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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환난을 이겨내는 삶 (롬 12: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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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난을 이겨내는 삶 (롬 12:12-13) 
  
사람마다 임종하게 되면, 크게 뉘우치는 것이, 3가지라고 한다. (1) 베풀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좀 더 많이 베풀고, 좀 더 많이 줄 수 있었는데, 내가 왜 주지 않았나." "이렇게 손에 쥐고 모아도, 먹지도 못하고 가는 데, 좀 더 좋은 일하면서 살 걸… 이것이 큰 후회가 된다고 한다. 

(2) 참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고 한다.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좋았을 걸, 쓸데없는 말과 화를 내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구나."후회한다. (3) 행복하게 살지 못한 걸 후회한다고 한다. "좀 더 행복하고, 즐겁게 살 걸… 내가 왜 그랬을까?" 이것이 공통적인 후회라고 한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베푸는 삶을 살게 만들고, 참게 만들고, 행복하게 즐기며 살게 만든다. 그러나 율법은, 참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사람을 공격하고, 용서를 모르기에, 참지 못하고, 공격적이기에, 함께 즐기지 못한다. 

하와이에 정부청사 앞에는,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진 동상이 있다. '다미엔' 동상인데, 나병환자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왜 흉측한 동상을 세웠나? 본래 다미엔은 '벨기에'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은 큰 부자였기에, 호의호식하면서 얼마든지, 일평생을 편안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그는, 자기에게 물려준 모든 재산을 정리해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려고, 하와이 군도의 한 섬 '몰로카이'로 건너갔다. 그 당시의 몰로카이 섬은, 나병환자들만 모여 살던, 절망과 죽음의 섬이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그곳으로 건너갔다. 

우리 같이 예수님을 믿자고, 복음을 전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움막으로 돌아오다, 뜻밖에 나병환자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다미엔은 몸이 성하니까, 그런 소리를 하지, 우리처럼 나병에 걸려서 몸이 썩어봐! 어디서 소망을 찾고, 하나님을 찾겠다는, 말을 할 수 있겠어!" 

그는 이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움막에 돌아와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저들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려면, 저들과 똑같은 모습이 되어야하니, 제게도 나병을 주세요, 예수님은 저를 위해, 그 귀한 몸을 버리셨듯이, 저도 그들을 사랑하기 원합니다." 

간절히 기도한 후, 다미엔은 나병환자의 고름 섞인 피를, 자기 몸에 수혈했다. 얼마 후 그의 몸도 감각이 무디어지기 시작하였다. 눈썹이 빠져나갔다. 손가락이 오그라들더니, 마디가 떨어져 나갔다. 그에게도 죽음의 병이 찾아왔다. 나병에 걸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야 비로소, 제가 저들 앞에서 '우리'라는 말을, 떳떳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저의 기도를 들으시고, 저에게 나병을 허락해주심을, 진실로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나병에 걸린 우리도, 지극히 사랑하신다."고 외쳤다. 그 모습에 사람들은, 감동을 받았다. 

모든 나병환자들은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다미엔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래서 절망과 죽음의 섬 몰로카이가, 소망과 생명이 넘치는 섬으로 바뀌게 되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성도의 삶에 대해 말한다. 성도는 자기라는 울타리를 뛰어넘어,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사랑으로 예수님을 섬겨도, 삶이 형통하고, 평탄하지 않을 때가 있다. 때로는 속상한 일로, 마음의 상처를 받거나, 환난과 핍박을 당할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든지 환난과 핍박을 이겨내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기에, 낙심할 필요가 없다. 어떻게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가? 

1.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12上).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율법은 하지 말라고 금하지만, 복음은 하라고 말한다. 우리는 소망이 있기에 즐기며 살기 바란다. 우리는 그 소망을 즐거워하기에, 얼마든지 현재의 고난을 이겨낼 수 있다. 

6.25 동란이 한창 치열할 때였다. 한번은 미 해병대 장병들 상당수가, 갑자기 들이닥친 중공군에 의해서 포위를 당했다. 사방에서 포탄이 떨어지고 있었다.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미군 병사들의 시체가, 여기저기에 널려 있다. 살아 남은 병사들도 참호 속에 갇힌 채,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곧 닥쳐올 죽음의 공포로 인해, 모두 떨고있었다. 그 가운데는 종군기자가, 한 사람 있었다. 그는 그 와중에서도, 기자 정신을 발휘했다. 떨고 있는 옆의 병사의 모습을, 사진기에 담았다. 그리고는 그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만일 이 시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당신에게 무엇을 해주면, 좋겠느냐고 물으신다면, 당신은 어떤 요청을 하시겠는가?" 그때 그 병사는, 유명한 대답을 했다. "Just give me tomorrow, 오직 나에게 내일을 주십시오." 다행스럽게 그들은 포위망을 뚫고서, 극적으로 살아났다. 

훗날 그 기자는, 똑같은 제목의 기사를 써서, 언론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퓰리처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 분명한 내일이 보장된다면, 오늘의 고통은, 얼마든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이 (고후3:12) "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라고 하였다. 

옛날 평안북도 선천군에, 가물남 교회가 있었다. 그 교회를 담임하셨던, 이성주 목사님 이야기다. 이 목사님은 공산주의를 매우 싫어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반대했다. 그러다가 공산당에 의해서, 아오지탄광으로 보내졌다. 공산당 간부들은 목사님 마음을 돌이켜서, 그를 이용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이따금씩, 그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그래, 일해보니까 어떻소? 당신은 바보요. 그까짓 목사 짓을 해서, 무슨 소망이 있겠소? 그러지 말고 우리와 손잡고, 공산주의나 합시다." 그럴 때마다 이성주 목사님은 담대하게, 이렇게 대답을 했다. 

"물론 내 소망은 크지요. 내 소망은 나팔통과 같지요. 오히려 당신들에게는, 소망이 없지요. 당신들의 소망이야 보습 끝과 같소." 보습은 밭을 갈 때, 사용하는 쟁기를 의미한다. 위는 넓지만 내려갈수록 좁아진다. 그리고 끝은 뾰족하다. 반대로 나팔 통은, 처음에는 가늘지만, 갈수록 굵어지고 넓어진다. 

이성주 목사님은, 서슬 푸른 공산당 간부들 앞에서,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담대하게 이렇게 설명했다. "당신들은 학교를 졸업하고서, 취직도 하고, 결혼도 하지요. 그때만 해도 당신들의 소망은 컸을 것이요.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 사십, 오십, 육십이 되면, 당신들의 소망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소. 

그러다가 죽으면 그 소망마저도,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러나 내 소망은 다르오. 내 소망은 예수를 믿는 소망인데,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욱 더 커지고 넓어진다. 따라서 당신들의 소망은 보습 끝과 같고, 내 소망은 나팔통과 같지 않으니,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나와 더불어 예수님을 믿읍시다." 

그들은 끝내, 이성주 목사님의 마음을 돌이켜놓지 못해, 결국은 총살시켜 버렸다. 그러나 이성주 목사님의 눈앞에는 소망이 분명했기에, 이 목사님의 말대로 나팔통 소망이 있었기에, 그는 담대하게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순교할 수 있었다. 

환난을 당하고 있나요? 환난 넘어있는, 찬란한 영광을 바라보기를 바란다. (롬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는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한, 분명한 소망이 있기에, 환난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담대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기에, 환난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활기차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다. 소망이 넘치는 삶이 되기를 바란다. 


2. 우리에게는 기도의 힘이 있다(12下).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환난이 오면, 그것을 확장시키지 말고, 견디자! 상처가 났을 때, 자꾸 긁으면, 더 커지고 덧난다. 환난 속에서도 참고 견디자. 

우리가 환난을 능히 이겨낼 수 있음은, 기도의 힘이 우리를 뒷받침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 빌립보에 이르렀을 때, 그 성에는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이 있었다. 바울은 귀신을 쫓아내 주자, 그 여종의 주인들이 수익이 끊어진 줄 알고, 바울과 실라를 끌고, 관가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로마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이상한 풍속을 전한다고 고소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의 옷이, 찢어 벗겨졌다. 매도 많이 맞았다. 깊은 옥에 가두고, 발에는 차꼬가 든든히 채워졌다. 

이러한 극심한 환난 속에서, 바울과 실라는 한밤중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했다. 그들은 환난 가운데, 기도와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났다. 옥터가 흔들리며, 옥문이 열렸다. 모든 사람들의 매인 것도, 다 풀어졌다. 

간수는 놀랐다. 죄수들이 다 도망간 줄 알고, 칼을 빼서 자결하려고 했다. 그때 바울이 크게 소리 질렀다. (행16:28中)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간수와 그의 온 집이 침례를 받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간수는 바울과 실라를 데려다가, 매 맞은 곳을 씻어주었다. 그리고는 자기 집에 초청해서, 음식을 차려주었다. 그는 자기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게됨을, 크게 기뻐했다. 훗날 사도 바울은 그 때, 일을 회상하면서, 빌립보 성도들을 향해서, 이렇게 권면을 했다. 

(빌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환난에 처해 있나요? 그 환난에 집착하거나, 묵상하지 말라. 그 일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평강을 주실 것이다. 그러면 어느 순간에 웃으면서, 환난에서 벗어나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인도에서 선교를 하시는, 어떤 선교사님의 체험담이다. 어느 날 밤 선교사는, 큰 비단뱀에 의해서 몸이 휘감기게 되었다. 이 비단뱀은 사람을 질식시켜, 통째로 삼켜 버리는, 아주 무서운 뱀이었다. 비단뱀은 그 선교사님을 계속해서, 조여오기 시작했다. 그러니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는가? 

그러나 그 선교사님은, 고통 중에도 자기가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치지 않았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자기의 삶을 맡기겠다는, 마지막 기도를 조용히 드렸다. 그리고는 평소에 즐겨 암송하던, 시편23편을 고요히 묵상하기 시작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이 말씀을 고요히 암송하는 가운데, 선교사님의 마음에는, 하늘의 평강이 임하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도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선교사의 몸을 죄고 있던 비단뱀이 갑자기, 선교사님의 몸을 서서히 풀어주고, 슬그머니 숲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서 기적적으로, 그 선교사님은 살아났다. 만일 그 선교사님이, 비단뱀에게 감겨 있을 때, 자기 힘으로 빠져나오겠다고 발버둥을 쳤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뱀은 오히려 더 세게, 선교사님의 몸을 조여서, 결국 선교사님은 목숨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 선교사님이, 자기 몸의 근육을 전혀 움직이지 않고, 평안한 상태로 있었기에, 오히려 뱀은 놀라서, 선교사님의 몸을 풀어주고, 달아나 버렸다. 지금 세상의 환난이, 우리의 삶을 조여들고 있는가? 그렇다고 해서, 우리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발버둥치지 말라. 

우리가 몸부림친다고 해서, 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기 바란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하기 바란다. (시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하나님은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환난 가운데서, 구해 주실 것이다. 

피아노를 제일 잘 사용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쳐야 한다. 피아노를 쳐야 음악이 흘러나온다. 집에 모셔만 두고, 치지 않는다면서, 왜 음악이 나오지 않느냐고 물으면,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피아노가 집에 있는데 왜 안 치는가! 기도의 서적만 읽지 말고, 찬양과 기도에 힘쓰시기 바란다. 


3. 우리에게는 성도들의 따뜻한 돕는 손길이 있다(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사도 바울이, 본문을 기록할 당시의 성도들은, 많은 환난을 겪었다. 특별히 경제적인 고통이 심했다. (히10:32-34)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초대교회 성도들은, 신앙 때문에 자기 산업을 빼앗겼다. 재산을 몰수당했다. 더러는 핍박을 받아서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더러는 마을에서, 추방을 당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람들이 당시 세계 제일의 도시였던, 로마로 몰려왔다. 바울은 그들을 염두에 두면서,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라고 권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어려운 일에, 구제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힘썼다. 그래서 그들은 있는 자는, 자기의 집이나 밭을 팔아서, 판 것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갖다 놓았다. 그러면 사도들은, 그것을 각자의 필요를 따라서 나누어주었다. 그래서 그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 

예수님이 승천하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에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저곳 찾아가서, 복음을 전했다. 그들을 순회전도자라고 한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도 바울도 세 번에 걸쳐서, 순회전도여행을 했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했다. 이 말씀도, 잘 지켜졌다. (요삼5-6) 가이오는 나그네 된 순회전도자들을, 자기 친형제처럼 생각하면서, 후하게 잘 대접했다. 

이런 성도들의 따뜻한 돕는 손길이 있기에, 우리는 환난에서도 얼마든지 이겨내고, 능히 견딜 수 있다. 우리 주변에도 우리를 돕는 손길은, 여전히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우리가 환난 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이들의 도움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큰 힘을 얻고서, 이겨낼 수가 있다. 

중국에서 사역을 하시던 어떤 선교사님의 이야기다. 한번은 어떤 개울을 건너가게 되었다. 홍수로 인해, 갑자기 개울물이 많이 불어났다. 그는 자기 옷을 걷어올리고,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한 걸음씩 개울물을 건너기 시작했다. 한 중간쯤 왔을 때, 그는 갑자기 발을 헛디뎌, 넘어져 버렸다. 

일어나려고 해도, 흙탕물이 너무 급류라서, 쉽게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흙탕물에 떠내려가고 있었다. 때마침 그 곁을 지나가던 어떤 사람이, 선교사님이 흙탕물에 떠내려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는 옷을 입은 채, 급히 개울물에 뛰어들어, 선교사님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었다. 

그래서 간신히 그 선교사님은, 자기 목숨을 구하게 되었다. 선교사님은 너무나도 고마워서, 자기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의 이름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 중국인은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성경에도 보니까, 선한 사마리아사람의 이름이 기록이 되어 있지 않더군요."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조용히 자기 갈 길을 갔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사람이, 강도를 만났던 것처럼, 이런 저런 어려운 일을 당할 때가 있다.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있다. 속상한 일을 당할 때도 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강도처럼 우리에게 해를 주는 사람도, 만날 수가 있다. 또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처럼, 우리가 환난 당하고 있을 때, 못 본 척 하고서 지나쳐 버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내버려두지 않는다. 반드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예비하고, 우리를 돕게 만드신다. 

과거 우리의 삶을, 한번 회상해보기 바란다. 우리 곁에는, 수많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환난을 당하고 있나?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반드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보내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주실 것이다. 


결론이다.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환난을 이겨낼 수 있는 근거를, 3가지로 말씀하였다. (1)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에,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2) 예수님의 이름을 주심으로, 기도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3) 성도들의 돕는 손길이 있기 때문이다. 

환난에 처해 있는가? 우리는 무방비상태에 놓여있지 않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환난 앞에, 소망을 갖다 놓기 바란다. 뒤에서 기도의 힘으로, 뒷받침하기 바란다. 우리 옆에는, 성도들의 따뜻한 사랑의 손길이 있음을 명심하기 바란다. 

환난은 결코 우리를 넘어뜨릴 수 없다. 우리는 이미 영화롭게 되기로, 작정된 사람들이다. 우리는 궁극적인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 이 믿음, 이 확신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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