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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마 9: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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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마 9:27-31)

시작하는 말

말기 암 환자인 엄마는
마지막 순간까지 삶에 매달렸습니다.
아들이 유치원에 가는 첫날 모습만 보고 가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기도가 통했을까.
31세 엄마는
그 다음 날 세상을 떠났습니다. 

영국 서레이주(州)에 사는 “젬마 호그”씨는 
염증성 유방암 진단을 받았습니다(inflammatory breast cancer). 유방암 환자 4%에게만 발병하는 악성 이었습니다. 일간지 “미러”에 따르면 지난 2008년 유방 절제 수술과 6개월간의 화학요법 치료를 받았지만 작년 10월에 
재발했습니다. 

엄마는 여섯 살짜리 딸과 
네 살, 두 살인 두 아들 등 세 자녀에게 엄마 없는 인생을 준비하게 하는 가슴 미어지는 일에 착수(begin the heart-rending task)했습니다. 

엄마를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될 
물건들로 가득 찬 “추억 상자들(memory boxes)”을 만들었습니다. 엄마의 인생을 정리한 글도 써놓았습니다. 틈나는 대로 추억이 남아있는 곳을 돌아다니며 가족사진을 찍었습니다.

마지막 남은 것은
네 살짜리 아들 “토마스”가 
처음 유치원에 가는 날 바래다주는 일이었습니다. 지난 2011.6.17일 아침, 엄마는 병원을 빠져나와 집으로 갔습니다. 아들의 손을 잡고,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길을 다녀왔습니다. 

유치원 여자 선생님들에게 엄마처럼 
아들을 돌봐 달라고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엄마는 남편과 세 아이에 둘러싸인 채 숨을 거뒀습니다(breathe her last). 그냥 깊은 잠에 빠져드는 듯했습니다. 마지막 소원을 이루고 나서인지 악착같이 붙잡고 있던 생명의 끈을 놓아버렸습니다.

엄마는 세 아이와 각각 찍은 사진이 
새겨진 베개 3개를 남겨놓고 갔습니다. 글 한 구절도 적혀 있었습니다. “네가 포옹이 필요할(need a cuddle) 때 엄마는 언제나 여기 있을 거야.”라고…….

여기 젊은 엄마의 아쉬운 죽음을 접하면서 
우리는 눈시울을 적십니다. “그 젊은 엄마를 살릴 수는 없었을까?”라는 의문을 가져 봅니다. 

오늘 본문에 그 답이 나옵니다. 
우리 주님이 가버나움에서 복음을 전하하시고 
떠나실 때 맹인 두 사람이 따라오면서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27) 라고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우리 주님이 어느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맹인들이 뒤좇아 와 주님께 나왔습니다. 주님이 그들에게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28)라고 말씀하시매 그들이 “주여 그러하오이다”(28)라고 그들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1.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

두 맹인은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마9:27)라고 간구했습니다. 이 말을 영어성경에는 공히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번역했습니다.

우리를“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은 애절하고도 간절한 기도를 말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신앙의 행위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하소연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과 하나님의 자비를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 이 일에 성공하면 기도는 성공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밧세바에게서 난 아들이 아플 때에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결국 죽었습니다. 아이가 죽고 난 후 다윗은 일어나 먹고 마셨습니다. 신하들이“이 일이 어찌 됨이니이까?”라고 의아해 했습니다. 그때에 다윗은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삼하12:22-23)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을 이끌어 내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그 아들을 잃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➀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➁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➂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➃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➄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➅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103:10-14)라고 말했습니다.

노아 시대에 하나님은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물이 150일 땅에 넘쳤습니다. 심판받을 자들은 다 심판을 받아 숨을 거두었습니다. 150일 동안 방주 속에 갇혀서 불안해하는 노아와 그의 기족들을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창세기 8:1절에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셨다는 말씀은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의 바람이 불면 홍수의 고난, 우환질고(憂患疾苦)가 물러갑니다. 

2. 내가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

사람이 언제 가장 뿌듯합니까? 사람들이 자기를 믿어 줄 때입니다. 사람이 언제 가장 슬프고, 외롭습니까? 사람들이 자기의 진실을 믿어 주지 않을 때입니다. 

우리 주님이 베드로와 약보, 요한을 데리시고 변화 산에 들어가셔서 은혜 받으시고 내려 오셨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귀신 들린 아들을 데려 왔습니다. 아비가 예수님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막9:22)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 아비에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비가 곧 소리 질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막9:24)라고 그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아비가 아들을 고쳐 달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자기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달라고 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우환질고(憂患疾苦)는 작은 문제입니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태산이 문제가 아니라 태산을 옮길 믿음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뽕나무같이 질긴 것이 문제가 아니라 뽕나무를 뽑아 던질 믿음이 없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우리 주님은 두 맹인에게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Do you believe that I am able to do this?”(28)라고 말씀하셨고, 두 맹인은 “주여 그러하오이다, Yes, Lord”라고 대답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문제라 할지라도 우리 주님은 우리들에게 질문하십니다. “내가 능히 이일 할 줄을 믿느냐?”라는 질문에 “주여 그러하외다”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너희 믿음대로 되리라 !

마태복음 15:22-28절을 보면은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라고 외치며 좇아 왔습니다. 

우리 주님은 좇아오는 가나안 여인을 개 취급 했습니다. 그러나 그 녀는 막무가내로 덤벼듭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15:28)고 말씀하실 때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두 맹인이 그들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신앙고백을 받으신 주님은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라”(마9:29)고 하시매 그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우리 주님은 믿음 없는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20:27)고 말씀하셨습니다. 


끝맺는 말

다윗은 시편139:7-10절에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라고 그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자연의 지배를 받고 살아갑니다. 
날씨는 우리의 옷을 결정합니다. 지리조건이 우리의 여행길을 결정합니다. 
중력이 우리의 속도를 결정합니다. 건강이 우리의 힘을 결정합니다. 세상의 조건이 우리의 신분을 결정합니다. 그러기에 
어쩔 수 없는 인간인가 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자이신 하나님은 
그 무엇에도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과 피조물의 이치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당하고 있는 우환질고를 하나님이 하시고자만 하면그 무엇이든지 지배하십니다. 
물리쳐 주십니다. 

성도 여러분 !

소망을 가지십시오. 
소망은 우리의 기대 수준을 
훨씬 뛰어 넘습니다. 소망은 우리의 기원이나 
바람을 초월합니다. 소망을 품는 것은 하나님을 어리석을 정도로 철저히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깜짝 선물을, 
놀랄만한 선물 말입니다. 우리가 필요를 
느끼는 대로 말입니다. 
아 ~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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