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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맥추감사절] 나의 전부이신 하나님 (시 73: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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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부이신 하나님 (시 73:12-28)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교회에서 감사절을 년에 두 번 지키는데, 그 성경적 근거는 출23:16입니다. “맥추절(麥秋節 the feast of harvest)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收藏節 the feast of ingathering)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말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구약 이스라엘은 1년에 이모작을 했습니다. 전반기에 추수하면서 맥추절을 지켰고, 후반기에 추수한 후 수장절을 지켰습니다. 

이런 전통을 이어받아 오늘 우리도 맥추감사절과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농사를 짓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아갑니다. 그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단 하루도 연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피조물로 성도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게 마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죄성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릅니다. 감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잘못이지만, 우리 자신에게도 손해입니다. 그래서 감사를 잊지 않도록 감사절을 기억하고 지키라고 명령하신 겁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감사가 왜 중요할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감사 유무가 행복과 불행을 좌우합니다. 그런데 진정한 감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진실한 신앙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말하자면 신앙, 감사, 행복은 정비례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행복이 소유 혹은 조건과 정비례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허위의식입니다. 여러분, 돈이 많을수록 행복할까요? 모 신문사에서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소득이 올라가면 어느 정도까지는 행복지수가 올라가다 그 이상이 되면 더 이상 올라가지 않고 오히려 떨어진다고 합니다. 국가별 행복지수도 1인당 GDP 순서대로가 아닙니다. 또 건강 등 조건이 호전되면 행복할까요? 반드시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시각장애인 걸인이 하도 불쌍해서 목사님이 개안 수술을 시켜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좋아하더니 얼마 후 찾아와서 항의합니다. 그 이유는 눈을 뜨고 나니까 사람들이 적선해 주지 않아서 먹고 살기 어려워졌다는 겁니다. 불평하는 사람은 이래도 저래도 감사할 줄 모릅니다. 

그러니까 소유가 늘고 조건이 좋아져서가 아니라 감사해야 행복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다.”(탈무드) 또 이런 말도 있습니다. “감사의 분량이 곧 행복의 분량이다.”(타고르) 성경에 이와 같은 원리를 증거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또 한 가지, 신앙이 좋을수록 어떤 환경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게 바로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범사에 감사하면 항상 행복한 인생이 됩니다. 

그런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성도들도 때로는 조건에 따라 마음이 흔들리고 감사 대신 불평을 하기 쉽습니다. 특히 감사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는 타인과의 비교의식 때문입니다. 우리 속담에 “사촌이 땅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잖아요. 비교의식은 평소 행복하던 사람을 금세 불행하게 만듭니다. 상대적 박탈감 때문이죠. 한국 사람만 그런 게 아니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인간이 마찬가지입니다. 

하버드대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흥미로운 실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질문은 “다음 둘 중에 어떤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까?” 첫째, 당신은 1년에 평균 5만 달러를 버는데 다른 사람들은 평균 2만5천 달러를 버는 세상에서 살겠습니까? 둘째, 당신은 1년에 평균 10만 달러를 버는데 다른 사람들은 평균 25만 달러를 버는 세상에서 살겠습니까? 결과가 어떻게 나왔을까요? 대부분의 학생들이 첫번째를 선택했습니다. 소득이 적더라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버는 쪽을 선택한 겁니다. 절대 소득보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되는 상대 소득에 신경을 더 쓴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이런 비교의식 때문에 성도들조차 마음이 흔들리고 감사를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본문 시편 73편을 쓴 아삽도 그랬습니다. 그는 다윗 왕 시대에 성가대장인데, 그가 쓴 시가 시편에 여러 편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 정도면 꽤나 훌륭한 신앙인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교의식 때문에 신앙이 흔들리고 감사 대신 불평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다행히 나중에 신앙을 회복하고 감사 찬양했지만, 아삽의 모습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가져다줍니다. 신앙이 웬만큼 성숙해지지 않으면 감사하기 힘들고, 감사하지 못하면 불행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감사하는 사람, 정말 행복한 인생이 되기 위해서는 신앙을 좀 더 성숙하게 키워야 합니다. 이제 본문을 통해 아삽은 왜 신앙이 흔들렸었는지, 어떻게 견고한 신앙으로 감사를 회복하고 행복한 인생이 됐는지 살펴봅니다. 1절~13절을 보면 아삽은 악인을 보면서 낙심했던 경험을 털어놓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악인들이 하나님을 무시하면서 사는데 형통할 수 있나? 너무 이상했다는 겁니다. 그들은 돈도 잘 벌고 몸도 건강하고 고난도 없고 죽을 때도 고통 없이 죽고 ... 그러니까 오만방자하고 하나님을 무시하는데도 잘만 된다는 겁니다. 본문 12절 보십시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반면에 자기는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깨끗하게 살려고 애를 쓰는데도 고난이 많다는 겁니다. 13절~14절을 보시죠. “13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14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그러니까 별의 별 생각이 다 드는 거죠. “도대체 하나님은 살아 계신가?” “그렇다면 뭘 하고 계신가?” “하나님은 과연 공의로우신 분인가?” 신앙에 갈등이 생깁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서 신앙생활깨나 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악인만도 못하니 영 체면이 서질 않습니다. 그렇죠? 당연히 의인이 악인보다 잘 돼야 되는 게 아닙니까? 그런데 악인이나 의인이나 비슷하다면 신앙생활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게다가 악인은 형통하고 승승장구하는데 의인은 고난만 당하고 있다면 정말 헷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신앙생활을 걷어치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혹시 우리에게는 이런 경험이 없습니까? 가만히 보면 우리 주변에 이런 일이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우리의 무지 때문에 오해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깊은 뜻을 이해해야 성숙한 성도입니다. 다행히 아삽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신앙을 회복하고 감사 찬양합니다. 16절~17절. 

“16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17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아삽은 갈등이 너무 심했었는데, 성소 즉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셔서 악인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지만 끝내 돌아오지 않으면 결국은 심판하신다는 겁니다. 18절~19절. “18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19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아삽은 이 때 눈이 확 떠지는 체험을 합니다. 그러면서 악인의 형통이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오히려 의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한 마디로 비교가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신앙의 사람들은 비교의식에서 해방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고,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신앙의 증거는 보는 눈이 달라지는 겁니다. 영안이 환하게 열려서 조건과 환경, 상황 등으로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신앙이 성숙해질수록 견고해질수록 보는 영안이 환해집니다. 조건이 똑같아도 그 해석이 달라집니다.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이 있죠. 똑같은 꿈이라도 해몽을 잘 하면 기분이 좋습니다. 해몽을 잘못하면 기분이 나쁩니다. 동일한 인간 조건이나 환경이라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감사할 수도 있고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그에 따라 행복과 불행 사이로 왔다 갔다 합니다. 우리에게 신앙이 생기면, 신앙이 성숙해지면 보는 눈이 달라지는데 어떻게 달라질까요? 세 가지로 정리해 드리죠. 

[1] 육신보다 영혼을 보는 눈 

신앙이 성숙해지면 육신보다 영혼을 보는 눈이 열립니다. 육신의 조건만 보면 악인들이 훨씬 더 나은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육신의 안일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육신과 영혼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조건만 충족시켜서 아무리 편리하고 안락하다 할지라도 진정으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행복은 성적 순이고 재산 순이겠죠. 하지만 그건 아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신앙에 관해 오해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무조건 부자가 되고 형통하고 건강하고 잘 되고 ... 이렇게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창조주로서 우리의 육식의 생존을 위해 의식주를 공급해 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믿는 성도들에게 특별히 주시는 것은 육신이 필요보다 영혼의 필요입니다. 그게 바로 영생입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가에 물을 길러 갔다가 예수님을 마나죠. 그때 예수님이 그녀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요4:13~14 “13 ...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육신을 위해 마시는 물은 필요하지만 잠시 육신을 만족시켜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반면 예수님이 주시는 물 즉 영생은 우리 영혼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샘물처럼 계속 기쁨을 줍니다. 

흔히 영생을 장차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히 사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그건 반쪽 진리입니다. 영생은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의 영혼에 부어주시는 영적인 기쁨입니다. 그것이 지상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다가 장차 천국에 들어가면 그 기쁨이 극에 달하게 됩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생명수 강에서 영생수를 마시게 되는데, 지상에서부터 영혼에 부어주시는 생수를 미리 마시는 겁니다. 

수입 생수 중에 에비앙(Evian) 생수가 있죠. 에비앙은 프랑스 동부의 작은 시골 마을의 이름입니다. 알프스의 빙하가 녹은 물이 로잔 호수로 흘러 들어가는데, 호수 주변의 마을 사람들은 공짜로 마음껏 마십니다. 지금 여기서는 병에 들은 생수를 제한적으로 마시지만 그곳에 가면 마음껏 마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금 여기서 영생의 기쁨을 맛보지만 여러 가지 요소(우리 내면의 죄성, 외적인 고난 등)로 인해 제한적입니다. 그러나 장차 천국에 들어가면 영생의 기쁨을 완전하게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에게만 주시는 영생은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선물입니다. 특별 은총이죠.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신령한 기쁨과 평안을 맛봅니다.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 평안은 장차 천국에서 만끽하게 되겠지만, 이 세상에서도 이 평안의 힘이 얼마나 큰지 거친 환경과 조건이 짓누르는 염려와 근심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영생을 얻고 정말 맛보기 시작하면 환경과 조건을 초월하는 기쁨과 평안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내 마음 속의 천국’입니다. 여러분, 장차 천국에 들어갈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지금 여기서 마음속에 천국이 이뤄진 사람이라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만이 참으로 예수 믿고 영생을 얻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영생을 얻지 못한 채 세상의 좋은 환경이나 조건을 아무리 추구해도 채워지지 않는 영혼의 갈급함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참 행복이 아닙니다. 결국은 불행해집니다. 마치 소금물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목이 말라 마시지만 소금물을 마시지만, 마실수록 더욱 더 목마르게 됩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 영안이 열려 육신의 것보다 영혼의 기쁨과 평안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하고, 진정으로 행복한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2] 부분보다 전체를 보는 눈 

신앙이 성숙해질수록 부분보다 전체를 보는 눈이 열립니다. 인간은 무지해서 눈앞에 보이는 작은 부분만을 봅니다. 그것은 칸 그림을 맞추는 작은 퍼즐 조각과 같은 것입니다.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당장 눈앞의 환경과 조건에 따라 일희일비하는 것은 퍼즐 조각을 보고 일희일비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나중에 큰일이 날 일인데도 좋아하고, 어떤 경우에는 나중에 큰 축복이 될 일인데도 괜히 슬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계획을 세워 놓고 있습니다. 그 계획이 이루어지기까지 때로는 고난이나 역경이 닥쳐올 수도 있습니다. 그 전체를 보는 눈이 있으면 감사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체를 보는 눈이 없으면 불평하고 원망하기 바쁩니다. 

여러분, 수를 놓는 것 보신 적 있나요? 어떤가요? 완성되기 전까지는 뭔지 잘 몰라요. 특히 뒤판을 보면 얼기설기하고 엉망이죠. 그러나 한 뜸 한 뜸 수를 놓다 보면 아름다운 작품이 완성됩니다. 바울은 증거합니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모든 것이 종합되어 선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매년 한반도에 태풍이 몰려옵니다. 무섭고 반갑지 않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꼭 필요한 것입니다. 태풍이 몰려오면 바다를 뒤집어버리고 대청소를 한답니다. 바다가 건강해지는 것이죠. 우리 인생도 때로는 뒤집어져야 잘 될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119:67,71 “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 ... )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사랑하셔서 때로는 고난이나 징계조차 주십니다. 결국은 우리 인생에 유익해서 그러시는 겁니다. 아무쪼록 고난과 역경이 닥쳐와도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이 이루시는 선리의 전체를 바랍니다. 

[3] 순간보다 영원을 보는 눈

신앙이 성숙해질수록 순간보다 영원을 보는 눈이 열립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이 순간만 좋은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영원히 좋은 것을 원하십니다. 순간만 보면 하나님이 왜 이러시지? 하고 의심하고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이런 저런 일들을 통해 우리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십니다. 24절.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아삽은 의심하고 실족할 뻔 했지만 결국 영원한 영광 즉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고 감사 찬양했습니다.

여러분, 인생이 긴 것 같지만 찰나와 같습니다. 일장춘몽입니다. 약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안개가 얼마나 쉬이 사라집니까? 인생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죽음 이후 내가 영원히 어디로 갈 것인지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히9:27 분명히 말씀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모든 사람에게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고, 그에 따라 각각 영원한 내세로 들어갑니다. 천국이냐? 지옥이냐? 믿든지 안 믿든지, 좋든지 싫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주권이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에 따라 좌우되지 않습니다. 만일 그게 가능하다면 인간 스스로 죽지도 말아야죠. 누구도 죽음을 원치 않지만,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인간의 의지에 상관없이 심판과 내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 세상에서 아무리 호의호식하며 떵떵거리고 살았을지라도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면 최대의 비극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죠. 마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soul)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soul)과 바꾸겠느냐”

사도 바울을 분명히 증거합니다. 인생에 오직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죄 사함을 받으면 영생과 천국의 길, 그렇지 않고 죄 가운데 살다가 끝나면 죄의 삯으로 영원한 사망의 길 둘 중이 하나라는 겁니다. 해피엔딩(Happy Ending)이냐? 새드엔딩(Sad Ending)이냐? 결정이 납니다. 

누가복음 16장을 보면,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가 나오죠. 거지였지만 나사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천국에 올라갑니다. 반면 부자는 자기 마음대로 세상의 욕망만을 위해 살았던 불신자로 음부 곧 지옥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그대로 믿고 있습니까? 점검해 보세요! 성경대로 믿으면 되지만, 하도 말세에 사람들이 완악해지고 

의심이 많아져서 그런지 하나님께서 천국과 지옥을 체험한 사람들의 증거를 보여 주십니다. 조심해서 봐야 되지만, 성경에 어긋남이 없는 신뢰할 만한 책을 두 권 소개해 드립니다. 신성종. 내가 본 지옥과 천국, 크리스천서적. 토드 부포, 3분, 크리스천 석세스. 

여러분, 천국과 지옥이 실존한다면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이겠습니까? 천국에 들어가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게 최고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게 최고입니다. 그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이 모든 사실들을 깨달은 아삽은 고백합니다. 25절~26절. “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26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전부이시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만 계시면 인생에 부족한 게 없다는 고백입니다. 우리도 함께 고백해 보시죠. “나의 전부이신 하나님! 주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뻔합니다. 아삽이 결심한 그대로입니다. 28절.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더욱 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분인지 전파하는 것입니다. 

오늘 맥추감사주일에 우리 자신의 신앙을 점검합시다. 정말 하나님이 나의 전부이신가? 말로만 그런 것은 아닌가? 우리가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 우리가 행복하지 못하는 이유, 그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이 나의 전부’라는 신앙고백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아삽처럼 과거에는 신앙이 흔들린 적이 있을지라도 이제는 ‘나의 전부이신 하나님’을 굳게 믿고 날마다 감사하고 항상 행복한 인생 되시기 바랍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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