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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능력있는 그리스도인 (고전 4: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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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있는 그리스도인 (고전 4:10-21)

2007년 대선에서 IQ 430의 천재정치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허경영씨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 사람은 독특한 공약을 내 걸었고, 축지법, 공중부양 등의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3번만 부르면 모든 소원이 다 이루어진다고 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자랑했습니다. 

결국 박근혜씨와 결혼할 사이라고 했다가 명예훼손으로 1년 6개월 실형을 살았습니다. 이 사람의 말은 믿을 수 없는 한마디로 허풍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을 많이 한다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치 있는 말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고린도교회와 성도들에게 말을 앞세우지 말고 능력 있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1년 6개월을 머물면서 온 정성을 다하여 교회를 세웠고, 성도들의 신앙성장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떠난 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신앙도 부패되고, 윤리도 땅에 떨어지고, 교회는 분열되었습니다. 

고린도교회가 이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바울이 떠난 이후에 고린도에 흘러 들어온 거짓 교사들 때문이었습니다. 거짓 교사들이 고린도교회에 들어와 성도들에게 잘못된 교리와 신앙을 가르쳤습니다. 특별히 바울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바울은 정통 사도가 아니요, 핍박자였으므로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파벌을 조성하여 성도들 간에 갈등이 생기도록 했습니다. 

18절에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라는 기록을 보면 거짓 교사들은 바울이 다시 고린도에 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음대로 비방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주님께서 허락하신다면 고린도에 다시 갈 것이며, 가게 되면 자신을 비방하던 사람들의 능력을 알아보겠다고 합니다. 

19절을 보세요.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 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거짓교사들이 말을 앞세우는 것을 보면서 말이 아니라 정말 능력이 있는지를 알아보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말보다 능력을 테스트하는 게 더 중요합니까? 그 이유가 20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 잘함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행동하는 능력으로 이루어집니다. 아무리 말을 잘해도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말 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대로 실천하는 능력입니다. 이 세상이 두려워하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하면서 그대로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말은 무성하지만 실천이 뒤따르지 못하는 교회였고, 은사를 과시하지만 십자가의 능력이 없는 참으로 안타까운 교회였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런 교회가 되지 말아야 하고, 이러한 성도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필요한 사람은 말을 잘하는 말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잘하는 일꾼입니다. 교회 안에는 구경꾼도 있습니다. 방해꾼도 있고, 말꾼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은 바로 일꾼입니다. 

행함이 없는 말은 무가치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말은 잘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말과 행실이 일치되어야 합니다. 언행일치의 신앙이 존경받고 사랑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이 이러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말만 앞세우는 고린도교회의 거짓 교사들과 차별화를 위하여 3가지를 강조합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능력 있는 삶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1. 자신은 복음을 위하여 고난과 핍박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10-13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전한 덕분에 받은 대가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몰랐다면 유대인 사이에서 실력 있는 사람으로 모든 사람 위에 군림하며 살았을 바울이 그리스도께 부름 받은 결과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같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사도 바울은 불평 한마디 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부활이 있고, 천국이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으로부터 비방을 당하고,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 없이 헤매어도 괜찮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당하는 일들에 신경을 쓰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을 받게 할까' 여기에 모든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교회 안에서 성도들은 신앙을 잘못 오해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기복신앙을 가지고 우리의 현실적인 삶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통한 만사형통을 바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불신자들을 전도할 때 가장 쉽게 하는 말이 하나님께만 나오면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축복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만사가 잘되고, 모든 일이 해결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모습을 말하면서 이것이 아니라고 강력하고 반박을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세상적인 것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에서 위대한 자가 되게 하려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만물의 찌꺼기 같은 존재가 되게 하셔서 천국을 마음에 두고 사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자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관심을 둘 것은 사도 바울과 같이 ‘어떻게 하면 내가 만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을까?’ 복음을 위하여 고난과 핍박을 받게 하는 각오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마음입니다. 그럴 때 교회가 능력이 있고 능력 있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2.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을 영적인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지혜로운 왕이 솔로몬 왕입니다. 어느 날 솔로몬 왕에게 한 아이를 데리고 두 여인이 찾아왔습니다. 둘은 같은 집에 사는데 한 여인이 자신의 아이를 실수로 죽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여인의 아이를 자기의 아이라고 우기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솔로몬에게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참 난감한 재판입니다. 지금은 과학이 발달하여 유전자검사를 통해 친자확인을 해보면 되지만 도저히 누구의 아이인지 올바른 판결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때 솔로몬은 부하에게 지시하여 칼로 이 아이를 정확하게 반으로 나누어 두 여인에게 주라 했습니다. 그때 아이를 낳은 친어머니는 울면서 아이를 저 여인에게 주어 살려 달라했고, 한 여인은 공평하게 아이를 나누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솔로몬은 울면 아이를 살려 달라는 어머니에게 아이를 주라고 했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을 알고 한 참 지혜로운 재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 자기가 낳은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요, 이것은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기도 합니다. 세상이 다 변해도 한번 맺어진 부모와 자식의 관계, 하나님과 그 자녀된 인간의 관계는 영원히 끊어질 수없는 진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아버지의 심정으로 성도들을 양육했습니다. 말만 앞세우는 거짓 교사처럼 하지 않고 날마다 전도한 성도들을 위한 걱정과 고민과 땀과 눈물이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개척할 때도 아버지가 아들을 살리기 위해 죽는 것 같은 심정으로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들어온 거짓교사들의 말을 듣고 성도들이 사도 바울을 공격하였습니다. 바울을 향한 공격의 핵심적인 내용은 사도권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아버지의 심정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본문 1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아버지의 마음을 강조합니다. 단지 스승이 아니라 아비요, 부모의 심정으로,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하고, 섬기고 봉사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스승이 귀하지만 어찌 아버지와 비합니까? 선생이 주인의 자녀를 돌보고 사랑한다고 해도 아버지와 비교할 수가 있습니까? 아버지는 선생과 다릅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향한 깊은 사랑이 있습니다. 자녀를 향한 보호가 있고, 희생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긍휼과 자비가 있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 아버지의 심정으로 성도를 대한 것입니다. 바울은 성도를 진정으로 사랑했고, 보호했습니다. 그들을 위해 희생했고, 긍휼과 자비로 대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마음입니다. 우리 모두가 아버지의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가 능력이 있고 능력 있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3. 본이 되는 삶을 살았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16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이 말은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굉장히 어려운 말이고, 매우 조심스러운  말입니다. 어쩌면 교만해 보이기도 하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당당하게 말합니다. 특히 고린도교회에 사용을 했습니다. 그것도 반복하여 말합니다. 그 이유는 사도권에 대한 논쟁의 종지부를 찍기 위함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추종자가 되지 말고 자기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기의 세력을 키워 파당을 만들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사심 없이 그리스도만을 따르는 자신의 모범을 닮으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즉, 지도자로 자처하면서 분쟁이나 주도하고, 세상 지혜와 말재주 따위나 자랑하면서 이권이나 챙기는 자들을 추종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행동하며 살아가는 자기를 본받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삶은 한마디로 본을 보이기 위한 삶이었습니다. 바울은 말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다 버렸습니다. 그리고 육신의 핍박과 박해가운데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그는 매사에 삶으로 모범을 보였습니다. 

힘과 정성을 다해, 열정과 수고를 다해 부끄럽지 않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당당히 본받으라고 선포합니다. 바울은 본을 보였고, 계속해서 본을 보이며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기를 최종적인 본보기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최종적인 본보기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성도로서 본을 보이도록 힘써야 합니다. 말보다 실천이 중요하고, 생각보다 행동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 시간 자신을 돌아보고 바울처럼, 주님처럼 본을 보이기를 다짐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린도교회가 이해했던 능력과 사도 바울이 말한 능력과의 사이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생각했던 능력은 화려한 외적인 은사 등이었습니다. 그들은 능력을 방언, 통변, 예언 등의 은사로 성령을 받은 자만이 발휘할 수 있는 특이한 능력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능력인양 자랑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교만해지고 말았습니다. 

오늘날도 능력이라는 말을 이해함에 있어서 고린도교인들의 수준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능력 있는 성도는 은사를 많이 받은 성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교회생활에 경륜이 있는 자들이 아니라, 말보다는 행함에서 나오는 능력,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을 능력이라고 보았습니다.  

바울이 평가하고자 한 것은 그들의 잘난 척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녀다운 삶의 능력입니다. 바울은 말 잘하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각종 은사를 행하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성도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얼마나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이 관심사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내세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 그들의 삶 속에 이루어진 천국입니다. 심령천국, 교회천국, 가정천국, 생활천국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이 말하는 교회의 능력, 성도의 능력은 한마디로 영혼을 살리는 것입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것이 가장 큰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14절에서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15절 말씀에서는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다”라고 말합니다. 여기 자녀라는 말이나, 낳았다는 말은 무엇보다도 생산의 의미를 갖습니다. 

바울은 결혼하지 않았기에 그에게는 육신의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적인 자녀를 많이 낳았습니다. 특히 디모데와 디도와 오네시모와 같은 자를 일컬어 믿음으로 낳은 아들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고린도교인 전체를 가리켜서 ‘믿음으로 낳았다’고 말합니다. 

여기 복음으로 낳았다는 것은 영적생산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여기만이 아니라 바울의 편지에서 많이 반복되고, 많이 강조하는 말 중의 하나입니다. 바울은 복음으로 사람을 낳았습니다. 이것이 그의 기쁨이고, 자랑하고, 면류관이었습니다. 자녀의 낳아 기쁨을 누리는 부모처럼, 그는 복음으로 사람을 낳아 많은 기쁨을 가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땅의 모든 교회는 영혼을 구원해야 합니다. 복음으로 구원받은 우리 모든 성도들은 복음으로 생명을 낳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뒤를 따르기 원한다면 바울과 같이 수고해야 합니다. 이제 복음으로 사람을 생산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이것만큼 소중한 기쁨이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기쁨이요, 우리의 기쁨입니다. 그래서 영적생산에 집중해야 합니다. 

아무리 은사가 많고, 아무리 말씀을 많이 배우고 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봉사하고 헌신의 삶을 산다고 해도 내 삶을 통하여 생명을 살리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지 아니하면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앞으로 어떤 교회가 되어가야 하겠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어떤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어떤 성도로 되어가야 하겠습니까? 

우리 교회는 능력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은 능력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도 말보다는, 그리고 행위의 우월함보다는 사도 바울처럼 아버지의 심정으로 생명을 구원하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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