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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왕중왕의 복음(1) : 복음의 각성 (막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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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중왕의 복음(1) : 복음의 각성 (막 1:1)

때는 1738년 6월 어느 따스한 주일 오후. 곳은 영국의 옥스퍼드 시. 그 유명한 톰 타워(Tom Tower)의 시계가 2시를 치자 동정녀 마리아 대학교회로 장엄한 행진이 있었습니다. 대학 부총장이 맨 앞에서 행진하고 부총장과 학감 사이에 그 날의 설교자가 행진했습니다. 35세의 키가 작고 차분한 설교자 존 웨슬리(John Wesley)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설교를 했습니다. 그것은 보통 설교가 아니라 가슴에서 터져 나온 울음이었고 영적인 전쟁을 위한 신호였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각성’(Evangelical Awakening)이란 놀라운 부흥을 일으킨 설교였습니다.

부도덕과 악행이 지배하고 있던 영국에서 ‘악행의 바닷물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말려 버리고 말겠다.’고 하던 개혁이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받는다.’는 웨슬리의 복음 설교는 악행의 홍수를 막아냈습니다. 복음을 깨달은 한 사람을 통해서 영국 교회가 복음을 깨닫고 바로 사는 ‘복음의 각성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복음을 바로 깨닫고 바로 사는 복음의 각성이 필요합니다. 이제 한 동안 마가가 전한 ‘왕 중 왕의 복음’을 전하고 들을 때에 복음을 새롭게 깨닫는 복음의 각성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마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한 절로 마가복음의 문을 열었습니다. 마가는 주로 로마인들을 상대해서 복음을 기록했습니다. 로마인들은 행동을 좋아합니다. 로마인들은 전진하다가 죽을지언정 후퇴하다가 죽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마가는 앞으로 쭉쭉 뻗어나가는 행동을 좋아하는 로마인들의 행동적인 특성에 맞게 별 서론 없이 ‘불쑥’ 시작했습니다.

마가는 불쑥 시작한 다음 ‘곧’이라는 단어로 장면과 장면을 바로 연결시켜 나갔습니다. 마가복음 헬라어 성경에 ‘곧’(유세오스)이란 단어가 40회나 나옵니다. 1장에만도 10절, 18절, 20절, 21절, 29절, 30절, 31절, 42절, 43절에 ‘곧’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마가는 행동과 행동을 ‘곧’이라는 단어로 연결해서 십자가를 향해서 빨리 진행해 나갔습니다. 마가복음은 십자가를 향해서 빨리 진행되는 드라마와 같습니다. 마가는 1-8장에서는 ‘왕 중 왕’을 묘사하고, 9-16장에서는 ‘십자가’를 묘사했습니다. 마가복음은 ‘왕 중 왕의 십자가’(King's Cross)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마가는 이렇게 ‘곧’으로 행동을 빨리 연결시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클라이맥스에 이르는 복음을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복음’이란 말이 중요합니다. 복음은 헬라어로 ‘유앙겔리온’이라고 합니다. ‘유’는 ‘좋다’는 뜻이고 ‘앙겔리온’은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복음’은 말 그대로 ‘좋은 소식’입니다.‘복음’이 ‘좋은 소식’이라고 할 때 얼마나 ‘좋은 소식’일까요? 

‘복음’은 일상적인 소식에 비해 삶을 변화시키고, 역사를 바꾸는 소식입니다. 당시 “시저 아우구스투스의 복음의 시작”이란 비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로마 황제의 탄생과 즉위의 소식입니다. 황제의 즉위나 전쟁의 승리 소식은 삶을 바꿀만한 ‘복음’이었습니다.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이 벌어졌을 때 그리스인들이 마라톤 대전에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 때 전령들이 도시들로 달려가서 이런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위해 싸웠습니다. 우리는 이겼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더 이상 종들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자유인들입니다.”

‘복음’은 이처럼 역사 속에서 여러분을 위해서 일어난 어떤 것으로 여러분의 삶을 영원히 바꾸어 놓는 좋은 소식입니다.

기독교와 타종교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타종교는 다 충고이지만, 기독교는 복음입니다. 타종교는 “당신이 이렇게 해야 구원 받는다.”는 충고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해서 역사 속에서 이런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서 이렇게 사시고 이렇게 죽으시고 이렇게 부활하셔서 여러분에게 구원받고 살 길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여러분을 다스리십니다.”는 ‘좋은 소식’입니다.

여러분이 ‘3천 킬로미터를 기어가야 하나님과 연결되어 구원 받습니다.’는 충고를 들으면 무거운 짐을 느낍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 처리해 주셨습니다. 믿기만 하면 됩니다.’는 소식을 들으면 무거운 짐이 벗겨지는 것을 느낍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해 놓으시고, 여러분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만 하면 된다는 것은 감격스러운 복음입니다.

마가는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란 ‘기름 부음을 받은 그 왕’(the anointed king)이라는 뜻입니다. 보통 왕이 아니라, ‘그 왕’입니다. ‘그 왕’만 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왕 중에 으뜸, 그 왕’입니다.

누가 그런 왕입니까? 마가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외에는 그런 왕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왕으로 다스리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God reigns)”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데 어째서 고통이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드시지 않습니까? 이 질문은 인간의 마음에 걸린 가장 예리한 낚시 바늘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데 어째서 고통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멀리서 구경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고통당하는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아무 죄도 없지만 이 땅에서 고통을 당하시다가 십자가에 달려 보혈을 흘려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우리의 고통에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삼 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심으로 고통 중에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고통의 근본원인인 죄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간암으로 시커먼 얼굴을 화장해서 건강한 것처럼 만들어놓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시커먼 얼굴의 원인인 암을 수술하시는 분이십니다. 암을 수술하신 후에 몸이 서서히 회복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죄라는 인간의 근본문제를 해결하신 후에 인간의 다른 문제들을 해결하시는 방식으로 다스리시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 누구든지 언제나 필요할 때마다 찾아올 수 있게 하는 왕이나 대통령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언제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오게 하십니다 (히 4:16). 하나님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은혜의 보좌 앞에 나와서 긍휼하심을 입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고통 중에 은혜의 보좌로 나와서 치료와 회복을 체험하게 하심으로 다스리십니다.

어떤 분이 시력을 거의 다 잃은 후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육적인 시력을 잃었으나 영적인 시력을 얻었습니다. 영적인 눈이 떠서 나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놀라운 변화를 체험했습니다. 이제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래서 친구들도 많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고통 중에서 성숙하도록 다스리십니다. 시편 기자도 고난이 유익하다고 고백했습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 119:67). 하나님은 고통을 통해 영광에 이르도록 다스리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 14:21). 하나님은 우리가 순종하면 자신의 살아 계신 모습을 우리의 생활 속에 나타내 보이시는 방식으로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은 고통의 현장에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마음에 평화와 안전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고통을 통해서 우리를 성숙하게 하시고 마침내 희망이 넘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고통으로 우리를 낮추시고 시험하사 마침내 복을 주십니다(신 8:16). 하나님은 고통의 십자가 후에 부활의 능력과 축복을 체험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매일 매순간 고통에서 영광에 이르도록 우리를 세밀하게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십니다.” 이것이 좋은 소식, 복음입니다. 인류 역사상 하나님처럼 다스린 왕이나 대통령이 언제 어디에 있었습니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고통의 현장에 뛰어들어 국민들을 위해서 죽었다가 부활한 왕이나 대통령이 어디에 있습니까? 청와대나 백악관에 누구나 언제든지 무상으로 출입하게 하시는 대통령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머리칼까지 세시고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왕이나 대통령이 어디에 계십니까? 고통 중에 우리를 성숙하게 하시고 마침내 희망의 세계로 인도하시는 왕이나 대통령이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은혜로 주시고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영원한 멸망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이르게 하시는 왕이나 대통령이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런 왕, 그런 대통령이십니다. 이것이 복음 중 복음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왕 중 왕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가장 큰 불행이요 고통입니다.

요즈음 성경학자들이 예수님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해서 계속 논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대한 도덕적 선생님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정치적인 해방가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민중을 동원해서 예루살렘의 기득권 세력과 비폭력 투쟁을 하게 하는 민중 해방가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단순한 예언가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이 망하고 완전히 다른 세상이 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세상을 뒤집어엎으려 했던 묵시가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슈바이처는 의사요 신학자요 선교사로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희생한 성자 중의 성자입니다. 그러나 슈바이처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보지 않았습니다. 슈바이처는 예수님을 착각한 유대인 묵시가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십자가에 죽으면 새 세상이 온다.’고 생각하고 죽었는데 새 세상이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착각한 묵시가라는 것입니다. 슈바이처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지 않고, ‘착각한 유대 묵시가’로 보았다는 말입니다.

당시에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바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동생들조차도 처음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우리 형님이 미쳤나 봐!’라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당시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도 거의 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하면 신성모독 죄를 범한 것이라 해서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재판하던 대제사장이 마지막으로 “네가 찬송 받으실 이[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그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 때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으며 예수님이 신성모독 했다고 하면서 사형에 처해야 마땅하다고 했습니다(막 14:61-64).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이 이렇게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마가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고 믿고 선언했을까요? 마가는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의 통역관이었습니다. 마가는 베드로가 아람어로 복음을 전하면 헬라어로 통역해 주었습니다.

마가도 처음에는 예수님이 왕 중 왕임을 몰랐다가, 베드로가 전해준 복음을 자꾸 들으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가는 베드로가 전한 복음을 들으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바로 ‘그 왕’이라는 것을 확신한 것입니다.

마가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바로 ‘그 왕’이라는 것이 복음이라는 것을 너무도 분명하게 깨달았기 때문에 마가복음 1장 1절에 이 진리를 제1면 톱기사의 타이틀로 잡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바로 ‘그 왕’이라고 주장하면 신성모독 죄로 잡혀가서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마가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이 가장 좋은 소식입니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마가는 베드로가 전한 복음을 들으면서 ‘복음의 각성’을 체험했습니다. 복음을 깨닫고 나니 목숨을 걸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 왕, 그분이 오시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우리로 영원토록 완벽하게 잘 살게 해 주신다는 바로 그 왕, 왕 중 왕입니다.”는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프린스턴 신학교의 에밀 까이예라는 철학교수가 “나를 이해하는 책”이라는 논문을 썼습니다. 그는 대학생 시절에는 ‘나는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는 불가지론자였습니다. 그는 실제로 성경을 읽어 보지도 않고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때 군대생활을 하면서 충격적인 일을 당했습니다. 그의 친구가 자기 엄마 얘기하다가 가슴에 총을 맞고 죽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 그가 공부한 철학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친구가 총 맞아 죽는 것을 볼 뿐 아니라, 자신도 총에 맞아 병원에 오래 입원했습니다. 그는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철학 책들 중에 “아무리 이상해 보여도 나를 이해하는 책”을 찾아야 되겠다고 갈망했습니다. 자기가 그런 책 한 권을 준비해야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많은 책을 읽던 중에 ‘자신의 상황을 말해준’ 구절이 있으면 주머니에 넣을만한 가죽 책에 기록했습니다. 그 책이 공포와 고민으로부터 마침내 해방과 환희로 인도할 것으로 기대한 것입니다.

어느 날 정원 나무 밑에 앉아서 자신이 모아둔 보배로운 인용문집을 읽기 시작했지만, 점점 더 실망했습니다. 철학자들의 좋은 말을 다 모아서 읽어봐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산책에서 돌아오면서 목사님이 주신 성경책을 들고 들어왔습니다. 그는 성경을 펴서 복음서들을 한 밤중까지 읽었습니다. 그 때 깨달음이 찾아왔습니다. “야, 보십시오. 내가 복음서들을 보고 있는데, 복음서들 속에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셨던 그분이 내게 생생하게 살아나셨습니다....이 책이야말로 바로 나를 이해하는 책입니다.”

그는 복음서를 읽으면서 예수님이 자신을 정확하게 아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아들, 바로 ‘그 왕’이시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도 복음의 각성을 체험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 왕이시라는 것을 믿으십니까? 예, 좋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족들과 우리 교회와 우리나라와 세계를 다스리신다는 소식이 정말 여러분의 삶을 바꾸는 복음입니까?

이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공부하시 시작했습니다. 제가 결혼 주례한 어떤 청년이 교회에 오래 다녔지만 복음을 깨닫지 못하다가 드디어 복음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복음의 각성’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가 복음을 깨닫고 나니 우선 감격이 찾아오고, 인생의 목표가 뚜렷해지는 변화를 체험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베드로의 복음이 되고, 베드로의 복음이 마가의 복음이 되었습니다. 마가의 복음이 이제 여러분의 복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웨슬리가 ‘복음의 각성’을 체험하고 세계를 깨웠던 것처럼, 여러분도 ‘복음’을 깨닫고 ‘복음’으로 가족과 친척과 친구와 이웃을 깨우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을 통해 ‘복음의 각성’이 물결처럼 번져나가기를 바랍니다. (권성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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