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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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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3-19)

 프랑스인 “샤르니”가 나폴레옹 황제에게 밉게 보여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그는 친구들은 물론 가족들에게도 잊혀졌습니다. 
처음에는 자주 면회를 오던 가족들도 점점 멀어졌습니다. 그는 벽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아무도 나를 돌보지 않는다.”라고...

소망을 잃어버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감옥 바닥에 있던 돌 틈에서 푸른 싹 하나가 돋아났습니다. 샤르니는 간수가 매일 주는 물을 조금씩 남겨서 잎사귀에 부어주었습니다. 마침내 꽃봉오리가 생기더니 아름다운 꽃을 피웠습니다. 

그는 먼저 썼던 글을 지우고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이 돌보신다.”라고...

감옥에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는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어 조세핀 왕비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꽃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돌보는 이는 결코 나쁜 사람이 될 수가 없다.” 
왕비는 황제에게 재고를 건의했고, 샤르니는 석방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제자들이 예수님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1.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

비교종교학을 연구하는 한 젊은 유학생이 있었습니다. 
생활비에 쫓기던 그 유학생은 학기 내내 아르바이트 하느라고 학과목을 제대로 수강할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 기말고사 시간이 되었는데 다행스럽게 시험문제가 “예수와 부처의 차이점을 논하라.”는 딱 한 문제였습니다. 

이 유학생은 처음엔 한 문제여서 좋아했지만, 막상 답안을 쓰려 하니 무엇부터 어떻게 써야 할지 아는 것도 없고 생각나는 게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험지를 백지로 내고 나오자니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딱 한 줄 답을 쓰고 나왔습니다. 
“예수와 석가는 헤어스타일에 차이가 있습니다.”
라고 답안지를 작성하여 내고 나왔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4대 성인 중의 한 사람으로 추앙해주는 것이 최고의 예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이스라엘의 북부 지방인 빌립보 가이사랴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더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때에 제자들은 당시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는 견해를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➀ 세상 사람들 중 더러는 세례요한으로 보았습니다. 세례요한은 헤롯왕에게 직언을 하다가 목베임을 당했습니다. 

막6:14절에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왕이 듣고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일어나느니라”고 말했습니다. 

헤롯은 자기가 목 벤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외침과 능력이 세례요한과 비슷했기 때문이었습니다.

➁ 세상 사람들 중 더러는 엘리야로 보았습니다. 엘리야는 북방의 선지자로 이스라엘의 역사 중 가장 악한 왕이었던 아합과 그의 부인 이세벨 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였습니다. 사람들은 엘리야가 다시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행하시는 기적이 엘리야와 비슷했기 때문이었습니다. 

➂ 사람들 중 더러는 예레미야로 보았습니다. 예레미야는 기울어지는 남방의 나라와 민족을 위해 눈물로 호소했던 눈물의 선지자였습니다. 장차 멸망할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는 것이 예레미야와 거의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➃ 사람들 중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로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성경 역사에 나타난 선자들이 엄청 많았습니다. 그들 중 성경을 기록한 선지자들만도 자그마치 16명이나 됩니다. 그들 중 하나라고 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 예수님을 위대한 사상가, 초월적인 도덕가, 거룩한 종교가, 탁월한 예언자로만 보았습니다.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 즉 그리스도로는 보지 못했습니다. 


2.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일반 여론을 전해 들으셨습니다. 제자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5)라고 물으셨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고백했습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혼자만의 고백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신앙고백(信仰告白)입니다. 

➀  나의 주님이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구약에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본명인 “여호와”라는 말을 사용하기를 꺼려했습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이 나오면 “나의 주, 즉 아도나이”라고 불렀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이 하나님을 “나의 주”라고 부른 것처럼 베드로는 예수님을 “선생, 랍비”라 부르지 않고 “나의 주”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른 것은 그 앞에서 자신을 종으로 낮추는 자세를 취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고 말했습니다. 

➁ 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스도란 말은 희랍어로 “기름 붓다.”라는 동사로부터 온 “수유자(受油者)란 뜻입니다. 히브리어의 메시아와 같은 뜻으로 사용됩니다.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히브리 인에게 있어서 ➀국왕 ➁제사장 ➂선지자의 직분을 성별하기위한 표시였습니다(출29:7, 삼상10:1, 16:13, 왕상19:16).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 즉 그리스도라는 대예언자의 출현을 오랫동안 갈망했습니다. 그들이 외국에 정복되어 그 압제를 받게 되자 이 염원은 더욱더 그들에게 불타올라 포로 이후에 이르러서는 국민 전체가 메시야에 대한 대망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메시아 즉 그리스도에 대한 사상은 물질적이고 세속적이었습니다. 메시아가 와서 로마의 권세를 물리치고, 그 군대를 구축하여 예루살렘을 거성(居城)으로 하여 천하를 호령하고, 세계 열방을 다 이스라엘에 공물(貢物)을 바치게 되리라고 상상했습니다.

더디어 그리스도가 오게 되자, 그들은 그토록 오래 기다리던 메시아라고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물질적, 세속적 관념에 반대하여 영적 왕국의 건설을 외치며 전도하자, 그들은 크게 실망하고, 마침내는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를 메시아의 이상을 실현한 자, 즉 그의 한 몸에 영적 왕국의 예언자, 제사장 및 왕의 직분을 지닌 자로 하여 그를 그리스도로서 승인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리하여 복음서의 기자는 “예수”란 이름을 썼습니다. 서신서 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또는 “그리스도 예수” 또는 단순히“그리스도”라고 칭하여 드디어 나사렛 예수의 고유한 명칭으로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7-9절에서 “➀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➁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➂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➃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➄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➅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고 말했습니다.

➂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인류의 역사상 그 어떤 성인이라 하여도 아버지가 있고 어머니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상에 아버지가 없으셨습니다. 나사렛 목수 요셉은 예수님을 길러주신 양부(養父)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의 진짜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3:17)고 말씀하셨습니다. 


끝맺는 말

시몬 베드로가 이런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고 말씀하셨습니다. 

미국의 대부호 “코넬리우스 밴더빌트(Vanderbilt)”가 임종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는 신앙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재물이 신앙이며 존재 이유였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흑인 하녀가 그를 위해 찬송가를 불러주었습니다. 
그 곡은 찬송가 96장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찬송이었습니다. 
밴더빌트는 조용히 찬송가 가사를 음미했습니다. 
찬송가에는 예수님의 속성이 아주 쉽게 표현돼 있었습니다. 

그때에 밴더빌트의 입술이 조금씩 떨려왔습니다. 
그리고 나지막한 음성으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님, 저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재물과 지식, 명예를 포기하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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