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괴로움의 집, 하나님의 도움 (요 11:1-11)

첨부 1


괴로움의 집, 하나님의 도움 (요 11:1-11) 
 
 
성경에 나오는 인명이나 지명들은 대부분 고유한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지명인 경우 그곳의 역사적인 배경이나 특징을 나타내게 되고 사람의 이름인 경우는 대부분 가문의 전통과 희망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고, 베들레헴은 ‘떡집’,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과 같은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는 예수님과 특별한 관련이 있는 지명과 인명이 나옵니다.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입니다. 베다니는 ‘괴로움의 집’이라는 뜻이고, 나사로는 ‘하나님의 도움’이라는 의미입니다. 나사로와 그의 누이들은 예수님의 총애를 받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사는 곳은 괴로움의 집이라는 마을입니다. 여기 베다니와 나사로의 관계에서 우리는 세상과 교회, 또는 죄 아래 있는 인류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조명할 수 있습니다.

1. 괴로움의 집의 실상

본문 말씀 2절에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고 하였습니다. 나사로의 고장 베다니는 인간세상의 불행한 현실을 담고 있습니다. 

1) 질병입니다.

‘괴로움의 집’ 베다니의 첫 번째 실상은 질병입니다. 1절에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고 하였습니다. 3절에는 “......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고 하였습니다. 6절에도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라고 하였습니다. 질병은 정상적인 생리활동에 이상이 생겨서 신체적 기능이 작동하지 못하는 것을 뜻합니다. 질병은 출생하면서부터 타고나는 선천적인 경우도 있지만, 세상이라는 구조적인 상황 때문에 각종 오염과 사고와 재난으로 인하여 누구에게나 오는 현상입니다. 질병은 신체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것과 영적인 것도 심각하게 작용합니다. 이와 같은 것은 과학적으로나 물리적인 처방만으로 치유되기 어려운 성격의 것입니다.

2) 죽음입니다.

나사로는 병들어 앓다가 마침내 죽었습니다. 본문 말씀 11절에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에는 죽은 것을 잠자는 것으로 표현하였습니다(살전 4:13). 14절에는 “나사로가 죽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39절에는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병을 앓다가 죽게 되고, 죽으면 무덤에다 장사하게 되고, 결국은 썩어서 없어집니다. 요즘은 많은 사람이 죽은 자의 시체를 땅속에 파묻지 않고 불에 태워서 그 유골을 납골당에 안치하기도 합니다. 땅속에서 썩어 없어지든지, 불에 태워 한줌 재로 변하든지 죽음이 가져다주는 인생의 허무함을 실감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 숙명적인 죽음의 공포를 알기 때문에 여기에서 벗어나려고 기를 쓰지만 어느 누구도 비켜가지는 못합니다. 

3) 슬픔(절망)입니다.

죽음은 사람을 슬프게 합니다. 부모나 자녀 또는 부부와 형제 등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은 참으로 슬픈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부모도 없이 두 누이와 함께 살다가 가장격인 나사로가 죽었으니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의 슬픔은 형언할 수 없이 컸을 것입니다. 그들 자매뿐 아니라 이웃 사람들도 모두 울었습니다(33절). 마침내 예수님께서도 눈물을 흘리시며 그들과 함께 울었습니다(35절). 베다니의 불행은 질병과 죽음과 슬픔으로 이어졌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집 베다니의 실상입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범죄한 인간이 사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이런 일은 지구촌 어디에도 다 있는 공통적인 불행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고 하였습니다(21, 32절). 마리아와 마르다처럼 예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사람이라도 세상에서 겪어야 되는 인간의 불행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2. 하나님의 도움(예수 그리스도)

‘베다니’라는 지명과 ‘나사로’라는 인명은 대조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매우 신앙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모두 괴로움의 집 베다니이지만, 거기에 예수님이 연결되면 곧 바로 하나님의 도움인 나사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1) 찾아와 주셨습니다.

질병과 죽음과 슬픔으로 얼룩져 있는 베다니에는 절망의 정적에 싸여 있었습니다. 마리아, 마르다 자매는 말할 것도 없고 이들의 슬픔을 동정하는 이웃 사람들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 볼 뿐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도움의 실체가 되는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그곳의 실상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4절).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이틀을 더 유하시다가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고 하였습니다(7절). 11절에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하였습니다. 괴로움의 집 베다니로 예수님께서 친히 찾아오신 것 자체가 하나님의 도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죄와 죽음과 절망뿐인 이 세상(베다니)에 오신 것을 의미합니다(요 3:16).
 
2)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 사랑의 극치입니다(요일 4:10). 예수님께서 평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와 그의 가족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본문 말씀 3절에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고 하였습니다. 5절에도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라고 하였습니다. 11절에는 “우리 친구 나사로”라고 하였습니다. 33-36절에는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며 우는 모습을 본 유대인들이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라고 했습니다. 43절에 예수님께서 무덤 속을 들여다보며 “나사로야 나오라.”하고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를 마음속에 담고 있다는 뜻입니다(요 10:3). 요한복음 5:28에는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라고 하였습니다.

3) 살려내셨습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찾아오는 ‘베다니’적 현상이지만 이것을 극복하거나 치유할 수는 없습니다(히 9:27). 다만 예수님만이 이 괴로움의 현장을 하나님의 도움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오라비의 죽음 앞에 좌절하던 마르다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하고 원망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라고 하였습니다(요 11:25). 그 말씀대로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무덤속의 나사로는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분부에 따라 무덤 안에서 걸어나왔습니다(요 11:44). 그것은 괴로움의 집 베다니를 근원적으로 치유하신 주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도움의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3. 세상속의 하나님의 나라

성경은 범죄한 인간이 사는 세상의 불완전성과 하나님 나라의 완전성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에덴의 낙원에서 추방당한 인간은 어디에서나 지상 낙원을 추구하였지만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다만 괴로움의 집에서도 하나님의 도움에 대한 소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1) 예수님께서 머무셨던 집

예수님께서는 괴로움의 집이라는 베다니를 자주 찾으셨고 그곳 나사로의 집에서 머무셨습니다. 그 집의 주인 나사로를 ‘친구’라 불렀고 그 가족들을 ‘사랑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3, 11절).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마치실 무렵 마지막 수난의 한 주간을 그곳 베다니에서 유숙하신 것을 보면 그 집과의 밀접한 관계를 알 수 있습니다(마 21:17). 겉으로 보면 나사로의 고장 베다니는 예수님께서 즐겨 찾으실 곳이 못됩니다. 예수께서 그곳으로 가자고 하실 때 제자들은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하고 반대를 하였습니다(8절). 돌로 치려는 자가 진을 치고 있고 안으로는 질병과 죽음과 절망이 있는 곳이지만 그래도 거기에 주님이 머무셨습니다. 그런 곳에도 하나님의 도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하였습니다(롬 5:20).

2) 지상 교회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베다니의 나사로는 세상 속에 있는 주님 교회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 또는 “세상의 빛이니 ......”라고 하시면서 세상에서 행할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강조하셨습니다(마 5:13-16). 맛을 잃은 곳에 소금이 필요하고 흑암이 쌓인 곳에 빛이 요구되는 것처럼 괴롬과 죄가 있고 죽음과 슬픔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사죄와 생명의 복음이 필요합니다. 교회야말로 진정 괴로움의 집에 하나님의 도움입니다. 나사로의 죽음으로 슬픔과 절망에 짓눌려 있는 베다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심으로 부활과 생명의 축복이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의 교회야말로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절실하고 유일한 소망이 됩니다. 인간들이 추구하는 그 어떤 것으로도 해결하지 못하고 채워질 수 없는 최상의 가치를 붙잡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됩니다.

복음 운동의 목적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지상에서 교회 운동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일입니다. 나사로의 질병과 죽음이 슬픔과 절망을 안겨 주었지만 예수님께서 괴로움의 근원을 치유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었습니다. 

본문 말씀 4절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아닌 이웃 사랑과 복지운동이 기독교의 본질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범죄한 인간이 예수님의 보혈로 사죄받고 구원받는 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이 일은 지상의 교회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신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40절).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