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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본이 되는 지도자가 되라! (출 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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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본이 되는 지도자가 되라! (출 3:1-14)


근간에 제가 조금씩 나이를 먹으면서 나름대로 소중히 여기는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만남'입니다.  사실 우리 삶의 행복과 불행은 어떤 만남을 가지면서 살아가는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 만큼 인생에서 만남은 중요합니다.  '좋은 부모', '좋은 아내', '좋은 남편', '좋은 친구', '좋은 스승', '좋은 선배', '좋은 후배'와 같은 사람과의 만남이 중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좋은 사람과의 만남을 위해서 '좋은 학교'와 '좋은 교회'와의 만남도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학교 못지 않게 교회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솔직히 말씀을 드리자면 학교보다 교회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뜻에서 좋은 교회와의 만남은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축복된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언제나 좋은 교회와의 만남을 욕심내면서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하셔야 합니다.

저는 사랑하는 우리 언양 영신교회가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축복의 근원과 통로가 되는 좋은 교회가 되기를 소원하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 언양 영신교회를 통하여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이 보다 평안하고 사랑이 넘치는 행복한 가정이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언양 영신교회를 통하여 우리 교회에 속한 모든 아이들의 인격과 가치관이 바르고 건강하게 세워져서 넉넉한 인생을 살아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좋은 교회의 기준과 조건이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좋은 교회의 기준과 조건은 아주 근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을 중히 여기는 교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자리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목사인 저는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은사와 소명을 따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자리를 소중히 여기는 교회가 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저는 우리 언양 영신교회가 좋은 교회가 되는 일의 한 부분만을 감당할 것입니다.  저는 저 혼자서 우리 언양 영신교회를 좋은 교회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능력이 저에게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지도 않을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저에게 이것도 요구하고 저것도 요구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 모든 요구를 제가 다 들어 드릴 수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저에게 그 모든 것을 다 요구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주님의 몸된 교회의 일을 혼자서 독불장군처럼 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서로 각기 다른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성령으로 하나가 되어 함께 동역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함께 만들어 가는 믿음의 공동체, 그것이 바로 고린도서를 통하여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시는 은사와 지체의 연합과 협력을 통하여 완성되는 하나님의 교회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우리 언양 영신교회의 스타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는 우리 언양 영신교회의 한 지체가 되고 싶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나와 다른 은사를 가진, 그러나 나와 같은 신앙을 가진 여러분들과 함께 동역하면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가고 싶습니다.  저는 우리 언양 영신교회를 좋은 교회로 만드는 일을 혼자서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 그것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해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  좋은 동역자들과 함께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언양 영신교회가 좋은 교회가 되기 위하여 우리 모두가 각각의 은사를 따라 좋은 동역자로 늘 기도하시고 주도적으로 믿음의 공동체를 세워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공동체인 하나님의 교회는 즐거워야 합니다.  세상 그 어느 곳보다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늘 교회와 성도들이 보고 싶고, 또 가고 싶은 그런 교회가 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교회, 성도들이 행복해 하는 교회, 그런 교회가 바로 우리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행복한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셔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 언양 영신교회가 세상의 그 어떤 곳보다 재미있는 교회를 만들어가기 위하여 애쓰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해 주기를 바라지 말고, 스스로가 그런 교회를 위해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세워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종종 말씀을 드리지만 교회라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이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여러분이 교회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믿음 안에서 한 공동체로 모인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한 교회는 어느 특정한 누군가가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부흥은 목사가 만들어 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이 땅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흩어져 있는 각각의 다른 은사를 가진 사람들을 하나의 신앙으로 불러 모아서 다 함께 합력하여 교회를 세워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도적으로 행복하고 즐거운 교회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서로 은사가 다른 사람들이 성령으로 하나가 되어 주의 몸된 교회를 세워갈 될 때 우리는 이 땅에서 가장 이상적인 교회를 보게 될 것입니다.

중국 고서인 '한비자'라는 책의 '내저설상 칠술편'에 보면, '임금이 신하를 다스리는 일곱 가지 방법'을 기술한 다음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나라 선왕宣王)이 사람들로 하여금 '생황'이라는 악기를 불게 할 때는 반드시 300명이 함께 불게 했다고 합니다.  이를 알게 된 '남곽처사'라고 하는 사람이 임금을 위하여 '생황'을 불겠다고 했습니다.  이 때, 선왕이 크게 기뻐하며 수백 명분의 곡식을 상으로 내렸습니다.  그런데 선왕이 죽자 민왕이 즉위했는데, 민왕은 따로따로 한 사람씩 연주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생황을 불게 했습니다.  이제 처사가 민왕 앞에서 생황을 연주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사실 처사는 생황을 불지를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 여러 번 회피하다가 결국에는 도망을 치고 말았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남취'(濫吹)라는 말이 유래되었는데, 이 말의 뜻은 무능한 사람이 유능한 체하거나 실력이 없는 사람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비유한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 단체든지 현실을 핑계 대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과 사명을 외면하는 이런 남곽처사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솔직히 남곽처사와 같은 이런 모습이 우리들에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남곽처사가 바로 나 자신일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과 책임을 회피하려는 모습이 우리들 안에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 안에는 두 가지 모습의 내가 있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면서 현실적으로 망설이는 나 자신과 주도적으로 공동체 속에서 희생적인 삶을 살려고 하는 나 자신이 있습니다.  현실적인 상황 앞에서 불평하고 원망하는 나 자신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와 찬송하는 내가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도 이런 두 부류의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를 가지고 주도적으로 합력하여 함께, 더불어 믿음의 공동체를 세워가기를 원하십니다.  주변인의 삶이 아니라 주인공의 삶을 살아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머뭇거릴 때 하나님의 영감을 의지하고 일어나 주도적으로 믿음의 역사를 만들어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보다 교회 안에 이런 남곽처사와 같은 사람들이 있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면 안됩니다.  솔직히 교회 안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욕심이 가득한 자신의 내면을 숨긴 채 거짓된 헌신으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희생과 섬김은 없고 명예욕만 가득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면 안 됩니다.  만약에 그와 같은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가 된다면 하나님의 교회는 순결함과 거룩성을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교회의 존재적 가치를 상실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이 땅에서 존재해야 할 이유를 잃어버렸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어떤 면에서 볼 때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죄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현장에서 이들 부부를 함께 죽이실 만큼의 죄는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만한 죄에 대하여 언제나 그렇게 심판하신다면 세상에 목숨을 부지하고 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그렇게 무섭게 심판하신 것은 교회를 보호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아직도 뿌리가 약한 교회에 그와 같은 사람이 교회의 리더십을 갖게 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옛날 B.C 5세기경에 그리스의 거지 철학자로 알려진 아폴로니아의 디오게네스는 대낮에도 등불을 들고 사람을 찾아 다녔다고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사람을 통해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불러 지도자로 세우시고 그를 통해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을 역사의 마운드에 다시 세우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을 가리 켜서 우리는 지도자라 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지도자'라고 하면, 흔히 남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사람을 연상합니다.  그래서 지도자라고 하면 한 나라의 정권을 잡은 사람, 회사의 사장, 어느 단체의 기관장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배자와 지도자는 엄연히 다릅니다.  다른 사람을 넘어뜨리고 싸워 이겨서 얻은 세상의 자리는 지배자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도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지배자는 다스리고 군림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겸손히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지도자는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불행이라고 한다면 지배자는 많으나 지도자가 없다고 하는데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 시대에 성공한 정치가들은 부러움의 대상은 되고 있지만 존경의 대상이 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많은 기업가들도 부러움의 대상은 되고 있으나 존경의 대상이 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큰 교회를 세운 많은 목회자들도 부러움의 대상은 되고 있으나 사회적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시대의 불행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바른 지도자는 언제나 자기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합니다.  지도자는 자기는 죽고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립니다.  그래서 지도자는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배자의 소리는 한때 세상을 지배하는 듯 하지만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정치가의 소리도 사라지고, 기업의 회장 소리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순교자 손양원 목사님과 주기철 목사님은 오늘도 한국교회 한 가운데 살아서 숨쉬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저들의 소리를 듣고 저들을 양식으로 먹고 삽니다.  따라서 지배자는 땅이 쓰는 사람입니다.  기업에 필요하고 정당에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하나님이 쓰는 사람입니다.  지도자는 하나님이 보내시고 하나님이 세운 사람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람들은 지배자가 아니라 지도자로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의 행복은 내가 가치 있는 존재임을 깨닫는데 있습니다.  사람의 가치와 가격은 다른 것입니다.  그의 재산이 얼마냐? 지식이 얼마냐? 월급이 얼마냐? 하는 것은 가격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곧 그 사람의 가치는 아닙니다.  사람의 가치는 그가 어떤 일에 쓰임을 받느냐? 무엇을 위해 사느냐에 따라 평가됩니다.  때문에 사람은 그가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 앞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어디에서든지 가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집안에 있는 작은 그릇만 해도 그렇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들락날락 쓰임 받는 밥그릇, 국그릇이 있는가 하면, 찬장 맨 꼭대기에 언제나 모셔져 있는 그릇이 있습니다.  이사 갈 때 한 번씩 꺼내서 먼지를 닦고 제일 먼저 챙겨지는 비싼 그릇, 그러다가 밥 한 번 담아 보지 못하고 깨져서 버리는 그릇!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런 인간이 되지는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름지기 사람이란 밥을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보람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가치를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잘 먹고 잘 입고 살면 행복할 줄 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하고 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존재가 되었다."  거기에 행복이 있습니다.  거기에 기쁨이 있고 보람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는 의미 없이 그냥 부르시지는 않았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은사를 주시고 그 은사를 따라 사명을 주시면서 부르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향한 기대를 가지고 부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내 모습 이대로가 소명이요 행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어느 시대에든지 당신의 일을 위해서 지도자를 찾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 앞에서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고민이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사명을 가지고 주먹을 휘두를 때는 그것이 불신앙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을까봐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간 그 비겁한 사건을 보고 히브리서 기자는 11장 27절에서 신앙으로 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 힘으로 할 때는 불신앙이고, 하나님께서 나를 몰아쳐서 할 수 없이 끌려 갈 때는 신앙이라는 말입니까?  적어도 오늘 본문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힘과 열정으로 하면 불신앙이고, 하나님의 뜻으로 하면 신앙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내 힘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내 힘으로 하려고 하면 넘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로 임하셨습니다.  떨기나무란 곧 가시나무를 말합니다.  호렙산 광야에 많은 나무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 많고 많은 나무가 이 떨기나무입니다.  그리고 구불구불 휘어져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나무가 떨기나무입니다.  기둥감은 고사하고 석가래 감도 못되는 천덕꾸러기 나무였습니다.  떨기나무는 건조한 기후와 사막의 열기에 가끔 불을 안 붙여도 불이 난다고 합니다.  한 번 불길에 타오르다 푹 꺼지면 그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일반적인 상식으로 생각한다면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백향목이나 상수리나무와 같은 아름답고 큰 나무에 임하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볼품도 없고, 쓸모도 없는 떨기나무 가운데 임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을 백향목으로 생각하고 있는 한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상수리나무처럼 위대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한 그는 하나님이 쓰시는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아침에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서 사명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떨기나무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자꾸만 우리는 내가 마치 백향목이나 상수리나무인 것처럼 착각을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떨기나무처럼 낮아지고 꺾여질 때 사명을 주십니다.  우리가 떨기나무 같은 존재가 될 때 하나님의 불이 임하십니다.  우리가 겸손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자 하는 지도자의 성품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쓸데없는 교만과 자아가 불쑥 불쑥 튀어나오거든 이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떨기나무다.  교만하지 말자.  깨끗이 죽자."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의 역사는 세상에서 아름답고 잘난 백향목의 역사가 아니라 보잘 것 없는 떨기나무의 역사였습니다.  이름 없는 무명의 사람들이 교회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보잘 것 없던 무식한 어부들을 불러서 세상 복음화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5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다."

사랑하는 여러분, 메마른 아론의 지팡이에 하나님의 손이 닿자 싹이 나고 꽃이 피었습니다.  열매를 맺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오늘 우리들 가운데 성령의 불이 떨어지면 우리도 그 크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게 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종들의 실력은 학력이 아닙니다.  지식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백그라운드가 아닙니다.

그래서 신발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신발을 벗고 사는 사람은 노예 밖에 없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사령관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종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의 신발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학문과 경험의 신발도 벗어야 합니다.  지위와 권세의 신발도 벗어야 합니다.  세상을 의지하던 너의 모든 힘을 다 내려놓고 겸손해지라는 것입니다.  네 발로 걷지 말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데로 걸어가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쓰시는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의 실력은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거기에 순종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들어 쓰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먼저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그리고 예배 속에서 먼저 은혜를 받으십시오.  지도자들이 은혜는 받지 않고 일만 하려고 하니까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교회 일부터 배우려고 하니까 교회가 어지러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존직 되는 안수집사님과 권사님들, 그리고 집사님들, 먼저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이 먼저 은혜를 받으십시오.  아멘 소리도 다른 교인들보다 더 많이 더 크게 하십시오.  찬송 소리도 다른 교인들 보다 더 진실하고 크게 부르십시오.  교회 지도자가 누구입니까?  누구보다 은혜를 잘 받는 사람입니다.  누구보다 순종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교회에서 은혜 받기가 가장 힘든 사람은 목사이고, 그 다음이 장로이고, 그리고 안수집사와 권사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그리고 먼저 은혜를 사모하고 누구보다 더 많이 은혜를 받으십시오.  하나님은 순종하며 나아가는 사람을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맨손으로 그냥 보내시는 법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12절입니다.  12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여러분이 말씀에 순종하고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증거가 되어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을 비롯한 많은 동물들은 공통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집단을 이루고, 그 집단에는 구성원들을 이끄는 지도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어느 집단이든 지도자의 리더십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누가 지도자가 되느냐에 따라서 인간이 짐승의 삶을 사는 지, 혹은 인간 본연의 삶을 사는 지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모름지기 지도자는 건강한 리더십을 가져야 합니다.

과거에는 개미형의 부지런한 사람이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혼자서 열심히 돈을 벌고 출세하고 잘 먹고 잘 살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시대에는 권위주의적인 리더십이 통했습니다.  권위주의적인 리더십이라는 것은 일방적인 리더십입니다.  그래서 구성원들은 지도자의 뜻에 무조건 따라야만 했습니다.  지도자의 뜻을 거부한다던가 반대하면 그 조직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시대에서는 이런 리더십이 통하지 않습니다.  과거 권위주의적인 리더십으로 구성원을 이끌려고 했다가는 지도자가 조직으로부터 왕따를 당하거나 버림을 받습니다.  지금은 일방적인 리더십이 아니라 쌍방적인 리더십의 시대입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포용과 배려의 리더십이나 섬김의 리더십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런 리더십은 상대방의 맘을 흐뭇하게 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마음에 오래도록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도자는 대단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기회를 찾아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사람입니다.  구성원들이 보다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고, 용기를 주고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서 배려로 섬길 수 있는 사람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처럼 낮은 자의 자리에서 섬길 줄 아는 사람, 그가 바로 이 시대의 진정한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그런 면에서 지도자들에게는 소통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런데 소통은 말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말을 잘한다고 소통을 잘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남을 설득하기 위해서 말 잘하는 법을 배울 뿐이지 소통을 잘 하기 위해서 마음을 나누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의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는 바로 소통의 문제입니다.

보십시오.  지금 이명박 대통령이 일을 못해서 욕을 먹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더 열심히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그분이 과거 산업화 시대에나 통했던 권위주의적인 리더십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국민들과 제대로 소통이 안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실 모든 공동체에는 어떤 목표를 이루어 감에 있어서 언제나 갈등의 가능성은 잠재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자는 구성원들간에 존재하는 의견의 차이를 좁히거나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지도자와 구성원들, 또는 구성원과 구성원 사이의 소통입니다.

지도자의 의사결정이 권위적이거나 독단적이 아니라 구성원들과 충분한 협의를 거친 것이라면 구성원들이 비록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라도 서로를 이해하고 자신들의 위치에서 할 일을 기꺼이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하나가 되지 않으면 소통이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러 나오지 않는 것은 참된 배려라고 할 수 없습니다.  결국 지도자가 구성원들을 포용하고 배려하는 문제는 얼마나 우리 안에 진실함과 진정성이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소망이 없고 빛을 잃어버린 이 세상을 향해 하나님께서 진리의 등대로 세우신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부흥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부흥이 그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각각의 성도들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 세상을 향한 희생과 섬김과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따뜻한 배려와 섬김과 소통이 있어야 합니다.

좋은 교회는 좋은 교인들이 만듭니다.  우리 모두가 타인을 포용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노력함으로써 좋은 교인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언양 영신교회의 뜰을 밟는 모든 사람들이 다 복을 받는 그런 행복하고 은혜로운 교회를 세워나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이제 저는 마지막으로 늑대들의 공동체 이야기를 전하면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늑대는 10여 마리 이상이 무리를 지어서 생활을 합니다.  더구나 늑대는 일부일처의 사회로 한 번 짝을 맺은 암컷과 수컷은 평생을 함께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늑대들은 어미뿐만 아니라 다른 늑대들도 새끼를 함께 보살핀다고 합니다.  늑대들에게도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 늑대가 있습니다.

특별히 무리 안에서 싸움이 벌어질 때 우두머리가 개입을 합니다.  그런데 우두머리가 싸움을 제압하는 방법은 폭력이 아닌 장난 걸기라고 합니다.  우두머리는 싸우고 있는 늑대 중에 힘이 센 늑대에게 장난을 걸고 그 장난을 통해서 동료를 향했던 공격성을 잊게 한다고 합니다.

먹이를 구하기 힘든 겨울에 우두머리는 혼자서 무리의 생존을 위한 굶주림의 여행을 나섭니다.  우두머리의 정탐은 굶주린 채 3-4일이 계속되기도 합니다.  우두머리는 사냥감의 흔적을 발견하면 울부짖어 무리를 부른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먹이감을 찾지 못한 우두머리는 크게 울부짖습니다.  그것은 "무리에 대한 슬픔과 걱정을 담은 울음"이라고 합니다.  이어서 무리들도 울부짖는데 그것은 "혼자서 먹이감을 찾아 나선 우두머리에 대한 격려를 담은 메시지"라고 합니다.

특별히 늑대들의 무리에서는 싸움에 능하고 난폭한 늑대는 결코 우두머리가 될 수 없다고 합니다.  우두머리의 난폭함으로 무리를 떠나는 늑대들이 많아지면 공동체는 아주 심각한 손상을 입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늑대들이 우두머리를 선택하는 기준은 공동체의 생존과 리더십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부터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사람을 모을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사람이 함께 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런 기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따르게 하는 능력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은 힘이 아니라 구성원들을 향한 포용과 배려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과 함께 할 때 함께 보람과 희망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만 따라가면 살맛이 납니다.  그 사람만 만나면 희망이 일어납니다.  그 사람만 만나면 용기가 일어납니다.  그 사람만 만나면 믿음이 생깁니다.  우리는 이런 지도자의 꿈을 꾸셔야 합니다.

오늘 주 앞에서 예배를 드리는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한 사명, 한 믿음, 한 소망으로 주신 이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이제부터 존경받는 사람이 되고 신뢰를 쌓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힘이 하나로 모여지면 하나님의 창대한 날을 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 모두 하나가 되어 강한 믿음의 팀웍을 이루어라!
그래서 작은 자가 천을 이루는 강한 믿음의 공동체를 만들어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이 쓰시는 좋은 지도자의 꿈을 꾸십시오.  그리고 누군가로부터 참으로 오래도록 기억될만한 지도자가 되어 주십시오.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생각하는 우리들이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자녀와 후대가 기억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누군가 닮고 싶은 믿음의 롤 모델이 되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 후대의 축복을 선도하는 여러분들이 되어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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