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예배자 다윗 (삼하 6:12-19)

첨부 1


예배자 다윗 (삼하 6:12-19)

시편 84편에서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성전을 사모하고 예배를 갈망하는 자세가 필요함을 배웠습니다. 이사야 6장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본 이사야가 자신의 참 모습을 보며,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는 예배자에서 사명자로 바뀌었습니다. 회개 없는 예배는 진정한 예배가 아니라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창 22장에서 아브라함의 모습을 통하여 배우는 교훈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자기를 포기해야 하고, 결단과 순종의 자세를 가지고 예배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예배에 여호와 이레의 응답이 주어집니다. 

오늘은 왕 중의 왕이라 불리는 다윗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를 통하여 또 다른 예배자의 자세를 배우려고 합니다. 

처음 법궤를 옮기려고 할 때 실패합니다.

왕이나 통치자가 통치 기반을 든든히 하기 위해 수도를 옮기거나 왕궁을 짓는 것과 같은 큰 역사를 일으킵니다. 대원군이 귀족들의 세도에서 벗어나 자기의 세력을 구축하려 했을 때 경복궁 재건을 추진했습니다. 가깝게는 노무현 대통령이 기득권 세력을 배제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중심으로 정치판을 짜기 위해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행정 수도를 충청권으로 옮기려 하였습니다. 블레셋 정벌을 무사히 마친 다윗도 신앙적으로 나라를 새롭게 할 목적을 가지고 기럇여아림으로 사람들을 보내 하나님의 궤를 다윗 성으로 옮겨오려 합니다. 

지금까지 여호와의 궤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블레셋과의 전쟁에 이기기 위하여 법궤를 가지고 전쟁터에 나갔다가 전쟁에도 지고 법궤를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법궤가 가는 곳마다 큰 재앙이 임하자 블레셋 사람들은 하는 수 없이 법궤를 되돌려 보냈습니다. 그때부터 법궤는 아비나답의 집에 약 20년 동안이나 있었습니다. 

사무엘 기자는 하나님의 궤를 가리켜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름 하는 것"이라 표현합니다. 이는 그 궤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지극히 거룩한 것임을 뜻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법궤를 이스라엘의 중심부인 예루살렘으로 옮겨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다윗에게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라고 말씀 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전에 대한 열심을 가지고 옮기려고 했습니다. 
 
다윗은 그 궤를 모셔 오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합니다. 법궤를 옮기는 거국적인 행사를 위하여 삼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백성들 중에서 친히 뽑았습니다. 물론 궤를 옮기는데 그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시며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것을 백성들에게 알려주기 원했습니다. 그는 법궤를 운반할 새 수레를 준비합니다. 그와 더불어 여러 가지 아름다운 악기를 준비하여 지금으로 따진다면 오케스트라를 구성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게 합니다. 그리고 아비나답의 집에서 오랫동안 그 궤를 지켜온 웃사와 아효로 하여금 그 수레 앞에서 몰게 합니다. 실로 그 행렬은 아름답고도 웅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하나님의 진노였습니다.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소들이 뛰는 바람에 궤가 떨어지려고 하자 웃사는 하나님의 궤를 손으로 붙잡았습니다.  누구라도 그런 상황에 있더라면 법궤를 붙잡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웃사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법궤를 옮기는 것에 반대하신 것이 아니라 법궤를 운반하는 방법에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반응은 다윗을 향한 경고였습니다. 성경은 반드시 거룩하게 구별된 고핫 족속 제사장들이 채에 꿰어서 어깨에 메고 여호와의 궤를 옮길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죄 많은 인간이 결단코 범해서는 안 되며,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함을 알리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오랫동안 참된 성전 예배가 사라진 시대를 살아왔기 때문에 여호와의 궤에 대한 규정을 미처 알지 못했거나 아니면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수레에 얹고 두 암소로 끌게 하였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에 자기도 그렇게 하려 했는지 모릅니다. 어쨌든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수레에 옮길 때 하나님이 내버려두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율법을 모르기에 어쩔 수 없어서 용납하신 것이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용납될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다윗 혼자 있을 때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삼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어났습니다. 왕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일어났기에 다윗의 입지를 흔들리게 할 만큼 심각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을 잘못을 그냥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다윗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아도 아무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안심하지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은 별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 인간 편에서의 헌신과 노력만으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석달'은 다윗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웃사가 죽었을 때 다윗이 분을 내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처사가 너무 심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일을 한다하더라도 그 마음 깊은 곳에 욕심을 부리거나 자기를 과시하려는 생각이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런 생각을 품고 있을 때 뜻대로 되지 않으면 다윗처럼 분을 냅니다. 

다윗은 웃사의 죽음을 보고 두려움에 떨며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며 법궤 옮겨오기를 중단하고 오벳에돔의 집에 두게 합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하나님께 물어보겠다는 자세가 아닙니다. 아마 다윗이 알았던 하나님은 정성을 다하여 열심히 섬기면 항상 복을 주시는 분이었을지 모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지닌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은 정성을 다하면 무조건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시며, 소멸하는 불이시고, 죄인이 감히 가까이 갈 수 없는 엄위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바르게 접근하지 않는다면 다가서는 사람에게 화가 있을 것입니다. 석 달이라는 기간은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올바른 방법에 대하여 숙고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궤는 하나님의 복이 임하는 통로이지만 그것을 운반하는 방법이 율법에 정한 바에 따르지 않으면 화를 당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레스웃사에서 징계하신 것이 무서운 심판이 아니고 사랑의 채찍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무서운 하나님이시라면 법궤가 있는 오벧에돔의 집 사람들도 다 죽어야하는데 도리어 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오벧에돔의 소식을 들으면서 다시 한 번 법궤를 다윗 성으로 모셔올 생각을 갖게 됩니다.

법궤 옮기는 것을 재차 시도합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받을만한 자에게는 은혜와 복으로 임하시지만,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는 재앙으로 임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지키는데 군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제사장이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제사장의 사명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정직하고 바른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임할 재앙을 복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말씀대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감싸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인간의 열심으로만 나아가면 은혜로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다윗이 용기를 내어 법궤를 운반할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했습니다. 이번에는 제사장들이 수레를 쓰지 않고 하나님의 궤를 어깨에 메도록 하였습니다. 다윗이 취한 행동을 보면 그가 비로소 하나님의 율법이 명하는 바와 그 의미를 깨닫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제사장들이 여섯 걸음을 옮길 때마다 하나님께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데 서두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서 하겠다는 뜻입니다. 온 백성은 하나님을 찬송하는데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습니다. 성령의 큰 감동이 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 감격으로 지난번에 받았던 마음의 상처를 씻고도 남는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다윗은 정성을 다하여 마련한 여호와의 장막 안에 그 궤를 넣어 두고 여호와를 향하여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이는 다윗 자신을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표현이었고, 동시에 여호와께서 다윗 자신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온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손을 들어 그 백성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였고, 모든 백성들에게 떡과 고기와 건포도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법궤를 옮긴 이 날은 영육 간으로 하나님의 복이 넘치는 잔칫날이었습니다. 백성들은 이것을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사단이 시험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강하게 역사할 때 사탄은 시기해서 우리를 공격합니다. 그것도 모르는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사람을 통하여 공격해 옵니다. 예배를 잘 드리고 집에 가는 찻속에서 부부가 말다툼하다가 받은 은혜를 쏟는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습니다. 다윗이 기쁨으로 돌아왔으나 미갈은 다윗을 향한 조소를 머금고 그에게 나타납니다. 

미갈은 여호와의 궤가 오는 것을 보고도 맞으러 나가지도 않고 창으로 구경했습니다. 멀리서 다윗을 바라보니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였는지 알지 못하고 그의 행동만 보았습니다. 다윗이 베옷을 입었기 때문에 춤을 출 때마다 그의 속살이 드러났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궤 앞에서 춤을 추며 즐거워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행한 것이었고 이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미갈은 다윗을 '방탕한 자'같다고 합니다. '방탕한 자'라고 부르는 것은 이스라엘의 욕입니다. 미갈이 다윗의 행동을 업신여긴 것은 다윗이 베 에봇을 입고 지나치게 춤을 춤으로써 왕의 체통을 잃어버리고 왕비인 자신의 체통을 손상시켰다는 것과, 이제는 자신의 아비 사울 왕가가 완전히 몰락했다는 데에 대한 반발심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동기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닙니다. 미갈의 이러한 반응의 원인을 바울이 말한 바,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라는 말씀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 역시 그의 가족들에게서 "귀신 들린 자"로 여김을 받으셨습니다(막 3:21).

다윗은 이미 받은 은혜를 미갈의 말로 인하여 땅에 쏟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택하신 은혜를 굳게 붙듭니다. 다윗은 자신의 행동이 오직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행해진 것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하나님께서 미갈의 아버지 사울과 그 집안을 버리시고 다윗 자신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더욱 천하게 낮아져야 하지만 자신의 그 같은 낮아짐에 대하여 업신여겼던 미갈은 다윗을 더욱 높일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미갈이 다윗을 다시는 업신여기지 못할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 결과 미갈은 죽는 날까지 자식 없이 지내는 수치스러운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는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심판이었습니다. 언제나 우리를 지켜보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행동 하나 하나에 대해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기보다 하나님을 먼저 의식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다윗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로 거듭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었을까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예배자가 될 수 있습니까? 

1)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제가 오바마 대통령에 대하여 알기 위하여 인터넷을 찾아보았습니다. 링컨 대통령에 의해 노예제도가 없어졌지만 여전히 인종 차별이 존재하던 시절에 케냐 유학생인 버락 후세인 오바마와 백인인 앤은 인종을 뛰어넘어 하와이에서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1961년 8월 4일, 오바마가 태어납니다. 오바마는 어릴 때부터 인종 차별에 눈을 뜨게 됩니다. 흑인 아버지가 갑자기 케냐로 돌아가자 엄마는 인도네시아 사람과 재혼을 합니다. 

오바마는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많은 방황을 하게 됩니다. 하버드 대학 로스쿨 편집장까지 지냈던 그가 시카고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을 때, 많은 사람들은 뉴욕에서 변호사를 하면 큰돈과 명예를 얻을 수 있는데 굳이 가난한 흑인들이 득실거리는 시카고로 가느냐고 하며 오바마를 말렸습니다. 오바마의 꿈은 처음부터 대통령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인종 차별이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자신의 현재 위치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인권변호사로 활동을 하며 그들을 도우려고 했습니다. 동서로 갈라져 싸우고, 흑인과 백인이 차별하고, 보수와 진보가 다투는 미국에서 오바마는 당당히 44번째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이 정도면 오바마에 대하여 제법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백악관을 방문하여 오바마를 잘 알고 있으니 만나게 해달라면 허락해주겠습니까? 당연히 거절을 당할 것입니다. 오바마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을 진정으로 알고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알아간다"는 말은 단순히 정보를 얻는다는 뜻이 아니라 관계를 맺는 것, 즉 인격적으로 사귄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더욱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가지려면 자주 만나야 합니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마음을 나누면서 서로 알아가야 관계가 깊어집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사귀려면 날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께 나아가 그분과 함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참된 예배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만큼 예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주 드리는 예배에서 감격과 열정이 식는 이유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마땅히 받으셔야 할 참된 반응이 일어나지 않고 예배가 의무가 되고 짐이 됩니다. 예배자에게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은 평생 동안 추구해야 할 영역이며, 예배자가 중심에 새겨야 할 태도입니다. 

주님을 더욱 알기 원한다는 고백은 모든 예배자가 평생 가져야 할 거룩한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3,6)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귀한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나를 깊이 알면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습니까?

-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다윗이 실패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열심은 있었으나 지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canon이라고 합니다. canon은 길이를 재는 자를 뜻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삶의 기준입니다. 

딤후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그래서 다윗은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 보았습니다. 교정을 했습니다. 해마다 성경을 일독하는 것은 예배자에게 기본이자 필수입니다. 또한 소가 되새김질 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에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게 됩니다. 이번 QT세미나를 통하여 말씀 묵상을 하는 법을 다시 한번 정립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데 얼마나 시간을 투자하고 있습니까? 예전의 성경 지식에만 의존하여 어두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 기도해야 합니다.

다윗이 쓴 시편을 보면 그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얼마나 깊은 교제를 나누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기도하며 하나님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기도하며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날마다 하나님과 대화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가운데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선 자기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베푸신 은혜에 감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기를 원했습니다.


2)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루이 기글리오는 예배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예배란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것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다." 참된 가치에 대한 반응을 예배라고 할 때 우리는 각자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가장 손쉽게 알 수 있는 방법은 시간과 돈, 열정을 어디에 쏟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마음이 향하는 곳, 시간과 열정을 즐겁게 쏟아 부을 수 있는 것, 바로 그것이 내 삶의 가치입니다. 

무엇인가 사랑하고 가치 있게 여기는 마음은 곧 그 대상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예배의 기초는 하나님을 내 삶의 최고 가치로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보다 크게 자리 잡은 것이 있다면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두 마음을 품고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에 보면 밭에 감춰진 보화 이야기가 나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이 비유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보화를 발견한 사람의 반응입니다.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보화를 숨겨두고 돌아가서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샀습니다. 그가 밭에서 발견한 보화는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버릴 만큼 가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대상에게 전부 쏟는 것은 그 대상을 우리 인생에서 보화로 발견했다는 뜻이며 그 진리를 증거하는 행위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배는 보화를 발견한 사람들의 자발적인 희생과 헌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그분은 온 우주를 지으신 분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신 분입니다. 우리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 우리 기도에 응답하시며 우리 삶 가운데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열정적으로 예배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지팡이와 막대기로 지켜주시고 건져주신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원수의 목전에서도 상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인하여 내 잔이 넘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다윗은 그런 은혜를 체험하였기에 열정적으로 예배할 수 있었습니다. 오벧에돔의 집에서부터 다윗 성까지 수 킬로미터의 거리를 여섯 걸음마다 황소를 잡으며 법궤를 어깨에 메고 온 후, 하나님의 장막에서 드린 다윗의 예배는 땀과 열정이 담긴 아름다운 예배였습니다. 이런 열정적인 예배를 드리고 싶지 않습니까? 
  

3) 감동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의 궤를 옮겨오는 과정에서 죄인 된 인간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지식을 새롭게 알게 된 다윗은, 그 거룩하시고 존귀하신 여호와와 그분의 임재를 가까이 누리게 된 사실로 인한 즐거움을 이기지 못하여 어쩔 줄 몰랐습니다.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해 기뻐하는 다윗의 어린아이 같은 신앙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교제 회복을 맛보는 거듭난 성도들의 기쁨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성도의 예배가 축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승리하신 주님이 오늘 우리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존 번연은 천로역정에서 거듭난 신자들의 특징을 "하늘의 신령한 것들에 대한 사모함"이라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어린아이같이 "하늘에 속한 신령한 젖을 사모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벧전 2:1-2). 

신령한 것을 갈망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심령에 진한 감동을 부어 주십니다. 예배를 드리며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우리의 감동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손을 들 수 있습니다. 뛰고 춤을 출 수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고 목소리를 높이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무릎을 꿇거나 엎드려 경배할 수 있습니다. 예배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은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면서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이지 결코 누구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남들이 하니까 따라서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삶 속에서 진정으로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나의 힘"이 되어야 합니다. 

음식을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물론 음식이 맛있어야 하고 먹는 곳의 분위기도 좋아야 하지만 배고플 때 먹는 것이 가장 맛이 있습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를 가장 은혜롭게 드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영감 있는 설교, 아름다운 찬양, 훌륭한 음향장비, 좋은 교회당 시설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가득하여 자발적으로 참여할 때 예배가 가장 은혜롭습니다. 

그러려면 예배에 참석하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평소에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날마다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그분을 알아가는 수준이 높아갈 때 예배 뿐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 더욱 풍성해집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감격으로 주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영원히 멸망해야 할 죄인인 우리를 위해 하나님은 기꺼이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향한 최고의 희생과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가치 있게 여기고 사랑하는 지를 십자가를 통해 증거 하셨습니다. 

예배는 우리 인생에서 발견한 최고 보물 되신 하나님을 우리 삶의 최고 가치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의 주인이시며, 우리의 사랑을 받으실 유일한 분임을 인정하며 그분께 우리 삶 전부를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예배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특정한 시간 특정한 장소에서 드리는 예배로 국한되지 않고 우리 삶 전부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과 같은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이 자리에 함께 한 저와 여러분이 바로 주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되어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체험하시고 참된 안식으로 이끄시는 복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