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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레네 시몬의 십자가-방관자를 주인으로 부르는 십자가 (막 15: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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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레네 시몬의 십자가-방관자를 주인으로 부르는 십자가 (막 15:21-31)

(본문: 마가복음 15:21-31)

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22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23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24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가질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25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26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27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28 (없음)  어떤 사본에는 '불법자와 함께 인정함을 받았다 한 성경이 응하였느니라'가 있음 2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30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3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참조: 마 27:32-44; 눅 23:26-43; 요 19:17-27)

억지로 진 십자가의 위력

고난주간은 나날이 위험과 갈등이 깊어져가는 점층적인 긴장 주간입니다. 예수님은 월요일에 나귀타고 예루살렘 입성하십니다. 화요일 다섯 그룹의 적대자들과 충돌한 대논쟁의 날입니다. 수요일 침묵의 날입니다. 목요일 겟세마네 혈투의 날, 번뇌의 날입니다. 금요일 수난의 날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히는 날입니다. 토요일 비애의 날입니다. 저주를, 버림받은 운명을 마시는 날입니다. 땅에 묻혀 음부로 굴러떨어지는 날입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핵심심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기 위한 자발적 무기력, 자발적 바보되기, 자발적 권력포기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경험은 버림받음, 고독, 인간존엄의 박탈입니다. 그것은 강압적인 외부힘에 눌러 자기존엄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의 비통어린 패배입니다. 이 십자가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려고 고안해내는 방법입니다. 그것은 전능한 힘인데도 힘의 부재처럼 보이는 현장이기도 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아들의 무능력, 무기력, 하나님의 아들의 무능력과 무기력, 고독이 드러나는 현장입니다. 사랑 때문에 자녀의 칼에 쓰러지는 아버지의 날입니다. 사랑 때문에 조롱을 견디는 아버지의 날입니다. 신하들과 백성들의 반역으로 왕이 지옥으로 굴러떨어진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사랑함으로 폭력적인 공권력을 동원하지 못하고 자기가 죽을 때까지 참으시는 왕의 자기비하 날입니다. 피조물의 온갖 반역과 저항에 창조주 하나님이 쓰러지는 날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날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열 두 영이 더 되는 천군천사를 동원하여 일시에 적들을 섬멸할 수 있는 권능을 가진 분이, 자기를 지킬 능력이 전혀없는 죄인의 연약함에 동참하는 날입니다. 그는 십자가를 지고 2킬로미터 남짓한 골고다 언덕길에서 세 번씩이나 쓰러집니다.  

이 처참한 나사렛 예수의 고난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모습이라니,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이라니 정말 어려운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가 당한 처절한 고통과 저주어린 죽음이 예수의 육체를 죄로 정하사 단죄하는 하나님의 심판현장입니다(롬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예수는 죄로 인해 심판을 당하는 무능력자가 되었습니다. 범죄자는 경찰의 포승줄에 묶이는 순간 무능력자가 됩니다. 자기 생명과 인신을 구속하는 법 앞에 결박되어 자유와 주권을 박탈당한 자가 됩니다. 범죄자를 자유케 하는 데는 어떤 인간적 도움도 의미가 없습니다. 죄를 범해 심판을 당하는 순간은 누구나 친구 없는 자, 도울 자 없는 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철저하게 버림받은 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도 사모할 수 없는 마지막 순간, 그것이 포박당한 죄인의 자리요 처형당하기 위해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죄인의 운명입니다. 나사렛 예수님은 바로 이런 자리에 섰습니다. 그는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요단강에 깊이 침수할 때, 즉 저마다 자기 죄를 고백하면서 물에 잠기는 그 순간에 무슨 죄를 고백하면서 물에 잠겼을까요? 

그는 무한책임을 지는 마음으로 이스라엘의 고난과 노예적 타락상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믿는 마음으로 요단강 수심으로 잠수했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지금 요단강에 잠기는 바로 그 마음으로 죄인의 자리에 섰습니다. 그는 체포당하고 재판받는 순간부터 불의와 폭력와 압제를 당하였습니다. 자기를 변호할 힘도 잃었습니다. 지극히 매를 맞고 혼곤히 피땀을 흘려 십자가를 지고 가는 걸음 걸음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쓰러진 것입니다. 한 번은 마리아와 조우하고 또 한번은 구레네 시몬과 조우합니다. 마지막으로 전설에 의하면 베로니카라는 여인과도 한번 조우하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예수님은 세 번째 쓰러지셨을 때 로마 병정은 예수님이 더 이상 홀로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는 것이 힘들다고 판단하여 지나가던 한 사람을 임의로 불러 세워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합니다. 그가 바로 구레네 사람 시몬입니다. 그는 아마도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아프리카 유색인종)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전혀 낯선 사람입니다. 모든 제자들이 차지했던 예수님의 옆과 앞이 텅 비었을 때 그 자리를 대신 지킨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데 21절은 그 낯선 사람의 두 아들을 소개합니다. 또 다른 두 낯선 사람들인셈입니ㅏ. 알렉산더와 루포입니다. 마가복음 독자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전제되고 있습니다.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 구레네 사람”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알렉산더와 루포는 이미 마가복음 독자들에게 익히 알려진 인물(이미 유명한 신앙지도자)이라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마가복음에서 한번도 본적이 없는 인물들입니다. 알렉산더와 루포! 그들이 누구일까요? 

놀랍게도 로마서 16장 13절에서 “루포”와 그의 “어머니”가 다시 언급됩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루포와 그의 어머니가 바울의 절친 동역자였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6:13에 보면 구레네 시몬의 가족은 완전히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억지로 진 것처럼 보였지만 구레네 시몬의 예수님 십자가 지는 경험은 충격 이상이었습니다. 죄없는 예수가 폭력에 짓이겨지며 하나님의 아들이 보호받지 못하고 모든 특권을 박탈당하고 모든 기도를 거절당하고 쓰러지는 장면을 보고 그는 어린 양의 피로 일곱 번 뿌림을 받은 듯한 영적 정화를 덧입었을 것입니다(히 10:22). 

예수의 육체휘장이 찢어지는 모습을 보고 그렇게 죽는 모습을 보고 로마백부장이 “그는 정녕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막 15:39)고 고백한 것 같은 고백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억지로 진 십자가로 구원을 이루고 당사자 구원은 물론이요 온 가족까지 구원했습니다. 우리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아들 지신 십자가는 익숙한 그림이지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아들 어린양의 십자가를 대신 져주는 인간의 이야기, 참 역설적이지요. 왜 하나님 아들은 이렇게 무기력해져 시몬의 십자가 대신 져주는 상황이 발생할 정도가 되었을까요? 

여기에 신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능억제는 인간의 개입을 유도하기 위한 하나님의 겸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실천과 순종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일부러 쓰러진 자, 무기력한 자가 되었습니다.

시몬은 처음에는 중립적인 관찰자, 혹은 지나가는 자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눈에 비친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참혹함과 눈물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가장 의롭고 거룩해 보인 예수가 저주받은 자의 잔을 받아 마시기 위해 하나님의 분노어린 얼굴빛을 맞이하기 위해 쓰러지고 찍히고 침뱉음을 당하고 쓰러지는 모습은 그의 양심을 폭풍으로 흔들었습니다. “왜 당신은 쓰러졌습니까?” 

우리는 구레네 시몬이 어떻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그리스도로 영접했는지 모릅니다. 다만 그가 나중에 엄청난 변화를 받고 주를 위해 실제로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았음을 짐작하게 됩니다. 그의 아내를 바울이 자신의 영적 어머니라고 부른 것을 볼 때 그는 바울의 영적 아버지뻘이 되는 인물이 되었을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그가 나중에 사도 바울의 동역자가 되고 가정 전체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변화시킨 것을 볼 때 그가 억지로였지만 주 예수의 십자가를 질 때 받았던 깨달음은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해서 시몬의 눈에 비친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해 봅시다. 왜 예수님은 채찍 맞고 쓰러지는 연약하고 무기력한 죄수가 되었을까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저주를 짊어진 이유

1. 죄는 생명파괴행위입니다.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기회의 박탈을 의미합니다. 죄는 죽음으로만 끝납니다. 레위기의 대속죄일제사나 속죄제, 속건제는 부지중에 지은 죄를 대속하는 제사였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엄청난 경제적 배상을 했거나 목숨의 일부 혹은 전부를 잃어야 했습니다. 

십자가는 로마제국이 반역하는 유대인들을 처형하기 위해 도입한 사형도구입니다. 십자가는 극악무도한 죄인을 가장 비참하게 죽여 로마제국에게 반역의지를 꺾는 사형도구였습니다. 예수가 십자가를 졌다는 말은 로마제국의 압제아래 시달리는 동족 유대인들의 슬픔에 동참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죄인의 운명에 동참하여 죄인의 죄를 대속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죄범한 인간 자체는 도상에 쓰러진 자입니다. 그래서 죄악 속에 사는 인생 자체가 쓰러지는 일의 연속입니다. 인생은 영생의 산에 오르다가 쓰러집니다. 그런데 이 쓰러진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도 참 죄인의 메시아가 되기 위해 쓰러진 자가 된 것입니다. 결국 돌이켜 생각해보면 인간의 죄악이 하나님의 아들을 쓰러뜨린 것이 하나님을 쓰러뜨린 것입니다. 배역한 아들이 아버지를 쓰러뜨리듯이 반역적인 피조물이 창조주를 쓰러뜨리듯이 배역한 이스라엘 사람들과 예루살렘 사람들은 그들의 극한 불순종과 완악함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가격하고 쓰러뜨렸습니다. 그의 몸에 와닿은 채찍은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자녀의 패륜적인 행위입니다. 

압살롬의 반역이 다윗을 쓰러뜨리듯이....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인간의 죄악으로 쓰러지신 하나님아버지를 대신해서 스스로 연약해졌고 쓰러진 것입습니다. 고후 13장 5절. 쓰러진 자, 저주받은 자의 운명에 동참하기 위해 쓰러진 자가 되었습니다. 넘어지고 쓰러진 자...그것은 장애인의 삶이요, 힘없이 단죄받는 자의 운명입니다. 예수는 넘어지고 쓰러진 자의 메시아, 지극히 연약해져 힘센 자들의 공권력과 폭력에 희생당하는 자, 억울하게 재판받아 감옥에 갇힌 자들의 메시아가 되기 위해 그도 쓰러진 자가 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아들의 쓰러짐, 쓰러지는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동정심을 유발하는 상황을 만듭니다. 소말리아 등 아프리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가난과 궁핍 저주에 시달려 쓰러지는 황토흙길 골고다입니다. 구레네 시몬같은 방관자를 세상변혁적 참여자로 만드는 고난의 현장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가다가 쓰러진 그 자리는 인간 이성과 양심이 불처럼 타오르는 자리, 성자가 일어나는 자리입니다. 쓰러진 하나님의 아들 자리 그곳에서 성자가 탄생합니다. 캘커타의 빈민촌에서 마더 테레샤가 일어나고 1933년 미국대공황기에 도로시 데이와 피러 모린이 일어났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무굴인의 고난 속에서 마하트마 간디가 태어났습니다. 

인간의 패역성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수난곡을 위한 무대장치입니다.   인간의 죄악된 패역과 반역앞에 하나님은 무력으로 제압하거나 죽여버리는 길을 택하지 않고 인간갱생을 일으키기 위해, 인간의 죽은 양심을 재창조하고 회복해서 새로운 피조물 만들기 위해 쓰러지는 길을 택합니다. 공권력으로 진압하기보다는 인간패역의 희생자가 되심으로 인간패역을 이기려 하십니다.

3. 연약해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는 12영 되는 천군천사의 도움을 거절했습니다. 악의 희생자가 되어 악을 이기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빽으로 고난을 피해가는 길보다는 폭력과 공권력 앞에 한없이 무기력하게 당하는 보통 사람들의 자리에 서서 죽음의 위력 맛보았습니다. 죽는 일이 얼마나 고달프고 외로운가를 친히 맛보신 것입니다(히 5:7). 

하나님의 전능을 억제하시고 하나님 아들은 쓰러지는 자, 연약한 자의 운명에 동참했습니다. 강한 자가 옹호하는 진리보다는 연약한 자가 옹호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저 찬란한 하나님의 빈곤 가난을 보라! 벌거벗은 하나님의 아들을 보라 존엄과 권위를 박탈당한 아들을 보라! 저주받은 자의 운명에 동참한 그 아들을 보라. 3일 동안 일용할 양식 청원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자 친히 밀밭으로 뛰어드는 하나님의 아들을 보라. 

사실 돌이켜 보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수난은 십자가에서 처음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태어날 때 가난했고 생애 내내 가난했습니다. 밑바닥에서 살았습니다. 유명하지 않는 자들과 친구였고 병든 자들의 아우성에 달려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의 고난이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바흐가 작곡한 마태수난곡 78곡은 아름답고 장엄한 음악입니다. 예수의 수난의 본질을 음악적으로 파고들어간 예술입니다. 요한 세바스챤 바하가 얼마나 많은 감동을 받았길래 그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요? 마태수난곡은 마태복음 26-27장을 갖고 중심줄거리를 만들고 피칸더라는 분이 일부 대사를 삽입해 넣었습니다.  

"오 거룩하신 주님, 그 상하신 머리"(145장인가?) 중심노래인데 약 네 번에 걸쳐 이 곡조가 가사를 달리하면서 나왔습니다. 

세 시간에 걸쳐 직접 들어보면 아리아와 해설자의 낭독적 노래(레시타치보, recitation) 사이 사이에 있는 관현악 연주들이 얼마나 장엄하고 감동적인가를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음악극의 마지막 부분에 100명의 남녀합창단이 내뿜는 합창이 있습니다. 합창단이 광장에 모인 유대군중을 대신하여 "lass ihn kreuzigen"(let him be crucified!)라고 외치는 장면에서는 아주 역설적으로 진리를 거부하고 배척하는 인간의 죄성을 고발하는 예언자의 음성을 듣는 듯 합니다. 

광장에 모인 유대 군중을 대신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바라바를 풀어주라"고 외치는 합창단의 노래가 패역한 인류역사를 고발하며 귓전에 맴돌고 있습니다. 수난곡의 마지막 부분에 빌라도의 노래가 우렁차고 구슬프게 터져나옵니다. "유대인들이여 도대체 그가 무엇을 했나? 왜 그대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했나?"라고 절규하는 빌라도에게  유대군중은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인들이 노래합니다. 

"그가 무슨 일을 했냐고요? 그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눈먼자의 눈을 열어주고,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고, 귀신들린 자를 치료해준 것, 그것이 그가 한 일이랍니다."

여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 당하는 근본 원인을 말하는 장면입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자들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유대종교와 로마제국이, 해롯 분봉왕들이 지배하던 그 압제와 절망의 땅에 버려진 사람들, 상실된 영혼들을 찾아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주시는 일을 하다가 미움과 시기, 질투와 위협을 받았습니다. 거짓왕들의 밑에 시달리던 백성들을 되찾아가는 참 왕을  거짓왕들이 합심하여 배척하고 대적하는 현장이 바로 십자가 현장입니다.


4. 하나님의 아들, 가난하고 연약한 하나님의 아들이 쓰러진 그 자리에 구레네 시몬이 들어섭니다. 그는 강제로 십자가를 지고 예수와 함께 걷습니다. 쏟아지는 구경꾼들과는 달리 그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방관자에서 참여자로, 참여자에서 하나님 나라의 지도자로 발돋움하는 첫 걸음에 들어선 것입니다. 

하나님(하나님의 아들)이 쓰러진 그 자리, 인간의 양심과 도덕과 책임이 무한 상공으로 치솟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자기를 비워 사람들의 도움에 의지하는 전능억제의 하나님, 자기겸허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쓰러진 그 자리는 양심과 이성이 갱신된 사람들이 주인의식을 갖고 일어서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동역자를 찾아내시기 위해 빈 자리를 남겨주십니다. 빈 자리는 고난의 자리입니다. 희생의 자리입니다.

구레네 시몬은 처음에는 우발적으로 십자가 고난현장에 동참한 사람입니다. 나중에 그는 의식적으로 의인의 고난에 동참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궤적을 따라 걷다가 하나님의 아들의 연약함을 짐지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십자가를 대신 지는 시몬이 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역할 도치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은 자기연약함으로 구레네 시몬을 구원합니다.   

이처럼 쓰러져 있는 이웃을 만나는 순간은 성스럽고 고결한 삶으로 초청장을 받는 순간입니다. 구원받는 순간입니다. 1861년작 레미제라블을 쓴 빅토로 위고, 그는 파리의 빈민촌, 몽파르나소와 몽마르트의 빈민들과의 접촉을 통해 1832년 6월혁명 전후의 프랑스 사회사를 입체적으로 재구성했습니다. 비참하고 가난한 자들과의 정면 조우가 위대한 문학을 탄생시켰습니다. 

19세기 말 톨스토이, 50세의 톨스토이는 전세계적인 소설가였습니다. 문학적 성공의 절정에서 그는 성자가 되어 갑니다. 50세 모스크바 빈민가를 보고나서 완전히 성자로 바뀌어갔습니다. 12세기 이탈리아 움브리아 평원의 앗시시 여자들의 뒷꽁무니를 쫓아다니는 혈안이던 청년 플레이보이가 자기가 사모하던 여인 클라라의 문둥병자 사역을 보고 나서, 부유한 포목상이던 아버지의 저택 지하 3층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일하던 노동자들을 보고나서 그는 더 이상 플레이보이로 살 수 없었습니다. 성스러운 프레이보이로 바뀌어갔습니다. 

그 외에도 고난의 현장을 방관하다가 위대한 인생을 살아간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홀트 여사는 고아를, 밥 존스와 한경직은 월드비전을 만들었습니다(국민주택 입주를 거부하기 위해 데모한 서초구 우면동 사람들과 의정부 민락동 사람들!! 인재가 나올 수 없는 황폐화된 양심의 사람들!!). 쓰러진 우리 겨레의 오르막길에 동참한 선교사들은 조선민중의 고난에 동참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병원, 교육시설을 짓고 잠든 이 땅을 깨웠습니다. 모든 문명사적 업적은 자기희생적인 참여자들의 몫입니다. 고생을 두려워하면 안됩니다. 

이 땅의 교육은 근본이 잘못되었습니다. 특권적 자리를 향한 각축이 되어 버렸지요. 가난한 사람들과 1촌이 될 정도로 연대하고 우애를 나누는 곳에 위대한 인재가 나옵니다. 명품학원이나 학군이 인재를 만들지 않습니다. 고난의 현장을 대면하고 양심이 폭풍을 겪은 사람이 비상하는 독수리가 됩니다. 의미있는 역사, 하나님 나라로 이월되어 기억될 역사적 성취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종들이 일으킨 십자가 행적들입니다.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방관자에서 참여자로, 하나님 나라의 역꾼으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중심으로 보면 다 외국인이며 나그네입니다. 벧전 2:11-12입니다.

11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1)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히브리서 11:13-16입니다.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도성을 향해 전진하는 나그네입니다(성 오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을 보라). 나그네는 이 땅의 역사를 물질적 소유축적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가치 창조의 관점, 거룩한 기억 창조의 관점에서 여정을 감당합니다. 사랑과 섬김의 여정만이 하나님 나라로 이월되는 여정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돌봐야 할 쓰러진 이웃들은 도처에 있습니다. 파라오의 경쟁체제에 시달리는 이 땅의 어린이들과 저임금 착취대상이 되는 외국인 근로자들 등 숱하게 있습니다. 교회는 이런 점에서 선교의 장막터를 넓힐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가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많아야 됩니다. 헌금 내지 못해도 교회에 나올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하겠지요. “2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사 54;2).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고난받는 갈릴리 백성들과의 깊은 연대와 우정 안에서 십자가 사랑을 완성해 가듯이 우리도 고난받는 백성과 대면하는 경험을 통해 어그러진 역사를 새롭게 하려는 결의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천지를 창조할 때부터 인간의 순종과 믿음에 하나님나라의 미래를 위탁했습니다. 인간이 방해하면 하나님 나라 구원사 진척도 일어나지 않게 할만큼 인간 책임을 극한으로 높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가 진 십자가는 인간양심을 갱신함으로 구원합니다. 일곱 번 피를 뿌려 양심을 새롭게 합니다. 백부장의 양심에 뿌려진 피요 구레네 시몬에게 뿌려진 피입니다. 피가 구원합니다. 십자가, 그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교차로입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의 하나님 사랑에 감복되어 이웃사랑의 십자가 짊에 도전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우리도 우리 십자가를 지고 따를 때 우리의 구원이 완성됩니다. 벧전 2:21이 증거하듯이, 주님의 십자가를 우리 죄를 대속하는 능력을 발휘합니다. 동시에 우리 또한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름으로써 주님의 대속적 은혜가 우리에게 100% 작용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지신 십자가 구원은 우리가 주님을 모방해 주님이 지우신 십자가를 질 때 완성됩니다. 

우리 한국역사와 교회사 중 가장 찬란한 부분은 십자가의 하나님 사랑을 받고 이웃사랑에 일생을 바친 사람들의 유산입니다. 고결한 이웃사랑에 투신된 인재양성에 주력하는 교회가 십자가를 지는 대학입니다. 학벌차별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공평하게 인재를 뽑는 회사가 십자가 지는 회사입니다. 쓰러져 있는 이웃을 위해 가던 길을 멈추고 상처를 싸매고 자기 돈을 써가면서까지 돌보는 사마리아인같은 시민을 길러내는 국가가 십자가를 진 국가입니다. 

지구자원을 아끼기 위해 웬만한 걸음은 도보로 움직이는 교인들을 길러내는 교회, 이웃사랑을 위해 자기 구매력을 절제하는 교인들을 길러내는 교회가 십자가를 진 교회입니다. 이웃사랑은 자기능력의 억제를 통한 베품과 나눔입니다. 옆구리에서 피가 쏟아지는 듯한 현기증 동반하는 연약함이 이웃사랑의 본질입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이웃사랑을 위해 감수하는 자발적인 불편입니다. 한소망교회가 이웃사랑을 위해 불편을 감수하고, 바쁜 일정을 재조정하고, 거룩한 낭비를 일삼는(discipleship of extravagance) 교회가 되어 우리 주님 오실 때 존속하는 교회로 남아 주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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