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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좋은 열정, 나쁜 열정 (벧전 3: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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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열정, 나쁜 열정
벧전3:8-14
(2011/7/10)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한 마음을 품으며, 서로 동정하며, 서로 사랑하며, 자비로우며, 겸손하십시오. 악을 악으로 갚거나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말고, 복을 빌어 주십시오. 여러분으로 하여금 복을 상속받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을 보려고 하는 사람은 혀를 다스려 악한 말을 하지 못하게 하며, 입술을 닫아서 거짓말을 하지 못하게 하여라.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며, 평화를 추구하며, 그것을 좇아라. 주님의 눈은 의인들을 굽어보시고, 주님의 귀는 그들의 간구를 들으신다. 그러나 주님은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서는 얼굴을 돌리신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열심으로 선한 일을 하면, 누가 여러분을 해치겠습니까? 그러나 정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여러분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의 위협을 무서워하지 말며, 흔들리지 마십시오.]

• 성 베네딕도 축일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저 남녘 땅 부산에서 들려오는 외침으로 인해 마음이 먹먹해지는 나날입니다. “너희는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사40:1) 하셨던 주님의 말씀이 쟁쟁하게 들려옵니다. 부디 이 땅에서 모든 이들의 살 권리가 존중되고, 거리 도처에도 울부짖는 이들의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세상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7월 11일은 사람들이 서방교회 수도원 운동의 아버지라 부르는 성 베네딕도(St. Benedict, 480-547)의 축일입니다. 그는 이탈리아의 중부 지방에 있는 누르시아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로마의 행정관이 되기 위해 필요한 교양을 익히기 위해 유모와 함께 로마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서로마제국이 몰락한 후에 찾아온 정신적 공허 때문에 로마에는 환락과 퇴폐가 만연하고 있었습니다. 예민한 젊은이였던 그는 로마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신앙에 모든 것을 걸기로 작정하고 엔피데라는 시골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고독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 마을의 수비아코 계곡에 있는 천연동굴에 들어가서 그는 꼬박 3년을 머물며 수도생활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지금도 그 동굴을 ‘사크로 스페코’(Sacro Speco), 즉 거룩한 동굴이라고 부릅니다. 

일전에도 한번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만 저는 그 동굴에 얽힌 이야기 하나를 참 좋아합니다. 한 미친 여자가 정신을 완전히 잃은 채 산과 계곡, 숲과 들판을 온통 밤낮으로 돌아다니다가 지쳐서 쉬어야 할 때가 되어야 조용해지곤 했습니다. 어느 날 그 여자는 정신없이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베네딕도의 동굴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들어가 머물렀는데, 아침이 되자 여인은 정신이 온전해졌고 이후에는 회복한 건강을 지키며 여생을 살았다고 합니다(그레고리오 대종, <베네딕도 전기>, 제38장). 저는 교회야말로 ‘사크로 스페코’, 즉 모든 이들의 정신이 온전해지는 거룩한 동굴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수비아코에 성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았고, 많은 사람들이 베네딕도를 찾아왔습니다. 인근에 있던 수도자들이 그를 찾아와 원장이 되어달라고 부탁했고, 베네딕도는 그 청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비코바로(Vicovaro) 수도원은 거룩한 삶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규율은 문란했고, 수도자들의 생활도 퇴폐에 찌들어 있었습니다. 베네딕도는 아주 엄격한 수도규칙을 만들어 수도자들을 훈련시키려 했습니다. 수도자들의 불만이 높아졌고, 어느 날 그를 살해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가 마실 포도주에 독약을 탄 겁니다. 

베네딕도가 그 포도주를 축성하기 위해 성호를 긋는 순간 그 잔이 깨졌고, 그는 음모를 알아차리고는 수비아코로 돌아갔습니다. 준비가 되지 않은 이들을 규율로 변화시킬 수는 없다는 소중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과 함께 새로운 수도원을 만들었고, 올바른 금욕생활과 기도, 공부, 육체노동, 공동체 생활의 원리를 담은 <베네딕도 규칙>(Regula Benedict)을 반포했습니다. 그것이 다른 모든 수도규칙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베네딕도 규칙이야말로 교회 영성과 서유럽 문화 진흥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합니다.

• 수많은 기적 이야기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황 가운데 하나로 기억되는 그레고리오는 베네딕도의 전기를 남겼습니다. 그는 베네딕도의 생애 가운데 나타난 일화, 특히 기적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의 삶을 재구성했습니다. 베네딕도의 전기를 읽다보면 성경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기적이 그를 통해 나타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산 정상에 있는 바위에서 물이 솟아나오게 했다든지, 제자로 하여금 물 위를 걷게 했다든지, 빈 통에 기름을 가득 차게 했다든지, 거대한 바위를 기도로 가볍게 했다든지…. 상식적으로 보면 납득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기적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베네딕도의 동생인 스콜라스티카는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봉헌했는데, 일 년에 한 번씩 오빠를 만나러 오곤 했습니다. 어느 해 베네딕도는 수도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가서 누이를 만나 온 종일 성스런 대화를 나누고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밤이 되었습니다. 동생은 오빠에게 “이 밤에 저에게서 떠나가지 마시고 아침까지 하늘에 속한 삶의 기쁨에 대해 같이 이야기를 나눕시다” 하고 청했습니다. 

하지만 베네딕도는 수도원 밖에서 밤을 지샐 수 없다며 거절했습니다. 동생은 식탁 위에 손을 얹고는 머리를 숙인 채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 순간 엄청난 천둥과 번개가 치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습니다. 수도원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베네딕도는 할 수 없이 동생과 밤새도록 영적 생활에 대한 성스러운 대화를 마음껏 나누었다고 합니다. 

그레고리오가 베네딕도를 통해 일어난 기적 이야기들을 들려준 까닭은 기적이야말로 성인들의 덕을 세상에 드러내는 통로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기적은 또 연약한 신자들의 신앙을 굳게 하기 위해서도 필요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매일 접하고 살아가는 모든 일들이 기적인데도 우리는 그 기적을 습관적으로 대하곤 합니다. 마음의 눈을 뜬 사람이라야 온 세상에 가득 찬 하나님의 숨결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우리가 ‘아’ 하고 경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현존 앞에 서있는 것입니다. 그레고리오는 기적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감미로우심을 맛보게 되고, 그분의 영광을 보게 된다고 말합니다. 

• 성도다운 삶

오늘 우리가 읽는 본문 말씀은 베네딕도의 성구라고 해도 좋을 말씀입니다. 그는 이 말씀을 자기 수도생활의 등불로 삼았습니다. 베드로는 폭력과 증오와 질시가 판을 치는 세상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세상적인 반응과는 ‘다른 삶’을 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8절에서 9절까지가 성도들이 택해야 할 다른 삶의 내용입니다. 베드로는 먼저 ‘한 마음을 품으라’고 말합니다. 한 마음이 된다는 것은 이견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동화시키려 하는 것은 정신적 억압이거나 폭력입니다. 생각이 다르다고 하여 등을 돌려서도 안 됩니다. 일단 자기 견해를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이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인지를 물어야 합니다. 그것이 한 마음됨의 기본입니다.

성도들은 또한 “서로 동정하며, 서로 사랑하며, 자비로워야” 합니다. 여기서 ‘동정’이라는 번역어는 좀 적절치 않은 것 같습니다. 동정이란 단어는 ‘남의 불행을 가엾게 여겨 온정을 베푼다’는 뜻으로 주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울의 말로 하자면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롬12:15)가 됩니다. ‘자비로우라’는 말은 이웃을 부드러운 마음으로 대하라는 말입니다. 우리 마음에는 쇠붙이가 참 많습니다. 남을 찌르고 그 쇠붙이에 자기도 찔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처투성이입니다. 반면 마음 따뜻한 사람, 온유한 사람과 만나면 우리 마음도 부드러워집니다. 그들은 있음 그 자체로 세상을 치유하는 이들입니다.

베드로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백성뿐만 아니라 적대자들까지도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악을 악으로 갚거나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말고, 복을 빌어 주십시오.” 이 메시지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5:44) 하신 주님의 명령과 일치합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것만이 폭력의 고리를 끊는 길입니다. 물론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모욕하는 사람들, 폭력을 사용하는 사람들보다 더 큰 정신을 갖추어야 합니다. 험한 산을 넘기 전에 마음을 산보다 높게 만들었다는 선다씽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그런 이들을 위해 복을 빌어주는 것이야말로 진정 복된 삶의 비결이라고 말합니다. 

살다보면 우리 마음에 상처를 주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사사건건 나와 충돌하는 사람과 함께 지내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저는 해병대 총격사건으로 희생된 장병들과 그 가족들, 또 동료들을 살해한 그 장병 때문에 마음이 아픕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범으로 구속된 정모 이병 때문에 마음이 아픕니다. 신학대학에 재학 중이었던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입대 6개월 만에 동료들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모질게 변한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내무반에서 겪었던 가혹행위와 성적․종교적 모욕은 그의 속에 잠들어 있었던 어두운 본능을 일깨웠던 것입니다. 극한적인 상황에 몰리면 누구라도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좋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상대방의 가슴에 깃든 따뜻한 본성을 호출하는 사람이 아닐까요? 그와 만나면 마치 봄볕에 꽃이 피어나듯 내 속에 있는 선한 기운이 싹트도록 하는 사람 말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 괴롭히는 사람과 함께 지내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을 용납하고 사랑으로 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럴 때만 그는 자기 속에 있는 선한 본성에 눈을 뜨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 생명을 사랑하는 한다는 것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기독교인으로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늘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칫하면 옛 삶의 관성에 따라 살기 쉽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자각이라도 해야 조금씩이라도 더 나은 삶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박해시기를 살아가는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해 시편 34편 12-14절을 자유롭게 인용하고 있습니다. 시편은 ‘인생을 즐겁게 지내고자 하는 사람, 좋은 일을 보면서 오래 살고 싶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노래하고 있는데, 베드로는 그것을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을 보려고 하는 사람’으로 바꿔놓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좋은 날을 보고 싶은 사람입니다. 생명을 사랑하는 것은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의 본능이지만, 그것은 때로 의지적인 선택이어야 할 때가 많습니다. 어떤 삶의 악조건 속에서도 희망을 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세상에는 늘 삶을 짐스럽게 여기면서 겨우겨우 견뎌가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순간순간을 즐기며 살아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삶의 주도권을 맡기는 것입니다. 맡기고 나면 평안이 찾아옵니다. 찬송가 345장 5절은 하나님과 더불어 시련을 겪어낸 이의 든든함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모진 바람 또 험한 큰 물결이 제 아무리 성내어 덮쳐도
권능의 손 그 노를 저으시니 오 잔잔한 바다 잔잔한 바다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 좋은 날을 보려고 하는 사람이 꼭 명심해야 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혀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악한 말을 하지 않는 것과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만드셨다고 고백합니다. 참 놀라운 고백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도 말로 세상을 짓습니다. 우리가 하는 말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만듭니다. 

오늘 여러분이 사용하신 말을 생각해보십시오. 살리는 말이 있고, 죽이는 말이 있습니다. 세우는 말이 있고, 허무는 말이 있습니다. 관계를 이어주는 말이 있고, 끊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를 머금게 하는 말이 있고, 수심을 안겨주는 말이 있습니다. 악한 말은 악한 세상, 험한 세상을 만듭니다. 거짓말은 사람들 사이의 신뢰의 다리를 무너뜨립니다. 성도의 말은 살리는 말, 세우는 말, 이어주는 말, 미소를 머금게 하는 말이어야 합니다. 

• 평화의 일꾼

성도는 또한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며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인생은 ‘벗어남’과 ‘지향’ 사이에서 이루어집니다. 부자유, 억압, 미움, 교만, 탐욕의 자리를 벗어나 자유, 존중, 사랑, 겸손, 절제의 자리를 향할 때 우리 삶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머금게 됩니다. 성도는 혼란의 시대에 평화의 기운을 불어넣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사람의 사람됨은 누군가의 필요에 응답하고, 가장 곤란한 처지에 있는 이의 이웃이 되어주는 데 있습니다. 연약한 이들을 넉넉한 사랑으로 부둥켜안는 이들이야말로 평화를 만드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성공의 사다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온정주의를 버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가까이 있는 이들은 잠재적인 적이 됩니다. 자기의 억압된 감정을 풀기 위해 다른 이들에게 모욕을 가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이들은 사실은 허약한 영혼들입니다.

신발을 벗어놓은 모습이나 문을 여닫는 모습, 설거지 해놓은 것을 보면 그의 사람됨을 알 수 있다 합니다. 말 한마디만 들어도 그의 사람됨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질척질척한 이 땅에 하늘의 빛을 끌어들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희망과 열정이 우리 속에서 꺼지지 않을 때 우리는 더 나은 사람의 길 위에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세상의 아픔에 눈 감고, 오로지 나의 안위와 평안과 기쁨을 구하는 이들은 자기 상실의 길 위에 있다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열정을 품고 살고 있습니까? 참 사람됨의 열정입니까? 아니면 출세를 향한 열정입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사랑한다는 말이고, 예수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의 일을 자기 일로 받아들인다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모신 형제자매의 세상을 꿈꾸셨던 주님은 지금 우리를 통해 그 꿈을 이루기 원하십니다. 베네딕도라는 한 성인이 출현하면서 혼란과 갈등 속에서 갈 길을 찾지 못했던 유럽 사회가 마땅히 가야 할 길을 되찾게 되었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뜻대로 변화되어 생명의 길을 가리켜 보이는 이정표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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