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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즉흥은 즉흥적이 아니다 (마 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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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흥은 즉흥적이 아니다 (마 4:1-11)

즉흥적인 것같지만 즉흥적인 것은 결코 즉흥적이 아닙니다. 반드시 그 뿌리가 있습니다. 빙산 일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다위에 빙산이 떠내려 갑니다. 위로 보이는 부분은 조그만 합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부분은 산같이 큰 빙산입니다.

즉흥같지만 즉흥의 뿌리에는 엄청난 것이 숨어 있습니다.

에디슨이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천재는 99% 노력과 1% 영감이다.”

이 말을 우리는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천재라도 99%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노력을 강조한 말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이 아니었습니다. 에디슨이 이 말을 할 때에는 아무리 99% 노력을 하여도 1% 천재의 영감이 없으면 안 된다고 천재의 1% 영감을 강조한 말입니다. 천재의 즉흥적인 아이디어같지만 결코 즉흥적이 아닙니다. 비상한 뿌리가 있습니다.

김 연아가 스케이트를 하다가 갑자기 몸을 하늘로 날리며 세 퀴를 돕니다. 깜짝 쇼같습니다. 멋진 즉흥적인 흥분입니다. 모두가 박수를 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까지는 한번 도는 데 900번 이상을 엉덩방아를 찧으며 피눈물나는 연습을 한 뿌리가 있습니다. 한번 도는 것을 연습하는 데 10억원 정도씩 연습비가 필요하였다는 것입니다.

즉흥은 즉흥적이 아닙니다.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예수님께서 40일 공생애에 들어가시기 전에 40일 금식기도를 하셨습니다. 무슨 일을 하기 전에 기도보다 앞서지 말라고 하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시고 계십니다. 40일 금식기도를 마치셨습니다. 

제일 먼저 나타난 것은 마귀였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것이라.”

마귀는 예수님을 다시 성전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마귀가 예수님을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말했습니다.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마귀는 더 이상 예수님에게 말을 붙이지 못 하고 떠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세 마디 말씀은 결코 즉흥적인 것같으나 결코 즉흥적이 아니었습니다. 즉흥이 아니라면 어떤 뿌리가 있는 것일가요?

1. 성경 읽기가 뿌리입니다.

마귀가 와서 예수님을 유혹할 때 예수님은 결코 즉흥적으로 대답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신명기 성경을 인용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있었던 구약성경을 늘 읽고 계셨음을 증명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기록하였으되”

세 마디 모두 성경을 인용하셨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것이라.” 

인간에게 가장 큰 욕구는 식욕입니다. 먹지 못 하고 굶주리고 목마름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예수님이 40일 동안 굶주리셨습니다.

동생이 일주일 금식기도하고 있을 때 방문하였습니다. 보름달을 보면서 말했습니다.
“형! 빵같애!”

무엇이든지 먹는 것으로 보이는 모양입니다.

유 관순이 감옥에 있을 때 어 윤희 장로님이 같이 있었습니다. 서강 감리교회 장로님이십니다. 서강 교회 정문에 그의 비석이 있습니다. 어 장로님은 조금 주는 음식, 조금 주는 물을 유 관순에게 주고 용기를 주고 격려하였기에 유관순이 탄생된 것입니다.

40일 주린 예수님에게 가장 결정적인 유혹은 떡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경 말씀으로 이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이 말씀은 신명기 8장 3절 말씀입니다.


두 번째 시험도 이기기 힘든 시험이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는 당시 가장 큰 욕구였습니다. 사역을 시작하려고 하면서 가장 큰 욕구는 인정받고 일하고 싶은 욕구였습니다. 마귀는 이 약점을 파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시편 91;11-12 말씀입니다. 역시 기록된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세 번째 시험도 큰 시험이었습니다. 첫 시험은 평지에서, 두 번째 시험은 성전 꼭대기에서, 마지막 시험은 산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갈수록 태산이었습니다. 점점 높아 갔습니다. 점점 커졌습니다.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그러나 예수님은 외치셨습니다.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이 말씀은 신명기 6장 16절 말씀입니다. 이같이 예수님은 늘 성경을 읽고 계셨었습니다. 
모두가 기록된 말씀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성경이 즉흥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영국이 온 세계를 점령하여 영국 땅에는 해가지지 않을 때였습니다. 남양군도 섬을 점령하였는 데 나무가 없었습니다. 영국 정부는 인부 100명을 파송하였습니다. 그 섬에 나무를 심으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대장은 100명을 데리고 갔는 데 모두 난폭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귀양을 보내듯이 보낸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삼청 교육대가 제주도로 보내져서 1100 도로를 닦은 것과 같은 성격이었습니다.

섬에서 나무를 심던 중 100명은 대장을 체포하였습니다. 대장으로부터 감시받고 구속받기 싫다는 것이었습니다. 작은 배를 하나 구하였습니다. 선장을 그 배에 태워서 바다로 보내 버렸습니다. 누구의 명령도 듣기 싫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섬에 살고 있던 흑인 여자들과 같이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무법천지였습니다.

그렇게 30년이 지났습니다.

그 섬은 온통 흑백이 섞여서 흑인도 백인도 아닌 혼혈인이 되었습니다. 30년이 지난 어느 날 그 섬 옆을 지나던 배가 그 섬을 보니 교회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죤 아담스 목사님이 그 마을 추장이었습니다. 영적 지도자와 정치적인 지도자가 같았습니다. 사연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30년 동안 거의 술마시고 난장판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담스가 어머니가 넣어 준 성경책이 생각나서 꺼내어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조용한 성령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아담스가 변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기도하였습니다. 성경을 읽으며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온 마을이 복음화되었습니다. 그 곳이 완전히 복음화되어 천국이 되어 있었습니다. 성경은 능력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말씀이 가는 곳, 성경이 가는 곳에는 언제나 성령의 역사가 따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기에 하나님도 임재하여 주셨습니다.

반대 이야기가 있습니다.
톨스토이 저서 중에 <재화의 근원>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동네에 의좋게 나란히 두 집이 살고 있었습니다. 한 집에 닭을 기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닭이 옆 집에 가서 알을 낳고 꼬꼬댁 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찾아가서 우리 닭이 낳은 알이니 달걀을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달걀 하나를 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안 낳다고 하면서 주지 않았습니다. 둘 사이에 싸움이 되었습니다. 말다툼을 하다가 싸움이 심해졌습니다. 남편들까지 합세하여 싸움이 되었습니다. 큰 싸움이 되었습니다. 승자 패자 없이 기분나쁘게 싸움이 끝났습니다. 그 날 밤 한 여인이 분을 삭이지 못 하여 옆 집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 불이 자기 집까지 날라와서 두 집을 모두 불태우고 말았습니다. 두 집은 불탄 자리위에 거적을 깔고 앉아서 서로 마주 보며 한숨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아무 것도 아니었는 데..........”

성경이 없고, 예수님이 없고, 말씀이 없는 곳에는 항상 비극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승리가 없고 축복이 없습니다.


2. 가득 들어 있는 것이 뿌리입니다.

그 사람 속에 가득 들어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세 말씀속에 꼭 들어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기록하였으되”

그리고 “하나님”입니다.

예수님 마음속에는 성경이 가득하였고, 하나님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이 튀어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속에 “기록하였으되”와 “하나님”은 약방의 감초처럼 들어가 있습니다. 이 두 말이 없으면 예수님의 말씀이 성립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이 두 말씀이 가득 들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은 그 사람안에 가득 들어 있는 것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생긴 사건입니다. 조선일보 보도입니다. 결혼하고 첫 날 밤을 자고 헤어진 신혼부부 이야기입니다. 첫 날 밤을 자면서 신랑이 잠결에 무의식적으로 다른 여자 이름을 불렀습니다. 심하였던 모양입니다. 

신부는 화가 나서 선언하였습니다.
“무슨 말로도 용서할 수 없다. 이혼하자.”

그래서 위자료 소송을 냈습니다. 가득 차 있는 것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즉흥은 즉흥적이 아닙니다. 반드시 뿌리가 있습니다.

예수님 속에는 성경과 하나님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그런 말씀이 나온 것이지 즉흥이 아니었습니다.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초등학교 교실에서 선생님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학생하나가 컬럼버스에 대하여 듣다가 졸았습니다. 막 졸 때 한 학생이 방귀를 뀌었습니다. 

선생님이 그 때 물었습니다.
“누가 방귀를 뀌었나?”

졸던 학생이 깜짝 놀라 깨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콜럼버스입니다.”

가득찬 것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복덕방 하시는 장로님은 아파트 계약을 정신없이 하다가 예배시간이 되어 정신없이 교회로달려 와서 사회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외쳤습니다.
“찬송가 256동 부르십시다.”

가득 찬 것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증흥은 즉흥이 아닙니다.

어느 은행원은 예배 사회를 맡고 계속 돈만 세다가 황급히 교회로 달려와서 강대상에 섰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말했습니다.
“찬송가 200원 부르십시다.” 즉흥은 즉흥이 아닙니다. 가득 찬 것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속에는 성경과 하나님만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어느 전도자가 젊은이를 만나서 전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으세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버지같은 분이십니다.”

그 젊은이는 갑자기 얼굴이 벍겋게 달아 오르면서 말했습니다.
“그 하나님! 내가 죽여 버리고 싶습니다.” 놀라서 물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가정을 망친 사람입니다.”

인간의 아버지는 안 좋은 아버지가 많아도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좋으신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욥은 말했습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청컨대 너는 그 입에서 교훈을 받고 그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고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리면 다시 흥하리라>(욥 22;21-23)

우리 속에는 오직 예수, 오직 하나님으로 가득 차야 합니다. 그러면 종은 어디를 쳐도 종소리가 나는 것처럼, 우리는 어디를 건드려도 예수님 소리가 나오게 될 것입니다.


3. 기도가 뿌리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결코 즉흥이 아니었습니다. 성경과 하나님이 그 뿌리였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습니다. 기도하신 결과입니다. 예수님이 40일 금식기도를 마치셨습니다. 기도는 기도자에게 담대함과 능력을 줍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담대하게 마귀를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시오니즘 정책을 시행중입니다. 여러 가지 내용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성전 복원입니다. 우리에게는 관계가 없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선지자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짐승피로 죄사함을 받는 구약의 교리를 그대로 받아 드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전 복원은 곧 짐승피 복원입니다.

짐승피를 복원하려면 제사장을 복원하여야 합니다. 제사장을 복원하려면 레위인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12 지파 중에 레위 지파를 찾고 있습니다. 레위 지파만 5만명 가량을 찾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레위 지파라고 판정을 받고 그 가문에서 아들을 낳으면 2살에 제사장 훈련학교인 야시바 학교에 입학시켜야 합니다.

어머니가 안고 학교에 갑니다. 랍비들이 레위기를 하루 종일 읽어 줍니다. 그래서 야시바 학교 학생들은 일단 입학하면 레위기 언어로 히브리어를 익히기 시작합니다. 레위기만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하루에 5번씩 기도하는 기도훈련을 시키게 됩니다.

야시바 학교 법칙이 있습니다.
<회당에 갈 때에는 뛰어가고 집에 갈 때에는 천천히 가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오해하신다.> 
<음란 서적을 읽을 지언정 신약 성경은 읽지 말아라. 유대교를 파괴시키는 책이다.> 

그래서 철저하고 기도하는 제사장을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판단은 즉흥이 아닙니다. 성경 훈련, 하나님 훈련, 기도 훈련을 통하여 철저한 제사장이 됩니다.

입만 열면 성경이고, 소리를 냈다하면 하나님이고, 시간만 나면 기도하는 사람으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어느 분이 환상중에 천국에 갔습니다.
베드로가 데리고 다니면서 천국을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그런데 큰 창고하나만은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베드로에게 말했습니다.

“저 창고를 보여 주십시오.”

베드로가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 궁금하여졌습니다. 그래서 계속 집요하게 보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큰 창고 건물이었습니다. 층층이 선반이 사방으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쁘게 포장한 선물들이 첩첩히 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이름이 적혀 있는 선물들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가 물었습니다.

“나를 주려고 저렇게 많은 선물을 준비하여 놓고 왜 주시지 않으셨나요?”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야고보는 말했습니다.
“너희가 얻지 못 함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약 4;3)

구하면 주십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6)

기도가 있는 땅과 기도가 없는 땅은 다릅니다.
쏘련은 기독교를 박해하고 공산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그 땅이 세 가지 기적의 땅이 되었습니다.

“나무는 많은 데 종이가 없습니다.

원유는 많은 데 휘발유가 없습니다.
땅은 넓은 데 식량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 땅은 반대입니다. 깊은 산속, 굴속, 교회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밤을 지새우며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사람들이 많은 나라입니다. 그래서 쏘련과 반대 나라가 되었습니다.

“나무는 없는 데 종이가 많습니다.

원유는 없는 데 휘발유가 많습니다. 
땅은 좁은 데 식량이 부족하지 않습니다.”

기도가 있는 땅은 응답이 있는 땅입니다. 예수님이 40일 금식기도하시고 나니 모든 것이 승리로 돌아 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즉흥은 즉흥적이 아닙니다.
쌓여 있는 것이 나오게 됩니다. 예수님같은 즉흥을 우리도 가져야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이됩니다.


마지막으로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책을 쓴 정 연희를 소개하며 마치려고 합니다.

감동스러운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은 맹 의순입니다. 그는 6.25 전쟁중에 중공군 부상자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치료하여 주었습니다. 미군이 간첩으로 오해하여 체포되어 포로 수용수용소에 들어갔습니다. 중공군과 북한군들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포로 수용소에는 미군 군의관이 있었습니다. 아픈 적들을 치료시켜 주고 있었습니다. 그는 영어를 잘 하기에 통역관이 되었습니다.

그는 아픈 환자들을 찾아가서 가만히 손을 잡고 말합니다.

“나는 먹는 약이나 바르는 약이 없어요. 그런데 마음에 평안을 주는 약이 있어요. 눈을 감아요. 그리고 귀로 듣기만 하면 돼요.”

그리고 성경을 읽어 주었습니다. 찬송을 불러 주었습니다. 안아 주고 사랑하여 주었습니다. 포곤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였습니다.

그가 줄 수 있는 것은 성경 말씀, 그리고 예수님 그리고 기도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 가지로 가득 차 있었던 것처럼 맹 의순도 이 세가지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오해가 풀리어서 석방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곳에 중공군과 북한군에게 전도하겠다고 석방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는 그 곳에서 중공군 발을 씻어 주다가 그 자리에 쓰러져 죽었습니다.

그 후 그 곳에서 추도 예배가 있었습니다. 한 중공군 병사가 추도사를 낭독하였습니다.

“평화의 왕자, 화평의 사도, 인애의 왕, 우리에게 사랑의 주인이셨던 맹 의순 선생님이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추모사를 하였습니다.

“나는 맹 선생님을 사랑합니다. 그 분은 성자였어요. 그런 성자를 만날 수 있었던 이 세상은 좋은 곳이었습니다. 맹 선생님은 나에게 예수님을 선물로 주고 떠나셨습니다.”
(강문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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