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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눅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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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눅 19:1-10)


여리고성은 하나님의 구속경륜의 무대에 등장한 복음의 고장입니다. 일찍이 구약 여호수아 시대에 멸망성 여리고에서 기생 라합과 그의 가족이 구원을 받았던 곳입니다. 그 일로 인하여 그 이름이 예수님의 족보에까지 오름으로 이방인도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들어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수 6:25, 마 1:5).
또한 선지자 엘리사 시대는 물이 좋지 못한 여리고의 수원(水原)에 소금을 치므로 수질이 좋아져서 오늘에까지 여리고 평원의 생산수단이 되고 있습니다(왕하 2:18-22).
그리고 여리고에는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가 운영하던 선지자의 학교가 있었습니다(왕하 2:5).
  
예수 당시에는 소경거지 바디매오가 주님의 은총으로 다시 보게 되던 역사가 있었던 곳입니다(눅 18:35-43).
오늘 우리가 받은 본문의 내용에서 삭개오가 주님을 만나 구원의 은총에 잠기던 축복의 사건을 보게 됩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오늘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이 주님의 선언은 삭개오에게 구원의 은총을 선언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Ⅰ. 죄인 삭개오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누가복음 19장 5절에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고 하였습니다.
"삭개오야!"라고 그 이름이 불려 구원으로 초청된 자의 정체는 어떠한가? 
그는 죄인이라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0장 10절에서 주님이 직접 지적한 대로 그는 '잃어버린 자'였습니다. 이 말은 위치와 장소가 바뀌어버린 상태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과 위치에서 하나님이 없는 자의 위치로 바뀌어져 버린 경우를 가리킵니다.
  
이는 영적으로 그가 죄로 인하여 타락해 버린 내용을 의미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아담의 타락과 함께 완전히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등진 상태의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도 죄인이었습니다. 여리고성 사람들은 삭개오의 집을 가리켜 「죄인의 집」(눅 19:7)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그의 매국노적 세리의 직업을 가리킵니다. 당시 세리들은 로마 정부와 결탁하여, 인정과세 외의 모든 세금은 세리들의 자유로운 결정에 따라 징수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로부터 당시 공무원인 세리들은 매국노적 죄인이라고 사회적 지탄을 받았습니다. 
  
어떤 경우든 삭개오는 영적으로 타락한 아담의 자손이었고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윤리적으로 죄인의 신분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비단 삭개오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죄로 말미암아 완전 사망에 이른 죄인들이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라고 하였습니다. 골로새서 2장 13절에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3장 10절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마치 나무 둥치에서 떨어져 나가 버린 죽은 가지와 같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분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죄인의 구주'가 되십니다(막 2:17). 예수께서 부르신 삭개오는 죄인이었습니다. 그의 사회적 신분은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였습니다(눅 19:2). 그러나 그는 잃어버려진 죄인이었습니다. 

Ⅱ. 무조건적 선택을 받은 삭개오를 불렀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 19:5)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 속에는 그가 그 수많은 여리고 사람들과 집들 가운데서 지목받고 주님의 선택을 받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잘못 생각하기를 삭개오에게 있는 어떤 종교적 열정의 결과, 즉 예수가 어떤 사람인가 보고자 하여 뽕나무 위에 올라간 그 모습을 보고 주님께서 귀히 여겨 불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결코 그런 것은 아닙니다. 누가복음 19장 1절에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주님의 마음에는 삭개오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삭개오에게 예수께 대한 최소한의 영적 종교심을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보고자 하는 영적 충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확실한 이유는 인파로 가득 차 버린 여리고 거리의 그 수많은 사람 가운데 주님은 유독이 삭개오를 지목하고, 그 이름을 불렀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전지(全知)하신 자기사랑이 있습니다. 주님에게 아무도 그를 소개해 준 일이 없음에도 주님은 삭개오를 먼저 알고, 그 이름을 지목하여 불러 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실로 무조건적 선택이었습니다. 그것은 창세전에 삼위 하나님의 작정에 기초하고 예수님 자신의 주권에 따라 삭개오를 사랑하여 불러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것은 선수적 사랑이었습니다.
삭개오가 주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요 주님께서 먼저 삭개오를 사랑하사, 그를 구원하기 위하여 세상에 사람으로 오셔서 지금 여리고에 있던 삭개오를 지명하여 불러 주셨던 것입니다(요일 4:10). 
  
이러한 주님의 무조건적 선택이란, 결코 그의 신앙과 회개가 조건이 되거나 그의 어떤 인간적 노력과 선행이 조건이 된 것은 아닙니다. 나중에 삭개오가 회개하고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눅 19:8)라고 자기 재산을 내놓을 것을 전제하고 부르신 선택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삼위 하나님의 사랑하심에 기초하고 그를 선택한 것입니다. 모세는 이 사실을 가리켜 「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다」(신 10:15)고 하였습니다(신 4:37, 신 7:6-7). 
바울의 영감에는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고 하였습니다. 여기 '미리 아신 자'는 '미리 사랑하신 자'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선택이란 선택받는 대상의 조건에 관계없이 골라서 뽑아내는 것(pick up)을 뜻합니다. 이렇게 죄인 삭개오는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실로 은혜입니다. 

Ⅲ. 삭개오는 제한속죄의 은총을 입었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 19:5)라고 함은 죄인 삭개오가 주님의 무조건적 선택을 입은 결과 주님이 '네 집' 곧 '삭개오의 집'에만 유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유하심은 무제한이 아니라 제한되었다는 말입니다. 즉 '주님의 유하심이 삭개오의 집으로 제한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본문 19장 9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집에 이르렀으니…」라고 하신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의 구원은 죄인이 그 대상인데, 그 대상은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을 입은 자요, 그 선택을 받은 자에게만 주님의 구원이 유효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크게 유의해야 할 것은 이 말은 주님의 구원의 능력이나 영향력이 제한되었다는 뜻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제한속죄, 혹은 제한된 구원이란 말은 주님께서 베푸시는 속죄은총의 적용이나 효과가, 구원하시기를 작정한 자에게 나타나신다는 의미입니다. 말하자면 주님의 자기 백성(마 1:21), 자기 사람(요 13:1),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행 13:46, 48), 아버지께서 예수에게 주신 자들(요 6:38-39, 요 17:9, 요 10:14-16)에게 적용된다는 뜻입니다. 택자는 누구든지(요 3:16) 온 세상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이 축복의 은총을 받게 된 것입니다. 

Ⅳ. 삭개오는 이 은총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 19:5)!
이러한 주님의 자기선언 가운데 삭개오 자신 편에서는 거절하려 해야 결코 거절할 수 없는 은총에 잠기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본문 19장 6절에는 삭개오가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주님의 부르심을 그리고 주님의 요청을 결코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거절할 이유와 근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급히 내려왔습니다. 즐거워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고 말았습니다. 
  
보십시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습니다. 그때 주님이 오셔서 '달리다굼'했습니다(막 5:41). 그 결과 죽었던 딸이 살아나 버렸습니다(막 5:42). 그것을 거절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아니 거절하기는커녕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의 시체가 관 속에 갇혀 상여꾼들에 의해서 공동묘지로 운구되고 있었습니다. 이때 주님은 그 여인의 우는 것을 보시고 손을 내밀어 상여를 붙잡으시고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눅 7:14)고 했습니다. 그 결과 그 청년은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실로 불가항력적이었습니다(눅 7:12-16).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무덤 속에서 그 시체가 썩을 기미를 내고 있던 나사로의 무덤을 찾아가서 주님은 큰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요 11:43)고 불러내었습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즉시 다시 살아나 걸어 나옴으로, 불가항력적 생명의 호출을 입증하고 말았습니다(요 11:43-44). 

그래서 물과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거듭남은 불가항력적입니다. 주님의 소명은 불가항력입니다. 회개와 믿음, 칭의, 하나님의 자녀 됨, 성화, 견인, 영화는 불가항력적입니다. 당하고 마는 은총입니다. 실로 삭개오는 자기를 부르시는 주님과 주님의 요청 앞에 급히 내려오고, 즐거워하고, 영접하는 은총, 곧 거절할 수 없는 은총을 입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의 것을 토색한 것이 있으면 4배나 더 갚겠다고 하는 자기회개를 하게 된 것입니다.

Ⅴ. 삭개오는 긍극적 구원을 약속받았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 19:5)!
주님의 이러한 자기 선언 가운데는 삭개오에게 주님 자신이 베풀어 주는 구원의 선물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9-10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바로 누가복음 19장 1절에 「예수께서 여리고를 들어 지나가시는」그 목적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예수께서 선언하신 '구원'은 심판과 멸망에서의 구원입니다. 영원한 형벌과 저주에서의 구원입니다. 그것은 죄의 삯인 사망에서의 해방을 뜻합니다(롬 6:23). 그것은 영화이고 영생복락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초청을 받은 자는 결코 망할 수가 없다는 주님 자신의 선언입니다. 그 이유는, 
①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눅 19:9).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함은 하나님의 언약 안의 자손이란 뜻입니다. 저들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아 구원받은 것처럼, 그의 자손들이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② 그들이 주님의 자기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대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자」이신 예수 자신 때문입니다. 
  
③ 그들이 예수님의 자기사람들로서 끝까지 가는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누구도, 그 무슨 이유로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롬 8:39). 
④ 주님이 궁극적 약속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0장 28-29절에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⑤ 넉넉히 이길 승리를 보장받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저들은 요한계시록 14장 1절에 어린양과 함께 시온산에 서야 될 14만 4천인의 무리들이 된 것입니다. 저들에게는 예외없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이 저들 이마에 찍혀 있는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 19:5)라고 하시는 주님의 자기 선언을 들었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자기 선언 속에는 죄인 삭개오가 무조건 선택을 받고 남다르게 제한된 속죄(구속) 은총을 입고, 거절할 수 없는 불가항력 은총으로 궁극적 구원을 보장받는 내용이 담겨있다는 것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삭개오가 받은 구원의 5대 은총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시대 모든 곳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100% 유효한 은총입니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지금도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 앞에서 그 은총에 감격하여 고백하는 "아멘, 아멘, 아멘!"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석원태 목사)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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