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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옥은 있습니다 (눅 16: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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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은 있습니다 (눅 16:19-31)

- 지옥은 왜 만들었을까요? 자비하고 사랑이 많으신 하느님이라면 차라리 사람을 만들지 말았어야죠. 공연히 사람을 만들어서 지옥에 떨어지게 하네요. 

- 기독교를 믿지 않으면 구원될 수 없다고 하는데 정말 착하고 바르게 도덕적으로 사는 사람도 기독교를 안 믿으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까? 주변에 적당히 사기도 치고 나쁜 짓을 하는 기독교인들이 있는데 그들이 과연 기독교만 믿는다고 구원을 받습니까? 

- 부모님은 기독교를 믿는데 자식과 조부모님은 믿지 않고 다른 종교를 믿어요. 그래서 부모님은 천국에 가고 자식과 조부모님은 지옥에 간다고 가정합시다. 자식과 조부모님은 유황불로 영원히 지져지고 고통받는데 부모님은 과연 천국에서 편하고 즐거울까요? 

- 기독교를 믿는데 1점이 부족하여 천국에 못 간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이 사람은 영원히 지옥으로 가는 것이죠? 이게 말이 됩니까? 

이상은 비기독교인들이 인터넷에 올린 글들입니다. 천국이나 지옥을 이 세상의 삶의 연장으로 생각하여 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판단하고 이해하려고 하니 엄청난 오해가 생깁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 중에도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시건주 Grandville에 있는 Mars Hill Bible Church 담임인 Rob Bell 목사가 지난 3월 출간한 ‘사랑이 이긴다(Love Wins)’라는 책이 큰 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의 글에 다음과 같은 예화가 들어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에 관해 어떤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두 여자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여자는 예수를 믿고 교통사고로 죽은 아들을 생각하면서 나중에 천국에 가면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니 기뻐서 눈물을 흘립니다. 

두 번째 여자는 예수 믿지 않고 죽은 자신의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자신만 천국에 있고 영원히 그를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니 슬퍼서 눈물을 흘립니다. 같이 천국에 대하여 듣지만 전혀 다른 이유로 눈물을 흘리고 있는 데 이것이 모순이라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서 시작되는 개념으로 정의합니다. 천국은 현재적이며 영원하고 강렬하면서도 실제적인 기쁨과 평화, 사랑의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옥은 하나님 나라, 그 새로운 질서 밖의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창조주이시기에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손수 만든 피조물인 인간들을 지옥으로 보낼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만 천국에 가고 수십억명은 영원히 타는 지옥 불에 떨어질 거라구요?"라는 도전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그런 지옥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주장은 천국과 지옥이 분명히 있고 죽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시인해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복음주의의 관점을 뒤엎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3-4절을 보면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는 바울의 말씀이 틀리지 않습니다. 

말세에는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보다 전하는 말이 과연 내가 듣고 싶어하는 말인가를 더 중요하게 따진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벨 목사의 발언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유니온신학교 서린 존즈 목사는 "예수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가 인간의 능력보다 강하다는 것"이라며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지옥을 만들어 사람들을 괴롭히겠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비기독교인은 자기들만 구원이 있다고 하며 기독교에 보수 꼴통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열린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다고 좋아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성경은 분명히 지옥이 있다고 하는데 벨 목사는 사람들에게 영원을 고통을 주는 지옥이 없다고 하면서 자기가 하나님보다 더 자비롭고 사랑이 많은 척합니다. 남침례교 신학교 총장인 보수신학자 앨버트몰러 목사는 벨 목사의 주장이 인간적 교만이라면서 지옥의 개념을 사람들이 좋아할 방향으로 순화해 결국 다른 복음을 만들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옥은 있습니까? 아니면 지옥은 그저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이나 겁을 주기 위하여 만들어진 허상에 불과합니까? 참고로 여론조사기관인 Pew Research에 따르면 미국인의 59%만이 지옥의 존재를 믿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요즘 세상에 지옥 설교를 하는 목사가 어디 있어'라고 하면서 그런 설교를 하면 무식하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죽으면 끝이지, 지옥이 있긴 어디 있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옥은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있고 없다고 해서 없는 곳이 아닙니다. 요즈음은 가짜가 더 진짜 같다고 합니다. 서울 가보지 않은 사람이 가본 사람을 이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누가 천국에 대하여 제일 잘 알겠습니까? 천국에서 오신 예수님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분의 예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몇 마디 나누기 원합니다. 

세상에서는 부자를 잘 사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잘 사는 것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그 가치관에 따라 달라집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는 이 세상의 재물이나 능력을 많이 가진 사람을 가장 복 받은 사람으로 평가합니다. 세상에 있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기에 이 세상에서 모든 가지려고 누리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으로 볼 때는 가졌다는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청지기로 부르셨습니다. 청지기가 주인의 것을 가지고 자기 것인 양 자랑하고 그것을 흥청망청 쓴다면 나중에 부끄러움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 우리는 이 세상과 천국을 동시에 소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선순위를 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6장은 불의한 청지기,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 날마다 잔치를 벌이는 부자의 스토리를 담고 있습니다. 스토리의 공통점은 재물에 대하여 비판적이라는 점입니다. 특히 예수께서는 16장을 말씀하시면서 바리새인들을 염두에 두고 말씀을 하신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생전에 부자와 가난한 나사로가 살았던 모습과 이들이 죽은 후에 어디에 있게 되는지를 비교하면서 현생과 이생이 얼마나 다르냐 하는 것과 이생의 삶은 단순히 현생의 삶의 연장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생전의 모습(19-21절)

부자와 나사로의 생전 모습은 한 문장으로 요약됩니다.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25)  부자의 호화로운 생활과 나사로의 비참한 생활이 대조됩니다. 부자의 모습은 두 가지로 묘사됩니다. 그 당시 옷은 그 옷을 입은 사람의 신분과 지위를 나타냅니다. 부자가 자색 옷과 가는 베옷을 입고 있었다는 것을 보면 그가 상당히 높은 지위와 많은 부를 누렸음을 보여줍니다. 

부자는 또한 날마다 잔치를 열면서 즐겼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을 나누지 않고 자기들끼리만 나누었습니다. 이름이 나오지 않는 부자와 대조적으로 나사로라는 이름이 언급됩니다. 개역성경에서는 나사로를  '거지'라고 하는데  헬라 원어에는 ‘가난한 사람’으로 나옵니다. 그는 '헌데'를 앓고 있었습니다. '헌데'는 피부가 헐어서 상한 자리를 말합니다. 그 상처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심지어 개들이 와서 핥을 정도였습니다. 동시에 나사로는 너무 가난하여 마땅한 거처가 없었기에 부자의 대문 앞에 버려졌습니다.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물로 주린 배를 채우려 했습니다.  

부자는 누구를 가리킬까요? 일차적으로는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시간과 돈의 여유가 있는 자들입니다. 자기들은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는 자들이라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들만의 삶을 누렸습니다. 사람들에게 자기의 경건됨을 보이려고 애를 썼습니다. 

반면에 거지는 누구를 가리킬까요? 개가 그 헌데를 핥았다면 그가 개 취급을 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로부터 그런 취급을 받은 사람들은 죄인과 세리입니다. 613가지나 되는 계명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고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로부터 늘 무시를 당하였습니다. 반면에 나사로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물 즉 온전한 것은 먹지 못하고 부스러기라도 얻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바리새인은 가장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요 나사로는 전혀 복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죽은 후에 어떻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사후의 모습(22-31절)

1) 부자와 나사로가 죽습니다(22-23절)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찾아옵니다. 가난한 나사로도 죽었고 부자도 죽었습니다. 나사로는 간단히 죽었다고 진술되는 반면 부자는 죽어 "장사되었다"고 묘사됨으로써 부자는 죽은 후에 호화스러운 장례를 치를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사로는 죽음과 함께 천사들에 의하여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습니다. 아브라함의 품은 천국에 대한 다른 표현입니다. 반면에 부자는 죽어서 지옥에 들어갔습니다. 

2) 부자와 아브라함과 대화를 나눕니다(24-31절)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면서 아브라함을 부릅니다. 부자와 아브라함 사이의 대화는 세 번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부자는 지옥의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면서 "이 고통 받는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불로 인한 고통을 인하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자기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또한 지옥은 단절된 곳입니다. 천국에서 지옥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갈 수 없습니다. 현생에서의 삶이 영원을 좌우합니다. 부자는 음부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표현인 아브라함의 품을 바라볼 수는 있지만 그 품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음부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음부에서는 더 이상 구원을 위한 전도가 있을 수 없습니다. 

부자에게 형제가 다섯 명이 있었는데 그들은 부자가 같은 종교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자기와 같은 운명에 이를 줄을 알았기에 나사로를 보내어 알려주게 하라고 부탁하지만 모세와 선지자들에게서 들으면 된다고 하면서 그 요청은 거절됩니다.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가져야 구원을 받는 것이지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기적으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부자와 아브라함의 대화를 통하여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죽은 후에 바로 천국이나 지옥으로 갑니다. 죽은 후에도 의식은 있습니다. 일단 죽은 후에는 운명이 바뀌지 않습니다. 한번 천국에 가게 되면 영원히 천국에 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한번 지옥에 가게 되면 영원히 지옥에 있게 됩니다. 또한 모세와 선지자로 대표되는 성경의 중요성이 언급됩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이 기록한 성경은 죽은 자가 살아나서 말하는 체험보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벧후 1:16-19). 이적보다 말씀이 우선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면 충분합니다. 천국을 가는데 66권의 성경으로는 부족하여 다른 책이나 추가 계시나 다른 특정한 행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본문은 지옥을 비유로 말한 것이지 실제 지옥이 있다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비유가 무엇입니까? 일상경험에 기초하여 잘 알려져 있는 것을 통하여, 전혀 알려져 있지 않는 것(영적진리)을 설명하는 방법의 하나입니다. 즉 어떤 사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곁에 두어 이해를 돕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13장에는 "천국은 마치  .... 과 같으니"라는 표현이 여러 번 나옵니다. 예수님이 왜 그런 표현을 사용하십니까? 천국은 실재하지만 천국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어떤 곳인지를 이해시키기 위하여 예수님은 흔히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것을 소재로 삼아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천국에 관한 비유는 천국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마찬가지로 본문에 나오는 비유는 지옥이 어떤 곳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후 세계는 분명히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이 사후세계를 결정하는가?"입니다.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는 부유함 때문이 아니라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을 거절하였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이 땅에 살면서 주님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나사로가 천국에 간 이유는 그의 고통을 많이 겪었고 가난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회개하고 복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운명은 이 세상에서의 삶에서 우리가 복음을 믿느냐 아니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리고 죽은 후에는 이 운명이 바뀔 수 없다는 점입니다. 

지옥에 대해서 가장 심각하게 경고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지옥은 갈 곳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9:43-48) 

만일 지옥이 실재하지 않는데 실재한다고 했다거나,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지 않는데도 다시 오신다고 했다거나, 인간이 죽은 뒤에 심판이 없는데 심판이 있다고 했다면 예수님은 거짓말쟁이입니다. 지옥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경고를 무시하고 사탄의 속임수에 놀아나게 되면 어느 날 지옥에서 깨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자신이 마귀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알고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때는 후회도 발악도 저주도 소용없고 오직 고통만이 있게 될 것이며 고통을 영원히 받게 될 것입니다. 


* 지옥은 어떤 곳입니까?

 1) 지옥은 고통이 있는 곳입니다. 

한 사람이 천국에 갔더니 천국 문 앞에 사람들이 서 있습니다. “왜 들어가지 않고 여기에 계십니까?” “문에 있는 글을 보시오.” 그래서 그 사람이 문을 쳐다보니 문에 ‘대조 중’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성형수술을 하도 많이 해서 그 사람이 맞는지 대조하느라 그렇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형수술하지 않은 사람은 바로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지만 성형 수술한 사람은 그 사람이 진짜라는 것이 확인될 때까지 기다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한국 여인 한 분이 지옥에 갔는데, 지옥 문 앞에도 사람들이 줄을 서 있더랍니다. 자세히 보니 전부 한국 여자들이었습니다. “왜 들어가지 않고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습니까?” “저기를 보시오.” 그래서 쳐다보니 ‘보수 중’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왜 지옥을 보수하느냐고 물으니 한국 여자들이 불가마에 하도 많이 다녀서 불에 면역이 생겨 지옥 불을 더 뜨겁게 하는 중이라고 하더랍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이 시대를 빗댄 농담이지 천국과 지옥은 그런 곳이 아닙니다.  

살다가 어려운 일을 겪으면 마치 지옥 같다고 하는 소리를 종종 듣습니다.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시베리아 집단수용소, 북한의 정치수용소 등을 지옥 같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어떤 상황도 지옥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상상력으로는 결코 묘사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지옥을 말할 때 운다고 했으며(마 8:12), 통곡한다고 했고(마 13:42), 이를 갈며(마 13:50), 어둡고(마 25:30), 화염 속에서(눅16:24), 불타고(사33:14), 고통 받고(눅16:23), 영원히 형벌 받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계 19:20에서는 “유황 불 붙는 못”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 13:42에서는 지옥을 ‘풀무불’이라고 표현합니다. 풀무불은 불이 완전히 갇혀서 바람만 통하기 때문에 실제보다 몇 배는 더 뜨거워진다고 합니다. 지옥의 고통을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고 표현합니다. 뜨거운 연탄불에 왕소금을 뿌리면 소금이 “탁, 탁”소리를 내면서 튀는 것을 상상하면 이해가 쉽겠습니다. 

지옥은 처절한 곳이고 어둡고 뜨겁고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지옥은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보내려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곳입니다. 하나님의 권위에 대적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고, 인간들을 미혹하여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진리를 못 믿게 하였던 어두움의 세력들, 악과 죄를 실행하는 그들의 하수인들을 보내기 위하여 예비하신 곳입니다. 구원받지 않은 자들(고전 6:9,10), 믿지 않는 자들(계21:8), 죄를 범한 자들(갈 5:19-20)이 가는 곳입니다. 지옥이 없고 인간이 죽으면 그냥 없어져 버리는 것이라면 왜 종교가 필요하며, 교회가 필요하고, 구원이 필요합니까?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면 반드시 이 지옥으로 가야합니다. 

2) 지옥은 영원히 고통 받는 곳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아들까지 제물로 주시어 여러분의 죄들을 용서해 놓으심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지옥에 가지 않게 해 놓으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우리 모두가 할 일은 이 사실을 믿고 예수님을 자기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일입니다. 인간의 첫 번째 출생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아담의 죄를 물려받아 영이 죽은 채 태어난(창 5:3)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두 번째 출생이 필요합니다. 영이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하늘로부터 나야합니다. 육신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요 3:6)이기 때문입니다. 영이 거듭나게 되면 혼이 구원을 받게(요 3:5) 됩니다. 

구원받은 혼은 죽어도 다시 살며 살아서 믿는 사람은 주님 오실 때 들림(살전 4:17) 받게 됩니다. 성경은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을 말합니다. 첫째 사망은 육체의 죽음을 말합니다. 둘째 사망은 영원한 지옥 형벌을 말합니다.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둘째 사망이라고 말합니다.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9:48)고 말씀합니다. 구더기도 죽지 않는다는 표현은 지옥의 불 온도가 우리가 견딜 수 있는 정도로 낮다는 말이 아니라 고통이 영원하다는 표현입니다. 죽으려야 죽을 수 없는 곳이 지옥이라는 말입니다. 지옥의 불은 모든 것을 태울 만큼 뜨겁지만 지옥에 떨어진 사람은 사라지지 않고 영원토록 고통을 당합니다. 

3) 지옥은 소망이 없는 곳입니다. 

지옥의 불 못은 잠시의 휴식도 취할 수 없는 곳입니다. 밤낮 쉼을 얻지 못하는 대신, 세세토록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보면 천국과 지옥 사이에는 큰 구렁이 있어서 왕래가 불가능합니다. 이 말은 한 번 결정되면 변개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우나 안에서 뜨거우면 내가 문을 열고 나오면 되지만 지옥은 그럴 수 없습니다. 일단 결정되면 영원토록 고통을 당하는 곳입니다. 완전히 단절된 곳입니다. 그 곳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2. 누가 지옥에 갑니까? 

어느 집사님이 전도지를 돌리고 있습니다. 그 전도지에는 “지옥에 가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는데, 집사님은 만나는 사람들에 그 전도지를 주면서 “뒷면을 보십시오”라고 했습니다. 뒷면에는 “아무 것도 없다”라는 큰 글씨만 씌어 있었습니다. 지옥을 가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고,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간다는 뜻이었습니다. 


3.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갑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됩니다. 사람들은 모두 다 죄인입니다. 스스로 죄를 범했기에 죄인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사람은 나면서부터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죄인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은 다 죄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고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은 영원한 지옥에 들어간다고 말하고 있으니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은 지옥에 떨어집니다. 그러므로 자연인으로 태어나서 그대로 살아간다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원한 지옥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죄가 사해지고 의롭게 됩니다. 요일 1:7에서는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첫째 사망은 육체의 죽음이고 둘째 사망은 영원한 지옥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첫째 죽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죄를 지었기 때문에 둘째 사망 즉 지옥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자신을 믿는 사람들과 연합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믿는 사람은 둘째 사망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천국에 들어갑니다. 지옥의 형벌은 끝이 없고 영원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죄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죄입니다. 그래서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일 가운데 하나가 죄에 대해서 책망하시는 일인데 요 16:9에서는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죄 중에 죄가 믿지 않는 죄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4.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하신 이치이고 죽음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그 심판을 이기지 못하면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는데 이 사실을 아는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1)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의 결국은 구원입니다.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 비결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죽음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명심할 것은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잘 믿는 것 같다가 죽음 앞에 서면 자신의 행위를 돌아보면서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명심하십시오. 우리가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지옥 형벌을 면하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됩니다. 

2) 주님께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천국의 백성은 은혜를 단지 많이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사람입니다. 부자는 받은 것이 많았습니다. 물질의 복도 말씀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지 않고 자기를 위하여 다 써 버렸습니다. 도리어 율법의 잣대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데 분주하였습니다. 

반면에 나사로는 부스러기 은혜라도 사모했습니다. 누가 천국에 들어올 자격이 있습니까? 이 세상에 자기가 가진 것을 자랑하고 사람들의 칭찬이나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자,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자들은 자격이 없습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다하면서 제대로 주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말씀을 통한 은혜를 사모하고, 분주하지만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시간을 드리고 정성을 드려 섬기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늘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우리는 몸의 요구와 영의 요구 사이에서 갈등할 때가 많습니다. 육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하시는 대로 살아가는 자들만이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들이 됩니다. 

3) 전도하며 살아야 합니다.

지난 주 평화로운 나라 노르웨이에서 테러 사건으로 100명 가까운 사람들이 죽음으로 온 유럽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2001년에 일어난 9.11 테러 사건으로 3000명 이상 되는 사람들이 죽었을 때 전 세계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얼마 전 일본 열도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쓰나미로 인하여 몇 만 명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지구촌에는 하루에 수십만 명이 죽어서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식구 가운데 지옥 형벌이 기다린다는 사실을 모르고 멸망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은 없습니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자식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형제가 예수님을 믿지 않고, 부모님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데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정말 사랑한다면 억지로 끌고서라도 교회에 데리고 와서 예수님을 믿게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친척, 친구, 이웃이 지옥을 향해 가고 있는데 우리가 입을 다물고 있다면 우리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처럼 예수님을 알지 못하여 영적으로 죽어있고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을 바라봐야 합니다. 

천국과 지옥은 실제로 있습니다. 계시록 5장을 보면 하늘 보좌를 중심으로 아름다운 장면이 기술됩니다. 네 생물과 24 장로들의 찬양에 이어 천군 천사들의 찬양이 나옵니다. 그들이 어린 양에 대하여 찬양을 합니다. 이어서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만물도 동참합니다. 온 우주의 피조물들이 전능하신 하나님과 어린 양을 경배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그분의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우리로 그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으로 영원히 하나님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우리들은 장차 요한이 보았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게 됩니다. 눈을 들어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금부터 그 앞에 설 준비를 해야 합니다.  

힘드십니까? 언제까지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하느냐고 물으십니까? 우리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하는 성도들입니다. 현재도 싸움을 하고 있고 앞으로도 많은 싸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린 양이 고난을 지나 죽음을 통하여 승리하였던 것처럼 주님을 온전히 본받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주님을 따르면서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믿음의 사람들,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사람들, 풍성한 열매를 인하여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칭찬을 들으며 상급을 받는 성도들, 생명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을 받으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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