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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이름이 무엇이냐? (막 5: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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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름이 무엇이냐? (막 5:1-20)
 
나의 나됨에 대한 확인이 필요합니다.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라는 독일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는 20세기 악의 상징이며 독재자였던 히틀러에게 대항했던 인물입니다. 전쟁에 몰두하고 있었던 나치정권하에서 평화를 외쳤던 인물입니다. 국민을 전쟁의 참혹함으로 몰고 갔던 위기 속에서 분연히 일어났던 용기 있는 인물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현실에 적용되고 나타나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는 목사의 신분으로 히틀러 암살에 가담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발각되어 감옥생활을 하게 되고 1943년 4월 9일 이른 새벽에 39살의 젊은 나이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습니다. 그는 참담한 감옥생활을 하면서도 의연하게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려 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난 받는 실존 속에서 자기가 도대체 누구인지 깊이 고뇌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누구인지 그 정체성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본회퍼의 글을 통해 나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확인했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쓴 글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감방에서 나오는 나의 모습이 
어찌나 침착하고 명랑하고 확고한지 
마치 성에서 나오는 영주 같다는데,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간수들과 대화하는 내 모습이 
어찌나 자유롭고 사근사근하고 밝은지 
마치 내가 명령하는 것 같다는데,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불행한 나날을 견디는 내 모습이 
어찌나 한결같고 벙글거리고 당당한지 
늘 승리하는 사람 같다는데, 

나는 누구인가? 
남들이 말하는 내가 참 나인가, 
나 스스로 아는 내가 참 나인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불안하고 그립고 병약한 나, 
목 졸린 사람처럼 숨 쉬려고 버둥거리는 나,
빛깔과 꽃 새소리에 주리고 따스한 말과 인정에 목말라하는 나, 
방자함과 사소한 모욕에도 치를 떠는 나, 
좋은 일을 학수고대하며 서성거리는 나, 
멀리는 벗의 신변을 무력하게 걱정하는 나, 
기도에도 생각에도 일에도 지쳐 멍한 나, 
풀이 죽어 작별을 준비하는 나인데, 

나는 누구인가? 
이것이 나인가 저것이 나인가? 
오늘은 이 사람이고 내일은 저 사람인가? 
둘 다인가? 
사람들 앞에서는 허세를 부리고 
자신 앞에서는 척박하게 우는소리 잘하는 겁쟁이인가? 
내 속에 남아 있는 것은 이미 거둔 승리 앞에서 
꽁무니를 빼는 패잔병 같은가? 
으스스한 물음이 나를 조롱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당신은 아시오니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하나님!

본회퍼 목사님은 고난 받는 한 실존으로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내가 누굴까? 내가 나를 보아도 잘 모르겠다. 사람들은 수군수군 이렇게 말하지만 내가 나를 들여다보면 그게 아닌데, 내 속에는 어둠이 있는데 사람들은 빛이라 하고, 내 속에는 두려움이 가득한데 다른 사람들은 용감하다고 하니 도대체 내가 누굴까? 그 두 모습 다일까?’ 그는 자기실존에 대해서 묻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만이 내 두려움도 알고 내 용감함도 알고, 하나님만이 내 허세도 알고 내 순전한 마음도 알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나의 나됨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누군가가 네가 누구냐 물으면 실은 자신을 모르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해 쫑긋하고 귀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남의 평가에 일희일비하며 살아갑니다. 누군가가 좋게 평가하면 의기양양해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조롱하면 의기소침해져서 어쩔 줄 몰라 탄식하는 존재가 바로 우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뭘까요? 하나님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다시 확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 자신의 본래 모습대로 살아라, 네가 얼마나 소중한지 너 자신을 회복하라, 그리고 너 자신의 삶을 누리면서 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오늘 하나님 말씀에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상실했습니다. 이름이 없습니다. 이름이 없으니 자기 정체성도 사라지고 짐승처럼 살았습니다. 산 것이 아니라 죽은 듯이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는 더러운 귀신에게 붙잡혔습니다. 쇠사슬과 고랑으로 묶여 있고, 무덤 사이에 거처를 삼고서 살아 있으나 죽은 자이고, 죽은 자 같으나 살아 있기 때문에 무덤에서 산으로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소리소리 지르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너무나 탄식스러워 돌을 집어서 벌거벗은 몸을 긁어 자기 자신을 상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찾아오셨습니다. 오늘 본문 그 이전의 구절에는 예수님께서 껌껌할 때 폭풍우 이는 바닷가를 건너 이 사람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한 사람을 만나 치유하신 다음에 다시 바다를 건너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사람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예수님 앞에서 거짓된 나의 나됨이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찾아왔을 때 이 사람 마음속에도 예수님에 대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도착하신 예수님을 보자마자 달려갔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 귀신들린 사람이 달려갔을까요? 아니면 귀신이 이 사람을 달려가게 했을까요?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마가복음 5:6)

귀신들린 사람이 달려갔을 것입니다. 왜냐면 귀신은 예수님을 만나기 싫어하고 그 앞에서 숨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만나면 자기 정체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남을 속이고 위장하는 것이 귀신의 특징이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붙잡힌 이 사람 마음속에서 예수님에 대한 갈망, 고치기를 원하는 갈증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가 예수님 앞에 나오자 드디어 귀신의 정체가 드러났습니다. 귀신은 이제는 예수님과 타협하려고 놀라운 고백을 하며 자신의 정체를 드러냅니다. 악 속에 있으면 악을 잘 모르고, 어둠 속에 있으면 어둠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어둠은 빛에 가까이 왔을 때 얼마나 어두운가를 알게 되고 악은 선을 만나야 악이 무엇인지가 드러납니다. 선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에 이 악한 귀신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귀신이 이렇게 말합니다.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마가복음 5:7)

예수님을 향해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영적인 고백을 하는 앞부분만 보면 아주 거룩한 성도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두려움에 꽉 차 있습니다. 도망가려고 하고 예수님과 타협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있나이까?”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 앞에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고 주님과 상관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귀신은 관계를 해제시키고 이 위기만을 모면하려고 나를 괴롭히지 말라고 요청합니다. 귀신의 특징은 남을 괴롭히면서 자기는 괴롭힘을 당하지 않겠다는 생각입니다. 남에게 거짓을 행하면서 자기는 속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남을 무너트리고 남은 파괴하면서 자기는 계속 존재하겠다는 모습이 귀신의 특성입니다. 우리가 삶에 자기존중을 하지 못하면 이런 특성이 있는 귀신에게 내 주권을 넘겨주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거짓된 나의 나됨에서 해방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들린 사람에게 어떤 사람이 되기를 열망하며 대하셨을까요? 인간아, 너는 귀신에 얽매일 존재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먼저 네 이름이 무엇인가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인간의 존엄성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아무도 자기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았습니다. 귀신 들고 병든 다음에는 더욱더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이 어쩌면 처음 그의 이름을 물었을 것입니다. 귀신이 그를 억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마가복음 5:9)

귀신들린 자의 정체성을 물었는데 자기를 상실했고, 더 이상 자기가 얘기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귀신이 대신 말합니다. 군대라고 대답하는데 ‘레기온(λεγιων)’이라는 말의 번역입니다. 군인 5,000명에서 6,000명 정도의 오늘날 군대 여단 규모의 숫자입니다. 수많은 귀신이 그에게 붙어 있었습니다. 거짓 자아가 그 사람의 인격을 분열시키고 있었습니다. 다른 인격들이 내면의 세계를 붙잡아 그의 고유한 인격이 빼앗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모습을 안타깝게 생각하셨습니다. ‘그에게 어떻게 자유를 줄까? 그가 어떻게 회복될 수 있을까? 그가 어떻게 인격으로 살아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하며 예수님은 귀신들린 사람과 귀신을 분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마가복음 5:8)

예수님은 우리를 스스로 삶을 책임지는 자유자가 되게 하십니다. 

이 사람은 거짓 자아인 귀신에게 식민지배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도 자기를 모르게 되어 자신에게서도 소외되고 있었습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도록 되어갔습니다. 그래서 무력했고 좌절감에 시달렸습니다. 

우리도 ‘내가 내 인생의 주인 역할을 하고 있는가?’ 물어봐야 합니다. 이 사람도 처음에는 자기가 그 인생의 주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어느 순간 주인 되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유혹을 받을 때 그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탐욕이 들어왔을 때 탐욕에 붙잡혔습니다. 음란의 귀신이 그에게 들어왔을 때 음란에 붙잡혔습니다. 나중에는 두려워서 붙잡혔습니다. 자기가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함에도 책임지기 싫어하고 두려워하면서 사탄이, 귀신이 그를 붙잡게 두었습니다. 

여러분, 내가 내 인생의 책임자인 것을 선언해야 합니다. 우리는 남의 생각에 지나치게 좌지우지 당합니다. 남에게 그냥 끌려갑니다. 내가 내 행동을 책임지기 싫어서 그냥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우리 안에 나를 존중하는 내가 있습니다. 또 반대로 내 속에 나를 조롱하는 내가 있습니다. 이것을 분리해야 합니다. 나를 조롱하는 나를 떠나보내야 합니다. 내 안에 나를 격려하고 밝은 빛으로 인도하는 내가 아닌, 나를 어둡게 만들고 음침하게 몰아가는 나는 떠나보내야 합니다. 나에게 이해와 사랑을 심으려고 하는 나와 그것을 분리시켜서 떠나보내야 합니다. 

나를 존중하고 나를 사랑하는 자아는 내게 자유를 주고 자존감을 키워주지만, 후자에게 붙잡히면 나를 억압합니다. 자기 연민 속에 빠져들게 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는 사탄이 우리를 못살게 구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약점으로 우리를 붙잡고 자기의 노예로 만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약점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자유자로 선포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의 내면세계에 자기 스스로 주인이 되게 하여 주십니다. 내적 통일성을 그에게 가져다줍니다. 그동안 통제할 수 없던 자기를 통제하게 합니다. 분열되었던 인격을 통합시켜 주십니다. 자기 존재를 망가트리는 귀신을 내쫓게 하십니다. 

거짓된 나의 나됨을 꾸짖고 참된 나와 화해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안에는 두 가지 마음이 있습니다. 빛도 있고 어둠도 있습니다. 긍정도 있고 부정도 있습니다. 선한 면도 있고 악한 면도 있습니다. 정직도 있고 부정직도 있습니다. 신뢰하는 마음도 있고 의심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남을 포용하려는 마음도 있고 남을 배척하고 비난하려는 마음도 있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용납하셔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갈등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확인하고 한 걸음씩 나가야 합니다. 내 속에 이런 악이 나를 자꾸만 무너트리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확인해야 합니다. 

가장 위대한 용기는 내 속에 나를 어둠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을 향해서 스스로 꾸짖을 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적당히 하려고 하다가 거기에 붙잡히는 순간 우리는 이중적인 인간이 됩니다. 이중적인 인격자가 됩니다. 이럴 때 자기 자신과 화해를 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내가 실수했던 것, 무너져서 어둠의 골짜기를 헤맸던 나를 용서하고 화해해야 우리가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납니다. 
이 사람은 이미 더 깊이 빠져 자기 주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강제적으로 ‘이 더러운 귀신아, 물러가라.’하고 쫓아버렸습니다. 

“그 귀신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마가복음 5:15)

벌거벗었던 사람이 옷을 입었습니다. 자기를 자해하던 사람, 산에서 무덤 사이를 오르락내리락했던 사람이 조용히 앉아 있었습니다. 자기통제가 시작됐습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알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나의 나됨이 온전히 회복됩니다. 

이 시대는 악의 세력이 우리를 유혹하고 넘어트리려 합니다. 매일매일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립니다. 본래의 자아를 포기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나는 나다.’라고 선포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나는 나다.’라고 하신 유일한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만이 ‘나는 나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선언해야 합니다. ‘나는 나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이 세상의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하고 선포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내가 너의 아버지다. 아바 아버지다.’하고 말씀을 신뢰하여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만나면 그냥 가서 안기듯이 하나님의 팔에 나 자신 전체를 맡기셔야 합니다. 50%만 맡기지 말고 90%, 98%만 맡기지 말고 마지막 그 2%까지 맡기셔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으시고 치유하시고 회복하게 하십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무슨 일을 하셔도 괜찮습니다. 여러분에게 맡겨진 일을 담대하게 ‘하나님, 내가 주님의 사랑으로 내게 맡겨준 일들을 감당하겠습니다.’하고 선포하면서 나아가는 귀한 믿음의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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