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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 때문에 슬퍼하십니까? (막 10: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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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 때문에 슬퍼하십니까? (막 10:17-22)

지난 주 우리나라에 ‘물폭탄’이라고 말할 정도로 엄청난 폭우가 쏟아져 수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습니다. 모든 상황이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가슴 아픈 것은 대학생 10명 등 모두 13명의 목숨을 앗아간 춘천 산사태입니다. 인하대학교 발명 동아리 학생들이 춘천 오지에 있는 한 초등학교에 봉사활동을 갔다가 참변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출발하기 전부터 비가 많이 내려서 봉사활동을 취소하려고도 생각했었는데, 초등학교 아이들과 한 약속을 지키겠다고 35명의 학생이 봉사활동을 강행했다가 변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목숨을 잃은 학생 가운데는 대학교 4학년 학생도 있었습니다. 그는 이번 8월이면 졸업을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봉사활동을 떠나려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취직공부나 하지 왜 봉사활동을 가려 하느냐?’고 말렸지만, ‘마지막이기 때문에 꼭 가고 싶다’고 말하고 봉사활동을 갔습니다. 그런데 그게 그의 인생 마지막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그 사연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소중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 하나가 있습니다. 그건 우리가 가슴 아픈 그 이야기를 들으면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안타까움을 느낄 수는 있지만, 그게 우리에게는 슬픔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안타까워하는 감정을 슬픈 감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정말 슬픔의 감정을 우리는 느끼지 못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내가 당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부모는 안타까움이 아니라 가슴이 무너져 내릴 큰 슬픔을 겪고 있습니다. 자기 자식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당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Karl Theodor Jaspers, 1883-1969)가 한 말이 옳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다가오는 상황들 가운데서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변화시킬 수 없는 것들이 있는데, 야스퍼스는 그것을 ‘한계상황’(Grenzsituation)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예를 들어 질병이나 죽음과 같은 것이 한계 상황입니다. 우리 힘으로 질병을 거부할 수 없고, 죽음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이런 한계상황에 직면하면 우리는 심한 절망과 슬픔을 경험하게 됩니다.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와 산사태는 우리 인간의 힘으로 거부할 수 없는 한계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목숨을 잃은 그 사건 역시 한계상황이었습니다. 그 사건을 한계상황으로 경험하게 된 사람은 그 사건이 엄청난 슬픔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 한계상황이라는 것이 꼭 엄청나게 큰 사건 속에서만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매일매일 겪는 좌절이나 절망 같은 순간도 한계상황입니다. 그런 상황 앞에서 내 스스로 확신에 찬 바른 선택을 하지 못하면 우리는 좌절과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한계상황에 처해 깊은 슬픔에 빠진 한 사람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를 ‘한 사람’이라고만 소개하고 있는데, 마태복음에서는 ‘청년’이라고 소개해줍니다. 그는 아직 젊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에서는 ‘관원’이라고 그의 직업을 가르쳐줍니다. ‘관원’이라는 말은 여러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로마 정부에 의해서 임명된 정부의 관리일 수도 있고, 회당의 책임을 맡은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당시 이스라엘 최고의 의결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의 공회원(요즘으로 말하면 국회의원)일 수도 있습니다. 그의 직업이 무엇이든지 간에 젊은 나이에 관원이라는 직책을 맡았다는 것은 그는 이미 성공한 사람이었음을 의미합니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았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더구나 그에게는 재산이 많이 있었습니다. 젊은데다 부자요 관원이라는 높은 지위까지 올라 있었습니다. 또 그의 고백처럼 그는 어려서부터 율법을 철저하게 지킨 사람입니다. 신앙적으로도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요즘 말로 한다면 그는 젊은 나이에 출세한 사람입니다. 모두가 부러워할만한 조건을 다 갖춘 사람입니다. 요즘 이런 사람이 있다면 신랑감 1순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 것에도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이 젊은이에게 큰 고민거리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건 영생에 관한 것입니다. 영생에 관한 문제를 안고 고민하다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이라면 능히 자신이 고민하고 있는 영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청년이 예수님 앞에 나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조건으로 본다면 자신은 이미 성공한 사람입니다. 남들에게 부러움을 살 정도로 출세한 사람입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받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나사렛 시골 출신인 예수님 앞에 와서 자기의 고민을 털어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가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것은 그가 영생의 문제로 인해서 얼마나 깊이 고민하고 있었는지를 반증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고민하고 있는 그 문제를 별거 아닌 것처럼 생각했다면 예수님 앞에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충 고민하다가 해결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냥 집어치우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대충 건너뛰거나 무시해도 될 그런 고민이 아니었습니다. 반드시 해결하고 싶은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체면이고 지위고 다 내려놓고 예수님께 찾아와 도움을 요청합니다. 더구나 17절에 의하면, 그는 예수님께 찾아와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주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태였음을 말씀해 줍니다. 그마만큼 절박했기 때문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주님 아니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라는 뜻으로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고민을 털어놓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십계명 가운데 이웃과의 관계에서 지켜야할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를 하나하나 일러주셨습니다. 

십계명은 모든 율법 가운데 핵심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계명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예수님께서 이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계명을 언급하셨다는 것은 당시 사회에서 이런 계명들이 무시되고 있었다는 것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만 잘 지켜도 정말 훌륭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그 청년은 어렸을 때부터 그런 계명들을 잘 지켜왔습니다. “선생님, 이런 것들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다 지켜온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를 가만히 쳐다보셨습니다. 여기 ‘쳐다보셨다’는 말은 뚫어져라 쳐다보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켰다’는 그  젊은 부자 관원을 뚫어지게 쳐다보셨습니다. ‘왜 거짓말을 하느냐’고 나무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를 쳐다보시는 예수님의 얼굴에 미소가 흘렀습니다. 너무너무 사랑스러웠기 때문입니다. 

21절에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라는 말씀은 참 귀한 말씀입니다. 그런 청년을 만났다는 것이 예수님께도 기쁨이었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 청년을 만난 것이 예수님께 기쁨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율법이 무시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그런 사회에서, 그 청년처럼 진솔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온갖 부정과 거짓이 판을 치는 사회, 종교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거짓과 위선에 파묻혀 사는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하는 젊은이가 있다는 것은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얼굴에도 그런 미소가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젊은 관원에게 ‘정말로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다 지켰느냐’고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젊은 사람이, 그것도 돈이 많은 부자이고 젊었을 때에 이미 높은 지위에 오를 만큼 출세한 사람이 쾌락을 따라 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처세를 위해서 다른 사람을 이용해 먹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출세하겠다고 다른 사람을 짓밟지 않았습니다. 정말 정직하게 살려한 사람입니다. 남에게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돈이 많다고 타락하지 않았습니다. 교만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보다 더 멋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젊은 관원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얼굴에 미소를 지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를 바라보실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벽한 삶을 살 때에만 만족해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죄를 짓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을 따라 살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얼굴에 미소를 지으십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좀 더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살까’ 고민하며 사는 모습을 보시며 얼굴에 미소를 지으십니다.

어렸을 때부터 계명을 다 지켰지만 영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그 젊은 관원을 사랑스럽게 미소 지으며 바라보시던 주님께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렇게 해결책을 제시해 주십니다. “네게 아직 부족한 것이 하나 있구나. 가서 네가 가지고 있는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주거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을 거야.”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젊은 관원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그리고는 슬픔 가득한 얼굴을 하고서 천천히 등을 돌려 예수님 앞을 떠나갑니다. 오늘 본문 2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슬픈 기색을 띠었다’는 말은 얼굴에 짙은 구름이 잔뜩 드리워져 있다는 뜻입니다. 누가 보더라도 슬픈 기색이 역역하게 드러납니다. 
  
우리 주변에도 깊은 슬픔이나 근심으로 인해 마음이 힘들어 하는 사람들 가운데 얼굴이 새까맣게 된 사람을 종종 봅니다. 누가 보더라도 뭔가 큰 근심이나 슬픔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지금 그의 마음에 얼마나 힘든지를 그의 얼굴만 보더라도 다 알 수 있을만큼 말입니다. 지금 이 부자 청년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는 얼굴색이 변했습니다. 큰 슬픔 때문입니다. 

젊은 부자 관원의 얼굴에 짙은 먹구름이 드리워진 것처럼 큰 슬픔을 안고 예수님 앞에서 떠났다는 것은 예수님을 찾아올 때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에도 얼굴이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오히려 더욱 큰 근심, 더욱 큰 슬픔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무엇이 그 젊은 부자 관원으로 하여금 얼굴색이 변할만큼 그에게 큰 근심과 슬픔을 안겨주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가 부자였기 때문입니까? 본문 22절에서 그 해답을 말씀해 줍니다. “그 사람이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그 청년에게 재물이 많지 않았다면 그는 슬퍼하거나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가진 재물이 많았기 때문에 그는 슬픈 기색을 하고 근심하며 되돌아가야 했습니다. 예수님께 찾아 나올 때보다도 더욱 슬픈 얼굴로 되돌아가야 했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물을 포기할 수만 있었다면 그는 그렇게 슬픈 기색을 하고 되돌아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에게 재산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는 그가 그렇게 오랫동안 고민하던 영생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체면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찾아와서 해결하고 싶었던 영생을 얻는 방법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씀을 듣고는 슬픈 기색을 하고 되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 젊은 관원에게 재물이 많다는 것이 축복입니까? 저주입니까? 그가 가진 그 많은 재산이 그에게 기쁨을 주었습니까? 슬픔을 주었습니까? 
  
우리는 재산이 많다는 것을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은 재산이 많은 것을 축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지라도 지금보다 더 많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내게 주신 것으로 만족하며 산다고 말하면서도, 더 주신다면 거절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내게 축복인 것만 같고, 내가 누리는 복인 것만 같은 것이 때로 우리를 슬프게 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때로는 그것이 우리의 삶에 커다란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어떤 사람은 건강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나에게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기만 하면 주님을 위해서 더 많이 봉사하며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만 같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지금보다 조금만 더 많은 것을 주신다면 물질로 인해서 당하는 힘든 상황에서 벗어나 더욱 기쁘게 살 수 있을 것만 같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남편이나 아내, 자식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지금보다 좀 더 자상한 남편이 되어준다면 우리 가정에 금방이라도 행복의 꽃이 피어날 것만 같기 때문입니다. 지금보다 좀 더 말 잘 듣는 아이들, 조금만 더 공부 잘하는 아이가 되어준다면 더없이 행복할 것만 같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힘들어하는 부분이 해결되기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지금 당한 큰 문제를 빨리 해결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기도하시는 것에 하나님께서 내 기도대로 응답하신다면 정말로 여러분은 지금보다 더 행복하고 기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그 행복이, 그 기쁨이 여러분을 얼마만큼이나 행복하게 해 주고, 얼마만큼이나 기쁘게 해 줄 것 같습니까? 그 행복과 기쁨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 것 같습니까? 
  
오히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포기할 때 더 행복하고 더 기쁠 것이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으셨습니까? 

우리가 무언가에 집착을 하면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분명 재물이 많고 여유 있다는 것은 큰 복입니다. 그러나 그 재물에 집착을 하면 그건 복이 아니라 재앙이 될 수 있습니다. 건강하다는 것 역시 큰 복입니다. 그러나 너무 건강에 집착하면 지금의 건강에도 감사할 수 없거니와 지금보다 더 건강하다 하더라도 그게 나에게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그건 가정의 문제도 그렇고, 자식의 문제도 그렇고, 사업의 문제도 그렇고, 인간관계의 문제도 그렇고, 모든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고,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님을 위해서 그것을 포기할 수 없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축복이 아닙니다. 더 많이 가질지라도 그건 우리에게 기쁨을 선물해 주지 못합니다. 

얼굴에 짙은 구름이 드리워진 것처럼 슬픈 기색을 하고 근심하며 돌아간 오늘 본문의 청년을 보십시오. 그에게 무엇이 부족했습니까? 건강이 없었습니까? 그는 청년입니다. 아직도 건강은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나이입니다. 그에게 사회적인 지위가 모자랐습니까? 젊은 나이임에도 관원이라는 남부러워할만한 사회적인 지위에 있었습니다. 그에게 신앙적인 열정이 없었습니까? 그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켰습니다. 

지금은 영생을 얻고 싶은 열정이 그의 마음에 가득했습니다. 그에게 재산이 부족했습니까? 그는 부자였습니다. 그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슬픈 얼굴로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슬퍼하며 돌아가야 했습니까? 하나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가장 관심을 갖고 있었던 영생이라는 아주 중요한 문제보다도 더 중요하게 생각되어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만 놓아버렸다면, 그 하나만 포기했더라면 그는 정말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정말로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큰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 주변에 이 청년만큼 영생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니고데모가 예수님과 거듭남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젊은 관원만큼 영생에 대한 갈급함은 없었습니다. 사회적인 지위나 젊은 나이, 또 어렸을 때부터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았던 모습을 생각한다면, 그가 예수님의 말씀처럼 재물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랐다면 아마도 사도 바울 못지않게 크게 쓰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를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슬픈 얼굴로 되돌아가야 했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자세히 보십시오. 성경 어느 곳에도 이 사람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저 슬픈 얼굴로 되돌아간 사람이라는 것 밖에 그에 대한 흔적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무엇 때문에 슬퍼하십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얼굴에 슬픈 기색을 띠게 만듭니까? 내 환경이 나를 슬프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포기하지 못한 것 때문에 슬픔이 찾아온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생각해 봅시다. 내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그것, 내게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꼭 손에 쥐고 있는 그것이 내 얼굴에 슬픈 기색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생각해 봅시다. 하나를 포기하면, 하나를 내 손에서 내려놓으면 참된 기쁨이 우리에게 찾아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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