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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을 지키려는 씨름 (창 16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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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지키려는 씨름 (창 16 :1-16)

백화점 같은 곳에 가면 큰 약도를 걸어놓고 현재 나의 위치를 표시해 놨습니다. 거기에서 나의 가고자 하는 목적지를 찾아야 되는데 거기까지 가는 길은 내가 정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섭리에는 세 가지 W가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 W는 Word-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두 번째 W는 Will-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말씀과 대비했을 때 더 분명하고 구체적이고 내게 게시하신 하나님의 뜻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고 세 번째 W가 기다리고 있는데 그게 바로 Way-하나님의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이건 좀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때 ․ 하나님의 장소 ․ 하나님이 선택하신 길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구체적인 하나님의 방법을 찾아야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세 번째 W에서 넘어집니다. 여기에서 실족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다음에 그들을 광야길로 인도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목적지는 불변합니다. 애굽, 가나안땅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거기가 목적지에요. 

그러나 목적지에 가기 위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통과하게 하신 길은 광야의 험한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지름길로 가면 일주일이면 갈 수 있는 곳을 사십년 걸려서 갔습니다. 사십년. 이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부터 알았느냐? 아닙니다.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목적지만을 바라봤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많이 걸리고 힘드니까 하나님을 의심하고 모세를 의심하고 그리고 반란을 일으킬 뻔 했던 것입니다. 

다윗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에요. 다윗의 인생에서 제일 멋있는 순간이 언제입니까. 골리앗과 싸워 이겼을 때, 그리고 그보다 더 먼저 이새의 여덟 아들 중에서 형 일곱을 제치고 하나님이 막내아들인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서 장차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게 하신 사건입니다. 이건 설교자들에게 인기 있는 설교 구절입니다. 

그런데 시련의 때가 그 후에 찾아온 것입니다. 백성의 마음이 다윗을 향했다는 사실을 사울 왕이 알게 되면서 사울 왕이 다윗을 견제하고 다윗을 시기하고 다윗을 두려워하고 다윗을 제거하기 위하여 그를 쫓아다니기 시작했는데 그래서 다윗은 십년동안 도망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이기기 위하여 물맷돌 하나로 족했지만 물맷돌 열 개를 쓰더라도 이 시련의 시절을 단축할 수 없었습니다. 다윗의 모든 기름부음을 가지고도 이 시련의 시절을 단축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저 묵묵히 인내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장차 임금으로 정하셨다는 증거로 그에게 기름을 부으셨는데 그 기름부음과 약속이 어떤 대가를 요구하는지 다윗은 알지 못했습니다. 만일 알았다면 사양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을 보면 그 전 장에 나오는 아브라함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전 장에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하나님이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겨우 한 장을 넘어온 것뿐인데 완전히 다른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아무리 아내의 말을 존중하고 공처가라 하더라도 이런 말은 함부로 들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어떤 의논도 없고 기도도 없고 하나님께 아뢰지도 않고 아내의 말 한마디에 덥석 하갈을 첩으로 맞아서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얻는데 어찌된 영문입니까? 아브라함이 타락한 것입니까? 믿음을 타협한 것입니까? 믿음을 잃어버린 것입니까? 어떻게 된 영문입니까? 그러나 그렇게 쉽게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 아브라함의 고민은 자신의 믿음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서 해결책을 모색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내가 너에게 하늘의 별처럼 많은 자식을 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그 약속을 믿는 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에요. 반대로 현실의 장벽은 자식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을 버릴 수 없지만 현실을 외면할 수도 없습니다. 현실을 외면한다면 바보입니다. 현실은 엄연히 사라가 시간이 지나도 아기를 낳지 못한다는 사실이에요. 여기에서 아브라함의 고민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고민뿐만이 아니고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모든 신앙인의 공통적인 고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하나님이 옳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일 경우가 많아요. 하나님이 우리를 고쳐주실 줄 믿지만 우리의 몸은 병들 때가 많고 하나님이 내게 복 주실 줄 믿지만 어려움을 겪을 때가 많아요. 평화의 하나님인 줄 믿지만 내 주변에 불화와 다툼이 많을 때가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하실 줄 믿지만 나에게 시험과 유혹이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생각하는 신앙인이라면 믿음을 외면할 수 없지만 현실을 외면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특별히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하나님이 분명히 그에게 만국의 아버지라는 이름까지 지어주시면서 하늘의 별처럼 많은 자손을 주시리라고 말씀하셨는데 기다리고 기다려도 도무지 아내가 자식을 낳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믿음도 지키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다보니까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방법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아마 우리가 그의 입장에 있었더라도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건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신앙을 가져본 사람만이 겪을 수 있는 고민이에요. 아브라함의 고민. 내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것인가? 내가 착각했던 것인가? 흥분했던 것인가? 아니면 내가 뭔가 잘못한 것인가? 가전제품이 우리의 뜻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이것저것 눌러보지요. 그렇게 해도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기 때문에 이것저것 눌러보는 것처럼 아브라함도 기다리고 기다려도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이것저것을 눌러보는 마음으로 이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라의 머리에서 나온 타결책이 이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그러나 이 전제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구이언 하시는 분이 아니에요. 한편으로는 후손을 주겠다고 말씀하시고 한편으로는 생산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일구이언하는 것이고 이중적으로 플레이를 하신다는 얘기인데 사라가 아직 하나님의 약속을 경험하지 못한 것이지, 하나님이 그의 생산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전제 자체가 잘못됐어요. 

그런데 그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물론 이건 번역하는 과정에서 반말로 기록된 것이지요. 만일 진짜로 사라가 ‘원컨대 이로 말미암아 자식을 얻을까 하노라’ 이랬으면 아마 아브라함이 건방지다면서 거부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믿음을 잃지 않는 범위에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인데 이건 착한 신앙인이라면 누구든지 겪는 유혹입니다. 믿음을 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을 버릴 수 없어요. 

만일 이들이 현실의 장벽에 굴복한다면 믿음을 버려야 됩니다. 하나님은 공언을 하셨다. 응답은 없다.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 우리는 실수했다. 현실의 장벽에 굴복한다면 믿음을 버려야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부인할 수도 없습니다. 아기가 안 생기니까. 그래서 이들이 선택한 것은 믿음을 버리지도 않고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제3의 길이었습니다. 그게 바로 하갈을 첩으로 얻어서 자식을 얻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아브라함의 큰 실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아까 세 가지 W를 말씀드렸는데 하나님의 뜻은 알았지만 방법을 몰랐어요. 잘못된 방법을 선택했어요. 하나님의 방법은 사라를 통하여 자식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기다리고 기다려도 응답이 오지 않으니까 하나님을 도우려고 한 것입니다. 어패가 있는 말이지만 하나님이 힘드신 모양이다, 하나님을 도와드리자,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아니면 자기의 믿음을 도우려고 한 것입니다. 이러다가 우리의 믿음을 잃어버리겠다, 우리의 믿음을 돕자. 그것도 실수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도울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내가 믿음을 가진 게 아니라면 내가 믿음을 도울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그 믿음을 지키시고 키워주실 것입니다. 마치 무엇과 같으냐면 라면을 끓이려고 냄비에 물과 라면을 넣고 끓이는데 째려보면 더 빨리 끓을까봐 라면을 째려보는 것입니다. 지켜보든 앉아있든 5분은 똑같은 5분인데 지켜보면 더 빨리 끓을까봐 끓어라, 끓어라…. 그런다고 더 빨리 끓는 게 아닙니다. 아니면 나비가 고치에서 나올 때 몸부림을 치지요. 그 고치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걸 사람이 지켜보다가 안쓰러우니까 그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면도칼로 그 고치를 찢어주면 나비는 쉽게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날지 못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나비가 날 수 있는 힘은 고치를 벗어나오려고 몸부림을 치는 동안에 얻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사람이 더 쉽게 나오게 하기 위해서 그 고치를 찢어주면 나오기는 쉽게 나오는데 날 수 있는 힘을 얻을 기회를 놓쳐버린다는 얘기에요. 우리의 신앙도 이와 같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이 날 수 있는 인간의 연약함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만한 큰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이 몸부림을 쳐야 될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도 단축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안쓰럽더라도 아브라함이 이 과정을 잘 감내해야 장차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는 것인데 만일 아브라함 자신이 이게 나는 싫다, 불편하다, 고통스럽다, 참지 못하겠다, 하게 돼서 다른 방법을 모색하게 되면 그건 믿음의 테스트에서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을 얻었지만 아브라함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번 일은 무효에요. 원점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돌아갈 수라도 있다면 다행이에요. 이제는 문제가 더 복잡해졌습니다. 이스마엘이 태어났어요. 가정의 불화 요소가 생겼어요. 원점으로라도 돌아갈 수 있으면 다행이에요.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것이지요. 실수를 했더라도 원점으로라도 돌아가서 다시 하나님을 신뢰할 수만 있다면 그게 어딥니까. 부모가 자식이 자신의 설 자리를 찾기 위하여 몸부림을 치는 것을 보면서 안쓰럽지요. 

그러나 안쓰럽다고 해서 자식이 해야 될 일을 부모가 대신 해주면 그 아이는 세상에서 자기 힘으로 살 수 있는 능력을 얻을 기회를 놓쳐 버립니다. 몸부림치도록 내버려 두어야 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뭔가를 얻고 믿음을 얻든 투지를 얻든 지혜를 얻든 경험을 얻을 수 있는데 안쓰럽다고 부모가 대신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무엇을 해주겠습니까. 시험을 대신 쳐 줍니까, 대신 선을 봐 줍니까. 대신 면접을 해 줍니까. 부모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기도하면서 또 축복하면서 격려하면서 기다려주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뭘 잘못한 게 아니었어요.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걸 못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지요. 

냄비 근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쉽게 뜨거워졌다가 쉽게 식는 것을 냄비 근성이라고 합니다. 우리 민족에게는 냄비 근성이 있어요. 그 이유는 한국민족이 스마트하기 때문에 그래요. 남들보다 영리하기 때문에 무엇을 느껴도 빨리 느끼고 감동도 남들보다 빨리 받습니다. 믿음에도 적용됩니다. 영적인 감흥을 받을 때 남들보다 빨리 느낍니다. 그게 우리의 특징이에요. 근데 거기의 단점은 금방 싫증을 낸다는 것입니다.

Easy come, easy go. 그래서 한 가지 일에 오래 붙어있지를 못해요. 제 친구 중에 그런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믿음이 좋은데 어디 부흥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거기를 꼭 가봐야 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한번은 저보고 토론토에 부흥이 일어났다면서 토론토를 찾아가더니 그 다음에 만나니까 이번에는 플로리다에서 부흥이 일어났다고 거기를 찾아가더라구요. 

제가 그 친구의 말을 들으면서 솔깃한 면도 없지 않았지만 저의 깊은 지혜로 하나님은 그럴 분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유행을 일으켰다가 또 저기에서 유행을 일으킬 그런 분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역사하실 것 같지 않아요. 하나님이 냄비와 같은 분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은 쉽게 싫증을 내는 분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유행을 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때에 당신의 방법으로 당신의 능력에 따라서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사람 눈치 보지 않습니다. 사람이 서두른다고 해서 하나님이 서두르는 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쉽게 요동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기로 작정했다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이룰 줄 믿고 기다릴 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말은 하나님에게 기회를 드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하실 수 있도록 기회를 드려야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당신의 약속을 지키시도록 조금만 더 기회를 드리면 됐어요. 아기가 안 생긴다고 단정 짓지 말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하실 줄 믿고 좀 더 기회를 드리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방해되는 사람은 아브라함 자신이에요.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데 있어서 가장 방해되는 사람은 아브라함 자신이에요. 아브라함이 비켜야 돼요. 상감마마가 납실 때 뭐라고 말합니까. 비켜라. 상감마마 납신다. 비켜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내가 비켜야 됩니다. 

Get out of the way, 내가 방해되기 때문에 내가 비켜야 됩니다. 나의 생각, 나의 똑똑함, 나의 영리함, 나의 염려, 나의 편협함. 비켜요. 비키면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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