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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의 길 (욥 1:20-22, 눅 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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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길 (욥 1:20-22, 눅 5:4-7)  

  
찬송가 549장에는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라는 제목의 찬송이 있습니다. 이 찬송은 벤자민 슈몰크(Benjamin Schmolck)라는 분이 작사를 했습니다. 이 분은 독일 루터교회 목사인데 어느 날 심방을 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까 집에 불이 나서 다 타고 어린 두 아들도 죽어 있었습니다. 그 때 그 광경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그 순간 신앙이 작동했을까요? 작동했다면 어떻게 작동하였을까요? 그런 경우 “아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야” 하고 할렐루야 했을까요? 슈몰크 목사는 그 후 처절한 절망을 경험했을 것이고 아마도 상당기간 방황했을 것입니다. 

비록 그가 아무리 목사일지라도 인간이기에 분명 혼란을 겪고 비탄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긴 시간이 흐른 후, 슈몰크 목사는 마침내 마음을 정돈하고 이렇게 고백의 시를 썼습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 몸과 온 영혼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하시고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참으로 기막힌 시입니다. 이 시에 조셉 홀브룩(Joseph P. Holbrook)이라는 분이 곡을 붙여 내 놓은 것이 오늘 우리들이 부르는 “내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라는 찬송입니다. 

이렇게 이 배경을 말하기는 쉽지만 참 기막힌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이런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할런지 생각하기조차 어렵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들에게 이런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그것은 “그 때 그의 집이 불탈 때, 그리고 그의 두 어린 아이들이 불에 타 죽어갈 때 하나님은 어디서 무얼 하고 계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하나님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것일까, 하나님은 도대체 왜 이러시나?” 하는 생각입니다. 신앙인이 걸어가는 길에는 이렇게 때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고 납득되지 않는 일들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만약 신앙인이 가는 길에 늘 형통함과 행복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는 풀기 어려운 일들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고민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보면 똑같은 사례가 또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이 욥의 경우입니다. 욥은 하루아침에 10남매를 잃게 됩니다. 또 하루아침에 전 재산을 다 잃게 됩니다. 게다가 몸에 병까지 들게 됩니다. 그 모습을 본 아내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가출해버립니다. 이제 욥은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모두 다 떠나 버리고, 다 빼앗긴 초라한 자리로 전락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 욥을 더 곤혹스럽게 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왜 내가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 왜 내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내가 무슨 큰 죄를 지었는가, 내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길래 이러는가?” 하는 이해가 되지 않고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들이었습니다. 

지금 욥이 처한 고난과 고뇌 수준은 엄청납니다. 그리고 원인을 알 수 없다는데 더 큰 고통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길이라는 명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신앙의 길은 참 깊고 심오합니다. 때로는 깨달을 수 있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부분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에게도 고민이 있고 고뇌가 따라 오는 것입니다. 욥은 의롭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다 잃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유를 모릅니다. 그러니까 더 고난스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의 길에서 때론 회의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알아야 할 신앙요소가 몇 가지 있습니다. 

순종 

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강력한 요소입니다. 순종은 이해가 되지 않음에도 응답하는 자질을 말합니다. 성경에는 이런 순종의 모습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아들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방신에게 인신제사 드리는 것을 가장 싫어하시는 분이십니다. 더군다나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그런 비윤리적인 요구를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이 아들을 바치라고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이것은 현실입니다. 거역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갈등했습니다. 밤새워 고민했습니다. 

분명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이것이 하나님의 절대적 명령이고 요구이기에 갈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여기 아브라함의 태도와 결단을 보면 그 모습이 절대적 순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밤새워 고민하다가 아침이 되자 아내에게는 말도 하지 않고 아들을 데리고 제물로 바치라는 모리아산으로 떠났습니다. 그 길은 3일을 가야하는 길입니다. 

그렇기에 가는 시간내내 곰곰이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믿을 수 없다, 있을 수도 없다, 내 생각으로는 납득이 안된다. 내 판단으로는 이것이 아닌데, 그렇지만 분명 하나님이 요구하시니 바쳐야지” 이것이 순종입니다. 내 생각은 아니지만, 납득이 되지 않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요구하고 계시기에 그 요구에 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순종입니다. 그렇기에 순종은 신앙의 길에서 중요한 신앙요소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밤새워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런데도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오셔서 깊은 곳에 한 번 더 던져보라고 하셨습니다. 밤새워 그물을 던진 사람이 깊은 데에 오른편에 안던져 보았겠습니까. 더구나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오신 분입니다. 고기 잡는 데는 문외한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고기가 잡히지 않는 새벽시간입니다. 이미 날이 밝아지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경험으로 볼 때 이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럴 때 사람들의 반응은 대개 이렇습니다. “다 해 보았습니다, 쓸데없는 일입니다.” 이 대답이 약속이나 한 듯이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을 보면 베드로는 “내 생각으로는 아니지만 말씀하시니 한 번 더 던져 보리이다” 하고 또 그물을 던집니다. 이것이 순종입니다. “내 생각은 아니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또 던져보겠습니다” 이것이 순종인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은 중요한 신앙의 요소인 것입니다. 또한 기적을 불러오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욥이 갑자기 찾아온 환란을 당할 때 속으로 하나님은 왜 이러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도무지 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하루아침에 열 아들이 죽고, 전 재산을 잃고, 온 몸에 창기가 돋아날 정도로 죄를 지은 일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큰 실수를 저지른 적도 없었습니다. 자신의 생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대부분 신앙인이라 해도 불평하고 원망하고 항거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의 길에서 떠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앙인의 길에는 순종이라는 요소가 필요합니다. 나는 이해할 수 없고 납득이 되지 않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이라면 순종하여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바로 순종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이니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불평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을 보면 “욥이 입술로 죄를 짓지 아니하였다(1:22)”고 나왔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순종입니다. 우리들이 살다보면 그런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신앙인들이 취하여야 할 태도는 순종입니다. 이유나 원인은 다음에 알기로 하고 오늘은 순종하는 것, 그것이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일본의 어느 부부가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습니다. 남편이 분만실에 가서 아이가 나오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나오는데 보니까 아이가 기형아였습니다.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는 아내에게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몇 일간 고민하고 고뇌하며 정신이 공황상태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런데 의문이 들었습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발생하는가?” 대부분 이 상태에 빠지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그런 생각입니다. 그렇게 고민하다가 며칠 후에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아내도 충격을 받고 한동안 말을 못했습니다.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그런데 한참 있다가 아내가 남편의 손을 꼭 잡더니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여보, 이런 불행한 아이를 하나님이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우리 부부에게 맡기신 것이 얼마나 감사해요” 여러분도 이런 해석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순종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고 받아들이는 태도가 바로 순종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속에서 숫한 문제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때로는 그 이유도 원인도 모르는 일이 발생할 때도 있습니다. 그 때는 일단 순종해야 합니다.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이유와 원인은 다음에 알기로 하고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순종입니다. 욥기서를 통해서 성경은 우리는 그 지혜를 배우게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순종은 강력한 신앙의 요소입니다. 

깊은 질문은 하나님께 돌리라 

살다보면 풀기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해가 안되니까 시험에 들게 됩니다. 그런데 욥은 어땠을까요. 욥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지 이유를 몰랐습니다. 그 와중에 친구들이 찾아와서 먼저 죄를 회개하라고 윽박질렀습니다. “네가 죄를 짓지 않았으면 왜 이런 환란을 당하겠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욥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하루아침에 열 자식이 죽고 전 재산이 다 날라가고 온 몸에 부스럼이 돋을 만큼 큰 죄를 지은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욥은 이것이 하나님이 자신을 시험하시는 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내가 몸 밖에서 주를 뵈올지라”(19:26)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 말은 “내가 죽은 뒤에 하나님을 만나서 그 원인을 알아보겠다”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죄짓지 아니하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세상을 살면서 모든 문제들을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신앙적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나오게 됩니다. 반드시 그런 부분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 그 부분은 일단 그냥 놔두어야 합니다. 언제까지 놔두는가 하면 내가 그 구절을 깨달아 알 때까지입니다. 분명 우리의 지식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한계를 가진 지혜를 가지고 그 말씀을 억지로 풀려고 하면 그 때 말씀을 곡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단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때는 깨달아질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욥이 “몸 밖에서 하나님을 뵈오리라”고 말한 것은 그런 뜻입니다. 

1986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엘리 위첼(Wiesel) 이라는 분은 “밤”이라는 소설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이 소설은 그 분이 어린 시절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겪은 일들을 토대로 쓴 작품입니다. 어린 시절 위첼은 수용소에서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여동생이 무참히 고문당하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교수대 위에서 가스실에서 죽어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그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당장 별 방법도 없고 속수무책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 어린 위첼은 그토록 신뢰하고 믿어오던 정의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 당신은 지금 이 시간에 도대체 어디에서 무얼 하고 계십니까, 어디서 무얼 하고 있길래 당신이 택하였다는 이 백성들을 이렇게 무책임하게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까.” 얼마나 몸부림치며 울부짖었겠습니까? 그 때 내면으로부터 뜨거운 기운이 솟아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저 교수대 위에 계시단다.” 예수를 믿으면 다 평안하고 행복하고 형통만 주어진다면 얼마나 신나겠습니까? 

때로 주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도 하고 형통도 건강도 주십니다. 그런데 좀 더 깊은 신앙의 경지에 들어가게 되면 우리의 지혜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눈을 조금 뜨고 보면 내가 복을 받고 형통한 것이 눈에 보이는데 눈을 조금 더 크게 뜨고 보면 이해 안되는 일들도 많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욥의 경우입니다. 그 때 모두 당황하고 두려워하고 고뇌하고 갈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을 보면 해답이 나옵니다. 

욥은 그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습니다. 섣불리 속단하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기다림으로 해결했습니다. 그리고 본문을 보면 욥은 얼마 후에 그 환란의 원인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매듭이 풀리게 됩니다. 캄캄한 밤이 지나고 밝은 광명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욥기서 마지막 장을 보면 욥의 말년에 잃은 것을 다 회복하게 됩니다. 이전 보다 더 많은 복을 받았다고 결론 맺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상담학에서는 이 욥기서를 상담교재로 사용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오늘 여러분들 중에도 지금 이 욥의 처지와 같은 처지에 처한 분이 있을 것입니다. 얼마나 답답하고 괴롭겠습니까. 오늘이 캄캄한 밤처럼 내 삶 전체가 어둡게만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앞날과 미래가 암담하게만 보일 것입니다. 이처럼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숫한 문제들에 직면해서 살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입장에 처해 살아가는 우리에게 문제의 해답을 주고 길을 제시해 주는 지침서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이 욥기서라는 것입니다. 

이 욥기서는 우리들이 체험하는 모든 문제들의 해답서입니다. 그 안에는 오늘 우리에게 처한 모든 어둠은 오래가지 않는다는 교훈을 메시지로 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극한 상황에 처한 위첼처럼 그 극한 상황에서 주님의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고난당하고 있는데도 침묵속에 계신 하나님을 향하여 외치기를 “당신은 이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당신은 도대체 지금 어디 있습니까?” 하고 항변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외면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 현장, 그 지점에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다는 것을 욥기서를 통해서 해답을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들이 하나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고 계시다는 믿음을 갖는 일입니다. 욥이 그 환경을 승리하고 원망하지 않았다는 것은 욥에게 그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나와 함께 하고 계시다.” 그 때 거기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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