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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찌하여 말랐나이까 (마 21: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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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말랐나이까 (마 21:18-22)


한국 초기교회 당시 부흥사였던 김익두(金益斗) 목사가 농촌마을에 전도하러 가셨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는 전혀 없는 마을이었습니다. 마침 모내기를 하던 농부들이 점심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김익두 목사가 예수 믿으라고 전도를 하자 젊은이가 당돌하게 나서며 전도하지 말라고 막습니다. 이유인즉 며칠 전에 벼락이 바위와 성황당 나무에 떨어져 바위가 깨지고 나무가 부러지고 다 타버렸다는 것입니다. 젊은이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바위와 나무를 그렇게 때리고 치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든지, 만약 계시다면 장님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하나님을 전도할 생각이라면 하지 마십시오” 그러자 김익두 목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젊은이, 학교에 다녀 보았는가?” “예, 다녀 보았습니다.” “학교에 가니 선생님 손에 무엇이 들려 있던가?” “막대기가 있었습니다.” “그 막대기가 무엇에 쓰이던가?” “학생들이 졸고 떠들면 조용히 하라고 칠판도 치고, 교탁도 탁탁 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사람아, 칠판이 무슨 죄가 있는가? 교탁이 무슨 죄가 있겠나? 왜 때리겠나? 학생들 졸지 말라고 떠들지 말라고 칠판이나 교탁을 치는 것이 아닌가? 그래도 안 되면 학생의 머리를 때리는 것이라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죄 없는 바위와 나무를 치신 것은 자네 깨달으라고, 자네 깨우치라고 친 것일세. 만약 자네가 계속해서 안 믿으면 다음에는 나무나 바위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네 머리 위에 벼락이 떨어질 것 일세” 이 말에 젊은이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 마을에 교회가 생기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본문에 보니 예수께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십니다. 그런데 죄가 무화과나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열매 없는 종교 지도자들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었는데, 맞기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맞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신하여 또한 종교 지도자들을 대신하여 무화과나무가 맞고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저주받는 모습을 보고 깨달으라는 것이 예수께서 주시려는 교훈이며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주변에 나를 깨우치기 위해서 깨지는 것들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부득불 나를 심판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본문에 보니 제자들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이 나무가 죽게 되었는지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 나무가 죽게 되었는가 질문하였습니다. 본문에 ‘어찌하여’ 라고 번역되고 있는 이유입니다.  

사실 무화과나무가 어떻게 말라 죽게 되었는가도 중요하나 무화과나무가 왜 말라 죽게 되었는지를 깨닫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우리들은 인생을 꽃 피우느라 바빠서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아직 때가 아니라고 핑계하며 살아갑니다. 죽을 때까지 돈만 벌다가 죽습니다. 실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린 이유를 깨달아야 합니다.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말랐습니까?
 
첫째로 열매가 없으므로

영국 브리스톨에서 고아들을 위해 일한 죠지 뮬러(George Muller)는 주님을 향한 헌신을 통해 수많은 고아들을 돌보는 열매를 거둔 사람입니다. 그는 기도하여 고아들이 살 수 있는 집을 얻었으며 고아들을 돌보는 데 필요한 것들을 공급받았습니다. 한 번도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필요한 돈이나 물건을 달라고 요청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계 각처에서 선한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 필요한 것과 봉사할 일꾼들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뮬러는 전 생애를 통해 3천명 이상의 고아들을 양육했으며 7백만 달러 이상을 모금했습니다. 고아들을 돌보는 일 외에도 빈민의 자녀들을 위해 학교를 세웠으며 성경을 포함한 수천 권의 책을 무료로 배포하는 선한 열매를 많이 맺었습니다.

본문 19절입니다.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나무는 목적이 있기에 심은 것입니다. 관상수는 보기 위하여 심고, 과실수는 열매를 얻기 위해 심은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관상수가 아닙니다. 열매를 위하여 심은 것입니다. 그런데 열매가 없습니다. 존재해야 할 가치가 없어진 것입니다. 무용지물이 아니라 유용지물이 되어야 합니다.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의 무화과나무는 잎만 무성했지 열매가 없었습니다. 우리의 모습과 같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열매가 없으면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잎만 무성해서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지가 못됩니다. 

열매는 사람 됨됨이입니다. 인격과 성품입니다. 열매는 신앙상태입니다. 과연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바리새인처럼 형식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신앙이 아닙니까?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기도와 전도, 봉사와 헌신의 열매, 사랑과 용서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열매를 통한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반복되는 신앙생활을 감당하기 위해서 필히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열매를 맺기 위해 더욱 힘써야 합니다. 열매를 맺으라는 마른 무화과나무에서 들리는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믿음이 없으므로

모택동(毛澤東)으로 인해 중국에 문화혁명이 일어났을 당시, 선교사들이 추방명령을 받아 중국을 떠나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떠나려던 외국 선교사가 제자훈련을 받고 중국교회 지도자로 성장한 중국인 목사와 차를 마시며 물었습니다. “앞으로 많은 환난과 핍박이 몰려올 텐데 어떻게 견디겠습니까?” 그랬더니 중국인 목사는 가만히 차를 바라보며 말을 잇더랍니다. “ 교사님, 차가 뜨겁죠?” 하며 티백을 꺼내 들었습니다. “이 티백이 뜨거운 물속에 들어갔다고 해서 그 맛을 잃었나요? 아마도 뜨거운 물속에서 진짜 맛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저는 믿음이 진실이라는 것을 환난 속에서 입증해 보이겠습니다.” 차의 맛이 뜨거운 물속에서 우러나올 수 있는 것처럼 믿음 역시 역경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본문 21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무화과나무가 말라진 이유는 그 중심에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수단이 아니라 원칙입니다. 인생을 수단으로 다루는 것이 세상적 삶이라면 원칙으로 다루는 것은 신앙입니다. 우리는 삶의 원칙을 찾아야 합니다. 

그 원칙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이기에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살아가는 원칙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믿음의 세계에서 살아야 하는 제자들이기에 예수께서 믿음을 가르치셨습니다.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하는 순간 믿음의 본질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잎만 무성한 교회 즉 성도의 수를 자랑하고 건물만 자랑하고 외형만 그럴 듯한 교회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그 중심에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의심하지 않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확신의 믿음을 통해 의심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믿음이 충만하면 의심의 공간이 없어지게 됩니다. 반면 의심이 가득하면 믿음의 자리가 없어집니다. 믿음이 없으면 사탄의 도구가 되고 사탄의 일에 앞장서게 됩니다. 하나님은 확실한 믿음의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의심치 않는 믿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며 매달려야 합니다. 믿음이 있으라는 마른 무화과나무에서 들리는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기도가 없으므로

아쳐 토레이(R. Archer Torrey) 박사가 청년 시절에 신앙의 구속을 받는 것이 싫어 집을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니께서 “내가 너를 위해 항상 기도하마. 만약 방랑의 길에 지쳐 어디로 갈 바를 모를 때 어머니의 하나님을 불러라” 말해 주셨습니다. 도시로 나간 토레이는 마음대로 다니다가 죄악의 수렁에 깊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자살을 하려고 여관에 갔는데 서랍 위에 성경책이 놓여 있더랍니다. 기드온협회에서 제공한 것입니다. 성경을 몇 줄 읽어 내려가는데 어머니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방황할 때 하나님을 찾으라 너를 인도하여 줄 것이다.” 그는 이내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나를 구하여 주옵소서” 회개하며 은혜를 받고 어머니에게 돌아와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기도는 능력입니다. 마귀를 이기는 능력은 믿음의 기도로 가능합니다. 

본문 22절입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다면 즉시 기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연결된 줄이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그 통로를 통해서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 곧 기도입니다. 믿음과 기도는 정비례합니다. 믿으면 기도하게 되고 기도하면 믿음이 좋아집니다. 믿고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면 응답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일하셔야 큰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자기가 했다고 교만하지 아니합니다. 다만 기도할 뿐이며 평생을 기도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기도하면 희망이 생기고 커지고 분명해 집니다. 지금도 기도하라는 마른 무화과나무에서 들리는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아프리카 선교사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에게 한 부인이 다가와 질문합니다. “박사님, 당신은 위대한 학자요, 천재적인 음악가입니다. 당신같이 훌륭하신 분이 어떻게 아프리카 오지에서 봉사하는 삶을 사십니까?” 이 말을 들은 슈바이처가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말했습니다. “나는 말로 사람들을 감동시킬 재주가 없습니다. 그래서 행동으로 감동을 주려고 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것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데 말로는 잘하지 못하니까 행동으로 표현한 것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행동으로 표현했더니,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더 큰 축복을 주셨습니다. 건강을 주셨습니다. 행복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내 친구, 동료, 어느 누구보다도 나는 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삽니다.” 존재할 이유가 있는 분명한 모습입니다. 존재의 이유를 상실한 인생은 마치 말라버린 무화과나무처럼 이미 끝난 것입니다. 모쪼록 하나님과 이웃 앞에서 존재할 이유가 있는 삶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모름지기 잎만 무성하여 말라 죽은 무화과나무처럼 되지 말아야 합니다. 부디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 맺는 신앙이 되시기 바랍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믿음으로 기도하여 하나님이 언제나 응답해 주시는 확실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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