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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디에서 어디로 가야합니까? (엡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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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서 어디로 가야합니까? (엡 1:1- 2)

: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새번역]”

유럽의 어느 시골 마을에 작은 공원이 하나 있었습니다. 하루는 머리가 하얗게 센 낯선 노인이 공원 나무 그늘 밑 벤치에 눈을 감은 채 앉아 있었습니다. 땅거미가 지고, 인적이 뜸해졌는데도 노인은 그곳에 그렇게 계속 앉아 있었습니다. 공원관리인이 노인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댁은 뉘시오?” 
“어디서 오시었소?”
“어디로 가는 중이시오?”

노인은 관리인의 질문에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이렇게 답했습니다.

“만일 내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내가 누구인지를 안다면, 그 결정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여기 이렇게 앉아 있지는 않을 것이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나를 부를 때 아서 쇼펜하우어라고 부른다는 사실뿐이오.”

여러분,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가야 합니까?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복음을 전하다가 체포되어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던 바울은 사랑하는 교회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감옥에서 보낸 편지라고 해서 ‘옥중 서신’이라고 부릅니다.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그리고 에베소서입니다. 이 중에서 에베소서는 신학자들에 의하여 ‘바울 신학의 면류관’이라고 불립니다. 또는 ‘기독교 신학의 완벽한 개요’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 말은 에베소서를 이해하면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줄거리를 이해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에베소서는 ‘성도들이 서 있는 자리와 행하여야 할 일과 지켜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앞으로 얼마 동안, 에베소 교회에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으려고 합니다.
에베소는 누구에 의하여 기록되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I. 누가

1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 1a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서를 기록한 사람은 바울입니다.
바울은 본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극렬한 반대자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는 일에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본래의 이름은 사울입니다. 

그 때도,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들이기 위하여 다메섹이라는 도시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다메섹 가까이 이르렀을 때, 그는 돌연 하늘로부터 비추는 빛을 받았습니다. 그는 땅에 엎드려졌습니다. 그는 하늘로부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주여, 뉘시오니까”라는 그의 질문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그는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가 그토록 극렬하게 반대하던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고 하였습니다. 

1.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입니다.

여기에서 사도[ajpovstolo"/아포스톨로스]는 ‘보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권세 있는 분을 대리하여 명령을 가지고 보내진 자입니다. 바울이 자신을 사도라고 말한 것은 그가 자신을 예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라는 분명한 자기 정체성을 가졌습니다.

때는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대제는 그리스의 아테네에 사신을 보내 무조건 항복하라고 하였습니다. 페르시아의 항복 요구에 화가 난 그리스는 오히려 사신을 우물 속에 넣고 매장시켜버렸습니다. 이에 ‘다리우스’대제는 ‘다티스’장군을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어마어마한 대규모 원정군을 파병하여 아테네를 정벌토록 했습니다. 

페르시아 대군의 침입소식을 전해들은 아테네는 다급해졌습니다. 당시 아테네 병력으로서는 이 같은 엄청난 병력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즉시 원군을 요청하기 위하여 당시 올림피아 경기의 달리기 선수였던 필리피데스를 사신으로 스파르타에 보냈습니다. 그러나 필리피데스가 가지고 온 소식은 종교적인 규칙에 따라 스파르타는 보름달 이전에는 출병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아테네는 국가의 존폐가 달린 절대 절명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아테네는 ‘밀티아데스’ 장군 지휘 아래 아테네 동북방 42Km지점인 마라톤 평원에서 페르시아의 군대와 마주하였습니다. 밀티아데스 장군은 열배나 우세한 병력을 가진 페르시아 군대를 협곡으로 유인하여 전멸시켰습니다. 아테네의 승리였습니다.

스파르타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사신으로 갔던 필리피데스가 승리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마라톤 평원으로부터 아테네까지 약 42Km의 거리를 단숨에 달렸습니다. 그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우리 아테네군이 승리했다.”는 한마디를 전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여기에서 마라톤의 전설은 시작됩니다.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바사의 왕 다리오입니다. 구약의 예언자 학개와 스가랴와 같은 시대입니다.

아테네에 항복하라는 명령을 전한 다리우스의 사신이 있었습니다. 스파르타에 도움을 요청하러 간 아테네의 사신이 있었습니다. 승리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달려온 마라톤의 사신이 있었습니다. 이 사신이 바로 오늘 말씀에서 사도입니다.

예수님의 사도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님께서 보내시는 곳에 가서, 예수님께서 시키시는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님께서 보내시는 곳에 가서, 예수님께서 시키시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도였습니다.

그런데, 바울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사도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a)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대신하여 세상으로 나아가 예수님의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세상에 보내시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바로 예수님의 사람, 예수님께서 세상으로 보내시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서 있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의 사도가 되었습니까?

다시, 1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 1a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의 사도가 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뜻[qevlhma/델레마]은 하나님의 결정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고자 원하시는 바에 따라서 된 것입니다. 바울뿐만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고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는 것 역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결정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명입니다.


2. 하나님의 뜻으로 되었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누가 맡겼는지 아는 사람은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되었다는 것에는 힘이 있습니다. 누가 시키는 일인지를 분명히 아는 것이 능력입니다.

우리나라에 와 있는 대사들 중에는 대사관 운영 경비를 걱정하는 나라도 있다고 합니다. 외국의 대사라고 믿고 집을 빌려주었다가 집세도 못 받고 나가지도 않아서 고민하는 집주인의 이야기가 신문에 난 적이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의 대사입니다. 그들을 보낸 나라가 가난하고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가하면 서울의 광화문통에 넓은 자리를 잡고 앉아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사도 있습니다. 그 뒤에는 그를 보낸 나라의 막강한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사를 보낸 나라의 힘이 대사의 활동과 영향력을 결정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사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으로부터 ‘세상 끝날 까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실패하는 것은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믿음이 없어서입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이미 자신과 함께 계신 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믿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자신을 부르시고 보내신 분이 항상 함께 계신다는 믿음이 없어서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예수님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예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예수님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서 있는 자리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디로 향하여 가야 합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어디로 가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누구에게로 향하였습니까?
  

II. 누구에게  

1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 1b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우선, 우리는 에베소라는 지역에 주목하여야 합니다. 

에베소는 로마 제국의 아시아현에 있던 항구 도시로 교통이 발달하였습니다. 교통이 발달한 항구도시답게 상업이 발달하였습니다. 많은 경제적인 부를 누렸습니다. 또, 에베소는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에베소의 아데미 신전은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입니다. 

주전 6세기 중엽에 이미 세로 100m, 가로 50m의 거대한 대리석 신전이 건립되었습니다. 로마시대에 이르러서는 황제 숭배가 극에 달하였습니다. 에베소 대극장은 대리석으로 만든 22열의 관람석이 3단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동시에 24,000명이 앉을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각종 경기와 오락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또, 에베소에는 엄청난 크기의 도서관이 있어 지식의 저장소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적으로 타락하여 공공연하게 성을 사고파는 장소가 이미 있었습니다. 2천년 에베소는 이미 오늘날과 같은 물질문명이 있었고 영적으로 성적으로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3년 동안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행 20:31). 그곳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들을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성도[a{gio"/하기오스]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도로써 나아가야할 모습은

1. 지역에 살고 있는 성도들입니다.

성도는 세속적인 도시에서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생활에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거룩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당시 에베소에서 살았던 성도들이었습니다.

이제 거룩함은 우리들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익산이라는 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곳에 보내어 살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예수님의 사람으로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앞으로 계속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선 기억하여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이 세상과는 구별되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름 위에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땅 위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서 이 세상의 사람들과 구별되는 거룩한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거룩한 삶을 결단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향하여야 할 것은 거룩한 모습만은 아닙니다.

다시 1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 1b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사는 성도들에게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도 편지합니다.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신실한 자들은 같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에베소에 있는 신실한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거룩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신실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신실하다[pistov"/피스토스]는 것은 진실하다는 것입니다. 믿을 만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숙한 인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닮은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 힘과 능력으로 살아가는 모습은


2.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물들지 않는 거룩한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한 믿을 만한 신실한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스스로 자신을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다른 사람이 볼 때에 신실하지 않은 사람이 많습니다.

KTF에 조서환이라는 부사장이 있습니다.

이 분이 육군 소위 시절인 1978년, 훈련 중 수류탄 폭발 사고로 오른손을 잃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병원에 누워있습니다. 제일 걱정이 되는 것은 ‘내 여자 친구가 아직도 나를 사랑해 줄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여자 친구에게 “아직도 나 사랑하니?”하고 물었습니다. 여자 친구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습니다. 

어느 날 아침, 여자 친구의 아버지가 왔습니다. 아버지는 딸의 팔을 잡아끌었습니다. 아버지는 “너 이 놈 부인할래? 아니면 내 딸 할래? 둘 중 하나를 선택해라.”고 합니다. 

그 때, 지혜로운 딸은 “만약 아버지가 교통사고가 나서 한 쪽 팔을 잃어버렸는데 엄마가 ‘여보! 난 당신의 팔 한쪽을 사랑한 게 아니야. 난 당신을 사랑해.’ 하고 아빠를 변함없이 사랑해 준다면 아빠는 얼마나 좋겠어요.”라고 합니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못하고 딸의 손을 놓아버리고 돌아갔습니다. 

그 때 조서환 소위는 마음속으로 “내가 살아있는 한 평생 이 여자만은 행복하게 해 줄 거야.”하고 결심했습니다. 그는 장군의 꿈을 접고 제대하고 다시 대학을 나와서 지금은 KTF의 부사장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업계에서 인정해 주는 마케팅의 귀재가 되었습니다. 

한 손을 잃은 뒤 주변의 편견과 수없이 맞닥뜨렸지만 그에게는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긍정의 힘’이 있었습니다.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나는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사고로 힘을 북돋웠습니다. 남들이 “해낼 수 없다”고 도리질 친 일을 보란 듯이 해냈습니다. 그가 이런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끝까지 믿고 사랑한 신실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앞으로 나아가야 할 곳은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신실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도 우리는 앞으로 이어지는 말씀에서 구체적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먼저 기억하여야 할 것은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세상에서 신실한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성숙한 신앙인격을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서 신실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제 세상에서 구별되며 신실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부족한 우리들이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겠습니까?
  

III. 어떻게  

2절 말씀입니다.
: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은혜와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바울의 인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교회에만 이렇게 인사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바울 서신에서 이렇게 인사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도, 고린도후서 1:2도, 갈라디아서 1:3도, 빌립보서 1:2도, 골로새서 1:2도, 데살로니가전서 1:1도, 데살로니가후서 1:2도, 디도서 1:4도, 빌레몬 1:3도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고 인사합니다. 

이것은 초대 교회의 공중 예배에서 빈번하게 사용하는 관례적인 축복 문구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거룩한 사람으로 신실한 사람으로 살 수 있는지를 말합니다. 

1. 그것은 은혜와 평강입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바로 은혜와 평강입니다. 바울뿐만 아니라 베드로도 이렇게 인사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1:2에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후서 1:2에서도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이나 베드로뿐만 아니라 저도 여러분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고 인사합니다. 

은혜는 기쁨이요, 평강은 행복입니다. 은혜와 평강, 이것은 우리가 거룩하고 신실하게 살 수 있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생각하여야 할 것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의 주변에, 이곳저곳에서, 저마다 나누어주겠다는 여러 가지 기쁨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저마다 기쁨과 평화를 주겠다고 속삭이는 것이 우리의 주변에서는 많습니다. 그 중에서 우리를 세상에서 거룩하고 신실하게 살 수 있게 하는 은혜와 평강은 어떤 것입니까?

다시 2절 말씀입니다.
: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은혜와 평강은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와 평강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이어야 합니다. 어디로부터 온 은혜와 평강인가가 중요합니다. 


2. 그것은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에베소라는 도시는 상업이 발달하여 경제가 주는 은혜와 평강이 있었습니다. 종교가 발달하여 우상이 주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문화가 발달하여 감각이 주는 괘락과 평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상에서 거룩하고 신실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강을 사모하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하나님의 뜻으로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은 자, 사도라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세상에서 거룩한 성도로, 신실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입니다. 하나님이 은혜와 평강을 주셔야 합니다.

가정과 사회와 일터로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의 사도로써 거룩하고 신실하게 사시기를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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