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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왕중왕의 복음(3) : 하나님의 환희 (막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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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중왕의 복음(3) : 하나님의 환희 (막 1:9-13)
 
저는 강원도 주문진에서 오징어잡이 배를 타 본 적이 있었습니다. 물매 같은 것을 돌려 낚싯줄을 한참 내렸다가 올리는데 갑자기 오징어가 먹물을 뿜으면서 뱃전에 떨어졌습니다. 어부 한 사람이 처음 올라온 싱싱한 오징어 몇 마리로 바로 그 자리에서 회를 떴습니다. 신선한 오징어 회를 초장에 찍어 입에 넣는데, 정말 맛이 좋았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계실 때라, 어떤 어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박 대통령 부럽지 않다. 박 대통령이 이런 맛을 알까?” 금방 잡아 올린 신선한 오징어 회를, 함빡 웃음을 머금고 입에 문 어부들의 순진무구한 환희! 안 먹어 본 사람이 어찌 그 맛을 알고 그 환희를 느끼겠습니까.

신선한 오징어 회를 먹을 때의 그 맛과 환희를 하나님은 아실까요? 하나님께 벅찬 기쁨, 환희라는 것이 있을까요? 천국은 정말 재미도 없고 기쁨도 없이 그저 덤덤하게 사는 곳일까요? 천국 왕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는 현세의 삶은 고달프기만 한 불행한 삶일까요?

본문에 왕중왕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사건과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신 사건이 하나님의 환희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왕중왕 예수님이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물 속에 푹 잠겼다가 물에서 올라오는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죄를 지었으니까 당연히 회개의 침례를 받아야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아무 죄가 없으니 회개하실 것도 없고, 회개의 침례를 받으실 필요도 없었습니다.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이 회개의 세례를 받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자 하실 때에 요한이 만류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마 3:14-15) 요한은 예수님의 종 노릇 할 자격도 없다고 했습니다(1:7). 종이 주인을 물 속에 집어넣었다가 물에서 끌어올릴 수 있을까요? 주일학교 학생이 총회장을 물 속에 집어넣었다가 물에서 끌어올리는 침례를 베풀 수 있을까요? 결코 그럴 수 없고, 그래서는 안 되지요. 요한도 그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요한이 만류하자 예수님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왕중왕으로서 죄와 고통 중에 빠진 백성들을 다스리시기 위해서는 먼저 백성들과 같은 자리로 내려가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회개의 세례를 받으신 것은 백성들과 하나가 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무죄하신 예수님이 죄인들과 동일시 되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모든 의”를 이루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시고 올라오실 때에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셨습니다. 하늘이 그냥 열린 것이 아니라 ‘찢어져 열렸’(torn open)습니다. 여러분, 하늘이 찢어져 열리는 장면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하늘이 찢어져 열리는 장면을 보셨습니다.

하늘이 찢어져 열린 후에 그 열린 공간으로 성령께서 비둘기 형체로 내려오셨습니다. 성령은 보이시지 않는 영이시지만, 때때로 보이는 형체로 나타나셨습니다. 성령계서 사도행전 2장 3절에서는 ‘갈라진 불의 혀’로, 계시록 4장 5절에서는 7등불로, 계시록 5장 6절에서는 7눈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본문에서는 성령께서 비둘기 형체로 예수님 위에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첫 창조 때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는데,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셨습니다(창 1:2). ‘운행하셨다’는 것은 새처럼 퍼드득 날아다니셨다는 것입니다. 둘째 창조를 하실 때도 성령은 퍼드득 날아(hover) 임하신 것입니다. 성령은 비둘기 형체로 예수님 위에 퍼드득 날아서 내려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실 때에 성령의 능력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성령을 한량없이, 즉 제한없이 주셨습니다(요 3:34). 우리는 때때로 성령으로 10% 채워지거나 20% 채워진다면, 예수님은 항상 성령으로 100% 채워진 상태에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원 작업에 필요한 성령의 능력을 무제한으로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이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자신 위에 날아와 앉는 것을 보실 뿐 아니라 성부 하나님의 음성도 들었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을 받으실 뿐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선언을 받으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님을 사랑하시고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님을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스바냐 3장 1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벅찬 기쁨, 큰 기쁨, 절로 노래가 터지는 환희를 느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때문에 이런 환희를 느끼신다면,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는 얼마나 더 기뻐하시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환희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을 사랑하시되 성자 하나님을 두시고 환희를 느끼신다는 선언을 하셨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에게 비둘기처럼 날아 앉으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환희의 선언을 하셨습니다. 여기에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삼위일체 하나님이 나오십니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는 신비입니다. 세 분의 신이 조화롭게 활동하시는 삼신론이 아닙니다. 한 하나님이 구약시대에는 성부의 모양, 신약시대에는 성자의 모양, 지금은 성령의 모양으로 나타나시는 양태론도 아닙니다. 한 하나님이 영원히 삼위로 존재하시면서 서로 아시고 서로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이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성부 하나님께서 사랑의 품으로 안으시고 덮으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을 능력으로 덮으셨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를 영화롭게 하십니다(17:4-5). 
20세기에 기독교에서 가장 독창적인 사상가 씨 에스 루이스(C. S. Lewis)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은 정적인 존재가 아니라... 동적인 존재, 고동치는 활동, 생명, 거의 드라마와 같습니다. 나를 불경하다 생각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거의 일종의 댄스(almost a king of dance)와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자식을 무조건 사랑하는데, 자식도 여러분을 사랑하고 존경한다면, 얼마나 서로 행복할까요? 그것은 환희, 최고의 기쁨일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영원히 이런 기쁨을 누리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서로에게 사랑과 기쁨과 흠모를 쏟아 부으시면서 서로를 배려하시고 섬기십니다. 서로에게 영광을 무한히 돌리시기 때문에 무한히 행복하십니다. 이런 무한한 행복을 씨 에스 루이스는 ‘하나님의 댄스’(divine dance)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하나님의 환희’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후에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40일을 밤낮 금식하신 후라 배가 고플 대로 고프셨습니다(마 4:2). 들짐승들이 함께 있었기 때문에, 매우 무섭고 위험했습니다. 사탄은 이런 극한상황에서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사탄이 시험한 말을 들어보십시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마 3:3).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마 3:6).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마 3:9).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고 하셨는데, 사탄은 성부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 반격을 가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그리스도 맞아? 그렇다면 너의 무한한 능력을 사용해서 돌들로 떡덩이를 만들어 먹어라. 이 높은 데서 뛰어내려라. 내게 한 번만 절해라. 내가 천한 만물을 네게 다 줄 테니까.’ 이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백성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삶을 살지 말고 너 자신을 위해서 살아라.’는 시험입니다. 이것은 왕중왕으로 하나님 중심, 백성 중심의 삶을 포기하고 자기중심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시험입니다. 

예수님은 세 가지 시험을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심으로 이기셨습니다.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백성을 위해서 자신을 헌신하시는 삶으로 이기셨습니다.

하나님의 환희를 체험하는 길은 자기중심의 삶을 부추기는 사탄과 싸워서 이기는 삶입니다. 호수 같이 조용하고 평온한 환경에서 하나님의 환희를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사탄과 싸우는 전쟁터에서 하나님의 환희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네 마음대로 살아. 그러면 정말 행복해.’라고 유혹하지만,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면 하나님의 환희에서 멀어집니다. 이기적인 삶은 행복한 삶이 아니라, 불행한 삶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남들을 섬기는 이타적인 삶이 정말 행복한 삶입니다.

자기중심의 삶은 정체된 삶입니다. 자기중심의 삶은 흐르는 물처럼 맑은 삶이 아니라, 고인 물처럼 썩은 삶입니다. 자기중심의 사람은 자기를 궤도로 해서 모든 것이 돌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사람들을 돕고 친구들을 사귀고 심지어 연애에 빠지더라도, 항상 자기 이권만 계산합니다. 자기에게 뭔가 생기는 것이 있을 때만 잘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도 하지만, 그것도 자기 기분이 좋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자기 삶에 방해가 되지 않을 때만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목적을 향한 수단으로 이용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말하고 다른 사람들과 재미있게 지내지만, 항상 내 이권이라는 궤도를 중심으로 돌고 돕니다.

무대에 5명, 10명, 100명이 있는데, 각자가 “여러분, 모두 나를 중심 궤도로 삼고 도세요.”라고 한다면, 댄스 파티가 엉망이 될 것입니다. 건전한 댄스 파티가 오히려 위험한 것이 될 것입니다. 각자가 자기중심으로 살 때 거기에는 환희가 없습니다. 행복이 없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각기 자신의 궤도로 도시지 않습니다. 영원히 서로에게 자신을 주시는 사랑을 무한히 베푸십니다. 삼위의 어느 위도 “나를 중심으로 돌아!”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삼위의 각 위가 각기 다른 위를 중심으로 삼고 도십니다. 삼위 간에 행복과 환희가 있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삼위 하나님의 환희는 천국의 환희입니다. 이것은 삼위 간의 사랑의 관계에서 체험하는 환희입니다. 하나님의 환희는 신선한 오징어 회를 먹을 때와 비교할 수 없는 환희, 결혼의 환희와 비교할 수 없는 환희입니다.

천국이 무슨 재미가 있을까 싶습니까? 하나님이 심심하실 것 같습니까? 우리가 천국에 가면 심심할 것 같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천국은 잔치입니다(마 22:1-14). 변화산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천국의 환희를 잠시 체험하고 너무 기뻐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사역을 하시면서 항상 환희를 체험하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예수님 자신이 충만한 기쁨을 맛보셨고,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충만한 기쁨, 즉 환희를 주십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님이 주시는 환희 때문에 심지어 감옥 속에서도 기뻐 뛰었습니다(빌립보서). 저도 이런 환희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로 백성들과 동일시되셔서 사탄과의 결투[시험]까지 이기신 왕중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왕중왕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환희에 동참하도록 다스리십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왕중왕 예수님을 신뢰하면 하나님의 환희에 계속 동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환희에 동참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행복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요 15:11). 우리가 예수님의 다스림을 매순간 계속 받으면 천국의 지복을 우리의 행복으로 체험합니다.

<좋은 기업을 넘어서 위대한 기업으로>(Good to Great)라는 책을 쓴 짐 콜린즈(Jim Collins)는 제1단계 지도자로부터 제5단계 지도자까지 다양한 지도자를 소개했습니다. 제1단계 지도자는 자신의 재능, 지식, 기술, 습관 등으로 생산에 공헌하는 사람입니다. 제2단계 지도자는 개인의 능력으로 그룹 발전에 공헌하는 사람입니다. 제3단계 지도자는 효과적인 목표달성을 위해 그룹을 조직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제4단계 지도자는 불같은 헌신과 선명한 비전을 가지고 그룹을 더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도록 자극하는 사람입니다. 제5단계 지도자는 인격적 겸손과 직업적 의지를 겸해서 그룹의 위대한 발전을 계속 이루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거의 다 자녀들이나 학생들이나 직원들의 지도자입니다. 여러분은 몇 단계 지도자입니까? 혼자만 잘 하는 제1단계 지도자입니까? 잘 해서 그룹 발전에 도움을 주는 제2단계 지도자입니까? 그룹을 조직할 줄 아는 제3단계 지도자입니까? 비전과 헌신으로 그룹을 잘 관리하는 제4단계 지도자입니까? 인격적으로는 겸손하면서도 사명에 있어서는 목숨을 거는 제5단계 지도자입니까?

다윈 스미쓰(Darwin E. Smith)는 보통 사람으로 보이는 변호사였습니다. 그는 1971년 킬벌리-클락(Kimberly-Clark)이라는 파산 직전의 종이회사의 회장에 올랐습니다. 회장 자격이 없다는 비판이 많았지만, 그는 20년간 회장직을 맡았습니다. 그가 회장으로 일하는 동안, 킬벌리-클락은 경쟁사들을 다 물리치고 세계 최고의 종이 회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시골 소년 같은 옷차림에 수줍음이 많았지만, 일에 관한한 강렬한 의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시골소년으로 밤에는 일하고 낮에는 공부했습니다. 어느 날 직장에서 손가락 하나를 잃었지만, 그 날 저녁 바로 수업에 들어갔고, 그 다음 날 바로 직장에 나갔습니다. 낮에는 풀타임으로 일하고 밤에는 학교에 다녀서 하버드 법대(Harvard Law School)에 입학했습니다. 그는 회장이 되고 2달 후에 코와 목구멍 암 때문에 1년 이상 못 산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사회에서 강력한 의지를 밝혔습니다. “나는 아직 안 죽었고 곧 죽을 계획도 없습니다.” 그는 암 치료를 받으면서 직장에 출근해서 25년 더 살았습니다. 스미쓰는 좋은 기업을 위대한 기업으로 만든 제5단계 지도자였습니다.

짐 콜린즈는 포츈(Fortune)지가 선정한 500대 기업 중에 좋은 기업에서 위대한 기업으로 약진한 기업 11개를 발견했습니다. 그 11개 기업의 지도자들은 다 개인적으로 겸손하면서도 기관의 발전을 위해서는 인생을 걸 정도로 의지가 강력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제5단계 지도자의 최고 완벽 모델입니다. 제5단계 지도자는 겸손하지만 강인합니다. 조용하지만 집요합니다. 약한 듯해도 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죄인들인 백성들과 하나가 되셔서 회개의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기를 위해서 능력을 사용하시지 않으시고, 오직 백성을 구원하시는 일에 목숨 걸고 매진하셨습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겸손하시고 사명 면에서 목숨을 거신 제5단계 지도자의 완벽한 모델 우리의 왕중왕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갈 때에 하나님의 환희를 맛보고, 또 우리도 제5단계 지도자로 성숙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섬기실 때 기쁨에 겨워 춤을 추십니까? 하나님께 기도하실 때 교제와 기대의 기쁨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축으로 해서 도십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여러분을 축으로 해서 돌게 하십니까? 여러분은 겸손하면서도 단호하십니까? 조용하면서도 집요하십니까? 약한 듯해도 담대하십니까? 우리는 제5단계 지도자의 완벽한 모델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고 다스림을 받으면서 그분을 본받아야 합니다.

왕중왕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환희에 동참합니다. 왕중왕의 다스림을 받는 감격과 행복이 넘칩니다. 이것이 환희와 행복의 복음입니다. 왕중왕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름으로 하나님의 환희를 체험하는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권성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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