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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맥추감사절] 기쁨으로 드리라 (신 1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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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으로 드리라 (신 16:10-17)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매년 세 차례에 걸쳐 하나님 앞에서 절기를 기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신명기 16장은 그 절기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유월절인데 이는 이스라엘 민족의 광복절이요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이때는 7일 동안 무교병 곧 고난의 떡을 떼며 애굽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맥추절인데 유월절이 지난 다음 7주 후에 지키는 절기로 칠칠절이라고도 합니다. 첫 열매를 거둔다 하여 초실절이라고도 하는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뿌린 씨의 열매를 거두어들인 것에 감사하며 지키는 절기입니다. 이를 흔히 오순절이라고도 부릅니다. 
셋째는 수장절입니다. 1년 동안 거둔 곡식을 창고에 들이고 난 다음 들판에다 초막을 짓고 그 곳에서 일주일 동안 생활하며 지키는 절기입니다. 이 절기는 광야에서 나그네로 초막생활을 하며 만나를 먹던 날들을 기억하며 지키는 것입니다.

이 절기들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신령한 의미가 있습니다. 유월절이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구원받는 것을 기념하는 절기라면 신약적인 의미로는 우리들이 마귀의 종으로 살아가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고 해방을 얻어 새 생명으로 거듭나는 부활절과 같은 것입니다. 또 맥추절이 첫 열매를 거둔 것이라면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여 신령한 첫 열매를 거둔 마가의 다락방의 교회 탄생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수장절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믿는 자를 다 거두어들일 심판의 날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절기를 지키면서 절기 예물을 드리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좀 더 신령한 은혜에 대한 축복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절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순절은 애굽에서 나온지 50일째 되는 날로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날이기도 합니다. 그날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심으로 그 백성들에게 광야 교회를 허락하신 것 같이 오순절에 성령을 주심으로 예수 안에서 교회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첫 열매를 드리는 오순절 즉 맥추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속죄를 받고 구원을 받아 성령으로 중생한 영적 열매를 주의 창고인 교회에 들이는 첫 추수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맥추절에 드려야 할 감사는 말할 수 없는 신령한 은사로 인하여 주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절기를 통하여 감사의 위대한 정신을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함께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아담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못하다 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 때부터 사람과 함께 교통하며 교제할 수 있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아울러 사람과 사람끼리 서로 도우며 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난 다음 하나님과 사람 사이가 멀어졌습니다. 동산에 거니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수풀 사이로 숨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피하여 숨는 존재로 만들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의 입을 빌어 로마서 1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사실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을 통해서 분명하게 보여지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사람들이 압니다. 흔히 과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아주 높은 압력으로 압축되어 있던 작은 점과 같은 것이 폭발하면서 우주가 만들어졌고 그 안에 한 부분으로서의 태양계가 만들어졌는데 우연히 이 지구가 생명체가 살 수 있는 좋은 환경이 되었고 그러다가 어떤 때에 우연히 생명체가 생겼고 그 생명체가 진화를 거듭해서 오늘날 모든 동식물과 사람까지 이 땅에 있게 되었노라고 진화론자들은 억지로 짜맞춰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처음 우주 폭발의 원인이 되는 그 초밀도의 물질은 어디서 어떻게 생겼느냐 하는데 대해서는 그들은 설명하지 못합니다. 아니 설명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건 당연히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우연히 어떤 계기에 생명체도 생겼고 그 생명체가 좋은 쪽으로 계속 진화되다 보니 오늘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그때마다 우연입니까? 어쩌다가 어느 계기로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데 아니 무슨 일이 장마다 꼴뚜기라고 언제나 어쩌다가 그렇게 됩니까? 
하지만 진짜 가장 뛰어난 세계적인 천재 과학자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를 믿었으며 진화론을 주장했던 다윈조차도 마지막에는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하는 점에 대해서는 결코 부인할 길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만 해도 지나치게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게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가장 좋은 조건의 거리에서 돌고 있다는 것이 어찌 우연히 되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거기다가 왜 돌되 원형이 아닌 타원형인지 그러면서도 더 멀어지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무엇 때문인지 그들은 설명하지 못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건물 하나를 지어도 먼저 설계자가 그 건물을 설계하지 않습니까? 

옷 하나를 만들어도 치수를 다 재고 그에 따라 도안을 만들고 그 도안대로 임시로 옷을 만든 후 다시 가봉을 해서 최종 마무리를 해서 옷이 내 몸에 맞게 완성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냥 옷감을 갖고 마구 가위질을 해대고 아무렇게나 바느질을 하다 보니 옷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사실은 그래서 누구도 핑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셨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며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더욱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합니다. 

하지만 그런 인간이 너무도 불쌍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시 사람들과의 교제를 회복하기 위해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임마누엘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즉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대로 버려두면 사형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심판을 받고 지옥불 속에 던져지도록 더 이상 방치할 수가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히 임마누엘로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신 하나님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이 곧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이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은 그 누구도 자기에게 주어진 조건으로 인해서 불이익을 당하는 자가 아무도 없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나는 이래서 안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핑계할 수 없습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두가 다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오직 조건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요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구원 즉 영생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함께 하는 생명들이기에 다른 사람과 우리는 또한 더불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믿고 마음에 영접해드린 예수님 그래서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우리는 다른 말로 성령님이라고 부릅니다. 그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시듯 우리 모든 믿음의 자녀들 안에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당연히 함께 하여야 하는 것이요 함께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며 함께 즐거워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하지만 악한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서로 대립하고 서로 갈라서게 만드는데 아주 이력이 나 있습니다. 처음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난 다음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핑계를 대지 않습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깁니다. 내 탓이 아닌 네 탓이다 어디까지나 나보다는 너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왜 똑바로 알려주지 않았느냐 왜 그때 나를 혼자 놔두고 어디 가 있었던 것이냐 왜 내 마음에 우원하는 대로 따라주지를 않느냐 등등 자기 섭섭한 것만 이야기 합니다. 결국은 모두 당신 탓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결코 함께 즐거워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가장 낮고 천한 자리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죄를 대신해서 직접 자신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누구 책임이라고 떠넘길 이유가 없습니다. 그저 감사하며 함께 찬양하면 됩니다. 이제 주님이 우리들에게 베풀어주신 그 사랑으로 내 안에 계신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그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이제는 남녀노소 빈부귀천 없이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면 됩니다. 그런데도 악한 마귀는 우리를 형편과 처지를 따라 나누려고 합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우리는 누구 할 것 없이 함께 즐거워해야 마땅합니다. 

왜 그래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하나되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도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노비나 성중에 있는 레위인 그리고 나그네나 고아와 과부와 같은 사람들은 옆에서 손을 잡아주지 않으면 가장 서러울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쪽에서 손을 내밀어주지 않는다면 도움의 손길을 펼치지 않는다면 한 자리에 있는 것조차도 힘들어하는 사람들입니다. 

당장 살아갈 길조차도 스스로는 마련할 길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손을 내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즐겁게 살아갈 수 있도록 삶의 방편을 만들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지 몇 푼의 돈을 주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추수할 때는 이삭을 남겨서 그들로 이삭을 줍고 한 자락 남겨논 이삭들을 베어다 그것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고 지나가던 나그네가 잠시 머물며 그것을 훑어 먹거나 과일을 그 자리에서 따먹어도 그것을 결코 죄로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주위를 살펴서 우리들이 함께 도와야 하고 함께 즐거움을 나누어야 할 사람은 누군가 살펴보도록 하십시오. 내가 일부러 외면했던 사람들이 있지는 않은가?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서 그 사람과는 함께 할 수 없다고 했던 사람이 과연 누군가? 깊이 생각해서 이제는 주 안에서 다시 화평을 누리고 함께 즐거워할 수 있는 우리 모든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계속해서 우리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즉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함께 즐거워해야 합니다.
우리가 마땅히 있어야 될 곳을 먼저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먼저 우리네 가정입니다. 가정은 서로 돕는 배필로서의 부부로부터 시작해서 서로 사랑을 공유하는 가족들이 함께 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네 집이 과연 행복이 가득한 집 해피하우스인지 괴로움만 가득한 그런 집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집에서 귀신이 나갔는데 나가서 돌아다니다 보니까 영 마땅치를 않아요. 

그래 전에 있던 집으로 돌아와 보니 집이 잘 청소가 되어 있는데 비어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더 흉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와서 함께 그 집에 머무니 그 집이 아주 형편없게 되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네 집이 어떠해야 하느냐 하면 우선 빈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당연히 주인이 있어야 합니다. 시골에 버려진 집들을 봅니다. 집에 사는 사람이 없게 되면 금방 엉망이 되고 맙니다. 반드시 사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입주(入住)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도 집 나온 가출 청소년이 사는 그런 온상이 아닌 주인이 살거나 주인이 허락한 세입자가 살 때 그 집이 아름답게 유지될 수 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항상 머무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잠시 머물다 가는 별장이 아니라 언제든지 가족들이 함께 머물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상주(常住)가 되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평안히 거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편안한 쉼터요 아름다운 사랑의 교제가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평안하기 위해서는 단지 좋은 환경과 조건만 갖춘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서로를 아껴주고 위해주며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는 마음이 있을 때 그래서 내 입장에 따라서가 아닌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생각해줄 수 있는 마음으로 가득할 때 집은 편안한 곳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평안히 안주(安住)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네 집이 평안한 곳이 아닌 감옥처럼 변해있지는 않습니까? 마치 감옥에 갇힌 죄수와 그들을 다루는 간수장처럼 그런 모습으로 우리네 가정이 움직이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가정은 언제든지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그런 곳이 되어야지 집에 들어가는 것이 마치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인 양 힘들어하는 곳이 되지 않도록 만들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언제나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를 아름답게 섬기십시오. 먼저 우리네 집이 섬기는 곳이 되게 하시고 아울러 또한 베푸는 곳이 되게 하십시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안겨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했습니다. 가족 간에만 베푸는 자가 아니요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은 우리들의 일터입니다. 직장인은 직장이 학생은 학교가 가정주부는 가정이 마땅히 우리가 있어야 할 곳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들에게 주어진 일에 우리의 모든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하는 것이요 우리들에게 주어진 그 모든 일에 우리는 즐겨야 할 줄 압니다. 마땅히 내가 해야 될 일이라면 당연히 즐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복 중의 하나가 일하는 복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이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일할 수 있다는 그것으로 먼저 기뻐하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래서 힘들다고 하시지 마시고 그 모든 일을 먼저 즐기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힘들어도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그것을 먼저 감사하십시오. 아니 그러면 그 일조차도 할 수 없도록 건강이 망가진다면 그때서야 감사하겠습니까? 힘들어도 감당할 수 있다는 그것만으로도 감사하십시오. 내게 볼 수 있는 눈이 있고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십시오. 

움직일 수 있는 손과 발이 있는 것으로도 감사하십시오. 너무 아프다고 하십니까? 그럼 아프니까 아주 없애 버리면 되겠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게 주어진 모든 처지에서 먼저 감사하시고 일이 힘들고 쉽고 따지지 마시고 그것을 내가 할 수 있다는 것 내게 할 수 있도록 기회가 주어졌다는 그것으로도 먼저 감사하십시오. 감사하시고 즐기게 될 때 평안도 건강도 하나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곳보다도 우리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은 하나님 앞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머물든지 예수님과 함께 하기에 그곳이 여호와 앞이 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날은 교회입니다. 그곳이 우리가 함께 있어야 할 곳이요 함께 즐거워할 곳입니다. 세상 그 어디서 즐거워하며 살아도 하나님이 그 이름을 주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즐거워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다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마땅히 주 앞에 있어야 될 때가 언제인지 아십시오. 거룩한 주일에 우리는 마땅히 주님 앞에 있어야 합니다. 

이 기쁨으로 감사하는 아름다운 절기에 또한 우리는 마땅히 주님 앞에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 모든 기쁨과 평안의 원인이 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 앞에 그것도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우리가 함께 즐거워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행복을 위한 모든 것을 더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 찬양하게 되면 하나님 또한 우리를 기뻐하시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우리의 모든 필요를 따라 채우실 것을 믿고 주님 앞에 나아와 함께 즐거워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는 것이요 너희는 주 앞에서 함께 먹고 마시라고 했으니 딸랑 예배만 마치고 돌아가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 앞에서 우리가 함께 먹고 마시며 즐거워할 수 있는 우리 모두요 사랑과 은혜와 기쁨이 넘치는 감사절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며 함께 즐거워해야 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라고 했고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소출과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이니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본적으로 우리들에게 먼저 복을 주시며 내게 주신 그 복에 대해서 감사하라고 하십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귀한 자녀가 될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감사할 일입니다. 

여기에 대한 감사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또한 어찌되었든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내가 첫 열매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네에게 불편하기는 하지만 사지백체가 있음을 감사하십시오. 어찌 되었든 움직일 수 있음도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소경들이 많은데 우리는 하나님을 깨달아 알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리고 오늘까지 살아오게 하셨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지만 있는 것만으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잃어버린 것 없는 것으로 인해서도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흔히 내게 있는 것보다는 없는 것만 찾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행복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주님께로부터 행복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이 주신 마음으로 살면 행복합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감사하고 찬양하십시오. 힘들면 힘든 것으로 인해서 먼저 감사하십시오. 그러면 감사가 더 큰 감사를 물고 들어옵니다. 마치 고구마 줄기 감자 줄기에 줄줄이 고구마 감자가 딸려 나오듯이 감사하는 자에게 그런 역사가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하지만 먼저는 감사함으로 드려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심지 않고서는 거둘 수가 없습니다. 감사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우리네 창고는 가득히 차고 즙틀에는 새 포도즙이 넘치도록 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늘문을 열어서 이 땅에 쌓을 곳이 없도록 채워주시며 들에서도 복을 받고 성읍에서도 복을 받게 만들어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아울러 주님 앞에 먼저 감사함으로 드리는 이유는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 억지로가 아니라 자기의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가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두리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주님 앞에 드린다는 그 자체가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힘들 수도 있습니다. 내가 쓰기에도 부족한데 하는 마음이 들 수도 있고 사실이 그렇기도 합니다. 

하지만 먼저 주님 앞에 드리면 그리고 먼저 흩어 구제하면 하나님께서는 백배로 갚아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따라 먼저 기쁨으로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십시오. 그래서 우리에게 모든 약속으로 함께 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따라 백배 육십 배 삼십 배로 채우시는 귀한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헤아리는 자는 그 헤아림으로 자기도 헤아림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한 가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것은 사람 앞에 대접할 때는 아주 풍성하게 대접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아주 잘 먹었습니다 하는 말을 듣고 싶어합니다. 한데 하나님 앞에는 아주 인색한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자기 쓰기에는 풍성한데 흩어 구제하는 일에는 아주 인색한 사람도 있습니다. 도무지 나누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다 흩어버리십니다. 움켜주면 없어지고 나눠주면 더 풍성해지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풍성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심고 거두는 법칙이라는 말까지 합니다. 하지만 아무데나 심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옥토에 심어야 합니다. 좋은 밭에 심어야 합니다. 

주님께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며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이야 말로 바로 옥토에 심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로부터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고 하나님의 베푸심이 있고 하나님의 채워주심이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순종함으로 드리며 나누는 자에게 물이 포도주가 되는 귀한 역사가 있게 될 것이요 오병이어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귀한 복을 누리는 약속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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