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요 9:36-39)

첨부 1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요 9:36-39)


Ⅰ. 이 말씀은 빛의 은총을 입은 자가 던지는 절규적 대망이 담긴 소원의 질문입니다. 
  
그는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자였습니다(요 9:1). 그는 마침 성전에서 나오시던 예수님을 만났습니다(요 9:1).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소경을 보고 주님께 이르기를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라고 질문하였습니다(요 9:2).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고,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대답하신 후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결과 그는 가서 씻고, 보지 못하던 어둠의 저주에서 벗어나 밝은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벌써 예수님이 그 사람 앞에서 자취를 감추시고 보이지 아니하였습니다(요 9:3-7). 
 
 이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세상의 빛'이심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목적이었다고 본문에 밝히고 있습니다(요 9:5). 
그는 주님께서 베푸신 기적의 은총을 받은 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목마르게 찾고 찾으며 던지는 대망의 질문이 "주여,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알고 보면 이 사람의 마음속에는 절규적 대망을 토하는 질문이었습니다. 

Ⅱ. 심한 논쟁 속에서 토한 질문입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그가 눈을 뜨게 된 이 사건은 엄청난 물의를 빚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큰 논쟁으로 비화되었습니다.

1. 먼저 이웃과의 논쟁이었습니다.

그의 이웃은 그가 전에 소경이었다가 눈을 떠서 보게 된 사실 앞에 여러 가지 의구심을 드러냈습니다. 전에 구걸하던 그 소경이다, 아니다, 아니 비슷한 자라고 하는 논쟁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내가 그로라」(요 9:9)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다시 이웃은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고 질문하였습니다. 그때 그는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저희가 다시 묻기를 「그가 어디 있느냐」라고 하니 「알지 못하노라」고 대답하였습니다(요 9:10-12). 바로 그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요 9:14). 그 이웃들은 그를 바리새인들에게로 데리고 갔습니다(요 9:13). 

2.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이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때 그는 이웃에게 증거한 것을 반복하였습니다(요 9:15). 그의 말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두 가지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① 바리새인 중에 혹은 말하기를 "그가 어찌 안식일을 범했는가?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선지자는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② 또 다른 바리새인들은 "저가 죄인이라면 어떻게 이런 표적을 행하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쟁론이 일어나 논쟁을 벌이던 저들은 눈을 뜬 사람에게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서슴지 않고 「선지자니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요 9:17). 

이때 바리새인들은 저가 소경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사실 여부를 확인하려 했습니다. 그때 그 부모는 대답하기를 "이는 틀림없이 소경으로 난 우리 아들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가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저에게 직접 물어 보십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어떻게 된 일인지 대답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한 것을 알고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요 9:22)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유대교에서 출교를 당함은 바로 죽음에 이르는 생존적 박탈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요 9:18-23). 

바리새인들은 다시 소경되었던 자를 불렀습니다. 그는 다시 두 번째로 바리새인들에게 불려갔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소경되었던 자에게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요 9:24)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그는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요 9:25)라고 말하였습니다. 
다시 바리새인들은 그에게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요 9:26)라고 반복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때 소경되었던 그 사람은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요 9:27)라고 역문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께서 날 때부터 소경되었던 자에게 행한 빛의 기적이 논쟁거리가 되었습니다.

Ⅲ. 죽음에 이르는 박해를 받는 중에 던진 질문입니다(요 9:28-34).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하는 중에 그는,

1. 욕을 얻어먹었습니다(요 9:28).

그 이유는 "당신들은 그의 제자가 되려 하느냐?"고 역문한 질문 때문이었습니다. 저들은 욕을 하며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다."라고 소리쳤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셨지만 우리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그 출처조차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요 9:28-29).
  
그러자 소경되었다가 눈 뜬 자는 저들 앞에서 다시 말합니다. "이상합니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결코 내 눈을 뜨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자기 소신을 밝혔습니다(요 9:30-33).

2. 그는 출교를 당하였습니다(요 9:34). 

눈 뜬 자의 소신 있는 말을 들었던 바리새인들은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태어난 죄인으로서 우리를 가르치려고 하느냐?"라고 하면서 그를 쫓아내 버렸습니다(요 9:34). 여기 '쫓아냈다'는 것은 '출교'를 뜻합니다.
  
'출교'란 회당에서의 추방을 의미합니다(요 9:22, 34, 12:42, 16:2). 당시 유대교에서는 세 가지 형벌이 있었습니다. 
  
① 그 하나가 '견책'이었습니다. 기간은 7일에서 30일까지입니다. 
  
② 또 하나는 '근신'이었습니다. 10인(人)회에서 선고를 받고 최소한 40일간 공중과 교제가 금지되고, 저주를 받고, 그 후 다시 30일간의 훈계 시기를 지나는 것이었습니다. 
  
③ 그리고 세 번째가 '출교'였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그 사회에서 제거되는 것입니다. 공중 석상에 나갈 수 없고, 사람들에게 4규빗(6척) 내로 접근을 못하고, 아무도 그와 교제하거나 그에게 물건을 팔거나 사거나 할 수 없으며, 그와 함께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가 죽으면 그 시체에 돌을 던지고 그를 위하여 슬퍼하고 곡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유대인)들은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면 이런 출교를 하였습니다. 실로 공생하는 생존권을 박탈하는 일종의 사형이었습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암흑에서 광명을 되찾은 그는 세상에서 이런 무서운, 죽음에 이르는 형벌인 출교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소경되었던 자신이 눈을 뜨고 밝은 세상을 보고 있다는 이 사실 때문에 여러 유의 논쟁과 박해와 출교가 가해지는 가운데도 예수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변함없이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이웃의 머뭇거림 앞에서 「내가 그로라」(요 9:9),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요 9:11)라고 증거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 앞에서도 '그 사람이 나를 보게 했다.'(요 9:15)고, 부모의 미온적인 태도 앞에서도 그는 단독적이고 자립적으로 확신 있는 투쟁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 앞에서 "그 사람은 선지자입니다."(요 9:17)라고 하면서 "왜 반복적으로 자꾸 질문을 거듭하십니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합니까?"(요 9:27)라고 역문하며,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그의 출처조차 알지 못합니까?"(요 9:30)라고 질문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빛의 은총을 굳게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이 그에게 그 무슨 말을 어떻게 하여도 '나는 소경으로 있다가 그 사람 예수로 말미암아 눈이 열려 보고 있다.'는 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때문에 예수를 향한 그의 소신은 바뀔 수가 없었습니다. 

Ⅳ. 예수를 향한 그의 고백적 혼의 고백입니다(요 9:35-39).

예수님께서 예수께 받은 은총의 확신 때문에 출교를 당하였다는 말을 듣고, 그 사람을 다시 찾아 만나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네가 인자를 믿느냐」(요 9:35)고 질문하셨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크리소스톰은 "유대인들은 그를 성전으로부터 쫓아내 버렸다. 그러나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께서 그를 다시 발견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질문을 받은 그는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요 9:36)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는 캄캄함 속에서 이 세상에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라고 하는 그 사람 때문에 빛을 받아 새 세계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정말 그에게 냉혹하였습니다. 이웃들이 그러했고, 그의 부모까지도 그러했고, 바리새인들이 그러하였습니다. 그는 오히려 논쟁의 대상이 되고, 출교라고 하는 무서운 사형언도를 받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는 자기의 눈을 뜨게 해 준 사람에 대한 동경과 확신과 열망적 소망으로 가득 차 버렸습니다. 이웃보다, 부모보다, 바리새인보다, 아니 출교보다도 그에게는 자기를 보게 해 주신 그 분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분을 보고 싶었고,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만을 믿는다고 전인적인 고백을 하고 싶었습니다. '눈 뜬 것'이 죄목이 되어 출교에까지 이른 그에게는 자기의 눈을 뜨게 해 주신 분이 더 그리웠던 것입니다.
  
다시 그를 만나 주신 주님은 그에게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요 9:37)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때 그는 「주여 내가 믿나이다」(요 9:38)라고 즉각적으로 고백하며 엎드려 절을 하였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이웃사람들에게 「예수라 하는 그 사람」(요 9:11)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 앞에서는 「선지자니이다」(요 9:17)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나중에는 박해 중에도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요 9:33)라고 하며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라고 고백하며 자기 소신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자기 앞에 다시 나타나신 예수를 뜬 눈으로 확실히 보면서 「주여 내가 믿나이다」(요 9:38a)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예수 자신의 모습 앞에서 그는 '주'(κ?ριο?)라고 고백합니다. 바로 그리스도(메시야)라고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절하는지라」(요 9:38b)라고 하였습니다. 입으로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행동으로 예배하였습니다. 여기 '절한다'(προακονεω)는 말은 최상, 최대, 최고, 최귀의 행위를 가리키는 행동적 고백입니다. 그는 자신의 본래로 돌아갔습니다. 자신이 지음받은 존재론적 의미와 내용과 목적이 창조주를 향한 '절함', 곧 예배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신 목적은 바로 그에게 '예배'(절함)를 받으시기 위함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 모두는 날 때부터 어두운 죄인으로 출생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영적 맹인으로 출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영광의 일로, 곧 구속적 경륜으로 보았습니다(요 9:3). 예수께서 세상의 빛이심을 나타내어, 우리를 영의 암흑에서 건져내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크리스천 모두는 예외없이 「물과 성령으로」(요 3:5)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나의 주로 고백하는 영의 눈이 밝아진 자들입니다. 
"선생님, 높은 하늘을 다녀온 우주 비행사가 마음이 청결하였습니까? 마음이 청결한 나는 이 무신론을 가르치는 교실에서도 하나님을 보고 있습니다."라고 하는 이 유명한 말은 소련의 우주 비행사 가가린이 '높은 우주에까지 올라가도 높은 데 계신다고 하던 성경의 하나님은 보지 못했다.'고 하던 말을 교육재료로 삼아 가르치던 선생에게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그 어린 꼬마 학생은 밝은 영의 눈을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신 예수로 말미암아 세상을 바로 보고,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빛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웃의 박해나 혈통의 부모나 어떤 종교적 교권주의나 권력주의 박해 아래서도 "예수는 나의 주님이시다."라는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행복자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일에도 그 예수 앞에 예배(절함)를 드리고 있습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고백하며 절하고 있습니다. 
예배는 인생의 부분이 아니라 인생의 인생 된 전부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라고 하였습니다.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요 9:36)!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요 9:3)!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요 9:38)!  (석원태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