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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쓴 물을 만났을 때에 (출 15: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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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물을 만났을 때에 (출 15:22-27)

사람들은 대개 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 보고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똑같은 상황이라도 지금 자신의 위치와 입장에 따라 다르게 보는가 하면 다 보는 것도 아니라 보고 싶은 것만을 봅니다. 

예를 들어 똑같이 남자가 집안 일을 하더라도 사위가 집안 일 하는 것은 기특하게 생각하고 아들이 집안일 하는 것은 못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가 하면 시집간 딸이 딸을 낳으면 살림밑천이고 며느리가 딸을 낳으면 그래도 듬직한 건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아들이 살찌면 부은 것이고 사위가 살찌면 딸이 잘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며느리는 남편에게 쥐어 살아야 하고, 딸은 남편을 휘어잡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공감하십니까? 똑같은 일이라도 어느 편에 서서 보느냐에 따라 이렇게 다르더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떠한 일에서든지 늘 믿음의 눈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엇에든지 늘 불신의 눈으로 원망과 불평만 늘어놓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사람이 인생을 더 행복하게 살아가며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겠습니까? 
당연히 전자라고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하여 광야의 길을 3일이나 갔지만 물을 찾지 못해 목마름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가 3일째 되던 날 ‘마라’ 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물을 발견하자 기뻐하며 이제 살았다는 생각과 기대를 가지고 물을 마시려 하였을 때에 그 물은 쓴 물이라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내가 만일 이런 상황을 만났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하였을까요?   

24절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이스라엘이 쓴물로 인하여 갈증을 해소하지 못하자 그들은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려고 했습니까? 
가장 먼저 모세를 향해 원망하였습니다. 

여러분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400년간 노예 생활을 하다가 이제 막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10가지의 재앙을 경험하고 홍해바다가 갈라지는 것을 보았지만 여전히 노예근성이 남아 있었더라는 것입니다.

주인과 노예의 차이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주인은 모든 일에 자신이 책임을 지지만 노예는 책임을 지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이것이 노예 근성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여전히 이 노예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원망하는 일은 쉬운 일이지만 이것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로운 방법이 아닙니다.

‘원망’ 이란 ‘불평하다’, ‘수군거리다’ 라는 뜻으로 불신과 배반을 포함하는 악한 심리를 뜻합니다. 

3일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을 찬양했던 입술이었지만 이스라엘은 그 입으로 모세를 향해 원망하며 불평하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모세를 향해 이처럼 원망하였던 이유는 ‘백성이 모세에 대하여’ 라고 한 것처럼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였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과연 모세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이 오랜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누구 때문이었습니까?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당장 목이 마르다고 모세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원망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원망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스라엘이 모세를 원망한 것은 곧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었으며 죄로 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민14:27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다시 말해 우리가 원망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죄로 말미암아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과 3일 전에 홍해를 건너는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때는 얼마나 춤을 추며 감사하며 찬양하였습니까? 
그런데 같은 입술로 조금 어려우니까 원망을 합니다. 
애굽에서 10가지의 재앙을 몸소 체험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럼에도 원망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우리 연약한 인간들의 모습의 실체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원망’ 이라는 단어가 성경에 얼마나 기록되었을까요?
신구약 합하여 40회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원망’ 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나오는 부분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입니다.

그리고 ‘원망’ 이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나오는 부분이 역시 출애굽 과정이 기록된 출애굽기부터 신명기까지에서 무려 20회나 나옵니다. 

여러분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와 가나안을 들어가기 위한 광야의 여정을 기록한 것으로 이것은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천국에 이르기까지 우리 인생의 여정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들도 인생의 광야 속에 다양한 마라와 같은 쓴 물을 만날 수 있습니다.

때로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 마라가 될 수도 있는가 하면 경제적인 위기, 질병이 마라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정이 화평하지 못할 수도 있으며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데 오히려 손해만 볼 수도 있습니다. 교회도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부흥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때 누구 때문이라고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를 원망하고 남편을 원망하고 아내를 원망하고, 자녀를, 동료를, 교회를, 목회자를 심지어는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마라 앞에서도 결코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수군대며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원망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요즘 찜질방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떤 목사님의 말씀이 그곳에 가 보았더니 찜질방에서 서로가 집사님, 권사님을 부르는 것을 보니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참 많이 오는구나 라고 생각을 했답니다. 

그런데 옆에서 이들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왜 그렇게 교회와 다른 사람의 험담을 많이 하는지 낯이 뜨거워서 혼났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집사님 권사님이라고 부르지나 말 것이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우습게 생각하겠습니까?

여러분 불교인들이 대놓고 자신이 다니는 절을 욕하거나 스님을 욕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천주교인들이 대놓고 성당과 신부님을 원망하고 욕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뭐라 하더라도 첫째는 하나님 편에, 둘째는 말씀 편에, 셋째는 교회 편에 서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모든 원망과 불평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사람들은 인생의 쓴 물을 만나게 되었을 때에 어떻게 해야 할까요?

25절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모세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합니까?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러분 똑같은 문제입니다. 똑같이 목이 마릅니다.
그런데 차이가 납니다. 똑같은 입술이지만 그런데 차이가 납니다. 
이것이 바로 지도자와 백성들의 차이입니다. 
매사에 다른 사람을 탓하며 원망하는 사람은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부정적인 사람과 긍정적인 사람의 차이이며 실패하는 사람과 성공하는 사람의 차이이며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사람과 사람의 편에 서 있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쓴 물이 놓여 있고 장애물이 다가오면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라는 신호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보며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 책임이냐고 이유를 묻는 것도 아닙니다. 
‘왜’ 라는 질문보다는 ‘어떻게’ 문제를 풀 것인가에 관심을 가집니다. 
누구의 탓이 아니라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싸인으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원망할 힘과 원망할 입술이 있다면 그 입술로, 그 힘으로 하나님께 더욱 힘껏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면 어릴 때부터 귀신들려 벙어리가 되고 발작을 하면 거품을 품고 경련을 하는 아이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를 데리고 왔을 때에 마침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려 하였지만 그 아이를 낫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귀신을 내어 쫓고 아이가 온전하여 졌을 때에 제자들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귀신을 쫒아 내지 못하였습니까?.” 

이 때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어떻게’ 에 집중합니다. 

막9: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자녀의 질병으로 자신의 질병으로 가족의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원인이 누구에 있느냐고 집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서로를 향해 원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수록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 때문에 손해 보고, 어떤 사람 때문에 고통을 당하였다면 이들마저도 원망하지 말고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환란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할 때에 낙심하며 원망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기도만 하고나면 다 끝나는 것일까요? 
그 다음은 믿음을 갖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시행해야 합니다.

25절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기도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의 응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원망하고 상황에서 나무를 집어 넣는다고 쓴 물이 단물로 변하겠습니까? 
이성적 판단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이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순종하여 그것을 물에 던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도하였으면 확실히 믿고 시행하여야 합니다. 내 생각에는 이루어질 것 같지 않고 이해되지 않지만 믿고 행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미 모세는 앞서 수많은 경험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대로 따랐을 때에 애굽에서 열가지의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3일 전 홍해를 가를 때도 지팡이를 들라고 할 때 들어 믿음의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옆에서 본 사람보다 직접 경험한 사람은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압니다. 
신앙의 체험이 없는 사람은 믿음의 기적, 모험적 신앙의 환희를 잘 모릅니다. 
그러나 말씀을 믿고 나아가면 믿음대로 역사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 라고 하였듯이 여리고성을 돌라고 하면 무식한 것 같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약속을 믿고 도는 것입니다. 

마치 엄마가 아이에게 심부름을 하면 용돈을 주겠다고 하면 그 말을 믿고 해 보는 아이가 용돈을 받을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100% 믿고 실행에 옮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리할 때에 쓴물이 단물로 변하여 역사가 나타납니다.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라고 약속하셨으면 그대로 살아 보는 것입니다.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라고 하면 그대로 살아보는 것입니다. 
용서하라고 하면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하면 사랑해 보는 것입니다. 
전하라고 하면 전해 보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행할 때에 갖가지 우리 인생의 쓴 물이 단물로 변화되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의 원망과 불평 가운데서도 모세가 믿고 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때문입니까? 

첫째로 모세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26절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 질병을 하나도 내리지 아니하리니’

말씀만 하고 약속을 시행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약속하고 안 지키는 사람들이 있지만 하나님은 말씀하면 그 말씀을 꼭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의 약속은 믿기 힘들지만 우리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러니까 모세는 하나님이 지시한 말씀을 그대로 믿고 행한 것입니다.
원하기는 이 약속의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을 때에 우리 인생의 모든 쓴물이 단물로 변하게 될 줄로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는 모세가 믿고 행할 수 있었던 것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26절을 보면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 라고 말씀하십니다. 

쓴물에 나무를 넣어 단물로 변화시킨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물을 고쳤듯이 우리의 영혼의 병과 마음의 병, 육신의 병도 고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교만하고 깨닫지 못하고 늘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의 병을 고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이 나무는 무엇을 모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일까요?
홍해를 가르게 한 모세의 나무 지팡이, 법궤에 들어 있는 지팡이, 구리뱀을 달아 올린 나무, 그래서 그 나무에 달린 구리뱀을 바라보는 자마다 다 죽지 않고 치료되게 하는 나무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십자가입니다. 할렐루야!

쓴물을 단물로 변화되게 하는 나무가 무엇을 상징하겠습니까? 
이 ‘마라’ 가 상징적으로 사용된 곳이 바로 ‘룻기’ 입니다. 
나오미가 흉년이 들어 좀 더 나은 환경을 위해 이방 땅 모압으로 이주하였지만 그곳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잃고 말았습니다.

결국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때 사람들이 나오미가 돌아오자 ‘나오미’ 가 왔다고 하였는데 ‘나오미’ 라는 이름은 ‘기쁨’ 과 ‘행복’ 이라는 뜻입니다. 
이 때 나오미는 ‘나를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로 불러 달라’ 고 하였습니다. 
‘쓴 자, 불행자’ 라고 불러달라는 것입니다. 

나오미의 마라, 인생의 쓴 물을 단물로 치료해 준 사람이 누구입니까? 
유력한 자로 기업 무를 자였던 ‘보아스’ 였습니다.
그리고 보아스는 예수님의 모형을 보여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병든 영혼과 상한 심령과 육체의 질병을 치유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벧전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입었나니’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치료가 임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영혼이 치유 받아 영생을 얻게 됩니다. 
우리의 병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쓴 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우리 인생에 그 어떠한 쓴 물도 달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모세가 행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를 훈련시키기 위해 테스트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40년간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이 일을 잘 알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기적으로 이끌어 내셨으며 홍해를 건너게 하심으로 애굽에서 완전히 결별 시키셨습니다. 그리고 마라의 쓴물로 시험하신 것입니다.

마귀는 사람을 멸망으로 이끌기 위해 유혹으로 시험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성화시키기 위해 마침내 복을 주기 위해 훈련시키십니다.

요셉을 보면 거절 당하는 쓴 물을 맛보며, 비판적, 부정적 평가를 받는 쓴 물을 맛보았지만 그 과정을 통하여 마침내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위대하게 사용하시기 위해 반드시 훈련을 시키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쓴 물을 만날 때 절망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쓴 물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의 시간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앞길을 모르기 때문에 조그만 어려움이 와도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마치 아이들이 부모가 공부하라고 하면 지금 당장 놀지 못하게 한다고 원망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결과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시키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하다 보면 인생의 마라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홍해를 건너는 영광과 기쁨도 있지만 마라의 쓴 물도 곳곳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해와 비난을 받을 수도, 질병으로 고통 당할 수도, 상실감과 물질의 어려움에 눈물 흘릴 수도 있습니다. 자녀의 문제로 고민하거나 유혹의 올무에 걸려 빠져나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 때 원망하고 불평하는 백성의 자리에 서겠습니까? 아니면 모세의 자리에 서겠습니까? 
우리는 마라 앞에서 원망하며 불평하지 말고 27절 말씀처럼 ‘엘림’ 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붙들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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