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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산지를 주소서! (수 14:6-12) - 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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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지를 주소서! (수 14:6-12)

요즘 많은 분들이 교회에 들어오면서 제 사진 “수지 선한목자교회로 오세요!”를 보시면서 깜짝 놀라신다고 합니다. 지하에 내려와도 또 서 있습니다. 저도 볼 때마다 깜짝 놀랍니다. 그러니 교우들은 오죽 하시겠나 싶습니다. 이제 분립 개척을 앞두고 있습니다. 분립 개척을 준비하면서 제 마음 속에는 좀 복잡한 심경이 있었습니다. 

요즘 교회 개척이 쉽지 않잖아요. 막상 나가려 하니 ‘잘 할 수 있을까? 여기서 주옥같은 설교를 들으시다가 제 설교 들으면 마음이 어떨까?’ 갑자기 비교 의식의 들면서 ‘개척 교회가 초라할텐데. 따라 나온 교우들의 마음에 얼마나 비교가 될까?’ 하는 생각이 나는 겁니다. ‘뭐 그런 생각을 하시나?’ 생각 하실지 모르겠지만 한 번 개척해 보세요.

그 동안 장소를 정하는 것, 또 지방에서 설립허가가 되는 것 등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았습니다. 정말 순간순간 ‘이거 안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끝에 가서 일이 풀어지고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구나! 하는 확신을 얻었습니다.(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 : 편안하게 안하시고 다룰 것은 다루시고, 겸손케 하시고, 전심으로 기도하게 하시다가 끝에 가서 됨) 솔직히 잘 될까? 하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일인가? 그것입니다. 주님이 함께하시는 일이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며 한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존비비어는 자신의 친구 중에 미국 동부에서 매우 부흥하는 교회를 섬기는 자신의 친구이야기를 했습니다. 친구의 교회는 은혜가 부어지는 설교로 급속히 부흥하여 아름다운 예배당도 건축을 했습니다. 교회가 부흥일로에 있던 어느 날 기품 있어 보이는 백발의 신사가 예배에 나오기만 하면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눈물이 그냥 은혜를 받아서 흘리는 눈물이 아닌 듯 보였습니다. 

어느 날 그 신사가 와서 고백하기를 하나님이 자신에게 1981년에 바로 이 도시에 교회를 개척하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 자신이 목회할 교회의 예배당을 꿈속에서까지 보았다는 것입니다. 꿈이 어찌나 생생하던지 전문가를 불러 꿈속에서 본 건물의 조감도를 그리게 할 정도의 생생한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시작을 하려하니 마음에 부담이 커져서 결국 포기했고 사업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하고는 꼬깃꼬깃 접은 종이를 펴 보이는데 81년에 꿈속에 보았던 교회의 조감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조감도는 지금 그 교회 건물과 정확히 똑같아 충격적이었다고 합니다. 그 노신사가 왜 연신 눈물을 흘렸는지 알 것 같습니다. 순종했어야 하는 것인데요.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이 내게 부담스러운가? 힘든가?’ 가 아닙니다. 우리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가져야 할 확신은 ‘나는 지금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하나님이 가라고 하는 길에 순종하여 가고 있는가? ’ 입니다. 이 확신만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가장 복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국 주 앞에 설 그 날을 준비하며 사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준비될 때 가장 복된 것이지요.

그러나 내가 지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있지 않다고 여겨진다면 육신은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고 편안할지 몰라도 뭔가 속 깊은 중심에는 말 못할 불편합니다. ‘이게 아닌데, 지금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마음을 잡지 못합니다. 참 불쌍한 사람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에 그냥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각 사람에게 그 사람을 통해 이루실 사명도 함께 주셨습니다. 그것은 소명입니다. 

나중에 우리가 주 앞에 서면 그것에 대해 주님께 반드시 보고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소명의 길에 순종하고 서 있을 때라야 비로소 평안하게 됩니다. 그것을 이루는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영혼은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 주님은 제게 갈렙에 대해 살펴보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갈렙은 바로 그 소명으로 나아가는 삶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갈렙은 그렇게 유명한 인물도 아니고 많이 등장하지도 않지만 아주 깊은 여운을 주는 인물입니다. 

갈렙이 처음 등장하던 때는 오늘 본문이 아니고 45년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이제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주시기 위해서 열두 정탐꾼을 보내서 땅을 정탐하게 했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땅이었습니다. 이제 들어가기만 하면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열 명의 정탐꾼들이 매우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정탐꾼들이 보고했던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잘 보시면 45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이 어느 지역 때문에 낙심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민13;28“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 

민13:33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이스라엘 백성이 아주 낙심하고 메뚜기 타령하면서 ‘우린 도저히 저기 못 들어간다.’고 했던 그 적군이 누구였는지 아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로 거인 족속 아낙 자손과 그들이 사는 헤브론 산지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낙 자손과 그들이 사는 견고한 산지를 보고 그만 기가 질렸습니다. 10절 정탐꾼의 부정적인 보고를 듣고 이스라엘이 충격과 낙심에 빠졌을 바로 그 때 갈렙이 전면에 등장합니다. 

민13:30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  

민14: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 

“우리 그 땅을 취하러 나가자. 우린 능히 이긴다. 그 땅에 아낙 거인이 살고 아무리 견고해 보여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우린 이긴다.” 목이 터져라 외쳤습니다. 그러나 이미 불신으로 기울어버린 백성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갈렙은 동족의 불순종의 죄를 지고 40년을 광야에서 유리하게 됩니다. 40년이 흐르는 기간 동안 갈렙은 성경의 전면에 거의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은 흘러 출애굽 1세대가 다 죽고 하나님의 약속대로 출애굽 2세대들이 가나안에 들어왔습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이 진행되면서 12지파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가나안의 많은 땅들을 하나하나 점령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14장입니다. 14장은 이제 정복 전쟁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이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땅은 점령했지만 오늘 성경에 보니 아직 정복하지 않는 땅이 있었습니다. 어디일까요? 바로 아낙 자손이 사는 헤브론입니다. 잘 기억을 더듬어 보십시오. 여기가 어디인지, 역사적으로 뭔가 결정적인 문제를 일으켰던 바로 그 지역, 그 거민이었다는 것을 감 잡으실 것입니다. 아낙 자손이 거주하는 크고 견고한 성읍 헤브론. 이곳은 바로 45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를 압살시켰던 바로 그곳입니다. 참 역사는 반복됩니다. 

45년이 지난 지금 그 때와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지역은 점령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아낙 자손, 헤브론 산지는 전혀 엄두를 못 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복 전쟁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에서도 여전히 이곳은 미 점령지대로 남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85세 된 유다 지파의 갈렙이 당시 민족 지도자인 여호수아 앞에 다시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과거를 회상하며 이야기 합니다. 

14;7“내 나이 사 십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하게 하였으므로”

14;9“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14;12“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갈렙의 이 말에는 중요한 세 가지 논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바로 이 지역이 갈렙이 45년 전에 정탐했던 땅 바로 그곳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그 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분명희 네가 밟은 바로 이 땅 헤브론은 영원히 네 것”이라고 말씀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그것을 분명히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그러니 나는 반드시 그 땅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리 아낙자손이 살아도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소명이라는 것입니다. 

참 가슴 뜨거운 모습입니다. 갈렙은 지금 85세입니다. 당시 최고령자입니다. 지금 여기 이 연세되신 교우는 거의 안 계실 것입니다. 솔직히 인간적으로는 헤브론 산지를 도전하지 않는 게 갈렙에게는 훨씬 더 편안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크고 강한 산지. 젊은 사람도 다 기가 질리는 거인 족속이 사는 그 산지를 내게 달라는 것입니다. 갈렙이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의 소명 때문이었습니다. 

갈렙은 지금 자기가 있는 자리가 하나님의 계획하신 수준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자신은 잘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너는 네가 밟았던 헤브론 산지를 얻게 될 것이다. 너는 아낙 자손을 물리치게 될 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날에 약속하신 자리는 헤브론 산지, 아낙 자손입니다. 이 부르심이 갈렙의 심장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갈렙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곳에 가기까지 늙을 수도 없었고 죽을 수도 없었고 그 땅을 포기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것이 갈렙의 소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소명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자리입니다. 연어가 알을 낳기 위해 마지막 자기의 소명을 다하기 까지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가려고 하는 것을 보면 눈물겹습니다. 미물일지라도 자신의 소명을 이루기 전까지는 그의 본능이 편치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도 똑같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부유하고 안전한 자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이 부르신 그 자리로 나아갈 때 평안한 것입니다. 비록 그 일이 오늘 말씀처럼 인간적으로는 넘기 어려운 크고 견고한 산지일지라도, 그것을 해 내는 것은 마치 거인 아낙 자손과 싸우는 것과 같은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일 같아 보여도 ‘주님이 함께 하시면 나는 할 수 있습니다.’ 라고 도전할 때 행복한 것입니다.
(이상춘장로님 여주교도소).

주님이 이 갈렙에 대한 말씀을 전하라는 마음을 주시면서 우리 자신의 삶을 깊이 살펴보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세상에 보내지 않았고 우릴 통해 뭔가를 하도록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때인가 여러분에게 소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위해 기도했고 또 어떤 때는 준비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말씀 드린 노신사처럼 현실을 따지다가 점차 마음이 약해지고 ‘나는 도저히 못해. 할 수가 없어. 내 여건이 안 돼.’ 그러다가 결국 그 소명의 길을 잃어버리고 영적으로 방황하는 분이 계시다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 소명의 길에 발을 내 딛고 있는가?’ 우리 자신에게 깊이 질문해야 합니다.  

이제 저는 기도해 주시는 것처럼 3주 뒤면 분립 개척을 나갑니다. 하나의 교회를 세우는 일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요즘 절로 듭니다. 그러나 정말 이 땅에 우리 선한목자 교회처럼 건강한 교회가 세워지는 일은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하고 귀중한 일입니다. 선한목자 교회에서 6년 가까이 있으면서 가장 크게 배운 것은 “정말 예수님이 이끄시면 힘들고 어려워도 우리는 순종하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님이 이끄시지 않으면 끝장입니다.” 담임목사님과 장로님들이 이런 절박한 마음으로 사활을 걸 듯이 주님께 순종했을 때 주께서 교회를 이렇게 영광스럽게 사용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수지에도 예수님이 이끄시는 그런 교회가 세워지길 원합니다. 갈렙이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했던 것처럼, 제 영혼도 하나님께 정말 그런 아름다운 예수님의 교회가 세워지게 하소서! 그 산지를 내게 주소서! 가슴 뜨겁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저는 그 높고 거룩한 산지까지 가길 원합니다.

그런데 저 자신을 생각하면 도무지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런 교회를 세울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정말 그런 능력이 됩니까?” 질문을 한다면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저 사진 속에서 어색한 웃음으로 “수지 선한목자교회로 오세요!” 이것 밖에 못합니다. 주님은 제게 그런데 “그냥 나와 함께 가자!” 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지난 월요일에 월요 새벽전도를 하기 위해 전도 티슈가 가득 담긴 가방을 들고 복정역으로 갔습니다. ‘티슈가 왜 이리 많나?’ 하면서 가는데 찬양이 나왔습니다. “부르신 곳에서 나는 예배하네! 어떤 상황에도 나는 예배하네!” 또 감동이 되더라구요. ‘아 그냥 예배하는 거구나! 전도가 아니라 그냥 주님께 찬양하고 주님께 예배하는 거구나! 분립 개척도 이런 거구나!’ 주님 바라보고 주님 찬양하고 겸손히 주님 손 붙잡고 주님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됩니다. 

제가 하는 일은 정말 주님만 바라볼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오신 교우들도 주님을 바라보게 할 것입니다. 역사는 주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목사님이 자주 하시는 말씀이 선한목자 교회가 여기까지 온 것은 이렇게 되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라 주님 바라보고 주님이 하라고 하는 일을 순종하며 오니 여기까지 온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전부이고 주님이 길이십니다. 주님만 따라갑니다.

세울 교회를 위해 주님께 간절히 기도할 때 제 스스로의 계획이나 스스로의 열정이 아닌 주님은 세울 교회에 대한 뜨거운 꿈을 주셨습니다. 저에게는 복음에 대한 감격이 있습니다. 저는 모태신앙이 아닙니다. 우리 부모님은 예수님을 믿지 않으셨었습니다. 제가 어릴 적 사이가 너무 좋지 않아 헤어지셨습니다. 그런 것 때문에 제게는 열등감도 참 많았고 제가 건강하게 성장하기 어려운 문제 있는 요소들이 참 많았습니다. 저의 어릴 적을 생각해 보면 행복한 기억이 별로 없는 우중충한 흐리고 어두운 날씨같이 생각되어집니다. 

그런데 제게 복음이 왔습니다. 빛이신 예수님이 저를 만나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 제 삶은 정말 밝게 빛이 나게 되었습니다. 교회 가던 첫 해에 소명을 주셨습니다. ‘너 목사 되라!’ 제 삶의 이전 것은 다 지나 갔습니다. 저는 새 것이 되었습니다. 저는 복음이 능력이라는 것을 너무나 생생히 체험했습니다. 

어떤 여 목사님이 저를 가만히 보시더니 ‘예수 안 믿었으면 술 고주망태가 되었겠는 걸.’ 하셨습니다. 저는 ‘맞다. 아니 더 나쁘게 되었을 거야.’ 그런데 복음이 저를 구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무엇보다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저는 어떠한 인생이라도 이 복음을 만나면 얼마나 놀랍게 변할지 저는 압니다. 저는 복음으로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기 원합니다. 

주님은 교회 개척을 위해 기도했을 때 제게 ‘성령’에 관하여 제 영혼에 강조하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성령이 맘껏 역사하시는 교회를 세워라. 그냥 교회 마당에만 와도 성령의 임재를 느끼는 성령의 역사가 충만한 교회를 세워라. 영혼들이 성령에 대해 갈급해 하고 있다. 믿는 자들이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충만함을 맘껏 누리는 교회가 되게 하라.’ 이런 감동을 강하게 주셨습니다. 

제가 복음의 문을 열고 안에 들어와 보니 복음 안에 성령의 놀라운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무 살에 성령님이 제 삶의 중심에 들어오신 것 같습니다. 정말 놀라웠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하나님이 제 속에 계시다는 것이 느껴지고 하나님과 살아있는 교제가 매 순간 일어나고, 주님이 하라하는 것을 했을 때 놀랍게 쓰임 받는 것을 경험하면서 정말 가슴 벅차는 삶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은 모든 믿는 자가 반드시 누려야 할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입니다. 주님은 수지 선한목자교회가 그것을 더,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까지 받아 누리는 교회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작년 안식월 때 제 가슴을 뜨겁게 하는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스미스 위글스워스가 마지막 죽기 전에 했던 중대한 예언이라고 합니다. 위글스워스가 이런 예언을 했습니다. 본인 사후에 세상에는 세 번의 큰 부흥의 파도가 밀려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먼저는 성령의 은사가 넘쳐나는 부흥이고 다음은 말씀의 부흥이 넘쳐나는 부흥이고 마지막에는 가장 큰 부흥인데 성령의 은사와 말씀이 조화된 부흥이 세상을 휩쓸고 주님이 오실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역사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이 둘이 조화된 부흥을 마지막에 주실 것이라는 것인데 제가 “주님 저요. 주님 그거 제 것입니다. 제가 그곳에 서게 하소서.” 기도가 드려졌습니다. 화요일에 기도하면서 주님께서 많은 분들에게 그런 기도를 시키셨습니다. 무엇보다 어린 아이들에게 성령이 임하여 아이들이 하나님께 사로잡혀 마지막 때를 준비하는 기도를 시키실 때 그렇게 뜨거웠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선물은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큽니다. 수지 선한목자 교회는 그것을 다 누리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그 산지까지 취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누리는 성도들이 온 열방에 나가 주님의 소원인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지는 그 일을 위해 삶을 드리고 온 땅을 가득 밟다가 그곳에서 주님 오시는 날 주님을 맞이하게 하는 것이 저의 뜨거운 기도제목입니다. 뭐가 될 것 같지요?

“그렇다면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이룰 것입니까? 얼마나 많은 교회가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목사님들이 그런 계획을 가지고 시작하는데 막상 성공하지 못하잖아요. 목사님은 잘 할 수 있겠어요?”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못합니다. 제가 하는 것은 오직 예수님만 바라볼 것입니다. 오늘 갈렙이 85세나 되어 그 두려운 아낙 자손이 사는 산지를 달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실력을 믿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갈렙이 바라봤던 것은 오직 변하지 않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자신의 몸이 늙은 것이지 하나님은 변하지 않았잖아요. 

저도 예수님을 바라볼 것입니다. 함께 온 교우들도 예수님만 바라보게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은 오직 주님 안에 있습니다. 이제 그곳에 가면 외적으로는 이곳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없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이면 충분합니다. 주님 바라보고 주님께 순종하고 주님과 동행한다면 제게는 더 이상 성공과 실패가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소명의 길을 걷는 것 자체가 이미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작년 안식월 때 갑상선암 수술을 마치고 철원에 있는 한 기도원에 가서 기도했었습니다. 그 해 1월 철원은 영하 23도까지 내려갔습니다. 수술 후 마음은 여러 가지로 힘들었었습니다. 그래서 아직 목이 완전치 않았지만 왠지 서럽고 괴로워서 많이 부르짖어가며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는데 마음에 저 강단 앞쪽에 가서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방석을 들고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생각해 보니 주님이 저를 앞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기도하는데 그렇게 눈물이 났습니다. “주님, 제 앞길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를 인도해 주세요.” 앞이 보이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때 앞으로 해야 할 목회를 위해 주님이 기도시키셨던 것 같습니다. “주님 누구인지 모르지만 제가 앞으로 섬길 교회 그리고 성도들을 지켜 주세요.” 

기도하는데 무슨 의미인지 모르게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한 장면이 보이는데 제가 이 땅에서의 모든 사명을 다 잘 마치고 주님 앞에 서는 장면이었습니다. 저는 주님 앞에 감히 설 수 없어 주 앞에 그냥 엎드려서 울면서 “주님이 나를 인도하셨습니다. 내 밟는 발걸음마다 주님이 인도하셨습니다.” 하면서 주 앞에 엎드려 감사하면서 울고 있는 저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니 제 모든 인생이 주님의 인도 아래 있는 것입니다. 제 마음의 소원은 이렇게 주님 바라보면서 제 소명의 길을 다 마치고 주 앞에서 서서 그 때봤던 그림처럼 주 앞에 한 없이 감사하면서 엎드려 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주님이 부르시는 소명의 길로 걸어가고 계십니까? 주님이 음성을 들려주실 때 순종하여 발걸음을 내딛고 계십니까? 아니면 자주 주저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소명의 길에 서 있지 못하십니까? 여기 지금 그렇기에 무기력해 있고 기쁨이 없고 두려움 가운데 있는 분이 있다면 우리 다시 주님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갈렙처럼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주님을 믿고 “그 날에 주께서 제게 감동하셨던 그 산지를 내게 주십시오.” 라고 담대히 고백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우리가 먼 훗날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우리는 잘 했다 칭찬 받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이곳에 방황하는 분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지쳐 있는 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찬양이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이 찬양을 하라는 감동을 주십니다.
우리 영혼이 다운되고 할 수 없다고 낙심될 때 주님이 하신다는 가사입니다.
(내 영혼 지치고 피곤할 때에 근심 걱정 내 맘 짓누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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