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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러나 노아는 (창 5: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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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노아는 (창 5:1-6:8) 
 
 
창세기의 두 번째 톨레도트(5:1-6:8)는 많은 분량의 족보와 약간의 기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족보는 대충 읽고 지나치고 싶은 부분이지만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담 자손의 계보”는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중시조인 노아를 연결시키면서 홍수 이전 천 년을 훌쩍 넘는 세월을 요약합니다.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을 텐데, 성경은 그 모든 사건들은 함구한 채 “죽었더라”는 말을 8번 반복합니다. 화려하게 살았든 평범하게 살았든, 결국 죽었다는 사실을 엄숙하게 선언하지요. 아담에게 선언되었던 죽음의 선고(3:19)가 그의 후손 모두에게 신실하게 적용되었습니다. 그 후 수천 년의 세월이 다시 지났지만, 의학이 눈부시게 발전하더라도 변치 않는 진리는 인간은 결국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본에 따라 이들의 자녀 출생 연령과 수명은 차이가 있지만 “죽었더라”는 사실은 일치합니다. 전도서에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전 7:2, 4)고 했습니다. 성경 가르침에 의하면 죽음의 사실을 회피하는 일을 어리석습니다. 오히려 나도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그러므로 어떻게 살 것인가 생각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죽음을 직면하게 하면서도 이 계보는 침울한 사망자 명단이 아닙니다. ‘낳았다’(요레드, 19번)와 ‘낳은 후’(홀리도, 9번)라는 단어를 28번이나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낳아” “낳았고” “낳은 후” “낳았으며” “낳고” “낳았더라”로 번역했습니다. 죄와 죽음의 비참 속에서도 생명의 역사가 진행됩니다. 심각한 죄의 결과 속에서도 여인의 후손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가장 적절한 때에 성취되기 위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계보는 “A는 x세에 B를 낳았고, B를 낳은 후 y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x+y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는 구조를 6번 반복합니다. 많은 사건들을 생략한 반면 정확한 나이를 세밀하게 언급함으로써 ‘역사의 기록’임을 분명히 밝혔지요. 살다가 자식 낳고 좀 더 살다가 죽은 삶만 반복한다면 너무 의미가 없고 허무하지만, 역사는 하나님께서 분명한 목적을 향해 인도하고 계시며 소수의 사람들이 이 목적에 쓰임 받고 있음을 계보가 드러내고 있습니다.

계보의 서론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사실, “남자와 여자”로 구별하여 창조하셨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다는 사실을 요약적으로 되짚습니다(1-2). 그런 후 가인의 후손은 배제하고 오직 셋의 계열 중 열 명만 언급합니다. 이들 중에 아담과 에녹과 라멕과 노아 네 인물에 대한 기사는 ‘낳았으며 … 죽었더라’의 구조를 이탈하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구성되었습니다.

첫 인물 아담과 관련해서는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3)라고 기술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아담은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습니다. 하나님 형상대로 손상 없이 태어났다면 죽음도 없겠지만, 아담의 형상을 가진 셋은 죽을 운명을 안고 태어납니다. 아담의 범죄이후 그의 모든 혈통적 후손은 원죄를 가진 존재로 태어나고 있음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셋을 낳은 후에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습니다(4). 이 사실은 사람이 창조되던 날에 조건 없이 주셨던 복, 곧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하신 말씀이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소유권 혹은 통치권을 드러내는 행위인데 “다스리라”하신 말씀도 성취되고 있음을 볼 수 있지요(1:28). 계보는 하나님께서 역사의 과정을 통해 형벌을 신실하게 시행하시는 동시에 인간에게 선언하셨던 복 또한 신실하게 시행하고 계심을 드러냅니다.

계보의 일곱 번째 인물인 에녹은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더니”(22, 24)라고 기술됩니다. 줄기차게 반복되어오던 “죽었더라”는 말이 사라지고,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는 설명으로 대치되었습니다. 마치 죽은 시체 더미들을 확인해오던 중에 유일한 생존자를 발견한 듯 반갑습니다. 에녹의 삶은 “하나님과 동행”이라는 구절로 특징지어집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듯이 삼백 년 동안 줄기차게 동행했고, 죽음을 맛보지 않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신약 성경은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 11:5),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유 1:14)라고 증언합니다. 에녹은 그 시대에 주님께서 수많은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실 것을 예언하는 삶을 살았으며,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증거를 얻는 삶을 살았습니다. 계보는 에녹을 통해 죽음 없이 하나님께 취해질 삶이 있음을 증거하며, 그 삶을 소망하며 살게 합니다.

다음으로 가인의 6대 손과 같은 이름을 가진 라멕은 아들의 “이름을 노아”라 지었는데,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고 소망했기 때문이었습니다(29). 라멕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이 크게 즐겁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가인의 후손 라멕의 삶에 있었던 시나 노래가 그에게는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하나님이 저주하신 땅에서 수고로이 일하는 삶으로 요약합니다. 고통스런 삶이었지요. 하지만 원망하지 않고 “노아” 곧, ‘안식’(j'nO, 노아흐)을 소망하며 살았습니다.

셋의 계열에 속했다고 해서 인생이 탄탄대로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에녹처럼 속히 취해가시면 좋겠지만, 수고로움 속에 남겨진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저주’를 심각하게 고려하기 때문에 가인의 후손 라멕처럼 세상 죄악을 마음껏 즐기며 살지 못합니다. 오히려 죄에 대한 회한(悔恨, 뉘우치고 한탄함)과 죄로 말미암아 감당해야할 수고로움을 민감하게 인식하지요. 있고 싶지 않은 곳에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는 지속적인 고통은 때로 자포자기와 절망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삶의 고통 속에서도 여호와께서 주실 안식을 소망하며 인내하는 것 또한 하나님 백성이 갖추어야 할 모습임을 셋의 후손 라멕의 삶을 통해 보게 됩니다.

노아는 세 아들의 이름 “셈과 함과 야벳”(32)이 기록되었고, 그의 죽음은 세 번째 톨레도트가 종결되는 9장 29절에서야 비로소 언급되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족보의 흐름 속에 홍수 사건이 삽입되어 있는 형태지요. 노아가 살았던 시대는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면서 죄도 함께 번성한 때였습니다(6:1). 1-4절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과 “네피림”과 고대에 유명했던 “용사”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아서,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한 세 가지 다른 해석에 따라 나머지 인물들도 달리 해석되어왔습니다.

먼저 ‘천사들’로 보는 견해는 구약 외경인 에녹 1세에 근거를 둔 유대 랍비들의 전통적인 해석인데, 천사는 결혼하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말씀(마 22:30)과 본문의 문맥이 인간의 타락과 처벌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는 사실로 반박됩니다. “하나님”으로 번역한 ‘엘로힘’이 구약 성경에서 종종 통치자들로 번역되었다는 점에 착안해서 ‘지배 계층들’로 보는 견해는 이들의 죄가 단지 강제적으로 여러 여인들을 취했다는 해석을 낳는데, “아내로 삼는지라”(4)는 표현이 정상적인 결혼을 의미하는 단어라는 점에서 반박됩니다.

초대교부 어거스틴과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은 ‘엘로힘’을 속격으로 취급해서 ‘경건한(godly) 셋의 후손’으로 해석했습니다. 4장부터 가인과 셋의 계열이 대조적으로 설명되고 있으므로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는 해석입니다. 성경이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나 신약의 성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고 있음도 이 견해를 지지합니다. 이 견해에 기초하면 “사람의 딸들”을 가인의 후손이나 셋의 후손 중 누구로 해석하든 죄의 핵심은 같습니다. 경건한 후손들이 단지 여인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신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 현상이 가인의 후손과 셋의 후손을 가리지 않고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기 판단대로 행하는 죄를 경건한 후손들조차 답습하고 있음이 나타난 현상들 이면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는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고 판정하셨고, 그런 현상의 보편화를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했으며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5)이라고 판단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의 날이 일백 이십 년”이 되도록 제한하셨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셨다는 신인동형의 표현까지 사용하시며 사람과 육축과 기는 것과 새를 쓸어버릴 홍수를 내리십니다(6-7).

경건한 후손과 불신 후손 간의 통혼은 이후에도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부패하게 만들어 항상 이스라엘에게 재앙의 원인이 되었습니다(민 25장). 반면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회복할 때는 회개와 함께 통혼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따랐지요(스 9:14; 느 10:30). 구약뿐 아니라 신약도 불신자와의 결혼을 금지합니다(신 7:3-4; 고후 6:14). 세 번째 해석이 모든 의문을 해소하지 않을지라도, 홍수 심판을 야기했던 죄악이 결혼 문제와 관련되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하나님 백성의 결혼은 단순히 남녀 사이의 사랑에 무게를 두지 않습니다. 결혼으로 하나님의 언약과 복을 계승하고 드러내는 구속적인 측면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톨레도트는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8)로 마감합니다. 죄가 번성해도 여호와께 은혜를 입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은혜 입은 모습이 여호와의 말씀을 절대 기준으로 삼아 순종하는 가정의 모습으로 드러남을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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