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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친구 되신 예수님 (요 15: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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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되신 예수님 (요 15:13-16)


아주 깊은 밤중에 잠이 들었는데도 전화를 받으면 반가운 목소리가 있습니다. 바로 친구입니다. 한밤중에 전화를 해도 언제나 반갑고 책망을 들어도 노엽지 않고 사용하는 언어도 존칭어를 안 써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거친 소리를 해도 상관이 없고 어떤 때는 듣기 거북한 쌍스러운 소리를 해도 친구 간에는 아무 문제가 안 됩니다. 사실 절대 존칭어를 사용해야 되고 목소리 조절해 가면서 대화해야 되는 관계는 편안한 관계가 아닙니다. 친한 사람끼리는 존칭어가 오히려 욕이 되는 느낌이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부인을 보고 “밤새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그게 좋은 인사가 아니지 않습니까? 아마 그렇게 말하면 “말씀을 놓고 하시지요.” 이렇게 나올지 모릅니다. 

시골 마을에 문화가 있습니다. 조상적부터 관계를 갖고 평생 함께 살아오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사실 그런 사람은 행복합니다. 자고 깨면 같이 보고 같이 일하고 같이 먹고 아주 재미있습니다. 만나면 못하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어떤 말을 해도 괜찮습니다. 아주 친한 관계는 처음부터 끝까지 욕으로 시작해서 욕으로 끝나는데도 행복해 합니다. 국어사전에도 없는 이상한 말을 하는데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식사하셨습니까?” 그런 말이 아니라 “처먹었냐?” 이렇게 말하지만 괜찮습니다. 

좋게만 들립니다. 그렇게 할수록 행복을 느낍니다. 만나면 서로 어른이라고 합니다. 형님도 아닌데 “형님을 보면 인사를 해봐라, 이 싸가지 없는 놈아!” 이야기하지만 좋습니다. 아무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러다가 어떤 사람이 어려운 일을 만나면 온 동네 친구들이 다 달려들어서 그의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끈끈한 정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것이 시골 농촌 문화입니다. 사실 그렇게 사는 것은 행복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친구를 잘 두는 사람은 삶이 풍성합니다. 

아주 행복합니다. 가깝게 있으면 더욱 좋습니다. 애정은 변할 수 있는 확률이 많은데 비해서 우정은 오래 가고 깊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애정 관계를 ‘에로스’라고 말하고 우정 관계를 ‘필리아’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주 옛날부터 들어온 소리가 있습니다. 생명을 같이할 수 있는 친구 한 사람이 있으면 임금님보다 낫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말씀은 뭔가? 그런 친구가 지금 하나 있다고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자청하셔서 그 제자들과 주변의 사람들에게 “내가 너희들의 친구다. 그런데 얼마큼 사랑하느냐 하면 내 목숨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되어 주겠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세상에 없다. 나는 내 친구들을 위해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을 주겠다.” 이런 친구가 지금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 말씀의 뜻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생각함으로 우리 삶이 아주 풍성해집니다.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친구의 의미는 수평적 사랑의 관계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관계라 할지라도 수직적 상하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일방적 관계의 사랑입니다. 위에서 주는 사랑을 내가 어쩔 수 없이 받기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와 같이 권위주의적 사랑은 윗사람의 기분에 따라서 아래 사람의 행복이 결정됩니다. 아버지 기분이 나쁘면 집안 식구가 다 같이 묵념을 해야지 아버지는 지금 기분이 나쁜데 엄마와 아이들이 깔깔 대고 웃으면 벼락이 떨어집니다. 사장이 기분이 좋아야 사원들도 행복합니다. 이렇게 수직적인 상하 관계는 사랑이지만 일방적입니다. 

수평적 사랑의 관계는 피차가 똑같습니다. 그래서 주고받습니다. 이게 사실 제일 행복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지금 주님의 사랑을 절대로 필요로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사랑이 필요하십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만나서 3번씩이나 심각하게 질문하셨지 않습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왜 그러셨습니까? 주님과 우리는 수평적 사랑의 관계라서 주님의 사랑이 필요한 만큼 주님도 우리의 사랑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시면 절대로 외로워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 수평적 사랑의 관계가 얼마나 좋은지 우리들이 늘 경험합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나이가 이제 19, 20살 된 아들, 딸과 시간을 보내려 하면 그 자녀들이 좋아합니까? 이제는 자기들의 세계가 완전히 형성되었기 때문에 아버지, 어머니와 노는 것을 아주 거북해 합니다. 밥 한번 함께 먹으려 해도 한 달 전에 약속을 해야 함께 먹거나 말거나 합니다. 그러나 자기들 친구를 만나면 밤이 가는 줄 모릅니다. 왜일까요? 수평적 사랑이 좋아서 그러는 겁니다. 제일 즐겁고 편안하게 사랑을 나누는 관계, 아주 부담이 없고 즐거움만 있는 관계가 수평적 관계입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친구들보다 아버지, 어머니가 저희들을 더 사랑하고 더 필요로 하고 더 좋은 관계입니다. 그러나 이 상하의 관계의 사랑은 매우 어려움을 느낍니다. 제가 목사인데 나이가 이 정도 되었으니 세미나 강사로 많이 가지 않습니까? 많이 배우고 나도 가르칩니다. 그런데 결국 제목은 하나입니다. 목사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목회를 하는 것이 훌륭한 목회가 될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영적이고도 일종의 어떤 때는 기술적인 내용들을 서로 이야기하는 거 아닙니까? 나도 많이 말하고 많이 듣습니다. 목사는 교인들의 성격을 알아야 목회를 잘할 수 있습니다. 

그 성격이란 뭐냐 하면 교인들은 목사와 공식적인 모임 외에는 함께 있는 것을 부담스러워 합니다. 제일 바보 같은 목사는 휴가철이 되어서 교인들, 집사님들끼리 놀러가려고 프로그램을 짰는데 나도 가겠다고 따라가겠다는 목사입니다. 초청이 없는데 따라가는 죄는 영원토록 사함이 없는 죄라고 합니다. 두고두고 말합니다. 그때 목사님이 따라와서 아주 재미없었다고 합니다. 제가 확실한 증거 하나를 대겠습니다. 저는 날마다 여러분 가정을 심방을 합니다. 자연히 식사를 함께 많이 하게 되지 않습니까? 식사 때마다 실랑이를 벌입니다. 제 앞에 정면이나 옆에는 아무도 안 오려고 합니다. 

때마다 누가 앉는 게 힘듭니다. 왜 그러느냐고 평가를 해보면 편안히 밥 먹는 것이 힘들다고 합니다. 또, 목사님 앞에 있으면 많이 못 먹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보니까 실상은 먹을 것을 다 먹으면서 괜히들 그러십니다. 세상에 제일 좋은 것이 수평적 관계입니다. 우리 목사들은 교인의 요청이 있을 때 절대 거절하지 않고 심방 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요청도 안했는데 심방 간다고 불평하는 교인도 많습니다. 권사님 한 분이 과거 초신자 때 일어난 일을 간증한 기억납니다. 

40대 적인데 옛날에 시골에 교인들에게 전화가 있었습니까? 그러니까 약속하고 가지 않고 목사님들이 지나가다가 별안간 예고 없이 들른 심방이 옛날에는 많았단 말입니다. 대문 밖에 목사님이 지나가다가 들렀단 말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대문 밖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자기는 얼마나 놀랐는지 장롱 속으로 들어갔답니다. 그러고 아이보고 “너 나가서 엄마 없다고 말해!” 아이들은 또 정직합니다. 나와서 엄마가 하라는 대로 다 했습니다. “엄마 있는데 없다고 말하래요.” “알았다.” 웃으면서 갔는데 그때 그 교인은 친구들과 집안에서 돈내기 화투를 하고 있었답니다. 그러니 목사가 들어가면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목사는 요청이 있을 때만 가야지 아무 때나 교인 찾아가면 큰 실례를 범하게 됩니다. 여러분과 제가 아무 부담 없이 만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이 목사가 되시면 됩니다. 수평적 관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주의 하나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늘나라 하나님 아들의 자리를 버리고 인간이 되셔서 인간 세상에 오셔서 인간과 수평적 관계를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이다.” 수직관계로서는 사람이 안갑니다. 사랑의 관계가 안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의 이름을 가지시고 인간이 사는 나사렛 동네에 오셔서 인간들이 하는 노동을 하시면서 “자, 내게로 오라.” 이렇게 하신 거 아닙니까? 또, 왕족이나 재벌가로 오시면 다가오는 사람이 제한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최하의 낮은 자리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누구나 다가오기에 부담이 없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 관계성의 가장 편한 친구로 우리들에게 자신을 열어 주셨습니다. “나는 내 친구를 위해서 내 목숨을 버릴 수 있다. 가장 최고의 사랑을 너에게 줄 수 있다.” 관계성의 깊이를 이렇게 오늘 선언하셨습니다. 특별히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행적을 우리가 살피면 예수님은 친구가 없는 사람들에게 친구로 다가가셨습니다. 문둥병 환자들은 현대 사회에서도 격리 수용합니다. 우리나라도 소록도가 있지 않습니까? 유대 나라는 특히 이 병이 아주 많았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이 병은 하나님의 저주라고 신학적 이유를 댔기 때문에 아무도 그들의 친구가 되지 않았습니다. 강제 퇴거 명령합니다. 그들끼리 모여서 살아야 합니다. 성경에 보세요. 열 문둥이가 함께 있었다고 했지 않습니까? 더 자존심 상하는 것은 새끼줄을 쳐 놓아야 합니다. 이 새끼줄에서 한 발자국도 넘어오면 안 됩니다. 어쩌다 다른 사람들이 거기 문둥병 환자들이 있는 것을 모르고 다가갈 때는 그 사람들이 소리를 쳐야 합니다. “부정하다,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칠 것이요” 구약에 있습니다. 말 안하면 큰일 납니다. 

그러니 이게 얼마나 자존심 상합니까? 병나서 이렇게 격리 수용 당하고 이렇게 사는 것만 해도 억울한데 사람들이 올 때 “여기 문둥병 환자가 있으니까 가까이 오지 마시오.”라는 표시로 소리를 질러 주어서 가까이 못하게 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찾아가서 친구가 없는 자에게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죄인의 집이라고 아무도 들어가지 아니하는 삭개오의 집을 일부러 찾아가서 “오늘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겠다.” 찾아가셨지 않습니까? 성경에 보면 들어가자마자 사람들이 비난했습니다. “저가 죄인의 집에 들어갔도다. 

우리들도 들어가지 아니하는 저런 죄인, 세리장의 집을 예수님, 선지자가 들어가다니” 예수님은 들어가셨습니다. 그런 자신을 친구로 삼아 들어와 주신 예수님의 그 사랑에 너무나도 감격해서 삭개오가 뭐라고 합니까? 자기 소유의 절반인 50퍼센트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쓰겠다는 파격적 선언을 그 자리에서 했습니다. 너무나 감격해서 했던 겁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소문난 창녀가 직업이었습니다. 함께 즐기던 남자들조차도 만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가장 가까이 그를 두시고 하나님의 사역에 그를 쓰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는 자기 비하의 결단을 내리셨기 때문에, 우리와 수평적 관계의 사랑을 맺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구원의 그리스도가 되신 것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렇게 되었습니다. 수평적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 다음에 좋은 친구는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형편과 분위기에 따라서 수시로 변하는 친구는 친구가 아닙니다. 그는 상대적인 관계만 있을 뿐 친구는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좋은 친구를 얻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좋은 친구가 되어 주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왜 좋은 친구인가? 나의 가장 어두운 면을 위해서 일하시기 때문에 좋은 친구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좋은 친구로 생각하고 모든 비밀스러운 마음을 다 나누었는데 관계가 나빠져서 지금은 서로 원수가 될 때 ‘그와 친구한 것이 지금은 후회스럽다.’ 우리가 많이 경험하는 거 아닙니까? 조셉 크리버는 시인이었습니다. 20대에 시인이 되었습니다. 1840년 20세에 약혼녀와 물놀이를 갔다가 약혼녀가 익사를 했습니다. 그 충격을 잊을 길이 없었는데 더 큰 충격은 자기를 그토록 사랑하시던 어머니가 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아가면서 내 삶을 가장 풍성하게 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주변에 친구들을 많이 사귀어서 피차 사랑을 나누면서 살아가는 것이 그런 길이라고 판단을 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친구를 많이 사귀면 사귈수록 자기의 삶은 더욱 외로워지고 더 힘들어지고 관계성이 더 나빠지고 고민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마음을 바꾸고 생활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오직 나의 친구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친구 삼아 주님만이 절대 변함이 없으신 나의 영원한 친구라고 영적 깊이에서 자신의 삶을 마련했습니다. 

그러더니 어느 날 자기에게 영감이 떠올라서 찬송가를 하나 내고 온 세계인들이 즐겨 부르는 찬송이 되었습니다. “♬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 바로 그 찬송입니다. “♬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 그분이 나의 진정한 친구로서 이 세상에 어떤 친구도 해결하지 못하는 그러한 모든 일을 다 해결해 주시는 영원히 변함이 없으신 나의 친구 예수 “♪ 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부질없이 낙심 말고 기도 드려 아뢰세 이런 진실하신 친구 찾아볼 수 있을까 우리 약함 아시오니 어찌 아니 아뢸까 ♬” 내가 반주도 없이 이렇게 잘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진실한 친구의 사랑을 나눈 아름다운 스토리 하나가 구약의 스토리 하나를 빛나게 하고 있습니다. 바로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입니다. 요나단은 사울왕의 장남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왕이 됩니다. 그런데 거절하고 자기의 친구 다윗이 이 나라의 왕이 되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다윗을 위해서 일을 합니다. 자기가 왕이 되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아버지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그렇게 많은 계획을 하고 모략을 하고 노력을 하는데 요나단 때문에 다윗이 살아납니다. 아버지의 계획을 날마다 비밀스럽게 가르쳐주어서 피난시켜 준 것이 요나단입니다. 

이 요나단은 가만히만 있으면 자기가 왕이 되는데 다 친구를 위해서 희생을 하고 다윗을 살리고 왕으로 세우는데 성공을 합니다. 세월이 흘러서 사울과 요나단이 다 죽고 다윗은 왕이 되어서 이스라엘 역사에 가장 훌륭하고 위대한 국가 건설을 이루는데 다윗은 그때 친구 요나단을 생각하면서 신하들을 시켜서 “요나단의 후손 가운데 살아남은 자가 없느냐?” “있습니다. 하나 있는데 므비보셋인데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데려와라.” 그를 데려다가 평생토록 임금이 먹는 상에서 음식을 대우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에로스’의 사랑은 매우 뜨겁게 타오르다가 끝나면 원수가 되는 경우가 매우 많고, ‘필리아’ 이 친구간의 사랑은 아주 영원하게 좋은 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옛날 시골에는 글방 선생이라고 훈장 선생이라고 있었습니다. 한문을 가르치는데 저도 배운 기억이 있습니다. 삼강오륜을 굉장히 강조하지 않습니까? “天地之間 萬物之衆(천지지간 만물지중)에 惟人(유인)이 最貴(최귀)하니 所貴乎人者(소귀호인자)는 以其有五倫也(이기유오륜야)라 是故(시고)로 孟子曰(맹자왈) 父子有親(부자유친)하며君臣有義(군신유의)하며 夫婦有別(부부유별)하며 長幼有序(장유유서)하며 朋友有信(붕우유신)이라” 하는데 이 “붕우유신”대목에서 반드시 글방 선생이 한마디를 강조합니다. “친구 간에는 믿음이 있어야 친구인데 친구를 많이 사귀지 말라. 한 사람만 잘 사귀어라.” 그렇게 예수님이 우리의 좋은 친구가 되신다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영원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 자신감 있게 “내가 너의 친구가 되어서 이것보다 더 큰 세상에 없는 사랑을 주겠다.”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오늘 말씀 15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하나님 아버지가 내게 주신 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니 이 주는 뜻은 너희가 선언하는 모든 일이 아버지의 뜻 안에서 이루려 하심이라. 친구가 행복하게 되는 것이 내가 할 사명이라. 친구가 영생을 얻는 구원자가 되고 아버지가 소원하는 모든 비밀스러운 것들이 이 땅에서 다 이루어지는 그것을 위해서 내가 일하노라.” 그래서 친구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 친구는 믿었는데 실망을 주는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역사적인 인물 가운데 소크라테스와 로마의 시저는 자기 곁에 가장 가깝게 있던 친구에 의해서 죽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친구의 거짓 증언으로 사약을 받고 죽을 때 뭐라고 그랬느냐? “내가 죽는 이 자체보다 친구를 잃음이 더 슬프다.” 그러고 죽었습니다. 시저는 친구인 부르터스의 칼을 맞으며 쓰러지면서 “내가 보호를 받을 줄 알았던 친구의 칼이 오히려 나를 죽게 하는구나. 이후로 누구든지 이 땅에 있는 친구를 믿지 마시오.” 그러면서 마지막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비해서 우리 친구 되신 예수님은 자기의 목숨까지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친구 선언을 지금 하시는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모든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이 참되신 친구가 내 곁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이 사랑은 수평적 관계입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주님을 사랑해야 되는 수평적 관계입니다. 이 부분은 많이 사람들이 잊어버리고 삽니다. 주님을 위해서 몸을 바치고 시간을 바치고 때로는 물질을 바치고 헌신하는 뜻은 그가 먼저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인간을 그 당시에 얼마나 친구로 사랑하셨는지 바리새인들이 별명 하나를 예수님에게 붙였지요? “저가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저는 열흘 전에 미국 장로교 총회 강사로 강의를 하고 왔습니다. 그 총회는 교단의 대표들이 각기 자기가 맡은 부서의 1년 동안의 결과를 보고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그 총회에 와서 재단 보고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 그 보고에서 들은 소리 하나를 여러분에게 소개하면 여러분도 깜짝 놀라실 것입니다. 장로교 재단의 재정 책임자입니다. 돈이 나가고 들어가는 것을 관리하는 에드먼드 바스콧이라는 재단 책임자인데 이렇게 나와서 보고했습니다. “지난 일 년 동안 미국 장로교 PCUSA 교인 가운데 4만4천명이 세상을 떠나서 주님께로 갔습니다.” 교인 세상 떠난 것도 총회에서 다 보고하게 되어 있습니다. “4만4천명이 하늘나라로 갔는데 그 중에서 1천명을 제외한 4만3천명이 자신들의 재산의 전부, 혹은 일부를 자기의 출석하는 교회에 바쳤음이 보고되었는데 그 금액이 6천9백만 달러가 들어와 있습니다.” 놀라지도 않으시네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도 굉장히 수준이 높아졌고 굉장히 성장했고 다 좋습니다. 그런데 이런 면은 절대 미국 교인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이 나는 차이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46년 목회를 했는데 그런 교인은 한 명도 못 만났습니다. 그런데 미국 교인들은 4만4천 명 중에서 4만3천명이 자기의 재산을 그렇게 정리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20세기의 그런 교인들 때문에 미국이 거의 완벽하게 세계 선교를 이룩했지 않습니까? 우리나라도 아펜젤러, 언더우드 그 사람들이 헌금 가져와서 이 나라에서 학교 세우고, 교회 세우고 다 해주어서 이렇게 된 거 아닙니까? 

그래서 미국이 세계 선교의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이 교인들이 그렇게 살아주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사랑을 원하십니까? 나도 수평적으로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게 기독교의 사랑의 진리입니다. 신앙의 초기 단계는 내가 주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것의 관심입니다. ‘무엇을 받을까?’ 성숙 단계는 ‘무엇을 드릴까?’ 입니다. 순교자들은 왜 순교 당합니까? ‘주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으니까 나도 수평적 사랑의 관계를 이루어 똑같이 주님을 위해서 죽는 것이 당연하지.’ 이렇게 판단했기 때문에 ‘주께로부터 받은 것을 주님께!’ 이것이 순교입니다. 오늘 주님이 말씀하신 “너희들은 내 친구야. 나는 이 친구의 사명을 위해서 내 목숨까지 준 거야. 이것보다 더 큰 사랑은 세상에 없을 거야.” 이 말씀의 뜻을 깊이 생각하고 주님의 뜻을 따르시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사랑에 대한 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주님을 사랑해야 되는 수평적 사랑의 관계를 기억하면서 우리가 신앙의 초기 단계에서는 항상 주님으로부터 얻는 것이었는데 무엇을 드릴까를 생각하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들로 성장하는 기쁨이 우리 가운데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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