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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평범이 비범이다 (사 48: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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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이 비범이다 (사 48:17-22)
 
 
1. “비범”을 향한 열망

대학 4학년 말 12월에 보았던 영화로, 아직까지는 제 생애 가장 감동적인 영화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마데우스>라는 영화입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의 생애를 그린 이 영화는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부각시키면서도, 그의 천재성을 지켜보면서 시기심에 불탔던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1825)’라는 사람이 스토리의 또 다른 한 축을 이루는 영화였습니다. 

살리에리는 모차르트보다 음악에 대한 열정이 훨씬 강하고 또 노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그야말로 음악에 파묻힌 삶이었지요. 그런 가운데 각고의 노력과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작품이 모차르트가 술에 취해 장난치듯 만들어낸 작품에 비해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그 수준이 떨어지는 것을 깨달으면서 늘 좌절합니다. 누구보다도 음악을 사랑하고, 음악을 향한 열정이 특별했음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 앞에만 서면 그는 언제나 평범한 음악인에 불과했습니다. 

사실 그도 당시 궁정음악가로서 비범한 음악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天才性과 非凡함 앞에서는 평범한 것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차르트를 시기하여 모차르트가 죽어 없어지기를 마음으로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러던 중, 젊은 모차르트가 죽고 맙니다. 그러자 비록 그를 시기했지만 탁월하고 비범한 천재를 흠모했던 살리에리는 자기 시대의 천재가 젊은 나이에 아깝게 죽은 것으로 인해 충격을 받아 정신 이상자가 되고 정신병원에 갇히고 맙니다. 

정신병원에 갇힌 그는 의사와 신부에게 자신이 모차르트를 죽였다고 절규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납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감동을 받은 이유는 살리에리의 절규하는 모습이 저의 모습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부터 머리 좋은 형들과 비교 되었고, 대학가서는 교회 대학부의 소위 SKY 대학 학생들과 스스로를 비교하면서 저 역시 그들의 천재성 앞에서 때로는 절망하고 또 때로는 시기심으로 괴로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난 다음에 깨달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비범함은 그런 천재성이나 남달리 뛰어난 그 어떤 것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읽은 <삼국지>에 유비의 수하이자, 제갈공명(諸葛亮, 181~234)의 동료 한 사람이 제갈공명의 고향에 갔다 와서 공명에게 그 아들에 대해서 말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그 사람은 ‘공명의 아들이 그 아버지만큼이나 뛰어난 천재’라고 하면서 ‘그 비범함이 벌써부터 드러난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들은 제갈공명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동료는 ‘아니, 당신의 아들을 칭찬하는데 왜 한숨을 쉬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공명은 ‘아이는 자기 또래 아이들처럼 자라야 하는 것이지, 그 나이에 또래 아이들을 뛰어넘은 비범함을 가지고 있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 아이는 앞으로 결코 평범하게 살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제갈공명이 염려한 것이 무엇입니까? 남달리 뛰어난 비범함이 어떤 면에서는 진정한 비범함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 때문에 그는 비범하지 못한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르기에 그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혹은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자신이나 혹은 자녀들이 비범하기를 꿈꾸고 그것을 위하여 자녀들을 채근하거나 채찍질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 역시 자신이 남다른 비범함을 가지기를 추구합니다. 성령 충만하여 남다른 은사와 능력을 가질 것을 바라고, 남보다 뛰어난 직분 받기를 구하며, 헌금이나 봉사 등에 있어서도 남달리 비범하기를 추구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도 그러한 비범함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그와 같은 비범함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2. 이스라엘이 놓쳐버린 평범한 진리

본문 17절부터 18절에 보면,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당신의 뜻, 당신의 바램을 말씀하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가 나의 명령에 주의하였더라면 네 평강이 강 같았겠고, 네 공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 네 자손이 모래 같았겠고, 네 몸의 소생이 모래알 같아서 그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였겠고 없어지지 아니하였으리라.”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라신 것은 어떤 특별하거나 대단히 어려운 苦難度의 것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바라신 것은 오직 한 가지였습니다. “네가 나의 명령에 주의하였더라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바라신 것은 지극히 단순하고 쉬운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18절에 나오는 말씀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평범한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지 못했습니다. “네 평강이 강 같았겠고”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없었습니다. “네 공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스라엘에게 공의가 사라졌습니다. 온갖 불법과 탈법이 난무하여 결국 그 해악을 자신들이 짊어지고서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네 자손이 모래 같았겠고, 네 몸의 소생이 모래알 같아서 그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였겠고 없어지지 아니하였으리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끊어질 위기에 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가장 평범한 요구인 “나의 명령에 주의하라”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이와 같은 모습은 이미 광야에서부터 드러났습니다. 출애굽 1세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서 거기에 정착한 후 안정된 삶을 살면서 온 세계와 모든 민족에게 제사장 민족이자 선지자 민족으로서의 模本을 보여주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약속을 붙들고 인내하지 못했으며, 광야에서 있으면서도 애굽, 혹은 애굽 이상의 삶을 요구했습니다. 일주일, 길어야 한 달이면 끝날 광야를 지나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안정된 삶, 풍성한 먹거리, 외적의 침입 등이 없는 특별한 삶을 요구한 것이죠. 

그리고 자신들의 요구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애굽으로 돌아가자”며 하나님을 향하여 抗議 示威를 벌이기도 했고, 심지어 하나님 대신 다른 우상을 섬겨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고자 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바라신 것은 아주 평범한 것이었습니다. 잠시 동안만 광야의 어려움을 견디라는 것이고, 광야의 어려움은 장차 가나안에 들어가 보면 그들에게 결국 유익이었음을 알게 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평범한 것에 순종할 때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 원주민을 이기게 될 것이고, 거기서 아주 特別하고 非凡한 복을 얻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습관처럼 하나님의 평범한 요구를 묵살내지 외면했고, 자기들의 삶에서 특별한 것을 요구하고 추구하다가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轉落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광야 세대만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이사야 48장은 이사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 역시 그와 같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4절, “내가 알거니와 너는 완고하며 네 목은 쇠의 힘줄이요 네 이마는 놋이라.” 이사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서 자기 고집만 내세우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 광야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은 것처럼, 현재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이사야서는 남쪽나라 유다가 멸망하기 전에 주어진 말씀으로 유다의 멸망에 관한 말씀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의 멸망에 관한 예언의 말씀을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들이 광야 이스라엘, 즉 그들의 조상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평범한 요구를 묵살한 것이 다른 민족들과 달리 더 비참한 지경에 처하게 된 이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우리의 삶이 이렇게 힘들고 어려울까요? 왜 우리의 삶에 고난이 필수 과목처럼 따라다니는 것일까요? 왜 사람들은 한결같이 고난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하는 걸까요? 그리고 그것은 진실일까요? 성경은 그것에 대해서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의 고난에 대해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것은 그들이 주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그들은 그렇게 극심한 고난을 받는 민족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주의하였더라면 “평강이 강 같았겠고, 공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 자손이 모래 같았겠고, 몸의 소생이 모래알 같아서 그의 이름이 (하나님) 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였겠고 없어지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즉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라면 그들은 세계 열방 가운데서 가장 특별한 민족으로 자리 잡았을 것입니다. 

물론 성도의 삶에 예외적인 고난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 노예가 아닌 가나안 땅의 주인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즉 애굽의 땟국을 다 씻어내고 가나안을 정복할 민족으로서의 위용을 갖추기 위한 훈련장으로서 광야의 고난은 겪었습니다. 그리고 욥의 경우, 더 깊은 하나님 지식과 성숙한 신앙을 위하여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의 峽谷을 지나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 자신이 아닌 모든 인류의 대속을 위한 고난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이와 같이 훈련과 성숙을 위한 고난 프로그램이 여러분에게도 있을 수 있으며, 그리고 가족, 자녀들, 혹은 다른 사람을 위한 고난이 여러분에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은 말 그대로 예외적인 고난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대로 대부분의 고난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평범한 진리 즉, 말씀에 청종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아서 오는 것입니다. 본문 마지막 절인 2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하셨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성도가 이 땅에서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고난 가운데 사는 이유는 주의 명령에 주의하지 않아서, 즉 하나님의 명령을 외면하고 묵살하고 불순종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있어서도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고난이 이어지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이스라엘 백성이나 욥이나 예수님처럼 비범하게 보셔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남다른 고난을 주실 수도 있으나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여러분의 평범한 순종에 하나님의 비범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일상생활에 대해 원하시는 것을 순종하시고 일상의 순종에 비범한 복으로 갚아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3. 계속 되는 평범한 요구

오늘 본문 20절부터 22절은 장차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말씀입니다. 즉 다음 세대를 위한 말씀이라는 것이죠. 장차 그들이 처할 상황은 아주 특별할 것입니다. 나라는 망하고, 대부분의 백성들은 전쟁터에서 죽지 않으면,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가 뿔뿔이 흩어질 것이고, 그들이 떠난 땅에는 이방인들이 들어와 살게 될 것입니다. 즉 앞으로 그들에게 일어날 상황은 아주 특별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런 상황에 처한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요구 사항도 특별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결코 특별하지 않습니다. 

“너희는 바벨론에서 나와서 갈대아인을 피하고 즐거운 소리로 이를 알게 하여 들려주며 땅 끝까지 반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그의 종 야곱을 구속하셨다’ 하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막으로 통과하게 하시던 때에 그들이 목마르지 아니하게 하시되 그들을 위하여 바위에서 물이 흘러 나게 하시며 바위를 쪼개사 물이 솟아나게 하셨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장차 하나님께서 포로 된 이스라엘을 다시 돌아오게 하실 텐데, 그때 돌아올 자들의 할 일이 한 가지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라는 상황은 그들의 조상들이 애굽에 있을 때의 상황보다 훨씬 심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돌아오게 하신 것처럼 바벨론에서도 돌이키실 텐데, 그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千千萬萬의 소와 양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리는 것이나, 하나님께 특별한 서원을 하는 것이나, 특별한 헌신 봉사를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바라신 것은 오직 하나, ‘자신들을 돌이키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을 온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포로 귀환 당시 이스라엘은 그야말로 집도 절도 아무 것도 없는 상황이었고, 무엇 하나 회복의 실마리나 터전이 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앗수르에 의해서 북 이스라엘이 망하고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갔으며, 바벨론에 의해서 남유다가 망하고 그 백성들 역시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포로 기간 중 역사의 주인은 페르시아로 바뀌어져 있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그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간 자들, 이스라엘의 포로에 대한 책임 있는 자들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나라와 민족의 처지를 기억하고 그들의 회복을 위하여 수고할 사람, 그리고 그 가능성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이 페르시아 왕에 의해 기억되어지고, 그들의 조국 땅을 밟아 거기에 성전을 세우고 성벽을 쌓은 모든 일은 인간의 힘이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힘이었습니다. 즉 하나님 스스로 바벨론 포로 귀환을 통해 당신의 존재와 하신 일을 드러내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굳이 하나님이 하신 일과 그 이름을 선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다들 아는 사실이 될테니까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런 평범한, 아니 아주 쉬운 일을 요구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평범하고 쉬운 말씀에 순종하면 주실 복에 대해서까지 약속하고 있습니다. 21절,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막으로 통과하게 하시던 때에 그들이 목마르지 아니하게 하시되 그들을 위하여 바위에서 물이 흘러 나게 하시며 바위를 쪼개사 물이 솟아나게 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예전 조상들이 광야를 지날 때와 비유하면서, 장차 포로에서 돌아오는 이스라엘에게도 그와 같은 복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포로에서 돌아올 때 “목마르지 아니하게 하실 것”이며, 그들이 포로에서 돌아오는 험한 여정에 있을 때, “그들을 위하여 바위에서 물이 흘러 나게 하실 것”이며, 그들이 돌아오는 길 앞에 큰 바위가 가로 막고 있으면 그 바위를 쪼개시어 길을 만들어주실 것이고, 그들이 돌아오는 길에 마실 물이 없으면 “바위를 쪼개사 물이 솟아나게”하실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알고 그 이름을 드러내며 사람들에게 알릴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남다른 복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는 것이지요. 여러분 이해가 되십니까? 포로라는 아주 특별한 상황에 있게 될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것이었습니다. 네가 포로로 있다가 돌아오게 될 때에 “여호와께서 구속하셨다”라고 세상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반포하라! 이것이 그들에게 요구하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사야 당시나 장차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특별하고 비범한 그 무엇이 아니었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것, 즉 그 말씀에 청종하고 순종하는 것과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널리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오늘을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요구하시는 것도 그와 같이 평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평범의 대가는 지극히 비범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평범한 요구를 묵살하고 외면함으로서 남다른, 즉 비범한 고난에 처했던 이스라엘을 보시면서,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바라시는지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평범한 하나님의 요구를 외면하고 계속적으로 하나님께 “비범한 것”, “남다른 것”, “특별한 것”을 요구해 왔던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비범해지기 원한다면, 하나님의 지극히 평범한 요구에 순종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하여 그 말씀을 실천하며 사시고, 주님의 이름을, 그 구원의 도리를 널리 전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만 산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비범하게, 특별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4. 평범한 것에 순종하여 비범한 것으로 받는 자

말씀을 맺겠습니다. 

경기도 시흥에 있는 <한가족교회>를 담임하시는 황대연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목사님의 교회가 한참 공사 중일 때, 목사님은 건축 비용을 아끼려고 낮에 시간을 낼 수 있는 성도들을 모아 그들과 함께 먼지를 뒤집어써 가면서 일을 거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한 남자 성도가 목사님에게 “목사님, 오늘 저녁은 제가 대접해 드리겠습니다.”라고 제의했습니다. 그의 제안에 따라 몇 남자 교우들과 목사님은 그가 안내하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들이 간 곳은 어느 근사한 한정식 집이었는데, 풀코스로 나오는 것이 1인당 몇 만원을 호가하는 고급 음식점이었습니다. 메뉴판을 들여다보던 목사님은 “무척 비싸네요!”라고 자신도 모르게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목사님, 더운데 애쓰시는 것을 보고 오늘은 맛있게 드시라고 일부러 이리로 모셨습니다.”라고 하면서, 말릴 틈도 없이 그 집에서 가장 비싼 음식을 시켰습니다. 목사님은 그때까지 그렇게 풀코스로 나오는 한정식을 먹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그에게 “돈을 너무 많이 쓰셔서 어쩌지요?”라고 하자, 그 성도는 “하하, 목사님,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법인카드를 사용합니다. 회사에서 제게 쓰라고 준 것이지요.”라고 했습니다. 그는 어느 기업의 중견간부였습니다. 

그렇게 식사와 함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낸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목사님에게 계속 들었습니다. 그 성도가 너무 많은 돈을 지출한 것이 마음에 걸렸고, 무엇보다 회사의 법인카드를 사용했다는 것이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음 날 그 성도를 불러 교회를 사랑하고 목사를 사랑하는 그 마음에 감사를 표하고, 저녁식사가 맛있고 즐거웠었노라고 말한 후, 봉투를 하나 건넸습니다. 어리둥절해하는 그에게, ‘목사로서 회사 법인카드로 식사를 하는 것은 경우가 아닌 것 같아 마음에 부담이 되었노라’고 한 후, ‘오해는 마시고 제가 원래 좀 고지식하니까 이해하시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럼요. 그렇고말고요. 목사님이 고지식하지 않으면 누가 고지식합니까? 그것은 제 앞으로 나오는 판공비였습니다. 하지만, 목사님 말씀이 무슨 뜻인지는 잘 알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해가 된 듯 씨익 웃으며 봉투를 받아 넣습니다. 며칠 후, 주일 아침이었습니다. 평소보다 일찍 교회에 온 그 성도의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목사님은 ‘엊그제 저녁 식사비 때문에 마음이 상했나보다’ 하고는 별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목사님에게 다가와 불쑥 봉투를 내밀었습니다. “목사님, 저도 계산 하난 분명한 놈입니다. 우리 더치페이 하십시다. 목사님 것은 목사님이 내십시오.” 자기를 가리켜 ‘놈’자까지 써가면서 뱉듯이 말을 하는 그는 어느새 얼굴이 붉어져 있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목사님은 말없이 봉투를 받았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봉투를 들여다보니 자신이 주었던 식사비 봉투인데, 목사님의 식사비를 제외한 나머지가 그대로 들어있었습니다. 

‘아, 그 분이 젊은 목사 앞에서 자존심이 무척 상하셨나 보다!’하면서 그가 교회를 떠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온 가족이 함께 나오는 가정이고, 남자 교인이 드문 건축 중인 교회에서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성공한 남자 교인 하나 잃는 것이 정말 아쉬웠지만, 그 목사님은 포기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주일, 여전히 그 성도가 교회에 왔습니다. 다른 때보다 더 일찍 예배당에 나온 그가 주보를 펼쳐들고 꼼꼼히 광고까지 읽으며, 그 날 설교본문을 미리 찾아 읽고 있었습니다. 

다음 주일도, 또 그 다음 주일도 … 심지어 주일 낮예배만 아니라, 밤예배와 수요예배까지! 그래서 그 목사님은 어느 날 그의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남편께서 별 말씀 안 하시던가요?” “글쎄요? 그이가 얼마 전부터 갑자기 사랑에 빠졌다네요. 생전 그런 말 않는 사람이 우리 교회가 제일 좋고, 우리 목사님이 제일 좋다네요. 참 별일이 다 있죠!” 순간 목사님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말씀대로 행하고 말씀대로 가르쳤더니 그 성도가 더 신실한 주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이나 여러분들이나 똑같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아주 평범하고 단순하고 쉬운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 그대로 행한다면, 살아계시고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전하며 산다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비범한 복, 특별한 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볼 때 이 평범한 하나님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마찬가지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여 실천하는 삶,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자랑하고 널리 알리는 삶, 너무 쉬운 것이고, 또 그동안 수도 없이 들어온 말씀이고, 지극히 평범한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이렇게 살지 않습니다. 물론 여러분들도 이렇게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렇지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성도의 삶에 고난에 쉼 없이 뒤따랐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역시 하나님의 평범한 요구를 묵살함으로 그것 때문에 고난을 당하면서도 ‘고난은 인생의 필수과목이다’라고 외치지는 않았습니까? 고난은 필수과목이 아닙니다. 말씀에 청종하고 순종하는 삶,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고 알리는 삶이 여러분의 필수과목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 때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고난은 면케 하시고 예비하신 복으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대로 살아 이스라엘과는 다른 길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넘치는 길로 걸어가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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