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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사람, 새 생활 (마 9: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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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사람, 새 생활 (마 9:14-17)


먼저 금식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14-15절)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비난 즉 세리와 죄인들과 음식을 함께 잡수시면서 교제하시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하는 것을 아시고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왔다"고 하시면서 일침을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로부터 금식 문제에 대한 질문을 받게 됩니다. 요한의 제자들만 해도 엄격하게 금식을 준수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금식하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큰 의문이었습니다. 

금식은 참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신실한 삶을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이 마음을 괴롭게 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기 위한 선한 몸부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형식이나 전통의 틀이 되서는 안됩니다. 금식은 율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자됨의 표지도 아닙니다. 그것은 거룩의 수준을 결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나의 신앙, 나의 절실함을 하나님께 아뢰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리새인들이나 세례 요한의 일부 제자들처럼 형식으로 자리잡게 되면 필연적으로 자기 의가 드러나게 되고 금식하지 못하는 사람을 정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영적 신랑이 함께 있고 그에게 직접 교훈을 받는 제자들은 금식이 필요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당신과 함께 있는 동안만이라도 쉬게 하고, 한가하게 지내도록 하고 싶으셨습니다. 

사실 이 제자들의 안락한 생활은 아주 짧았습니다. 3년의 기간이 흐른 후 십자가의 고통의 길이 펼쳐졌기 때문입니다. 금식은 슬퍼함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고 그때에는 제자들이 금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금식과 기도는 어렵고 슬픈 시기에 속한 것이므로 예수님은 이들이 곧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아갈 것임을 암시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어진 짧은 즐거운 시간에 대해서 최대한 보장해 주시고 또한 다가올 고난과 환난의 때를 준비시키셨습니다. 

바라기는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든지 금식은 경건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다는 식의 우월감을 가지지 않기를 원합니다. 가만히 따져보면 사실 우리가 금식이라는 조금 극단적인 카드를 사용할 때는 그만큼 내가 절박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은 왜 나처럼 절박하지 않느냐고 요구한다면 모순이 되는 것입니다. 

공동체가 금식해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모두가 금식하며 기도해야할 때라고 생각된다면 함께 금식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향해서 "당신은 왜 그렇게 하지 않는거요?" 라고 말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율법이 되고 정죄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형식과 전통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변하는 진리는 아닙니다. 같은 이유를 들어서 금식 자체가 진리는 아닙니다. 금식은 주님을 좀 더 깊이 묵상하고 주님께 나아가기 위한 신자의 선한 몸부림입니다. 이것을 늘 기억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다음은 옛것과 새것, 옛 사람과 새 사람에 대한 말씀입니다(:16-17절)

기독교는 옛사람의 약점이나 부족한 것들, 혹은 잘못된 습관과 좋지 않은 과거를 부분적으로 고치거나 누덕누덕 기운 상태로 쓰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특징은 옛것은 버리고 죽이고 태우고 부수어 십자가에 못 박는 생활에서 시작되어 완전히 새 사람, 새 생활을 하는 것이 기독교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의 교훈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헌것을 새것에 붙여서 누덕누덕 기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것으로 재창조되는 것의 신비로움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 화장실 중고 문)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정말 새사람입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해야 합니다. 
“예,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입니다” 

본문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조명해 볼 수 있습니다. 

1. 생베 조각은 낡은 옷에 붙이지 않습니다(16절).

16절의 ‘생베’ 라는 말은 ‘아그나포스’ (αγναφο) 인데 “한 번도 세탁된 적이 없는 천”을 가리키는 말로서 이것을 물에 빨아 말리면 줄어듭니다. 이와 같은 생베를 여러 번 세탁한 적이 있고 올이 낡은 베에다가 기울 경우에는 오그라들어 낡은 옷을 잡아당김으로써 기운 효과가 전혀 없고 오히려 그 헤어짐이 더하게 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생베 조각에 비유되었고 유대교의 의식은 낡은 옷으로 비유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유대교의 바리새인들이 가르치는 교리들은 금식과 금욕주의적 의식들을 가르치지만 이런 것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인 복음과는 조화를 이루지 못할 뿐 아니라 복음과 비교하면 할수록 옛 종교인 유대교의 교리는 점점 고립될 뿐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교훈은 예수의 복음으로 새사람 이 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새사람답게 살아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분명 새사람인데 그 삶은 옛 사람으로 살아간다면 한참 잘못된 것입니다. 

신앙도 옛 사람에 새사람을 접합시켰을 때 처음에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결국은 잘못되고 맙니다. 때문에 옛사람은 철저히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현대 그리스도인의 위기라면 그것은 아직도 낡은 사고를 버리지 않고 새사람의 삶을 살아가려는 것입니다. 

주님이 불가하다고 하시는데 그것을 오히려 죄책감조차 갖지 않고 시도하고 있 습니다. 적당히 즐기고 적당히 마시면서 천국을 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낡은 사고를 새것으로 바꾸려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낡은 것을 적당히 수선해서 사용하려는 정신과 삶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타락한 삶과 세상적인 쾌락을 영위하면서 영원한 생명을 동시에 붙들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마음과 정신이며 행동일 뿐입니다. 분명한 것은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지 못한다는 주님의 교훈을 귀담아 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새사람의 삶입니다. 

새사람이란 외모를 새롭게 만들었다 해서 새사람이 아닙니다. 성형 수술을 했다거나, 그래서 못생긴 얼굴이 예쁘게 보인다거나, 아니면 뚱뚱한 몸이 운동을 해서 날씬해졌다고 해서 새사람은 아닙니다. 

새사람의 특징은 속사람의 변화입니다. 곧 심령의 변화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에베소서 4:17-5:21까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관하여 말씀하셨는데 특히 4:22-24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 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그렇습니다. 아무리 겉모양이 아름답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탐욕과 교만과 불량함과 시기와 질투와 오만함과 불의함으로 가득 찬 사람이라면 그런 것들은 자연 언젠가 겉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심령이 새롭게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새사람입니까” 

이 질문을 받을 때 우리는 예수님이 싫어하시는 것들을 버리고 새롭게 살아가야 분명한 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 “예,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입니다.” 


2.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담지 아니 합니다(17절).

17절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포도주’를 수식하는 ‘새’ 라는 말은 “시간적으로 새롭다”는 뜻의 ‘네오스’ 입니다. ‘부대’를 수식하는 ‘새’ 라는 말은 “질적으로 새롭다”는 뜻의 ‘카이노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교훈을 받습니다. 진정한 새사람은 시간적으로 질적으로 새롭게 된 사람입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다시 말하면 어떨 때는 그리스도인 같고 어떨 때는 비그리스도인 같은 삶이 아닙니다.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리스도인의 모습 그것이 새사람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새사람의 삶입니다. 

그런데 낡은 부대에다 새 포도주를 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 안에 살고 있는 것 같고 성도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같은데 사실은 그 모든 삶은 흉내일 뿐 새사람의 삶은 아닌 경우입니다.

세속적인 욕심으로 가득 차서 교회 안에서도 자기를 주장하고 자기의 이익을 챙기기에 바쁘고 자기 자신에게 유익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상관하지 않는 비인간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왜 오늘의 교회들이 시끄러운가? 왜 교회가 성장하지를 못하고 벌써 하향 그래프를 기록하고 있는가? 왜 오늘의 교회들이 평안하지 못하는가? 새사람이 아닌데 새사람인양 살아가는 사람들 때문에 그렇습니다. 

낡은 부대는 새것을 담을 수 없습니다. 유한한 것이 영원한 것을 수용할 수 없습니다. 세속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담을 수 없습니다. 썩고 오염된 곳에서 생명체가 살아 움직일 수 없듯이 타락하고 부패하고 부정한 마음에 성령은 계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정 새사람이라고 외칠 수 있다면 세속적인 타락과 세상적인 방법을 즐기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려는 잘못을 재현해서는 안 됩니다. 

즉, 우리가 예수를 믿어 세례를 받아 거룩한 직분을 수행하려면 진정으로 새사람이 되어 주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3. 우리는 새사람으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새사람으로서의 삶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무용했던 지난날의 나의 존재가 아니라 이제는 유용한 존재로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있으나마나 한 사람이 아니라 꼭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부터, 직장에서, 사회에서, 국가에서, 하나님의 교회에서 어디에서라도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새사람의 모습입니다. 

쓸모 없는 인간에서 쓸모 있는 인간으로의 변화입니다. 
가치 없는 것에서 가치 있는 것으로의 변화입니다. 
의미 없는 생활에서 의미 있는 생활로의 변화입니다. 

우리는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새사람의 모습이며 새사람의 삶의 증거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교회에서 무엇인가 한 가지는 할 수 있어야 합니다. 

1년 내내 교회 출석만 하고 주님 앞에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면 그야말로 부끄러운 존재일 뿐입니다. 무엇이라도 좋습니다. 한 가지라도 좋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분명 새사람의 모습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청지기로서 오늘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새사람의 삶이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생활에서 작은 일부터 새 삶의 모습으로 살아가면 됩니다. 그것은 나쁜 습성부터 고쳐 나가는 것입니다. 아니 새사람이 되었다면 나쁜 습성들은 자연적으로 고쳐질 것입니다.

예컨대 예배 시간에 늦는 습성이라든가, 기도 시간에 눈뜨고 살피는 습관이라든가, 예배 시간에 졸거나 잠자는 습성이라든가, 교회 일에 빠지는 습성이라든가, 찬양 시간에 하품하는 습성이라든가, 거짓말 하는 습성 같은, 하여튼 아름답지 못한 것들을 버릴 수 있는 생활에서부터 우리는 새사람의 삶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35장에는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기 전에 가족들에게 새 생활을 위한 놀라운 선포를 하는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창35:2)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하면서 새사람의 삶을 역설하였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엡 4:22-23)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5:17) 그렇습니다. 새사람은 심령이 변해서 좀 더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존재의 의미를 모르면서 살아가던 사람이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알고 필요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지난날의 잘못된 모든 습성들이 변화되어 보다 더 좋은 삶을 위한 삶으로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새사람으로서의 생활은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신앙을 탈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육신과 율법은 즐거움을 주지 못하지만 성령과 복음은 우리들에게 기쁨을 줍니다. 복음의 삶은 곧 새사람의 삶의 내용입니다. 우리의 영이 살아 있을 때 우리는 기쁨 속에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오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을 하지 못한다면 세상에 살면서 어찌 아름다운 삶을 나타낼 수 있을까요?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우리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빛이어야 하고, 소금이어야 하고, 산 위의 동네이어야 하고, 등경 위의 등불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새 사람 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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