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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름에 합당한 생활 (엡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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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름에 합당한 생활 (엡 4:1-6)

한 주간 산호세 크리스천 칼리지에 가서 봉사하고 왔습니다. 한 달 전에 만만만 생명운동에서 40피트 화물을 보내었는데 컴퓨터실을 만들어 컴퓨터를 설치하였습니다. 학생들이 기숙할 수 있는 기숙사에 에어컨을 설치하였습니다. 우리가 직접 밥을 해먹으면서 일을 하고 있는데 한국에서 70대 목사님 2분과 성도님이 오셨습니다. 중국에 있는 아이들을 양육하여 지도자로 만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산호세 크리스천 칼리지에 아이들을 보내 공부시켰으면 좋겠다고 탐방 왔다는 것입니다. 이제 죽음을 앞에 놓은 70대 나이인데 기독교 지도자를 양육하기 위해 자신의 돈과 시간을 들여가며 열정적으로 세계를 누비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이름도 알지 못하고 같은 민족도 아니고 피가 섞인 것도 아닌데 이들을 위해 그렇게 힘써 살겠습니까?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그 크신 은혜로 하나님의 아들 딸로, 목사로, 장로로, 집사와 권사로 불러 주었는데 그에 걸맞는 삶을 살기 위해 힘쓰고 애쓰는 것입니다. 

감옥에 갇혀있는 바울은 이제 4장부터는 우리의 삶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삶에 대하여 첫 번째 말씀이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야 합니다(1) “합당”은 조화를 말합니다. 두개의 물건을 저울의 양쪽에 놓는다면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완전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교리와 실천 조화를 말합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어울리는 것을 말합니다. 옷의 색깔을 어울리게 맞추어라는 말입니다. 무엇에 어울려야 합니까? 부름심입니다. 세상 풍속이나 육신의 정욕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교회는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모임입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30)”라고 했습니다. 창세전에 미리 정하시고 부르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6:44)”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부르심 받았기 때문에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1:3).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습니다. 동일한 성도, 동일한 시민, 동일한 권속, 동일한 성전이 되었습니다. 이제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왕같은 제사장으로 영원한 하늘나라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한 자로, 후사로, 성도로, 동일한 시민, 권속으로 백성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왕같은 제사장으로 합당하게 행하여야 합니다. 

왕이 자식을 잃었습니다. 거지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왕이 그 거지를 찾아 왕궁에 들어 와 살도록 했습니다. 이제 신분이 거지에서 왕자로 바뀐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왕궁에서 거지처럼 살 것이 아니라 왕자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부름에 합당하게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에베소서에서는 부름에 합당한 삶에 대하여 크게 세 가지를 말씀합니다. 

첫째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4:1-16, 3) 성령안에서 연합하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통일성을 말합니다.
둘째는 새 사람을 입으라는 것입니다.(4:17-5:4, 24) 
셋째는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는 것입니다(5:5-21, 8) 
교회의 순결성을 말합니다.
오늘은 첫째는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삶에 대하여 말씀을 살펴보면서 은혜를 받기 원합니다(3).
단순하게 말하면 하나되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왜 사도 바울은 하나되게 하라(화목하라)를 맨 처음에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4절 이하를 보십시오. 피부 색이 같고, 말이 같고, 같은 학교, 같은 지역 출신, 같은 또래, 같은 취미, 같은 경제 수준이기 때문에 하나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이유에 대해 충분하고도 저항할 수 없는 근거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4-6절을 자세히 관찰해 보십시오.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무엇입니까? 하나입니다.

몇 번이 나옵니까? 일곱 번이 나옵니다. 7이 완전수이기 때문에 일부러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그렇게 기록하게 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나를 어떻게 분류하고 있습니까? 4-5절에서는 세 개씩 짝지어져 있고 마지막 7번째는 6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6절에는 만유를 4번 반복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개씩 짝지은 것은 어떻게 배열하여 있습니까? 처음 세 개는 성령께 대한 것이고, 다음 세 개는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것이고, 마지막은 성부 하나님께 대한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 되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는 교회의 지체로써 교회는 성부 성자 성령의 세 분 안에 있는 단일성 즉 세분이 일체이시다는 삼위 일체 하나님의 통일성을 지상에서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 성령과 성령의 사역에 의해 나타나는 통일성이 우리의 하나됨의 근거이고 이유입니다.(4절)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몸이 하나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교회의 지체들이다는 말씀입니다. 교회가 하나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무엇입니까? 내가 전부라는 생각입니다. 나만 중요하고 내가 느끼는 일이, 내가 하는 일이, 내가 하는 말이 전부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가 위대하고 신비스러운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임을 말씀합니다. 고전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우리 전체가 이루어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손이 눈을 눈이 손을 발입 입을 나는 네가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한 부분은 다른 부분과 상호 의존 관계가 있습니다. 몸 속에는 독립된 개체가 없습니다. 각 지체는 다른 지체들과 관계에서만 그 의미와 존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습니다. 한 지체가 불구가 되면 몸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한 지체도 필요없는 지체가 없습니다. 중요시 되지 않는 지체가 없습니다. 지체끼리 경쟁하는 몸이 어디있겠습니까? 지체끼지 서로 경쟁하고 질투하고 시기하고 없수이여긴다는 것은 무모한 짓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지체의 각부분입니다. 그러므로 구조적으로 하나이고 필연적인 관계입니다. 

무엇이 그 몸을 살아 있고 생명력있는 유기적 조직체가 되도록하는 것입니까? 
바로 그것은 성령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성령의 활동의 결과입니다. 교회를 만드시고 유지하시고 부흥케 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일로 교회 안에서 역사하시는 이는 성령이십니다. 교회안에 역사하시며 교회의 통일을 이루시는 분은 오직 한 분이십니다.

 성령께서 내 속에 있는 타락, 부패, 바르지 못함, 왜곡된 지식, 뒤틀린 본성, 교만을 깨닫게 하고 책망하여 겸손하고 애통하며 회개하게 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수선하고 페인트 칠하고 광택을 내는 일과 같은 그런 일 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일을 합니다. 우리는 수선받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다시 만들어 집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연합시킵니다. 그 토록 많은 분열과 차이와 오해가 있는 것은 대부분 부르심의 소망을 바라보지 못하는 데서 기인됩니다. 부르심의 상태만 이야기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과거)

유대인 이방인 야만인 스구디아인 종, 자유자 남자, 여자, 청, 장, 노년, 돈, 명예, 권력, 학식, 지역 등을 그들이 뒤돌아 볼 때 그들은 그 구분 차이를 생각하게 되고 서로 미워하게 되고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과거의 본성, 사회적 지위, 부와 능력, 지식 등 과거가 중요시되거나 구원받았던 상태, 회심의 경험에 집착해서는 안됩니다. 부르심의 소망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부르심의 소망은 하나니며 언제나 동일하여 우리 모두를 위한 소망입니다. (한 가족, 천국) 앞을 바라 보지 않고 현재의 상태에 눌러 앉아 안주하게 되면 분열과 분리를 면치 못합니다. 앞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2)성자와 성자의 사역이 우리가 하나됨의 근거와 이유입니다(5).

이제 사도는 5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에 비추어 교회의 연합을 설명합니다. 
주도 하나이요. 주님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위격을 말합니다. 믿음도 하나입니다. 그리스도 만이 신앙의 대상입니다. 의롭게 되는 방법은 오직 하나입니다. 기독교는 곧 그리스도입니다. 마리아. 사람, 제도, 물질, 학설, 전통, 교파 등이 아닙니다. 교훈과 사상 철학은 그 면모가 다양합니다. 그것들은 반드시 분열을 초래합니다. 주님은 한분이시기 때문에 나뉘어질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이름에 더해 서도 안되고 주님의 이름과 동등한 위치에 다른 이름을 두어서도 안됩니다.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피로 사신 교회입니다.(행20:28)

어느 사람이 돈을 내어 경영하는 교회도 될 수 없습니다.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값으로 산 분도 한 분밖에 없습니다. 교파, 인간, 제도, 전통,지역, 명분, 친분 그것이 우리를 하나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세례도 하나입니다. 세례가 우리를 갈라 놓는 요인이 될 수 없습니다. 

3) 우리가 하나되어야 할 근거와 이유는 하나님이 하나이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한분 분이십니다. 만유의 아버지이시고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만유”란 넓게는 모든 사물 천지 만물 우주, 그 밖의 모든 것을 말합니다. 좁게는 궁극적으로 믿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시면 믿는 사람의 아버지입니다. 한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만유 위에 계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만유를 초월하여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교회만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기관 중의 일부분입니다. 교회를 이끄시고 지배하시는 분이시다는 말입니다. 만유를 통일하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만유를 관통하여 활동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섭리하십니다. 교회의 전 생명을 간섭하십니다. 창설하시고 유지하시고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1장 10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창세전에 하나님의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시기로 작정하셨을 때 의도하신 근본적인 목적은 바로 이 통일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죄악은 분열의 세력입니다. 죄는 언제나 나누고 분리시키며 찢어 쪼갭니다. 죄는 사람의 마음속에 갈등을 일으킵니다. 선과 악, 의와 불의, 해야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인간과 인간, 인간과 하나님 ,나라와 나라, 계층과 계층, 영과 육체를 분열시킵니다. 우리의 구원은 개인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삶은 공동체로의 부르심입니다. 공동체로서의 부르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님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7장 21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 이 지상에서의 제자들을 위한 마지막 기도 가운데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하나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하나 되지 못하니까 소통하지 못합니다. 바벨탑으로 인간은 소통이 단절되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이 임함으로 모두가 소통하는 모습을 봅니다. 넓은 의미에 있어서 구원의 중심되는 목적은 결합시키고, 연합시키고, 죄와 인류의 타락이 가져왔던 무서운 파괴가 있기 전에 누렸던 통일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①그리스도는 막힌 담을 허셨습니다.(2:14) ②한 새 사람을 지었습니다.(15) ③함께 하는 삶으로 불렀습니다.(17,19,21, 3:6)

그러므로 가정이 하나 되어야 합니다. 직장이 하나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 되어야 합니다. 사회가 하나 되어야 합니다. 화목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공동체를 그럴 때 의미가 있고 힘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상적인 하나됨의 공동체를 꿈을 꿉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이루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였습니다.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 중의 하나는 `하나됨'입니다. 하나됨을 실현해 보겠다고 맑스 레닌은 공산주의를 창안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결국은 인간의 힘으로 하나됨을 성취하기란 마치 무지개를 잡는 것과 같은 것임을 알았습니다. 하나됨을 실현해보겠다는 종교적인 운동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도 실패에 불과 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인위적 외형적 노력에 의해 된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되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이미 예수님께서 막힌 담을 허시고 하나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제 힘써 지켜야 합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연합된 자들입니다. 그러면 이 일을 하는데 서둘러야 하며 이 일에 대해 부지런해야 하며 그것을 결코 잊지 말고 생활의 주된 일로 이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무엇보다도 우리 가운데 있는 이 연합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과 열심을 나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킨다’는 말은 ‘감시한다. 굳게 지속한다. 보존한다.’라는 말입니다. 현재형분사(계속적으로 지키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연합하라거나 하나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이미 연합된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지키고 보존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2. 그러면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은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우리의 내적 기질은 모든 겸손과 온유로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의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오래 참음과 서로 용납함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되어 평안하게 살기 위하여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용서 이 네 가지 축이 있어야 수레바퀴가 잘 돌아갑니다.

1) 우리는 하나 되기 위해 모든 것에 겸손으로 해야 합니다.

겸손은 마음을 낮춘다는 말입니다. 자기 몸을 낮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자만, 교만, 오만 자기주장에 반대되는 말입니다. 겸손이란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을 말합니다. 나는 죄인이고 하나님 앞에 보잘 것 없는 자인데 은혜로 산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자만, 교만, 오만 자기 주장 만이 판을 치는 교회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가정, 회사, 사회는 결코 평안할 수 없습니다. 화목할 수 없습니다. 모든 불화 뒤에는 교만이 숨어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겸손은 모든 미덕의 바구니"라고 했습니다. “종교를 믿는 제일 조건은 겸손이며 제2 조건도 겸손이다. 그리고 제 3의 조건도 겸손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물은 낮은 대로 흐릅니다. 이슬은 계곡에 내립니다. 무슨 말입니까?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겸손한 자의 삶은 평안합니다. 유명한 D.L 무디는 "믿음의 최대의 것을 얻으며 사랑은 최대의 역사를 이루며 겸손은 최대의 것을 보존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에게서 볼 수 있는 덕입니다. "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빌2:2-8에 나와 있는 그리스도의 겸손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왔습니다. 죽기까지 낮아지고 낮아졌습니다. 요한 복음 13장에 보면 주님께서 제자들을 발을 씻기셨습니다. 교회가 하나가 될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이것이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지키는 첫 번째 비결입니다. 사회적인 지위, 학문, 권력, 명예가 교회에 그대로 적용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한국교회사에 자랑스러웠던 유명한 분 가운데 한분이 바로 조만식 장로님이십니다. 산정현 교회 장로님이셨습니다. 그 교회 송창근 목사님 후임으로 주기철 목사님을 모시러 평양 문창교회를 갔습니다. 가서 주기철 목사님께 "우리 교회에서 목사님을 모시기로 당회가 결의하고 초빙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주기철 목사님이 "장로님, 장로님은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저희 교장 선생님이셨습니다. 교장 선생님 장로님 계신 데서 제가 어떻게 목회합니까? 못합니다" 그러니까 조만식 장로님이 무릎을 꿇고 "그때는 제가 교장이었고 지금은 장로입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에 가시면 제가 잘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하고 말했답니다. 

결국 주기철 목사님이 그 교호에 가서 섬기게 되었는데 어느날 예배시간에 조만식 장로님이 예배시간에 10분 늦게 왔답니다. 기도 당번인데 늦게 왔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마침 그것을 보았습니다. "조만식 장로님 거기에 서 계시죠" 장로님이 가방 들고, 중절모 들고, 구두 들고 들어 오다가 서 있으라고 하니까 그대로 서 있었답니다. 그것을 본 교인들은 예배시간 내내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기분이었답니다. '존경받고 나이 많은 장로님을 저렇게 무례하게 했으니 교회는 이제 큰 시험이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래도 주기철 목사님은 거기에 아랑곳 하지 않고 강하게 설교를 마쳤답니다. 설교를 마친 다음에 "조 장로님 기도하시죠" 할 때 장로님이 기도하였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주의 종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으니 용서하여 주소서" 그날 교인들은 다른 때보다 더 은혜가 충만했답니다. 

2) 우리는 하나 되기 위해 모든 것에 온유해야 합니다.

이것은 거의 겸손과 항상 동반해서 사용되는 덕입니다. '속마음이 부드럽고 상냥하다는 뜻입니다. 연약함은 아닙니다. 강한 자가 자기의 힘을 조절함으로써 지니게 되는 부드러운 성품입니다. 이것은 마음의 자세입니다. 근본적으로 마음의 자세를 온유함으로 할 때 화목이 있습니다. 일치가 있습니다. 

야생짐승이 짐을 나르거나 밭을 가는 등의 일에 그 힘이 사용되어졌을 때 그것을 가리켜 "온유해졌다"고 말씀합니다. 온유하지 못하다는 것은 폭발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를 조정하는 힘이 없어질 때 우리는 폭발하고 맙니다. 그러면 하나됨은 깨어지고 맙니다. 가정도 교회도 부부관계도 부자 관계도 온유를 잃고 폭발하면 깨어집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는 "모든 가능한 , 모든 종류의 겸손과 온유, 어떤 상황에서든, 언제든지" 라는 말입니다. 주일 이든 평일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일이 잘 될 때나 못될 때나 마찬가지입니다. 회의가 잘 진행될 때나 의견대립이 있을 때나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하든, 어떤 사람을 상대하든, 어느 곳에 있든지 마찬가지입니다. 

모세는 온유한 사람입니다. “(민12:3)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백성 원망, 동생의 비방, 부르짖어 고쳐 달라고 용서해주었습니다. 그러나 모든에는 합격하지 못하였습니다. 민20:10에 보면 결국 온유를 잃코 혈기부리다가 가나안 땅에 못 들어 갔습니다. 온유를 잃으면 공동체는 깨어집니다. 하나됨이 지속되지 못합니다. 어떤 경우든 온유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온유하심이 십자가로 나타나셨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도 입을 열지 아니하였으며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이 털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온유한 것에 힘이 있습니다. 옛날 초등학교 교과서에 바람과 해가 어느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시합을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먼저 바람이 아무리 쎈 바람을 불게 했어도 바람은 그 사람의 외투를 벗기지 못했습니다. 바람이 세차면 세찰수록 그 사람은 더욱 외투를 여미었습니다. 

그 다음 태양이 그늘을 벗기고 따뜻한 햇빛을 내리 쬐었습니다. 나그네는 "왜 날씨가 이렇게 변덕이냐" 외투를 벗습니다. 온유의 놀라운 능력입니다. 마음을 점령합니다. 땅을 점령합니다. 하나님의 기업을 누립니다.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시 37:11)”라고 말씀합니다.

3) 우리는 하나 되기 위해 오래 참아야 합니다.

"화를 내지 않고 오래동안 자제한다."하라는 말입니다. "오래 견딤"라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내게 피해를 주는 사람에 대하여 용서하므로 견디는 마음입니다. 오래 참는다는 것은 인간관계에서 참아준다는 것입니다. 참는다는 것은 말을 참는 것입니다. 말을 참지 못하면 말썽이 납니다. 성도가 할 말 다 하면 교회가 평화로울 수가 없습니다. 할 말을 참아야 직장이 조용해집니다. 예수님께서 오래 참음의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딤전 1:16)”

십자가에 달리실 때 백성들이 구경합니다. 관원드링 비웃습니다. 군인들이 희롱합니다. 신 포도주 주며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고 합니다. 함께 달린 강도가 비방합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수모 고통을 당하였지만 오래 참았습니다. 끝까지 참았습니다. 참지 못하면 하나됨은 깨어지고 맙니다. 하나됨을 이루기 위해서는 참아야 합니다. 참기도 오래 참아야 합니다. 한번 참고 끝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고 내려오는데 횃불들고 대제사장들이 잡을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은 벌써 잡힐 것을 아시고 내려오는데 대제사장의 종중에 말고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검과 몽치를 들고 예수님을 잡을려고 옵니다. 그때 베드로가 칼을 빼서 말고의 귀를 치니까 귀가 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귀를 만지시면서 낫게 하시고 칼을 집에 꽂으면서 "칼을 든 자는 칼로망한다. 이것까지 참아라 내가 열두 영도 더 되는 천군 천사를 동원해서 이런 일을 할 수 없도록 얼마든지 할 수 있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된다. 참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4) 우리가 하나 되기 위해서는 용납해야합니다. 

용납이란 "상대방을 자기에게 맞춰 바꾸려는 의도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 들임"이라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와 허물에 대하여 이해하는 태도입니다. 잘못한 사람에 대하여 책벌을 보류하는 태도입니다. 이해한다는 말입니다.

이해하다는 말은 영어로 'understand'입니다. 'under(아래) + stand(서다)' 아래 있는 것이 바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죄인들을 이해할려면 죄인들 속에 들어가야 되고, 병든 사람을 이해할려면 병든 사람 속에 들어가 그 심정을 이해해야 됩니다. 저쪽에서 짜증낼 때 '병들었으니까 짜증내겠지' 하고 이해를 해야 넘어갑니다.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어떤 사람이 내 비위에 맞지 안는다는 이유로 그 사람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바꾸려고 하는 일에 열심을 내다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은 없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집을 떠난 못된 탕자에게 "네 행동을 다 고치고 떳떳한 인간이 되어 돌아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탕자가 그 추한 모습 그대로 돌아 왔을 때 그를 받으셨습니다. 
베드로가 처음부터 사도였습니까?
바울이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종으로 완전하였습니까?

욕구의 차이 때문에, 가치관 차이 때문에, 감정의 차이 때문에 대립과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죄가 아니라면 좋은 것, 나쁜 것 있는 모습 그대로 그 사람의 인격을 인정하고 받아 들여야 합니다. 차이를 다른 것으로 생각해야 하지 죄로 타도의 대상으로 생각하면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마음 맞는 교인 없다고 불평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 내 마음 맞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한번은 성 프랜시스 수도원에 금식기간이 와서 금식을 하는데 제자 하나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죽을 훔쳐 먹었답니다. 주방장이 그것을 보고는 프랜시스에게 와서 "선생님, 어젯밤에 제자들 가운데서 한사람이 주방에 들어와서 죽을 훔쳐 먹었습니다"라고 말했답니다. 그때 옆에 있던 제자가 "괘심한" 하면서 분을 냈답니다. 그러자 성 프랜시스가 "그래? 어서 죽 그릇을 가져다가 모두에게 주어라 우리 같이 먹자" 하면서 다 먹었답니다. 왜 그렇게 했겠습니까? 성 프랜시스는 제자들이 죽 한 그릇 훔쳐 먹은 사람을 정죄하고 심판하다가 자기의 의로움 때문에 교만에 빠져서 망할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먹고 낮아져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작가의 자품을 모독하는 것은 곧 그 작가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롬15:7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용납이라는 말 앞에 무엇이 수식되어 있습니까?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라는 것은 그 사람이 가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라고 말합니다. 마음에 안 맞는 사람을 맞추는 것 쉽지 않습니다. 시어머니 기분을 맞추어 주는 며느리, 사랑 없이는 쉽지 않습니다. 시어머니와 함께 밥상에서 밥을 먹는 사람, 이것은 역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죄인들을 예수님이 맞추기 위해서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내려와서 죄인들의 형상을 입고 함께 맞추어 사십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가 되었으니 모든 겸손과 모든 온유로 하나됨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서 지켜야 합니다.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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