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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6.25] 무릎으로 하는 애국 (느 1:1-10, 마 23:37-39) - 호국의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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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으로 하는 애국 (느 1:1-10, 마 23:37-39) 

   
6월은 호국의 달입니다. 나라를 생각하는 달입니다. 그래서 6월만 되면 생각나는 것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6월 6일 현충일입니다. 이 날은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한 분들을 기리는 날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가 6월 25일 6․25전쟁의 날입니다. 이 날은 우리민족이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입니다. 그런데 벌써 6․25의 역사도 금년으로 61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 6․25는 우리나라가 겪은 역사가운데 가장 처절한 역사입니다. 그래서 6월만 되면 지난날의 잔인한 이 역사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한마디로 고난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압제의 역사, 전쟁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민족은 눈물과 한이 많은 눈물의 민족이요 한의 민족입니다. 춤도 한풀이 춤이 전통 춤이 되고 눈물이 많은 작품들의 주제가 될 정도입니다. 특히 주제가 눈물인 노래도 많습니다. 미아리 눈물고개, 울고 넘던 박달재, 울어라 열풍아,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아가씨…. 그 노래를 들으면서도 모든 이들이 또 눈물을 흘립니다. 그만큼 지난날의 역사가 고난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회의 문화는 그 사회의 역사 환경 살아온 과정이 어우러져서 이루어지는데, 우리의 역사가 고난과 압제의 역사이기에 바로 이 눈물은 우리 민족에게 하나의 역사이자 문화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또 다른 눈물이 나옵니다. 이 눈물은 바로 느헤미야가 흘린 눈물입니다. 느헤미야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런데 노예로 잡혀갔던 그가 출세하여 왕궁에서 왕의 술시중을 드는 관원이 되었습니다. 포로로서는 대단한 성공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안락한 삶을 누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성공하면 평안한 삶을 누리는 것에 만족하고 다른 것에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달랐습니다. 오늘의 평안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또 다른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고국에 대한 염려와 걱정이었습니다. 그는 나를 넘어 너를 생각했고 우리를 넘어 나라와 민족을 생각했으며 더 나아가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 뜻을 먼저 생각하며 고민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남의 나라에서 성공했지만 언제나 고국 그리움으로 삶의 갈증을 안고 살아갔습니다. 어느 날 예루살렘에서 찾아온 사촌형제 하나니로부터 고국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은 나라가 침공당해서 예루살렘이 불타고 성벽이 무너져서 백성들이 탄식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옛날에 붙잡혀 오기를 너무 잘했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생각에 머뭅니다. 1960년대 미국에 이민을 간 어느 장로님이 주일날 예배 때 강단에 올라가 대표기도를 하였습니다. “전쟁위험이 상존하고 지옥 같은 한국 땅을 떠나 천국 같은 이 땅에 와 살고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이런 사람은 한국 땅에 전쟁이 터졌다 하면 “우리가 그때 잘 빠져나왔지” 하고 전쟁을 구경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그 날부터 금식하였습니다. 또한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난 받는 동포들과 이 고난을 함께 하지 못함을 애석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의 몸은 축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아닥사스다 왕이 그런 느헤미야를 보고 “네 얼굴이 왜 그러냐, 네 몸에 병이 없는 것을 내가 아는데 네 얼굴이 왜 그리 상하였느냐”하고 묻게 되었습니다. 그 때 느헤미야는 “내 나라가 불타고 성벽이 무너지고 내 백성이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며 살고 있는데 내 어찌 잘 먹고 평안히 쉬리이까 내가 금식하며 기도 중에 있나이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아닥사스다왕이 무슨 생각을 하였겠습니까? “내게는 왜 저런 신하가 한사람도 없단 말인가, 저는 비록 포로로 이 땅에 잡혀 왔지만 저는 진정한 백성이고 지도자이고 신앙인이구나” 하고 마음에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왕이 “내가 무엇을 도와주랴”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느헤미야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에게 휴가를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고국에 돌아가 탄식하는 내 백성을 위로하고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고 돌아오리이다”. 

여러분, 진정성이 있는 곳에 감동이 있습니다. 길이 있습니다. 방법이 나옵니다. 하늘이 움직입니다. 그래서 그는 허가를 받아 고국으로 돌아가서 백성을 격려하고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고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그 이야기가 오늘 읽은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느헤미야의 뜨거운 눈물의 기도를 보게 됩니다. 그 때 느헤미야가 고국의 소식을 듣고 그냥 앉아서 기도했겠습니까! 분명 무릎을 꿇고 눈물로 금식하며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두 가지 눈물로 기도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는 일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내 나라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내 나라가 건강한 것이 참으로 복입니다. 또 다시 이 나라에 전란이 일어나 고난 받는 그런 불행은 없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또 하나는 이 민족이 구원받고 복음화 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두 가지 주제를 가지고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합니다. 애국은 반드시 총과 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애국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무릎으로 하는 방법입니다. 우리의 무릎을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위해서 내어놓아야 합니다.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무릎을 꿇고 눈물로 기도했습니까! 또한 6․25때 3년 동안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무릎을 꿇고 눈물로 기도를 했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눈물의 기도가 총칼을 들고 전장에 나아가는 것 보다 훨씬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나라를 위해 무릎으로 기도하여야 합니다. 사도바울의 애국과 복음화를 이루려는 방법은 무기도 총칼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무릎이었습니다. 

분명 나라는 공짜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61년전 이 땅에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이 6․25전쟁은 이 땅에서 발발했지만 그 전쟁은 우리나라만의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이 땅은 전 세계가 참여한 전 세계의 전쟁터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 나라가 되찾아진 것입니다. 그 때 이 나라가 무너졌더라면 오늘 우리는 모두 저 북한에서 사는 사람들처럼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내 나라, 평화는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미국 워싱턴에 있는 한국전 기념공원에 가보면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니다”라는 글귀가 쓰여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나라가 건강하게 세워지는데 어찌 그것이 공짜로 주어지겠습니까. 자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눈물과 희생으로 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6․25전쟁 때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려 이 나라가 세워지고 이 땅에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미군은 54,246명이 이 땅에 와서 싸웠고 유엔군은 우리나라를 포함해서 모두 628,823명이 싸웠습니다. 또한 이 6․25전쟁 때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아들을 참전시켰고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은 이 전쟁 때 아들을 잃기까지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워커 중장은 아들과 함께 참전했다가 아들과 함께 전사했습니다. 이처럼 자유나 안정이나 발전은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눈물이 있고 수고가 있고 희생이 있어야 얻어지는 것입니다. 

광복도 마찬가지입니다. 1945년 2월 16일 젊은 시인 윤동주가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27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일본 경찰은 뇌일혈로 사망했다고 발표하였지만 최근 밝혀진 바로는 생체실험 대상이 되어 의문의 주사를 맞고 죽었다고 합니다. 당시 규슈국제대학에서 실험하던 생체실험은 “혈장대용 생리식염수”라는 실험이었습니다. 이 실험은 전쟁에서 부상당한 일본 병사들에게 수혈을 해야 하는데 혈액이 부족하니까 혈액을 대신할 약품을 개발하기 위해서 했던 실험이었는데, 산 사람의 몸에서 피를 뽑아내고 바닷물에서 추출한 생리 식염수를 주입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이 생체실험으로 인해 윤동주가 쇼크사로 사망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후 1948년 해방이 되고 윤동주가 죽은 지 3년외 되었을 때, 그의 첫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판되었습니다. 그 시들 속에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절절히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중 감옥에서 썼던 “십자가”라는 시 중에는 “방금 떠오르던 해가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기 위에 머물러 있습니다”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여기서 방금 떠오르는 해는 독립기운을 말합니다. 지금 나라의 광복기운이 달아오르고 있다는 것을 시로 상징한 것입니다. 이처럼 광복 해방 자유 독재타도와 같은 일들이 반드시 총과 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윤동주와 같은 사람들의 고민과 몸부림들이 모이고 모여 이 나라가 해방되고 되찾아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23장 37-39절에 보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 눈물은 이 나라와 민족에게 장차 주어질 대환란과 아이들이 수난당하고 부녀자들이 능멸당하는 미래의 모습을 보시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흘리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뒤따르며 눈물짓는 여인들에게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고 타이르신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똑같은 심정을 가지고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였습니다. “나에게는 원하고 기도하는 것이 한가지 있다. 

그것이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롬 9장에서는 “나에게는 큰 근심과 마음에 고통이 한가지 있다. 그것은 내 골육지친이 예수를 믿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가르쳐 주셨고 사도바울이 그것을 가르쳐 주었고 느헤미야가 그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가지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자유와 안정

나라는 반드시 자유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자손이 평안할 수 있습니다. 내 나라가 평안해야 세상으로부터 조롱당하지 않습니다. 요즘 북한의 김정일 모습을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중국을 오가며 양식을 구하고 다니고 3대 세습을 굳히겠다고 애를 쓰고 다니는데 그 모습이 참 처량해 보입니다. 옷이라도 좀 세련되게 입지 그렇게 누런 복장을 입고 그것도 헐고 찌들은 복장을 해서 세련된 중국 지도자들 앞에 서 있는 그 모습이 너무 궁해보이기까지 합니다. 

거기다 긴 기차를 끌고 다니는 모습이 아주 전근대적으로 보이니 세계를 주름잡으며 앞서가는 중국 지도자들이 속으로 얼마나 비웃겠습니까. 우리나라도 그런 모습이 되지 않으려면 이 나라에 평안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안정이 있어야 합니다. 나라가 자유는 있는데 안정이 없어도 안됩니다. 또한 안정은 있는데 자유가 없어도 안됩니다. 예수님의 눈물의 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마 24;1-2에 보면 눈물을 흘리시다가 한숨짓고 한마디를 하십니다.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김없이 무너지리라” 이 말은 “자유는 있는데 안정이 없다”는 예언(마 24:2)입니다. 실제로 그 후 40년 후에 로마에 의해서 그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로마군 8만 명이 예루살렘으로 몰려와서 110만 명을 학살하였고 수만명을 노예로 잡아갔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백성들은 각각 세상으로 흩어져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실들을 미리 아시고 감람산에서 눈물을 흘리셨던 것입니다. 이런 비극적 현장은 이스라엘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61년 전 이 땅에서도 있었습니다. 그 때 남북한 군인들 중 사상자가 300만 명이나 되었고 민간이 사상자가 300만, 전쟁고아가 10만, 이산가족이 수천만이나 되었습니다. 또한 그 밖에 마음 파괴, 정신 파괴의 피해를 당한 사람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렇기에 오늘 이 나라에 가장 필요한 것은 자유함과 안정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딤전 2:1-3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모든 사람은 유대인, 이방인, 여자, 남자, 신자, 비신자, 통치자, 백성들 모두를 말합니다. 또한 교회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절에서는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잘해야 나라가 평안하고 자유해지기 때문입니다. 나라가 자유하고 평안해야 믿음생활도 지장 받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최고의 애국은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는 일임을 믿고 기도해야합니다.

복음 강국 

이스라엘 민족은 무서운 비극을 겪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예수를 거부하고, 오늘도 유대인들은 아직도 오시리라고 예언된 예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 유대인들을 바라보던 사도바울은 그것을 가장 가슴 아픈 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서10장1절에 “내 마음에 원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바는 내 백성이 구원을 받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또 로마서9장1-3절에서는 “내 민족이 예수를 믿는다면 나는 저주 받을지라도 .... 원하는 바로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도바울의 마음에는 민족의 구원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렇게 뜨거운 복음의 열정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오늘 이 세상이 복음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6․25 전란 후에 복음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는데 이 복음화는 압제 속에서 꽃이 피었고 전란 속에서 결실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전국이 복음화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국화 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 공로자는 이승만이었습니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이승만은 이 나라의 복음화를 위해서 하나님이 예비해 두셨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승만을 재평가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승만은 미국 프린스톤 신학교를 나온 사람입니다. 

공부를 다 마치고 귀국했을 때 그는 선교사의 뜻을 가지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전도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정치인으로 입문한 후 이 나라를 건국하게 되었는데, 첫 국회를 개원하는 날 이승만은 모든 국회의원들을 머리 숙이게 하고 기도로 모든 것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또한 그 후에 군에 군목제도를 창설하였고 학교에는 교목제도를 창설하였습니다. 그 때 놓은 주춧돌이 오늘까지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오늘 이 제도를 창설한다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반대가 요란하겠습니까. 그렇기에 이처럼 우리는 모두 그 시대에 선교사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인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오늘 우리는 이 나라가 계속해서 복음 강국이 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북한과 일본의 복음화 

일본과 북한은 우리와 가장 가까운 나라입니다. 이 두 나라가 빨리 복음화 되어야 합니다. 이 두 나라는 똑같이 우상의 나라입니다. 그 중 일본은 온 땅에 우상 천지입니다. 그런데 일본의 나가사끼는 수십만명의 그리스도인들이 희생당한 순교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땅에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유독 일본에 십자가가 보이는 곳은 나가사끼 뿐입니다. 그 외에는 전국 어디나 신사가 즐비합니다. 일본이 복을 받아야 이웃 나라인 우리도 이 세계 나라들도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일본이 빨리 복음화 되어야 합니다. 또 한 나라는 북한입니다. 

원래 북한은 한국의 기독교 발상지입니다. 1907년에 일어났던 영적각성운동의 진원지가 바로 평양입니다. 그런데 북한은 그 영적 각성운동이 일어났던 바로 그 자리에 있던 장대현 교회를 헐어내고 세계에서 가장 큰 김일성 동상을 세웠습니다. 분명 일부러 그 자리에 김일성 동상을 세워 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나라를 하나님이 사랑하시겠습니까? 이 두 나라가 빨리 복음화 되어야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 기도 몫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애국도 종류가 있습니다. 총칼을 들고 나아가 싸우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애국은 총과 칼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무릎에 있습니다. 무릎으로 하는 애국을 해야 합니다. 오늘 읽은 분문은 느헤미야가 무릎으로 하는 애국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내용을 보면 절절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구령의 기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급식하고 기도하였다”(1:4), “내 조상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심이 없사오리이까”(2:3). 이 뜨거운 눈물의 기도, 이 기도가 나의 기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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