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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한 신뢰의 신앙 (눅 4: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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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 신뢰의 신앙 (눅 4:1-13)

요즘 우리나라 학교가 큰 일입니다. 선생님을 때려 상해를 입히는 아이들도 있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막가파식으로 행동하고,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다룰 방법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교육이 가능하겠습니까? 엊그제 뉴스를 보니 한 고등학생이 지각을 밥 먹듯이 해서 선생님이 꾸중을 했는데, 다음 날 학생 어머니가 와서 <우리 애 그렇지 않아도 힘든데 왜 당신까지 스트레스 주느냐>고 따졌다고 합니다. 엄마가 아이보다 더 큰 일입니다.
 
여러분, 이런 학생들에게 부모는 어떤 존재일까요? 아마도 <사고치고 경찰서에 끌려가면, 와서 빼내주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아이들에게 부모는 봉입니다. <우리 아빠, 엄마는 내가 무슨 짓을 하든지 무조건 내 편이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완벽하게 뒤치다꺼리 해 준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본문에도 나옵니다. 마귀가 예수님께 했던 세 번째 시험이 그와 비슷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 시험이 두 번째 시험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9~11절을 읽어봅시다.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마귀는 예수님에게 성전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고 충동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사자들을 보내어 지킬 것이며, 손으로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해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시험은 하나님 아버지를 끌어들이는 교묘한 시험입니다. <넌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냐? 그런데 뭐가 걱정이냐? 네 아버지가 아들이 위험에 빠졌는데 보고만 있겠느냐? 겁내지 말고 뛰어 내려라.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다 알아서 해결해 주실 거다>, 이렇게 속삭입니다. 

마귀는 우리에게도 이런 시험을 합니다. 이런 시험을 통해서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잘못 알게 만듭니다. 이런 시험에 넘어가면 사람들은 <일단 뛰어내리고 보는 거야. 그 다음 문제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일부에서는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을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저 사람 좀 보세요. 얼마나 믿음이 좋으면 성전꼭대기에서 뛰어 내리겠어요? 하나님을 철저히 믿으니까, 저렇게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정말 믿음이 좋은 사람일까요? 우리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한 남자가 길을 걷던 중에 땅에 떨어져 있는 요술램프를 발견했습니다. 그가 램프를 손에 주워 올리자, 요술램프에서 거인이 나오면서 말했습니다. <주인님 소원이 무엇입니까?> 그 때 남자가 말했습니다. <난 돈, 여자, 결혼이 필요하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남자는 정신이 돈 여자와 결혼했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해준다는 요술램프 이야기는 정말 흥미진진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하나님은 정말 요술램프 같은 존재일까요?  

이런 시험을 통해서 마귀가 노리는 궁극적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 어떤 아이가 사고를 치고 경찰서에 갇혔는데, 아무리 연락을 해도 부모가 오지 않고, <네가 저지른 일이니, 네가 알아서 해결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들은 속으로 부모에게 욕을 할 것입니다. 나중에 만나면 <왜 나를 꺼내주지 않았느냐>고 대들 것입니다. 언젠가 돈을 주지 않는다고 어머니를 죽인 아들이 있었습니다.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줄 줄 알았는데, 해 주지 않으니 죽인 것입니다. 

그러니 아들이 사고를 치고 경찰서에 갇히면 부모는 갈등할 것입니다. <또 가서 빼내야 하나? 아니면 고생 좀 시키더라도 사람을 만들어야 하나?> 부모의 고심이 깊어갈 것입니다. 아들의 실수는 부모를 고통에 빠지게 합니다. 

이런 구조는 우리가 하나님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로 작용하기 쉽니다. 자,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린다고 해 봅시다. 그는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다치지 않도록 받들어 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아서 사정없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는 소리 지를 것입니다. <난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 하나님을 믿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 하나님은 날 버렸다. 날 사랑하지도 않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어서 뭘 하겠는가? 난 이제 하나님을 떠난다, 하나님, 잘 계십시오.>라고 말하게 됩니다. 바로 이게 마귀가 노리는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은 <그냥 둘까, 용서하고 구원할까>를 고심하실 것입니다.  마귀는 바로 이것을 노리고 있습니다. 마귀는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예수님을 시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린다면 하나님은 천사를 보낼 것인지, 그냥 계셔야 할 것인지 고심하게 될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을 격동시키는 시험을 시도한 것입니다. 이게 마귀의 간악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의 이런 간교함을 꿰뚫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하신 말씀을 보십시오. 본문 1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아멘! 예수님께서는 마귀의 이 시험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임을 꿰뚫어보시고, 단도직입적으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마귀를 쫓아내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가 가져야 할 생각은 무엇이겠습니까? 우선 우리는 마귀의 동업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여러분, 절대로 마귀를 돕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귀를 돕는다는 게 무엇입니까? 만약 마귀가 우리에게 성전꼭대기에서 뛰라고 유혹할 때, 그렇게 한다면 그게 바로 마귀를 돕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뛰어내린다면 우리의 그 행동 때문에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 받들어 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고심하게 될 것이고, 마귀는 하나님을 격동시키려는 자기 목적을 달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마귀를 돕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가끔 사람들은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립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여러분, 왜 사람들은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그 이유는 자기 이름을 내는 위해서입니다.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린다면 누구나 죽을 것입니다. 그런데 천사가 내려와 받들어 주어 무사하다면 사람들은 열광할 것입니다. 정말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리고도 무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스파이더맨처럼 당장에 유명해질 것입니다. 이건 정말 큰 유혹입니다. 

마귀도 이 점을 노리고 예수님을 유혹한 것입니다. <예수, 그대는 메시아가 되고자 하지 않느냐? 왕이 되려고 하지 않느냐? 그렇게 하려면 사람들에게 그대를 널리 알려야 하지 않겠느냐? 언제 그 일을 하겠느냐?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라. 그렇게 하면 하루아침에 그대는 유대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될 것이고, 천사가 와서 받들어 주어 무사하다면, 그대는 당장에 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대를 왕으로 떠받들 것이다. 그러니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라>, 이게 마귀의 시험이었습니다. 

결국 <성전꼭대기에서 뛰는 것>은 자기를 과시하기 위한 행동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이용하여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자기만족을 위해서,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 받들어 주는지를 확인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세상에 과시하고 싶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겪는 고통이 어디서 기인했습니까?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사는 과정에서 고통을 겪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 욕심을 차리려다가 고난을 당합니까? 우리를 과시하려고 하다가 문제를 일으키고 위기에 봉착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신앙이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까? 신앙생활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얻고 유명해지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나요? 예수님을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받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실 수 있지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할 수 있는 능력>보다 더 위대한 것은 <할 수 있지만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로 떡을 만들어 잡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잡수시기 위해 돌로 떡을 만들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할 수 있지만,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능력>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으신 것입니까? 그 이유는 사람들을 끌어 모아 유명하게 되는 것보다 정말 더 중요한 것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기적을 행하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의 사명을 완수하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철저히 당신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목적에 충실한 삶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를 과시하고 드러내는 게 아닙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중 소요리문답의 첫 문항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라고 묻고, <하나님을 영화롭게하고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난 할 수 있다고 외치고,  그 일을 해 낸 후 사람들의 찬사를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아닙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기도는 우리를 과시하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닙니다. 또 우리 욕심 때문에 문제를 일으켜 놓고, 그것을 수습해 달라고 부르짖는 것도 아닙니다. 만약 그게 기도라면, 그래서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다면 그는 이렇게 자랑할 것입니다. <보십시오. 제가 사고를 쳐도 하나님께 SOS만 치면 하나님께서 당장에 해결해 주시지 않습니까? 제가 그런 사람입니다. 하나님도 절 무시하지 못하신다니까요..> 이건 기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귀와 손을 잡고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본분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이 생명의 복음을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것을 위해 때로는 고난을 받고, 수고를 하고, 눈물과 땀을 흘리며, 어떤 분들은 피를 흘려 순교하기도 합니다. 

그런 분들은 성전꼭대기에서 무사하게 뛰어내려 자기 이름을 과시하는 데는 조금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며,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 욕망, 육신의 썩어질 일을 가지고 하나님을 시험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순례자라고 말합니다. 순례자는 그 길이 험하든 쉽든 모든 길에서 무조건 하나님을 따릅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인용한 성경구절은 시편 91편 11-12절인데, 마귀는 교묘하게 성경 말씀을 수정하여 사용했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시편 91편 11절을 보면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귀는 자기 멋대로 <네 모든 길에서>를 빼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네 모든 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가는 모든 길, 순례자의 길을 말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순례자라면 그 길이 평지이든 골짜기이든, 산이든 바다이든, 어디든 하나님을 따라 갑니다. 

그러므로 이 길은 자기 욕심을 위해서 자기가 길을 선택해서 멋대로 걸어가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난, 골짜기는 싫어. 왜 하나님은 나를 가파른 골짜기로 인도하시는 걸까? 난 이 길로 가지 않겠어. 그 대신 내가 선택한 길을 가겠어>라고 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간다면 그건 <모든 길>이 아닙니다. 자기 마음대로 길을 택해서 걷다가 낭떠러지를 만났을 때, <하나님, 천사를 보내 도와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 고통은 스스로 초래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는 길>과 <자기 영광을 위해 자기가 선택해서 가는 길>은 구별해야 합니다. 진정한 성도는 무조건, 어디든 하나님을 따릅니다. <이 길로 가면 날 도와 주시려나? 한번 두고 봐야지..> 이런 생각을 아예 하지 않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란다면,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가십시오. 하나님의 구름 기둥을 따라 가십시오. 그 길이 어디로 연결되어 있든지 따라가십시오. 고난의 길이라도 가십시오. 자기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 성전꼭대기로 향하지 마십시오. 그런 길로 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을 수 없습니다.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지키시는 사람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자기 욕심을 위해 성전꼭대기에서 뛰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의 구름기둥만 따라가야 합니다. 구름 기둥이 움직이지 않으면 기다려야 합니다. 구름 기둥이 움직이길 기다리는 대신 자신이 시간을 선택하여, 자신이 택한 길로 마음대로 여행한다면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고난으로 인도하신다면, 고난을 짊어지고 그 길을 가는 것, 그것이 성도의 순례입니다. 

루마니아의 살아있는 순교자로 불렸던 <리차드 범브란트, Richard Wurmbrand>는 1909년에서 2001년까지 사신 유태계 루미니아 목사님입니다. 이 분은 1948년부터 1965년까지 총 14년 동안 감옥에서 온갖 고난을 겪었습니다. 목사님과 사모님인 <사비나 오스터, Sabina Oster> 부부가 투옥되었을 때 아들 <미하이>는 겨우 아홉 살이었습니다. 공산 정권은 그 누구도 아이를 도울 수 없게 했습니다. 이웃에 살던 여인들이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었는데, 그 일로 끌려간 여인들은 8년형을 선고받았는데, 온 몸의 뼈가 부스러지도록 맞아 평생 불구로 지내야 했습니다. 

이런 고통을 겪은 지 2년이 지나 미하이가 11살이 되었을 때, 면회가 허용되었습니다. 고문으로 온 몸이 반쪽이 된 사모님은 그 와중에서도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꼭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그 때 간수들이 화를 내며 사모님을 거칠게 끌고 들어갔습니다. 미하이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독실한 신자가 되었습니다. 미하이는 <저런 고통의 와중에서도 내가 존경하는 어머니에게 사랑을 받으시는 예수님이라면 얼마든지 나도 믿을 수 있어요> 그 후 미하이는 공부를 잘해서 상으로 붉은 넥타이를 받았는데, <우리 부모를 감옥에 넣은 자들이 준 넥타이는 맬 수 없다>고 던져 버렸습니다. 

여러분, 범브란트 목사님 가족들은 이 와중에서도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내가 감옥에 갈 테니 천사를 보내 날 지키고 나를 감옥에서 꺼내 제가 세상에서 유명하게 되게 해 주세요> 이런 마음으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범브란트 목사님의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저 정말 힘듭니다. 제 몸에 여러 뼈를 부러뜨리고, 수십 군데의 살을 베어내고, 불로 지지고, 열여덟 군데나 구멍을 뚫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전 아직 견딜 수 있답니다. 저를 꺼내주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지금 저 보다 더 힘든 형제들이 많을 테니, 그들에게 가 봐 주세요. 하나님께서 제게 침묵하셔도 “아, 지금 내 형제를 방문하고 계시는구나.”라고 생각하면 기쁩니다. 하나님, 전 잘 이기고 있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범브란트 목사님 부부에서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루마니아 정부는 서구 국가들의 압력을 받아 1964년에 유대인 크리스찬을 위해 일하는 노르웨이 선교단체로부터 미화 만 불을 받는 조건으로 목사님 부부를 석방했습니다. 이 금액은 당시 정치범을 빼내는 데 드는 돈의 5배에 해당되는 금액이었습니다. 목사님 부부는 루마니아를 떠나길 거부하기는 했지만, 다른 루마니아 지하 교회 지도자들의 떠나라는 권유와 외부 세계로 나가서 지하 교회의 목소리가 되어 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들 세 가족은 루마니아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섣부른 욕심으로 성전꼭대기에서 뛰는 일은 그만 하길 원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길 원합니다.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그 길로 가길 원합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내길 원합니다. 그 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 우리를 받들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전적인 신뢰의 믿음을 가지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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