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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패스, 패스!(Pass, Pass!) (마 14: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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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 패스!(Pass, Pass!) (마 14:13-21)
 
 
지금 여러분은 축구하는 장면을 보고 계십니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중 박사과정 1,2,3학년을 두 팀으로 나누어 축구를 했는데요. 사진을 찍으신 분이 세 사람 중 한 사람을 저라고 보시고 이 사진을 보내주셨는데 사실 저는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 축구를 하다보면 자주 하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패스”라는 말입니다. 축구 경기 도중 서로 “패스”하라고 외치는데, 수비수가 공격수에게, 같은 공격수끼리, 그리고 수비수끼리, 때로는 자기 편 골키퍼에게 패스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골에 대한 욕심이 있고, 자신이 축구를 좀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패스를 잘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해결하려고 하지요. 그러다가 공을 잘못 다루거나, 상대방에게 빼앗기거나, 혹은 골대를 향해 공을 찼는데 골대로부터 멀리 차버리면 같은 팀 선수들로부터 有言 無言의 비난을 받습니다. 그래서 축구를 하면 그 사람의 기질, 혹은 그의 인격이 보입니다. 수비수로 다른 사람을 뒤에서 받쳐주는 사람, 공을 다른 사람에게 적절하게 패스를 해주어 그로 하여금 공을 넣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항상 공격수만 하려고 하고, 자신이 골을 넣으려고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어떤 유형일 것 같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유형일까요? 

오늘 본문은 제가 미국에서 탐방했던 한 교회에서 설교 본문으로 들은 것입니다. 이 본문으로 설교를 들으면서 제게 계속 남게 된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패스”라는 말입니다. 도대체 본문이 말하는 “패스”란 어떤 의미일까요?

그 답을 하기 전에 먼저 여러분에게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여러분, 성도가 이 세상을 사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즉 나눔이 성도가 세상을 사는 목적이고,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이지요. 나누지 않고, 베풀지 않고, 섬기지 않는 교회와 성도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나눔”이라는 말에 모순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무슨 말인가 하면, “나눈다, 준다”는 것은 ‘내 것을 준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내 소유, 원래 내 것인 것을 준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것은 다 주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준다’기보다는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는 것, 즉 패스해 주는 것이 성도의 삶’이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이 이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 무리를 먹이소서(Give Them the Bread)!

오늘 본문은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예수님의 <五餠二漁> 기적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여러 가지 기적 사건들 중에 가장 유명하고 가장 놀라운 사건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씩 파송하여 전도하게 하신 일과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둘씩 짝을 지어 천국 복음을 전하도록 각 동네로 보내시면서, 그들에게 권능을 주셔서 그들이 복음을 전할 때마다 귀신이 물러가고, 병든 자들이 낫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나 할 수 있는 그 놀라운 사역을 마치고 돌아와 결과를 예수님께 보고했습니다. 

그렇게 사역 보고가 끝난 제자들은 무척 피곤했습니다. 게다가 그들과 예수님이 계신 곳에 엄청난 무리의 사람들이 몰려들어 음식을 먹을 겨를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한적한 곳으로 가서 좀 쉬라고 하셨습니다(막6:31). 

그런데, 오늘 본문 앞부분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쉬라”고 말씀하신 것은 단순히 지친 제자들을 쉬게 하시려는 목적만 있었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잠시 쉬어라”고 하신 말씀은 본문 바로 앞에 기록된 세례 요한이 헤롯에 의해 斬首된 사건과도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헤롯에게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결혼한 것을 ‘회개하라’고 설교했습니다(6:17~18). 이러한 요한의 설교는 妖婦인 헤로디아의 심기를 건드렸고, 헤로디아의 충동질을 받은 헤롯을 움직였습니다. 그 결과 세례 요한이 죽임을 당했지요. 그런데 헤롯의 입장에서 비록 헤로디아의 사주를 받아 요한을 죽이기는 했지만 선지자를 죽인 것으로 인하여 마음이 착잡하고 불안하던 차에 예수님의 등장과 더불어 그의 제자들까지 기적적인 일들을 해내는 것을 보면서 ‘죽은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막6:16). 

그래서 헤롯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그냥 그대로 버려두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쉬어라’고 하신 것은 제자들이 처음으로 자신을 떠나 사역하느라 지쳤으니 잠시나마 쉬라는 뜻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헤롯의 위협으로 인하여 잠시 활동을 중지한다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 동북쪽으로 가면 나오는 벳새다 광야로 갔습니다(눅9:10). 그런데 이것을 본 수많은 무리들은 예수님을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배를 타고, 또 어떤 사람들은 걸어서 거기까지 따라왔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따라온 무리들은 생각 밖으로 너무 많았습니다. 본문 말미에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고 하는데요(21), 여자와 아이들, 그리고 노인들까지 합하면 이만 명은 족히 되는 숫자의 사람들이 그리로 몰려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숫자는 그 당시 이스라엘의 인구로 보아서 엄청난 숫자였습니다. 

이 무리들을 보신 예수님은 그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아 보여 불쌍히 여기셨습니다(막6:34). 예수님은 먼저 마태복음은 이 부분을 생략하고 있습니다만,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항상 말씀이 먼저, 말씀 우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달콤하고 심오했던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무리들은 자신들이 지금 어디 있는지, 그리고 시간이 어떻게 되는지도 잊은 채, 그리고 배꼽시계만큼 정확한 것도 없다지만 그마저 느끼지 못한 채 말씀에 몰입해 있었습니다. 

이런 몰입의 상태를 깬 것은 다름 아닌 제자들이었습니다. 무리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날이 저물어 저녁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말씀을 올린 것이죠. 무리들 틈에 있던 제자들은 비록 무리들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기쁨이 충만했지만, 육신적으로는 무척 배가 고파 기진할 정도라는 것을 눈치 빠르게 파악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말했습니다. 15절,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여러분, 여기서 보여주는 제자들의 이 태도는 정말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제자들이 무리들을 살펴보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님께 구하는 것, 이것이 제자들이 무리들 속에 있는 이유요, 여러분이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 사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금요일 심야기도회 시간에 ‘에드나.M.페리’라는 분의 글을 『참된 기도는 부흥을 일으킨다』에서 발췌해서 소개해 드렸는데, 다시 한 번 소개해 드립니다.

노르웨이 어떤 거리에 술 취한 사나이가 어떤 부인 옆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그 부인에게 하시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너는 저 사나이가 어찌하여 저런 상태 가운데 있는지 아느냐? 그는 중보자(仲保者)가 없다. 그를 위하여 기도해줄 자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 부인은 급히 집으로 달려가서 그 술 취한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 부인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주신 것입니다(스가랴 12:10). 그 부인은 이때까지 한 번도 그런 모양으로 심령을 쏟아놓고 기도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 부인은 그 사람 이외에도 술 먹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도 꼭 같은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부인은 머리를 들기 전에 그가 살고 있는 도시와 온 교회와 근방에 있는 지방이 부흥되게 해달라고, 또한 죄로 인하여 마음이 어두워진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해달라고 간절한 심령으로 기도했습니다. 그 부인은 기도를 마칠 무렵에 하나님을 향하여 “나는 주님의 것인 줄 아나이다. 이 근방에 주께서 나에게 맡긴 사명 같은 사명 맡은 이가 있사오면 만나게 하옵소서”라는 간절한 기도를 올렸습니다. 바로 다음 날 그 부인은 이상하게도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자기와 같이 중한 사명을 맡은 부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두 부인은 매일같이 한 자리에 모여서 부흥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같은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는 사람들을 더 보내달라고 주님께 졸랐습니다. 주님께서 두 사람을 더 보내 주었습니다. 그 후부터 얼마동안 낙심당할 만한 기간이 계속되었습니다. 괴롭던 그 기간이 지나가자 네 사람이 여덟 사람으로 늘었습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서 곧 열여섯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 후에 어떤 날, 함께 기도하는 한 부인이 자기의 기도가 곧 응답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확신을 얻었노라고 하는 말을 다른 부인들에게 말했을 때 다른 부인들도 역시 ‘똑같은 확신을 얻었다고’ 하는 간증을 피차에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말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그들은 기도할 때에 그들의 모든 심령을 쏟아 놓았습니다. 그들은 처음으로 심령을 쏟아놓고 기도했습니다. 그리하여 부흥이 노르웨이 전국에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한 남성의 문제를 주님께 패스하는 기도를 드리기 시작한 한 여성도로 말미암아 노르웨이에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세상에 살면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잘 살피되, 예수님만이 그들의 문제의 유일한 해답이라고 믿고, 예수님께 그들의 문제를 대신 아뢰는 삶을 사는 것, 이것이 여러분이 이 세상을 사는 이유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주님께 드리십시오(Pass it to Him)!

제자들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대뜸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16).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라고 말한 제자들, 그들이 생각한 것은 ‘무리들을 빨리 인근 마을로 보내어 스스로 양식과 잠자리를 해결하도록 해주십시오’이었습니다만, 예수님의 명령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였습니다. 헬라어에서는 일반적으로 주어를 생략한 채 동사의 인칭만으로 주어를 나타내는데, 여기에서는 ‘너희’라는 주어를 또렷이 명기하고 있을 뿐 아니라, ‘주라’는 동사도 대문자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즉 주님은 일부러 ‘주라’는 말을 강조하시면서, 주어야 할 사람은 다름 아니라 ‘너희’, 즉 제자들임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말씀은 제자들의 입장으로서는 정말 난감한 말씀이었습니다. 제자들로서는 무리들이 이렇게 많이 몰려들 것을 예상도 못했고, 게다가 자신들의 저녁 끼니 해결도 어려운 상황인데, 예수님께서 무리들의 저녁 식사를 책임지라고 말씀하시니 어찌 난감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로부터 몇 가지 반응이 나왔습니다. 

➊ 남달리 계산이 빠른 빌립이 먼저 나섰습니다. 그는 대충 계산해도 돈 ‘이백 데나리온은 있어야 할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200 데나리온은 거금입니다. 당시 壯丁들이 하루 종일 일하고 받는 일당이 1데나리온이었으니, 200 데나리온이란 당시 장정들이 1년 동안 벌 수 있는 돈과 맞먹는 액수였습니다. 오늘로 치면, 3천만 원이 될 수도 있고, 4천만 원이 될 수 있는 액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설사 그런 돈이 있다고 해도 2만여 명이 한꺼번에 먹을 수 있는 양식을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2만 명이 일시에 먹을 빵을 만들어낼 수 있는 빵 공장도 없고, 설사 그런 빵 공장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벳세다 광야로 운반해 올 수십 대의 트럭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200 데나리온”은 가능을 계산한 숫자가 아니라 불가능을 입증하는 숫자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이 불가능의 상황이야말로 주님을 바라볼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왜요? 제자들은 지금까지 주님의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직접 주님의 이름으로 놀라운 일을 행한 경험도 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이 바보가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제자들에게 돈도, 그리고 가까이에 빵 공장도 없다는 것을 예수님이 모를 리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에게는 예수님만의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머리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도 답이 없는 문제를 예수님께 도로 맡기면 됩니다. 주님은 불가능을 자신에게 맡기는 제자들의 믿음을 원하신 것이지 그 광야에서 돈을 거두고 빵을 사는 수고를 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언제 이러한 것을 깨달았는지 아십니까? 사도행전 3장 6절에서 베드로가, “금과 은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준다”고 하면서 앉은뱅이를 일으켰을 때, 그때야 비로소 돈이나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하여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돈이 없어도 예수님만 있으면 돈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아직까지는 모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빌립을 비롯한 제자들에게 ‘없는 돈’만 보이지 ‘있는 예수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없는 것’에 사로잡혀 ‘함께 계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제자들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보십니까? 만약 여러분이 돈이나 권력이나 그 어떤 힘보다 예수님을 의지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가진 모든 문제를 예수님께서 해결하실 줄 믿고 예수님께 그 문제를 패스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➋ 예수님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에 두 번째로 반응한 사람은 안드레였습니다. 안드레는 그 수많은 무리 가운데를 “혹시나” 하고 찾아 다녔습니다. 안드레는 무리들의 형편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리고 주님의 요구가 다소 어려운 것임을 알지만, 그래도 가만 앉아있기보다는 우선 움직여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무리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면서 먹을 것을 찾았습니다. 그러던 중 한 어린 소년이 집을 나설 때 엄마가 싸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예수님께 갖다드렸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6장 8,9절에 밝히는 사실입니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안드레는 소년의 도시락을 가지고는 왔지만 예수님께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라고 말했는데, 이것이 문제입니다. ‘무리들은 이렇게 많은데, 이 작은 도시락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도대체 누구 입에 부친단 말입니까?’ 가져오기는 했으되 안드레의 결론 역시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움직이지 않고 머리로 따져서 불가능하다고 하는 사람이나, 움직여보기는 했으나 결론은 역시 불가능하다고 하는 사람이나 다 똑 같습니다. 그런데 안드레의 잘한 점은 비록 적은 양이지만 그것을 주님께 드렸다는 점입니다. 비록 적은 것이라도 주님께 “패스”해 드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결과가 말해주지 않습니까? 주님은 안드레가 건네주는 어린 소년의 도시락을 받으시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제자들에게 “나눠주라”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무리들을 질서 있게 앉힌 후 떡을 나눠주었습니다. 그런데 무리들이 그것을 받아 배불리 먹었는데, 먹고 남은 것이 열 두 광주리나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20절을 원문으로 직역하면, “그들은 열두 광주리의 조각들, 즉 충만함을 거두었다. 그리고 물고기들로부터도 그러했다.”라는 뜻입니다. 즉 먹고 남은 음식을 거둔 정도가 아니라 “충만함”이라는 것을 거두었다는 말입니다. 

한 어린 소년이 음식을 찾는 안드레에게 자신의 도시락인 5병2어를 패스했을 때, 그리고 안드레는 그것을 다시 주님께 “패스”해 드렸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주님께 드려진 빵과 물고기는 더 이상 소년의 도시락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능력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내 것을 내 것이라 하여 손에 꼭 쥐고 있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주님께 드릴 때 큰 것, 위대한 것, 복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성전 입구에서 구걸을 하던 거지의 눈에 예수님께서 바르신 진흙, 그 하찮은 진흙이 주님에게 사용되자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의 눈을 뜨게 만든 기적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마른 나무 맞대기가 모세의 손에 들려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행하는 도구가 되었을 때 그 마른 막대기는 바다를 가르는 기적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산길에 보기 싫게 나뒹굴던 나귀 턱뼈가 삼손의 손에 들려지자 수백 명의 적을 물리치는 무기가 되었습니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돌멩이 몇 개가 소년 다윗의 손에 들려져 주님의 이름으로 던져질 때 골리앗을 이기고 블레셋을 이기는 무한한 능력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이나 여러분이 가진 것이 하나님께 쓰임받기에 너무나 보잘 것 없다며 낙심하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전능하신 주님의 손에 들려질 때, 여러분과 여러분이 가진 것들이 위대한 능력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인도와 인도 빈민 선교를 담당했던 ‘테레사’ 수녀는 “나와 1프랑은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나와 1프랑과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을 드리고, 아주 적은 돈을 주님께 드렸더니 주님께서 천지만물을 자유롭게 하는 엄청난 일을 이루셨다는 말입니다. 

사람에게는 無限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욕심입니다. 아무리 채우려고 해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 욕심입니다. 그러나 소년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보다 예수님께 드리고자 하는 마음이 앞섰습니다. 여러분도 이 소년처럼 되시기 바랍니다. 마음과 정성과 물질과 시간과 재능까지 주님께 드리면 주님은 그것을 통하여 놀라운 일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안드레처럼 거의 희박한 가능성일지라도 주님께 그것을 패스해 드리면 주님의 역사와 능력은 나타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비록 적은 것일지라도 그것이 주님의 손에 들려질 때 엄청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가진 것이 무엇이든 주님의 나라와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드리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그 적은 것이 위대한 일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3. 주님으로부터 받아 그들에게 주라(Receive it from Him, Pass it to Them)

세 번째로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시고 하늘을 향하여 기도하신 후 그것을 나눠주실 때, 그것을 받아 무리들에게 일일이 전한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예수님의 첫 마디 말씀입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무슨 말입니까? 결국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세상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들려주고 깨닫게 하는 역할은 바로 여러분의 책임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주님으로부터 받아서, 그리고 그것을 세상에, 사람들에게 ‘pass’해 주는 것이 여러분의 역할이지요. 

그러므로 아이의 작은 도시락을 주님께 “pass하는 삶!”,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빵과 물고기를 다시 사람들에게 “pass하는 삶!” 이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의 것이든 다른 사람의 것이든, 그것을 주님께로 “pass”해 드리는 것, 그리고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내가 간직하지 않고 사람들에게와 이 세상을 향해 “pass”할 때 주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세상을 사는 이유이고, 여러분이 은혜 받는 이유입니다. 여러분이 사람들 속에 사는 이유는 그들이 가진 문제를 주님께 패스하기 위함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여러분이 가진 것과 여러분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은 여러분이 영원히 소유할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pass해 주기 위한 것임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pass 하는 삶, 그렇게 사는 사람만이 주님의 위대한 능력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4. Pass 하는 삶!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저는 본문으로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첫째는 세상의 것, 사람의 것, 여러분 자신의 것을 주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어봐야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될 수 있고, 나중에 남 좋게 해주는 것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을 주님께 “패스”해 드리면 바로 그것이 주님의 기적을 일으킬 기적과 능력의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것이나 다른 사람의 것을 주님께 드리지 않으면 주님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둘째, 여러분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세상과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십시오.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지 말고, 그것을 pass해 주는 것, 그것이 여러분의 삶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들이 나를 이용하라! 나를 이용하여 세상을 복 되게 하고, 세상 사람의 지친 어깨를 감싸 안으며, 세상 사람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며, 텅 빈 세상 사람들을 충만하게 채워주어라!’

따라서 오늘 설교는 한 단어로 요약됩니다. 그것은 “pass”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문제 만 아니라, 이 세상의 문제와, 사람들의 문제를 주님께 pass해서 주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가진 것, 받은바 은혜들을 여러분이 간직하지 말고 사람들에게 pass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이 그들의 삶에 놀라운 일을 일으킬 것입니다. 이와 같이 pass를 잘하는 삶을 살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여러분의 삶과 주변에 놀라운 일을 일으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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