀한 것은 달리 없습니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을 알 때 비로소 우리 인간의 위치를 알 수 있고, 그 위치에 합당한 처신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자신이 지음 받은 존재임을 알고 겸손히 하나님을 섬깁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창조의 목적을 알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오늘날 인류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인간들이 창조의 원리를 무시하고 얕은 과학 지식을 가지고 지구 생태계를 마구잡이로 개발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손이 미친 곳마다 생태계가 파괴되어 황폐해져 가고 있습니다. 반면에, 인간들이 손대지 않은 곳은 지금도 원시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요즘 돈에 눈이 먼 사람들에 의해 지구의 허파라고 하는 아마존의 밀림이 훼손되고 있다고 합니다. 아프리카의 밀림도 같은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사람들의 발길이 이르는 곳마다 파괴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인간에 의해 파괴된 곳이라도 인간들이 내버려 두면 생태계의 복원이 이루어집니다. 그 좋은 예로, 우리나라의 비무장지대를 들 수 있습니다. 비무장지대는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에 의해 설치된 곳으로 남북 양쪽으로 각각 2킬로미터 폭의 완충지대입니다. 동서의 길이는 약 250킬로미터입니다. 이곳은 정전 이후로 지금까지 사람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생태계가 완전히 회복되어서 현재 멸종 위기에 놓여 있는 짐승이나 물고기 67종을 포함해서 2700여종의 야생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이라도 인간들이 손을 대지 않고 내버려두면 하나님께서 치료하셔서 원상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요즘 사람들은 종자의 유전자를 조작하는 장난을 하고 있습니다. 벌써 유전자를 조작한 콩이나 옥수수가 수입되고 있는데,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그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생겨날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유전자를 비롯해서 모든 동식물의 유전자를 조작하는 일은 인간의 교만한 마음에서 비롯된 망령된 행동으로서 감히 인간들이 창조의 섭리를 거역하는 심각한 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창조주를 경외할 때 인간은 제 위치를 알고 순리대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영원히 신뢰할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라고 했습니다. 영원한 존재는 하나님 한 분밖에 없으십니다. 시편 102편에 이르기를 “26)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27)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년대는 무궁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늘과 땅도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작이 있었듯이 끝이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12절에 보니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라고 했습니다. 하물며 인간들이 영원할 리가 만무합니다. 야고보 선생은 말씀하기를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고 하였고, 베드로 사도는 말씀하기를 ‘…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진다’(벧전 1:24)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말씀하기를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그 수명이 영구하지 못하고 유한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이르기를 “3)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찌니 4)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나 나폴레옹과 같은 사람은 불세출의 영웅호걸로서 한 때 천하를 호령했으나 지금은 죽어 한 줌 흙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죽음과 더불어 그들을 믿고 따랐던 사람들의 기대도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언제라도 호흡을 거두어들이시면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맹세하고 다짐한 일도 죽고 나면 허사입니다. 그 누구도 죽은 자에게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내일 일을 자랑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분이십니다(약 1:17).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은 불변하시며, 하나님은 우리가 영원히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이와 같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찬송을 받으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베푸시는 분이시므로 우리의 찬송을 받으셔야 합니다.

본문에 이르기를 “압박당하는 자를 위하여 공의로 판단하시며”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은 불의해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압제하고, 빼앗고, 종으로 부립니다. 공정하게 법대로 판결해야 할 재판관들이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소송비용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억울한 일을 당해도 재판을 청구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재판관이십니다.

또한 본문에 보니 “악인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만, 악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시편 1편에 이르기를 “4)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6)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때로 하나님의 심판이 더디 임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아삽이라는 성도는 악인이 교만하게 굴며 악한 말을 하며 불의하게 사는데도 하는 일마다 형통하고 부귀를 누리고 몸도 건강하고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나 재앙도 없고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는 것을 보고서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이 악인들을 보아라, 이들은 언제나 편안한 생활을 하고 그들의 재산은 날로 늘어만 간다.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고 죄를 짓지 않은 것이 허사로구나, 공의의 하나님이 계신데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실족할 뻔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 기도할 때에 악인들의 최후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주께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셔서 파멸에 밀어 넣으시므로 그들이 순식간에 멸망하여 끔찍한 종말에 이릅니다. 그들은 아침이 되면 사라지는 꿈과 같은 자들입니다. 그리하여 주께서 일어나시면 그들은 한낱 꿈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집니다.”

이 땅에서 심판을 받지 않더라도 최후의 심판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28)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고 하셨습니다.

노자는 말하기를 “하늘의 그물은 성글지만 결코 놓치는 것이 없다.”(天網恢恢 疏而不失)고 하였고, 공자는 말하기를 “하늘에 죄를 얻으면 빌 곳이 없느니라.”(子曰 獲罪於天 無所禱也)고 했습니다. 이들은 성경에 계시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했지만, 하늘이 공의로운 심판을 내린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서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이 사실을 믿을 때 우리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않게 되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공의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과 압제 받는 자들의 후원자가 되시기 때문에 찬송을 받으셔야 합니다.

본문에 이르기를 (하나님께서는) “7)…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시는 자시로다 여호와께서 갇힌 자를 해방하시며 8)여호와께서 소경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을 사랑하시며 9)여호와께서 객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은 가난한 사람, 고아와 과부와 같은 약자를 깔보고 무시합니다. 남의 땅에 와서 사는 객들도 마찬가지로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는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서 고생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권력자들과 부한 자들은 이와 같은 약자들을 동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힘으로 억누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고와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 되십니다(시 68:5). 

또한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출 23:9)고 명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에 보니 하나님을 일컬어 “3)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저들의 짐을 대신 져 주시며 진정한 마음의 쉼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에게서 위로를 받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과 압제 받는 자들의 후원자가 되시는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갇힌 자를 해방하시는 분이십니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복음이 들어간 곳마다 갇힌 자들이 자유하게 되는 일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노예제도가 엄연히 살아 있었습니다.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노예를 사고 팔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상전과 노예의 구별이 무의미했습니다.

그 이유는, 주 안에서는 모든 믿는 자들이 한 형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노예와 상전이 한 형제로서 서로 악수하며 포옹했습니다. 같은 식탁에 앉아서 음식을 나누어 먹고 한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기독교는 혁명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주 안에서 완전한 평등을 이루어 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성도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본문에 이르기를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하지 않고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한 까닭이 무엇일까요? 야곱이 형 에서의 칼을 피하여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 갈 때, 그는 맨손에 외롭고 처량한 처지였습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변고를 당할는지 알 수 없어 불안에 떨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벧엘 들판에서 돌을 베개하고 누워 자는데, 하나님께서 꿈속에서 나타나셨습니다. 

꿈에 보니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고,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층계 위에 서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 28:13-15)고 하셨습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그 날 이후로 하나님께서 야곱과 함께 하시면서 지켜주시며 복을 주셨고, 드디어는 거부가 되어 가나안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주신 영광스러운 이름이요, 승리자의 이름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가난하고 무능하고 불안과 두려움에 떨던 당시의 이름입니다. 따라서 “야곱의 하나님”은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위로와 보호를 베푸시며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일컫는 호칭입니다. 야곱의 하나님은 언약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우리도 야곱처럼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대하게 살아감으로 야곱과 같이 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한 대로, 우리는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무슨 요행수를 바라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일컬어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요 20:17)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부르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신데 그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시편 62편에 보면, 다윗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1)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2)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3)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은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박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4)저희가 그를 그 높은 위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 5)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6)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7)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8)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할렐루야!

때로 우리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둡니다. 대부분의 부모가 자식들에게 희망을 둡니다. 그러나 부모의 희망대로 행하는 자식은 많지 않습니다. 선거철이 되면 후보들이 저마다 자기에게 희망을 가져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가장 희망적인 후보를 택해서 표를 던집니다. 그러나 오래 지나지 않아 이번에도 잘못 선택했다고 후회하곤 합니다.

현대인들은 과학기술에 희망을 겁니다. 공해문제도 과학이 해결해 줄 것이고, 식량의 부족도 과학이 해결해 줄 줄 압니다. 그러나 체르노빌이나 후꾸시마 원전 사고와 콜롬비아 우주선의 폭발 사건 등은 과학이 만능이 아님을 보여주었습니다. 더구나 인간들은 과학 기술을 선한 일보다는 핵무기를 비롯한 전쟁 무기를 만드는데 더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사람이나 정치나 과학을 막론하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희망을 두는 사람은 반드시 실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결코 실망하지 않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이유는, 민수기 23장 19절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고 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이 백세가 되었어도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 없이 믿은 데 대하여 로마서 4장 17절에 이르기를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선민 이스라엘의 조상이면서 동시에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은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본질에 있어서 아브라함의 믿음과 우리의 믿음이 같아야 하나님의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님들의 소망을 저버리지 않으시고 기대에 넘치는 복 된 결과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삶은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다윗처럼 일평생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살아갈 때 사람의 본분을 다하면서 사는 사람이라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십시오. 하나님께서 성도님들의 일평생을 함께 하시면서 지켜주시며 범사에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1)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2)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이 시편의 구절이 성도님들의 진심어린 믿음의 고백이 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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