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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크리스챤의 격(格) (고전 13: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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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챤의 격(格) (고전 13:8-13)


언제쯤인가 국격(國格)이란 말이 나오고부터 개인의 품격에서부터 공동체의 격에 이르기까지 격(格)을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나라 모 신문사 기자 한 사람이 독일의 어떤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아이가 식당을 뛰어다니고 있었습니다. 이때 옆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중년신사가 그 아이를 잡고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사정없이 때리는 것을 보았답니다. 이때 그 아이의 엄마가 부끄러운 듯이 아이를 데리고 자기 식탁으로 황급히 가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나중에 기자가 그 중년신사에게 "남의 아이를 그렇게 때려도 되느냐?"고 묻자 그 사람이 "나는 그 아이를 때린 것이 아니라 장차 독일의 장래를 때린 것이라"고 했답니다. 

일찍이 토마스 홉스는 "인간의 자연 상태가 권리만능주의로 인하여 열악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권리만능주의가 공동체를 붕괴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6장 12절에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권리의식만 있고 의무의식이 없었다면 그 아이의 엄마는 당신이 뭔데 내 아이를 때리느냐고 했을 것입니다.

서울대 박효종 교수는 그의 수필에서 "민주사회는 권리의식과 더불어 발전해 온 사회"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개인의 권리를 인정하는데서 민주주의의 기초가 놓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그는 "권리라는 것은 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에 중점을 두는 것이지 그 일을 하는 것이 멋있다든지 우아하다든지의 모습을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어떤 일을 할 수 있다는 점만 가지고 사는 사회는 품격을 갖출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행위를 하는 것만으로 평가했지 어떤 방식으로 그 행위를 하느냐는 평가 대상에서 제외될 때가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같은 긍정이라도 부정이상의 긍정이 있고 같은 부정이라도 긍정이상의 부정이 있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태도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부정이든 긍정이든 그 태도가 거만하냐, 공손하냐, 간절하냐, 무관심이냐, 희생적이냐, 도둑심리냐 등의 태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문법적으로 보면 인사한다는 것은 동사적 용법이지만 예의 바르게, 공손하게, 거만하게, 교만하게 라는 표현은 부사적 용법입니다. 
이처럼 그 사람의 평가는 동사적 용법이 아니라 부사적 용법에 의해 평가되어야 합니다. 성경에서도 어떤 일을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평가의 수위가 차별화 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과 복음전선에서 함께 한 고난의 동지들에게 동사적 용법보다는 부사적 용법에 의해 기록함으로 각자의 격(格)을 공개적으로 자랑했습니다. 

Ⅰ. 그리스도인의 격(格)은 믿음입니다. 

본문 13장 13절에 『그런즉 믿음…항상 있을 것인데… 』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성도에게 있어서 항상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48절에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고 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하나님의 작정(Divine Decrees)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후서 3장 2절에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고 했습니다. 
따라서 이 믿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어야 합니다(딤전 3:13; 딤후 1:13). 어거스틴은 "믿음이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고 이러한 믿음의 보상은 우리가 믿는 것을 보이게 한다."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길(시 37:5)과 행사(잠 16:3)와 염려(벧전 5:7)를 주님께 맡겨 버리고 평안을 누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의 출처는 하나님이시며 믿음의 근거는 성경말씀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응답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주관에 속하는 막연한 신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을 전제로 하여 주시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고 했습니다. 

믿음은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라 할찌라도 그것은 우리의 심리에서 단절된 어떠한 별개의 존재는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심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워져 말씀과 화합한데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2절에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9장 2절에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고 했습니다. 
믿음의 종류에는 4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역사적 믿음이 있는데, 이는 아무 영적인 목적도 없이 순전히 지적인 진리의 인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둘째는 일시적 믿음이 있는데, 이는 복음을 듣고 참으로 회개하지 않지만 성령의 보통감화에 인도되어 일시적으로 경험하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셋째는 이적적 믿음이 있는데, 이는 자신이 이적을 행하든지 타인이 자기에게 이적을 행함으로 갖게 되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에는 구원하는 믿음이 동반될 수도 있고 동반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넷째는 구원 얻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크리스챤에게 항상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가치는 구원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고 했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5장 4절에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고 했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에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고 했습니다.
이 믿음이 크리스챤들에게 부사적 용법으로 각자의 이름 앞에 붙어 다녀야 합니다. 

Ⅱ. 크리스챤의 격(格)은 소망입니다. 

본문 13장 13절에 『그런즉…소망…항상 있을 것인데… 』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어떠한 꿈과 소망을 지니고 사는가에 따라서 자기 삶의 방향이 결정됩니다. 그래서 "꿈이 있는 백성은 망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18세기 사람들은 인간의 혁명을 "호모 사피엔스"(理性人)라 불렀고, 19세기에 이르러서는 "호모 파베르"(工作人)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현대에는 에리히 프롬이 인간을 가리켜 "호모 에스페란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소망을 가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옛날 희랍 사람들은 인간을 안드로포스(Anthropos)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인간은 위를 바라보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고 했습니다. 
모든 짐승들은 땅을 내려다보고 먹이를 찾으며 살아가지만 우리 인간들만은 두 눈을 들어 저 높은 곳을 바라보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소망하는 존재이지만 절망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참소망의 대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도의 소망은 현재를 넘어서 장래를 보고, 물리적 안목을 넘어서 영의 세계를 보는 것이며, 현실을 넘어서 영원한 천국을 보는 것입니다. 

소망은 성도로 하여금 믿음의 행동으로 도약시켜 주는 추진력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장차 부활의 세계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고 했습니다. 
시편 146편 5절에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5절에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라고 했습니다. 

의인의 소망은 즐거움을 이루어도 악인의 소망은 끊어지고 마는 것입니다(잠 10:28). 
잠언 23장 17-18절에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고 했습니다. 
소망이 부끄럽지 아니한 것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되었기 때문입니다(롬 5:5). 
로마서 8장 24-25절에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고 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 1절에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더 좋은 소망입니다. 
히브리서 7장 19절에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입니다(히 7:2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고 산 소망이 있게 합니다(벧전 1:3). 하나님은 우리의 소망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 10절에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5장 5-6절에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고 했습니다. 
소망이 성도를 성도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소망이 크리스챤들에게 부사적 용법으로 각자의 이름 앞에 붙어 다녀야 합니다.

Ⅲ. 크리스챤의 격(格)은 사랑입니다. 

본문 13장 13절에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 했습니다. 
까뮈의 "이방인"에 나오는 주인공 뫼르소는 사랑을 상실한 현대인의 대표적 인물입니다. 그는 어머니가 죽었을 때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고 이유도 없이 살인을 한 후 사형수가 되었지만 참회하는 마음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었습니다. 몸서리칠 수 밖에 없는 냉혹하고 무감각한 인간상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뫼르소가 수없이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살생과 범죄는 사랑을 잃어버린 결과 빚어진 참극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만 사랑하고(딤후 3:2), 세상을 사랑하며(요일 2:15), 재물을 사랑하면서(마 6:;24), 불법을 행하기 때문에(마 24:12)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이토록 참혹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 성도에게 항상 있어야 할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에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선수적 사랑(요일 3:16), 완전한 사랑(요 15:9), 자기 사람에 대한 불변의 사랑(요 13:1), 끊을 수 없는 사랑(롬 8:35), 강권하는 사랑(고후 5:14), 희생적 사랑(요일 3:16)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레 19:18). 원수를 사랑으로(요 13:34) 복수해야 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며(벧전 2:17), 이방인까지도 사랑함으로(눅 10:36) 구원의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복음의 격전지에서 자신과 함께 동역한 사람들에게 안부를 전하면서 이른바 부사적 용법으로 그들의 격(格)을 높였습니다. 
나의 보호자 뵈뵈라고 했습니다(롬 16:2).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 브리스가와 아굴라라고 했습니다(롬 16:.3). 나의 사랑하는 에베네도라고 했습니다(16:5). 많이 수고한 마리아라고 했습니다(롬 16:6).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라고 했습니다(롬 16:7).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라고 했습니다(롬 16:9).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한 사랑하는 버시라고 했습니다(롬 16:12). 주 안에서 택하심을 받은 루포와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라고 했습니다(롬 16:13).
크리스챤들의 이름 앞에 항상 있어야 하는 것은 믿음의 사람 아무개, 소망의 사람 아무개, 그리고 사랑의 사람 아무개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독립된 것이 아니라 유기적 관계를 가진 하나의 개념입니다. 이 중에 그 어떤 것도 경시되거나 소외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우월한 것으로 표현된 것은 사랑은 믿음과 소망의 존립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장 8절에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고 했습니다. 

믿음과 소망은 종말에는 사라지는 것이지만 사랑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자기 이름 앞에 믿음의 사람 아무개, 소망의 사람 아무개, 사랑의 사람 아무개, 선한 사람 아무개, 착한 사람 아무개, 겸손한 사람 아무개, 기도의 사람 아무개, 거룩한 사람 아무개, 인내의 사람 아무개, 약속의 사람 아무개라고 붙여도 부끄럽지 않도록 살아갑시다.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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