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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반드시 기억할 것 (눅 12: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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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기억할 것 (눅 12:13-21)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가뭄이 심해서 밭작물들이 다 타들어갔습니다. 때 이른 무더위로 인해서 폭염 주의보가 발령되기도 했습니다. 30도를 웃도는 기온에 모두가 허덕였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비가 간절했습니다. 드디어 비가 왔고 기온도 평상 기온을 되찾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비가 와도 너무 왔습니다. 거기다가 태풍까지 몰려온다고 합니다. 

그래도 우린 나은 편입니다. 이웃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는 하루만에 140밀리의 비가 왔답니다. 평상시엔 6월 한 달을 다 합쳐도 그 1/10밖에 비가오지 않는 곳인데 한 달 동안 내릴 비의 10배가 하루 만에 와 버린 겁니다. 그러다보니 도시의 하수 기능이 감당을 못합니다. 그래 중국의 수도가 물난리를 겪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도 지난해 수도 서울의 한 복판 세종로가 물난리를 겪기도 했지 않습니까? 
어쨌든 가랑비에 옷깃 젖는다고 조금씩 내리는 비가 농작물에도 큰 도움이 되지만 한꺼번에 많이 쏟아지는 비는 이롭기는커녕 해가 될 가능성이 그만큼 더 크다 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 장사를 해서 많은 돈을 번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돈 버는 데는 남 다른 재주가 있어서 날로 큰 부자가 되어 갔습니다.
나중에는 그는 가만히 있어도 돈이 돈을 벌어주어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오직 돈 버는 재미로만 살았습니다. 마치 돼지가 먹는 재미로 살듯이 말입니다.
하루는 그가 친구를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상하단 말일세. 내가 죽으면 가난한 사람을 위해 내 재산을 몽땅 자선단체에 바치겠다고 유언을 해두었는데도 왜 사람들은 나를 구두쇠라고 비난하는지 모르겠어? 도대체 이해가 안 돼.”

그러자 친구가 말했습니다.
“자네 혹시 암소와 돼지 이야기를 알고 있나? 내가 얘기를 해주지. 어느 날 돼지가 암소에게 이렇게 투덜거렸다네. ‘사람들은 왜 항상 암소의 부드러움과 온순함만을 칭찬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물론 너는 사람들에게 매일 우유를 주기는 해. 하지만 사실 나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것을 바친다고. 베이컨과 햄, 그리고 털까지도 말이야. 아니, 심지어는 발까지도 주는데 왜 사람들은 나를 욕심쟁이라며 별로 좋아하지 않는지 모르겠어 정말.’
돼지의 불평을 듣고 암소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어.
‘글쎄 그건 너는 살아 있을 때는 꿀꿀거리며 먹기만 하지만 나는 살아 있을 때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우유를 나누어주기 때문일 거야.’”

다음 주일 우리는 맥추 감사주일로 지키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맥추절을 맞아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모든 탐심을 물리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요청합니다.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그때 예수님은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고 하십니다. 그 당시는 어떤 분쟁거리가 생겼을 때 흔히 랍비를 찾아가 해결을 요청하곤 했습니다. 아마도 이 사람은 예수님께 동일한 기대를 하고 나왔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유산 상속에 관해서는 이미 율법에 정해진 바가 있으니 그대로 따르면 됩니다. 한데 아마도 형이 욕심을 부리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흔히 보는 바 부모가 물려줄 재산이 없는 형제들은 아주 우애가 좋습니다. 하지만 물려줄 재산이 많은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어떻게 해서든 한 푼이라도 더 받아내고자 하는 마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이 미리 자기가 받을 유업을 나눠달라고 해서 그것을 가지고 타향으로 갔을까요? 아마도 동생이 보기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형이 제대로 아버지의 유산을 나눠주지 않을 것으로 생각해서는 아닐까요? 

나중에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을 위해서 잔치를 열었다는 말을 듣고는 집안으로 들어오지도 않고 밖에서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라고 하며 화를 내고 있는 모습을 보면 형의 성품이 어떤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형의 재산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기 몫을 가지고 나갔던 동생이 빈털터리로 돌아왔으니 다시 자기에게 돌아올 몫에서 동생 몫으로 얼마를 또 떼어줄까봐 더 속상해하는 것은 아닐까요? 아무튼 부모가 재산이 없었다면 둘째가 집을 떠나는 모습도 달랐을 것입니다. “아버지 어차피 여기서는 지금의 곤경을 벗어날 길이 없으니 제가 도시로 나가 돈을 벌도록 하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그랬다면 아버지도 형도 참으로 미안한 마음으로 떠나보냈을 것이고 동생이 실패하고 돌아왔다고 해도 “그래 얼마나 고생이 많았냐? 정말 잘 돌아왔다. 자 이제 편히 몸좀 추스르면서 힘을 내도록 하려무나” 하고 감싸 안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돈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유산을 나눌 수 있도록 내 형을 명하여 달라고 하는 말은 형이 지금 동생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몫을 주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동생은 속상합니다. 물론 그 속은 아무도 모릅니다. 동생이 무능해서 유산을 주었다가는 하루아침에 다 말아먹을 것 같으니 대신 관리하면서 동생을 돌보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진짜 혼자서만 욕심을 차리려고 하는 못된 형인지 알 길이 없지만 어쨌든 유산 상속 때문에 형제간에 문제가 생긴 것은 분명합니다. 

결국은 돈이 문제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 문제 역시 결국 돈이 문제입니다. 며칠 전 “울고 싶은 '하우스 푸어'(house poor·집 가진 '가난뱅이')… 더 울고픈 '하우스리스'(houseless·집 없는 빈곤층)” 라는 신문 기사가 실렸습니다. 무리해서 집을 산 사람은 대출 이자가 계속해서 올라가니 걱정이고 전월세를 사는 사람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전월세가 올라서 또 걱정이요 전월세도 힘든 판에 집을 산다는 것은 꿈도 못 꾸니 또 마음이 안 좋고 이게 오늘 우리들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무엇입니까? 우리네가 너무 욕심을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은 조금 달라졌다고는 해도 그저 집은 커야 하고 전월세를 살아도 번듯한 집만 찾으려고 하니 그만큼 부담스러웠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 마디로 내 수준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탐심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꿈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우리가 불평하고 원망하고 시비하며 다툰다면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 못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먼저 내게 있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고 하신 것입니다. 

지금 내게 있는 것에 대한 감사로부터 시작할 때 그 감사가 마중물이 되어 하나님의 허락하시는 복으로 우리에게 안겨질 것입니다. 그러니까 감사함으로 내일을 준비한다면 얼마든지 그 꿈은 커도 좋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도 도와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항상 불평만 입에 달고 살면서 다른 사람만 부러워하고 있다면 그것은 결국 탐심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감사하십시오. 비록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서 허리띠를 졸라맬망정 먼저 오늘을 기뻐하고 오늘을 즐기도록 하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나날이 행복으로 가득한 삶이 되도록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이런 은혜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부자를 생각해 봅니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그 사람의 수고가 당연히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부자이기에 그 밭을 돌보는 일꾼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꾼들에게만 맡겨놓고 있었다면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을 정도로 많은 소출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부자는 농사를 아는 사람입니다. 단순한 농사꾼이 아닌 농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일꾼들도 잘 다룰 줄 아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만큼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거기다가 소출이 많아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자 즉각적으로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거기다가 모든 곡식과 물건을 쌓아 두리라”고 할 정도 그 사람은 신속한 결단력과 투자 마인드도 있는 사람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고 할 정도로 인생도 즐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경영 능력도 있고 내일을 준비할 줄 아는 사람이기도 하고 아랫사람도 잘 다스리는 리더십도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뛰어난 사람이요 그런 것이 이 사람이 부자로 살아갈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자라고 하십니다. 세상으로 볼 때는 저만큼 지혜로운 사람이 없는 것 같았는데 어째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하십니까? 그것은 먼저 이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 사람은 아주 유능한 경영자요 많은 장점을 지녔습니다. 하지만 그가 한 가지 착각하고 있는 것은 자기의 수고만으로 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농사만 해도 그렇습니다. 

밭을 가꾸고 씨뿌리고 김매고 비료주고 물 대주고 또는 물 빼주고 하는 등의 모든 수고는 당연하다고 해도 그것이 반드시 풍년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병충해까지야 약을 써서라도 막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애굽을 휩쓸었던 메뚜기 떼가 습격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 동안의 모든 수고가 다 헛것입니다. 그래서 말라기 3장에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씨에서 싹도 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수고는 내 몫이라고 해도 내가 싹 나게 할 재주는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열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쭉정이로 끝나냐 싸라기로 끝나냐 아니면 알곡이 되느냐 하는 것 역시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거기다가 이른 비 늦은 비가 적당한 때에 내려주어야 합니다. 비가 적절한 때 적절한 양으로 내려주어야 곡식도 과실도 풍성해집니다. 

그래서 풍성하게 거둘 수 있는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먼저 우리가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건강도 하나님이 허락하셨습니다. 건강치 못하고서야 무엇을 어찌할 수 있었겠습니까? 또한 좋은 일꾼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첫 열매를 가져다 주님 앞에 드리며 맥추절을 지켰던 것입니다. 추수하는 첫 열매 첫 곡식단을 하나님께 드리며 그들은 먼저 감사했습니다. 물론 모든 거둔 것의 십분의 일도 마땅히 하나님 앞에 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부자에게서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단 한 마디도 없습니다. 감사가 없으면 하나님은 더 이상 은혜의 손길을 베풀지 않으십니다. 거기다가 하나님께 마땅히 드림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하나님께 드림이 없다는 것은 땅에 쌓는 것이요 거기에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해가는 일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드리면 좀도 동록도 해하지 못하고 도둑도 도둑질을 못하니 안전하게 지켜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군다나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신명기에서는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라고도 하십니다. 
다음으로 부자는 이웃에 대한 섬김을 생각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 나오는 말씀이 이렇습니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우리 역시 받는바 은혜를 함께 나누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실 뿐만 아니라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부자는 “흩어 구제함으로 더욱 부하게 되는” 하나님의 원리를 잊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생명을 나눔이 아니겠습니까? 가난한 자에게 도움의 손길을 펼치는 것은 곧 그들에게 생명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보십시오.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었는데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다비다는 영양 또는 눈이 아름답다는 뜻의 아람 말이고 도르가는 같은 뜻의 헬라 말입니다. 다비다는 이름처럼이나 아름다운 눈을 가졌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비다는 자기도 과부이면서 다른 과부들을 돌보았습니다. 친히 겉옷과 속옷을 지어 입히며 그들을 돌보았습니다.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다고 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귀한 이름들이 있습니다. 여인의 이름들도 많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그 어떤 여인에게도 제자라고 부른 적이 없습니다. 유일하게 다비다만이 여제자라고 기록이 될 정도로 저의 섬김은 진실되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랬던 이 여인이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납니다. 그때 사람들이 욥바 가까운 룻다라는 곳에 머물고 있던 베드로에게 연락하여 빨리 와달라고 합니다. 

그래 베드로가 와서 울며 하소연하는 과부들을 보고 도르가의 시체를 뉘어놓은 다락방으로 올라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았습니다. 이처럼 선행과 구제에 힘쓰던 다비다에게 또 한 번의 생명이 주어졌습니다. 그만큼 선행과 구제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고아와 과부 가난한 자와 나그네 그리고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을 힘써 도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부자만이 섬길 수 있는 것입니까? 

가장 비천하고 가난한 여인 한 없이 불쌍한 여인 과부로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조차도 제대로 먹여 살릴 수조차 없었던 여인 그래서 마지막 죽을 날만 기다릴 수 밖에 없었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가뭄이 너무 심해서 아제 먹을거리도 다 떨어졌습니다. 빵 한 개 만들 밀가루가 남은 식량 전부입니다. 돈도 한 푼 없습니다. 이스라엘 밖 사르밧이라는 동네에 사는 여인입니다.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은 이 여인이 엘리야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이 여인에게 빵을 하나 만들어오라고 합니다. 마지막 빵 한 개 그러나 여인은 그 빵을 가지고 엘리야를 섬깁니다. 그랬을 때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빵을 만들 수 있도록 밀가루를 더해주셨습니다. 

이게 섬기는 자의 복입니다.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결국 섬김은 마음입니다. 그 마음에 사랑이 있느냐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있느냐 입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받은바 은혜대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부자는 마땅히 받은바 은혜대로 섬겨야 할 본분을 망각하였던 것입니다. 
또 하나 부자가 잊은 것은 자기 생명의 날에 대해서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언제까지인지 알지 못합니다. 물론 하나님 나라에서는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될 것이지만 이 세상에서의 날은 정해진 때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셔서 이 땅에 오게 하신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다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이 있기 전에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늘나라에 갈 준비를 생명이 있을 때 마쳐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더 이상 기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전도에 힘써야 하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하라고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날은 주님 외에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뒤로만 미루다가 오늘 주님이 이제 끝이라 하신다면 마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처럼 버려질 것입니다. 당연히 아직 생명이 있을 때 영원한 생명을 위한 준비를 마쳐야 했지만 이 부자는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모든 재산을 다 가지고 갈 수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결국 이 사람은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로 끝나고 말았던 것이요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하였지만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할 기회조차도 저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럼 그 준비한 것은 누구의 것이 되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그 어떤 것도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오. 내일의 염려는 오늘로 가져와서 끙끙거리면서 오늘 해야 될 섬김은 뒤로만 미루려고 하는 어리석음에 더 이상 매이지 마십시오. 오히려 오늘 내가 섬길 수 있음을 오늘 내가 베풀 수 있음에 감사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드리고 나눔으로 하나님의 약속하신 모든 것으로 풍족하게 누리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베르랑 목사님은 프랑스의 유명한 설교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젊었을 때 눈 덮인 알자스 산에 등산을 갔다가 발을 잘못 디디어 깊은 계곡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오래 동안 정신을 잃었다가 점차 의식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집 방안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지나가든 어떤 농부가 자기 오막살이로 데려온 것을 알았습니다. 그의 상처는 싸매져 있었고 추위를 잊을 수 있도록 방안은 따뜻하게 불이 지펴 있었고 옷은 갈아 입혀져 있었습니다.

주인은 근심스러운 얼굴로 “이제 정신이 드십니까?”하고 근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오베르랑 목사님은 눈 덮인 계곡에서 떨어졌으나 얼어 죽지 않고 살게 된 것이 너무나 감사하여 그는 자기를 살려준 그 집주인에게 감사를 드리면서 말했습니다. 
“당신은 나의 목숨을 살려주신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며 이곳의 주소는 어떻게 됩니까? 돌아가서 반드시 은혜를 갚겠습니다.”
그 때 농부는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저도 한 가지 묻겠습니다. 저의 이 질문에 대답하실 수 있다면 저도 저의 이름과 주소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당신은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사람의 이름과 그 주소를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기에 풍족하고, 감사가 있습니다. 이렇게 풍성하신 은혜를 주시고도 작은 대가도 보답도 원치 않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온전한 은혜입니다. 보답을 요구하면 이미 은혜가 아닙니다. 대가가 없는 은혜가 온전한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섬김과 나눔에는 어떤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 받은바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섬기며 나누며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그런 섬김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바꾸어 가실 뿐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주는 자의 기쁨 섬기는 자로서의 기쁨이 넘치게 만들어주십니다. 기억하십시오. 뺏기지 말고 자원해서 기쁨으로 드리는 자요 주는 자가 되십시오. 그래서 더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시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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