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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안에 계신 이 (골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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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계신 이 (골 1:29)

구소련의 최초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이 지구를 한 바퀴 돌고 귀환한 후에 기자회견을 하는 자리에서 ‘내가 하늘로 올라가봤더니 하나님이 안 보이더라’라고 말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게 가가린 개인의 말이었는지 아니면 당에서 그렇게 말하라고 지시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좀 무식한 말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럼 위로 올라가면 하나님이 보일 줄로 생각했다는 얘기입니까. 

만일 최초 우주비행사가 러시아인이 아니고 한국인이었다면 그런 발언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국 사람들은 예로부터 신의 존재는 눈으로 봐야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서양의 종교가 들어오기 이전에도 우리 조상들은 영적인 세계를 느낌으로 경험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언어 속에 이미 그러한 사상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예컨대 신이 난다, 신바람, 신명, 흥이 나다, 신이 들리다, 영감이라는 말, 신통이라는 말, 영험이라는 말, 신기라는 말, 이런 모든 단어가 보여주는 것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영적인 세계가 존재하고 인간이 그것을 내면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 조상들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와서 하나님 내지는 하느님을 전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 조상들은 거기에 대한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수년 전 타임지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느냐 라는 내용의 기사를 내보낸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서구인들의 접근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규명한다고 하는 모든 철학적인 이론을 소개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소위 first mover 이론입니다. 모든 것이 이전에 존재했던 것으로부터 비롯되었다면 가장 최초의 원인이 있었을 것이 아니냐. 소위 first mover, 그게 바로 하나님이 아니었겠느냐 라는 이론입니다. 

또 하나는 원인 제공자 이론입니다. 사람이 무엇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인 그 무엇이 존재해서 생각할만한 원인을 제공하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마치 사람이 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꽃이 있기 때문이고 사랑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사랑이 있기 때문인 것처럼 사람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냐, 사람에게 원인을 제공하지 않느냐 하는 설입니다. 

또 하나는 도덕적 이론 설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생존에 필요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선을 행하고 선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선의 기준이 임의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이론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철학적인 이론을 제시한 뒤에 타임지 기자는 맨 나중에 소위 주관적인 경험론을 이유를 제시했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공통적인 요소가 있다, 그게 다였어요. 공통적인 요소가 있다…. 만일 한국인이 똑같은 주제로 기사를 썼다면 비록 그것이 비종교적인 잡지를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접근하는 방식이 달랐을 것입니다. 도대체 first mover 이론 때문에 하나님을 믿게 되는 사람이 세상에 몇 명이나 있습니까. 그건 대학교 강의실에서는 설득력이 있을지 모르지만 사람이 실제로 하나님을 믿을 것이냐 안 믿을 것이냐를 결정하는 데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이론입니다. 믿은 다음에 그 믿음을 더욱 곤고히 하게 하는 데에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처음 믿음을 갖는 데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좀 더 실존적이고 또 인격적이고 우호적인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믿을만한 이유를 갖게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제 친구의 어머님은 일평생 독실한 불교신자였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꿈을 꾸었어요. 꿈에 큰 강을 건어야 되는데 스님들은 옆으로 지나가기만 할 뿐 도와주지를 않는데 어느 신부님이 도와주는 꿈을 꾸었어요. 그래서 그 꿈을 꾼 다음에 본인이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남편이 병상에서 영세를 받고 장례식을 가톨릭 식으로 치렀습니다. 

이건 놀라운 일이지요. 아마 여러분 중에는 어떻게 꿈 하나 때문에 종교를 바꾸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분에게는 충분한 이유가 됐어요. 이처럼 사람은 실존적이고 또 인격적이고 우호적인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믿을만한 이유를 얻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 데에서 하나님의 실존을 실감하고 하나님을 신뢰할만한 이유를 찾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원리는 믿기 이전에도 유효하고 믿은 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눈에 보이지 않던 하나님이 별안간 보이기 시작하는 건 아니에요.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 눈에 안 보입니다. 믿기 전에도 그렇고 믿은 후에도 그렇습니다. 또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저절로 그의 감정이 바뀌는 게 아니에요. 믿기 전에는 기분이 나쁜 사람이 믿고 난 후에 기분이 저절로 좋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또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저절로 하나님의 섭리가 이해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은 때로는 여전히 애매할 때가 많이 있어요.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도대체 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하고 알 수 있다는 얘기냐. 그 대답은 바로 오늘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주 짧은 구절입니다. 한 절밖에 안됩니다. 원래는 여러 절을 읽어야 되지만 여러 절을 읽다보면 여러분의 집중력이 떨어질까 봐 한 절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여기서 말하기를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사도바울이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가 계시다고 말했어요. 이건 나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나와는 별도로 내 속에서 능력을 따라 역사하시는 인격체가 계시다는 말이에요. 이 분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이분이 바로 성령이에요.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시는 성령, 사도바울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의 또 다른 인격을 말하는 게 아니고, 우리의 감정을 말하는 게 아니고, 우리의 의지를 말하는 게 아닌, 내 안에 거하시는 또 다른 인격체가 계시는데 그분이 능력으로 역사하신다는 고백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 안에 계신 성령을 일컫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을 경험할 수 있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냐고 했을 때 무엇보다도 내 안에 계시고 역사하시는 성령의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을 느낄 수 있고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진리입니다. 쉽게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영적인 방법으로라야 하나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느냐.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길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것입니다. 왜 서구사회에 찬양과 경배에 사람들이 열광합니까. 음악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아니에요. 찬양과 경배를 통하여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왜 성령운동에 사람들이 몰려듭니까. 그 이유는 사람이 신비주의적이기 때문이 아니고 성령운동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왜 현대인들은 영성-spirituality에 대하여 관심이 높아집니까. 그것은 물질문명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고 영성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자꾸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에 눈길을 주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유물론적인 접근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유물론자들은 역사에 대해서 말하고 역사에서 신의 섭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차갑고 비인격적이고 인간의 영혼에 위안을 주지 못합니다. 

제가 그리스도인이 된 다음에 가장 현저한 변화가 어디에서 일어났느냐. 제가 부자가 됐느냐. 제가 더 건강하게 됐느냐. 제가 더 팔자를 고쳤느냐. 글쎄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가장 큰 변화는 뭐니 뭐니 해도 제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과 이후의 가장 현저한 변화는 영적인 변화요, 인격적인 변화요, 하나님을 아는 변화인데 이것은 내면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제 안에 성령이 오셔서 저를 감화 감동하시고 저에게 새로운 목적을 주시고 또 새로운 꿈을 주시고 그것을 이루고자 하는 의지를 주시고 마음속에 평강을 주시고 또 제 안에 감동을 주시고 하나님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처럼 하나님을 섬길 때 저는 신바람을 느낍니다. 그때 정말 신명나는 것을 느낍니다. 기쁨을 경험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신바람 ․ 신명 이런 단어를 사용한 것이 이해가 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역사하실 때 사람은 기쁨을 경험합니다. 뭔가 인생의 보람을 느낍니다. 담대해집니다. 용기를 얻습니다. 믿음이 생깁니다. 이러한 내면적인 변화가 가장 현저하고 가장 줄기찬 그리스도인의 변화입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이런 내면적인 변화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그 사람은 손해가 막심한 것이고 아직 제대로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너희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 안에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서 마치 물이 포도주가 되는 것 같은 내면적인 변화를 통하여 사람이 거듭나고 하나님의 나라를 알게 되고 이해하고 하나님 나라에 소속되고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으로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왜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오래 사느냐. 여러분 그 사실을 아십니까. 이건 이미 조사를 통해서 검증된 것입니다. 믿음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정기적으로 예배를 참석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적어도 5년 이상을 더 삽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저는 알 것 같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중에 신바람을 경험하는데 당연히 그것이 우리의 건강에 영향을 주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가 계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사도바울 같지는 않겠지요. 정도의 차이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이지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 속에 성령이 계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12장 말씀에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이미 성령이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를 감동하시고 그렇게 고백하도록 도우신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솟아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건 성령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여러분을 교회로 이끄시는 것이고 성령이 여러분을 경건한 자리로 이끄시고 성령이 여러분을 기도하게 하시고 신령한 것을 사모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건 내 의지로 말미암는 게 아니고 내 성향으로 말미암는 게 아니고 우리 안의 성령이 우리를 이끄시는 것입니다. 

흑인영가 중에 Every time I feel the spirit 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내가 성령을 느낄 때마다 감동이 있어 나는 기도하네''라는 가사입니다. 어떤 문학작품도 어떤 음악작품도 이보다도 더 귀한 진리를 단순하게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성령을 느낄 때마다 감동이 있어 기도하네'' 사람이 성령을 느끼기 때문에 기도하고 예배하고 성령을 느끼기 때문에 우리가 신앙으로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내가 성령을 느낄 때마다 감동이 있어 도박을 하네'라고 하지 않았어요. '내가 성령을 느낄 때마다 감동이 있어 욕을 하네''라고 하지 않았어요. 

성령은 우리를 경건한 일로 이끄십니다. 경건하고 선한 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우리 안에 이러한 일을 하셔서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 계십니다. 다만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내면적인 것에만 국한시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내 안에서 경험하는 것만으로 국한시키려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미신이요 신비주의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험은 모든 곳에서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흔적을 볼 수가 있고 또 역사의 흐름 속에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또 내 가정에 하나님이 인도하신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증거를 볼 수 있고 내 인생을 인도하신 그 모든 발자취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큰 세상에서도 역사하시고 우리의 작은 내면에서도 역사하십니다. 이런 모든 곳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비주의를 가르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희생하셨습니다.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목적은 우리가 신비주의자가 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희생하고 섬기고 일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서'' 

여기서 역사라는 말은 일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계셔서 우리를 신비주의적으로 만드는 게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일하게 하십니다.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삼천리강산 위해''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일하는 사명을 받습니다. 다만 이 일은 억지로 하는 게 아니고 마지못해 하는 게 아니고 자원해서 하는 것이고 즐거움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내 힘보다 더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에 붙들려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요,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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