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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다 같은 사랑 (겔 28:1-2, 계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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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같은 사랑 (겔 28:1-2, 계 15:2-3)

‘네덜란드의’(Dutch)란 형용사가 있습니다. 영어사전에는 이 단어 앞에 나오는 관용구는 모조리 좋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Dutch Comfort란 말은 ‘네덜란드인의 위안’이란 뜻인데 조금도 고맙지 않은 위안을 말합니다. Dutch Courage란 말은 ‘네덜란드인의 용기’라는 말인데 술김에 쓸모없는 용기인 만용을 뜻합니다. Dutch Party란 말은 ‘네덜란드인의 파티’라는 말인데 회원제의 시시한 파티를 뜻합니다. Dutch Treats는 ‘네덜란드식 계산’이란 말인데 각자가 부담하는 계산방식을 뜻합니다. Dutch Wife란 말은 ‘네덜란드인의 아내라는 말인데 탐험대가 먼 길을 떠날 때 소지했던 비닐로 만든 인공여성을 뜻합니다. 

우리나라 옛날에 있던 죽부인 같은 것입니다. 16-17세기에 영국과 네덜란드는 누가 바다를 더 많이 지배하는가, 누가 더 많은 식민지를 지배하는가를 두고 다투었습니다. 이 때 영국은 네덜란드를 격하하느라고 ‘네덜란드’란 말의 형용사를 사용하여 네덜란드인의 인상을 깎아내린 것입니다. 바다가 누구의 것인가 다툼은 이런 비극적인 용어를 만든 것입니다. 

바다가 누구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다. 영국과 네덜란드가 싸울 일이 아닙니다. 바다는 하나님의 창조의 자리입니다. 기적의 자리입니다. 능력의 자리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바다의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바다를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애급에 있던 이스라엘백성들은 홍해를 건너 출애굽을 성공했습니다. 출애굽 여정의 절정은 홍해를 갈라지게 하고 그들이 건너고 다시 바닷물이 합쳐져서 애급의 병사들이 다 죽고 출애굽을 마무리한 일입니다. 
  
신약성경에는 갈릴리 바다가 예수님의 사역 중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주위에서 제자들을 택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에서 고기잡이하던 중에 예수님께서 따르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에 나가셨다가 풍랑이 심하게 불던 바다에서 풍랑을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바다 위를 걸어 오셨습니다. 부활하신 다음에 다시 갈릴리에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 고기를 드시고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물으셨습니다. 
  
애급에서 홍해를 건너 가나안에 들어온 것은 구약의 구원의 경로입니다. 신약에는 우리 모두가 마지막에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며 유리바다를 건너서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계시록 15장). 하나님의 나라는 바다를 건너 들어갈 영원한 집입니다. 우리의 본향은 바다 건너편에 있습니다. 
  
우주의 많은 행성 가운데 지구만이 유일한 푸른 행성입니다. 지구는 생명이 있는 유일한 행성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지구를 푸르게 만듭니까? 물입니다. 지구는 물의 행성입니다. 물은 지구 표면의 75%를 덮고 있습니다. 바다의 넓이는 약 3억 6,105만 평방킬로미터입니다. 세계 인구의 절반이 바다로부터 60마일(100km) 이내에 살고 있습니다. 북반구의 60.6%가 바다이고, 남반구의 81%가 바다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가운데”라고 합니다. 왜 바다를 하나님의 자리라고 할까요? 시편 139:8에는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곳이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바다도 분명히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바다를 찾는 계절을 맞이하여 바다를 찾을 때마다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바다는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에스겔 28:2에는 “인자야 너는 두로 왕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가운데에 앉아 있다 하도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리인 바다에 앉아 계시다고 합니다. 물을 ‘오리방석’이라고 하는 것 아십니까? 오리가 물에 편안하게 앉아있기 때문에 물을 오리방석이라고 합니다. 바다는 ‘하나님의 방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물에 편안하게 앉아 계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리 바다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이시기에 가장 넓은 터입니다. 
  
시편 24:2에는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라고 합니다. 바다는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바다는 우리에게 무서운 곳이고, 쓰나미가 몰려오면 정말 두려운 곳이고, 바다가 큰 파도를 일으키면 우리가 힘들지만 하나님은 바다가 편안한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바다를 지배하시고, 심지어 바다 위를 걸어오셨습니다. 어떻게 바다 위를 걸어오십니까? 바다가 하나님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바다는 하나님의 놀이터입니다. 바다는 하나님의 일터입니다. 
  
바다는 모든 것을 다 포용합니다. 작은 빗방울이 모여 개천을 이룹니다. 다시 개천의 물이 모여 시내를 이룹니다. 시내의 물이 모여 강을 이룹니다. 강물은 여기저기에서 다 모여 바다를 이룹니다. 바다는 더 이상 물을 보내지 않고 모든 물을 다 품습니다. 때로운 더러운 물도 더럽다 하지 않고 다 품는 것이 바다입니다. 이런 바다는 하나님의 자리이고 동시에 모든 것을 다 품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역대상 16:32에는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이 다 외치며 밭과 그 가운데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라고 합니다. 왜 즐거워해야 합니까? 어떻게 즐거워 할 수 있습니까? 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있으니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하나님의 자리에 우리가 함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의 자리에 있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즐거움입니다. 의인이 왜 행복합니까? 시편 92:13에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라고 합니다. 의인은 여호와의 집에 심겨 있으므로 행복한 것입니다. 어디에 있든지 그 자리가 하나님의 자리인 것을 알고 인정하고 확신하면 그 자리가 복이 있고 즐거움입니다. 야곱이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삼촌의 집으로 도망을 가다가 하나님을 만난 곳을 ‘벧엘’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집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곳에도 계시다는 사실을 안 야곱은 잠이 확 깼을 것입니다. 두려움에서 깨어났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아는 것이 큰 힘입니다. 행복한 일입니다.  
  
바다는 때로는 파도가 치고 흉융합니다. 마태복음 8:24에는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다입니다. 때로 바다는 유리바닥처럼 조용합니다. 계시록 4:6에는 “수정과 같은 유리바다”라고 합니다. 바다는 풍랑을 일으키고 집채만 한 파도가 일어나고 그러다 갑자기 큰 놀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하나님 모습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인자하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경책하시는 분이십니다. 바다의 양면의 모습처럼 무섭게 변하는 것이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두로는 남 레바논의 바다로 둘러싸인 도시국가입니다. 두로 왕은 “나는 신이다. 내가 하나님의 자리인 바다에 앉아 있다”라고 합니다. 두로 왕국은 바다로 둘러싸여 어느 누구도 침입할 수 없는 완전한 곳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과연 두로가 안전할까요? 두로왕이 바다를 자기 자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바다는 하나님의 자리이지 자기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바다를 다른 신이나 왕에게 자리를 내준 적이 없습니다. 
  
옛날부터 바다를 가진 나라가 그렇게 당당했습니다. 바다를 중심한 시대에 바다가 없으면 힘이 없습니다. 흔히 바다가 없는 내륙국은 여러 면에서 경제적 군사적 정치적 외교적으로 힘이 없습니다. 아시아에서는 몽골이나 카자흐스탄이 내륙국입니다. 몽골은 모든 면에서 중국과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바닷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유럽은 스위스나 룩셈부르크가 내륙국입니다. 아프리카는 말라위가 내륙국입니다. 남미는 볼리비아와 파라과이가 내륙국입니다. 볼리비아는 태평양 해로를 얻기 위하여 인접국들과 항상 외교적인 접촉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바다가 없는 내륙국도 해군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여러 해 전 일본 홋카이도를 잠시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오타루에 어느 호텔에 묶고 있었습니다. 호텔에서 내려다본 바다 풍경은 절경이었습니다. 호텔 곁에는 요트 주차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트를 보호하느라 방파제가 두 겹이었습니다. 아무리 파도가 쳐도 요트는 꿈적도 안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방파제이십니다. 아무리 파도가 쳐도 ‘잔잔하라’ 한 마디만 하시면 그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이시며, 산성이시며, 요새이십니다. 바다의 주인인 하나님은 유리바다처럼 우리를 평안하게 하십니다. 
  
나폴레옹이 어렸을 때, 포성 소리는 겁을 내지 않지만 바다는 근처에도 못 갔습니다. 왜 바다는 가지 못하느냐고 묻자 “병사들이야 내가 명령하면 내 말을 따르지만 바다는 그렇지 않잖아”라고 했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바다는 두려운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사람에게는 두렵지 않은 존재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언제나 든든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바다도 압니다. 바다가 하나님의 자리임을 압시다. 바다는 하나님의 넓은 가슴입니다. 세계를 품는 하나님의 가슴 같은 사랑을 압시다. 바다가 자리인 하나님의 바다같은 사랑을 아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둘째, 바다는 하나님의 마음이므로 모든 것을 품는 가장 비싼 자원입니다. 

에스겔 28:2 하반절에는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가운데에 앉아 있다 하도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 큰 바다에 앉아서 큰 바다를 지배하십니다. 인류의 역사는 바다를 끼고 발전하였습니다. 고대는 지중해시대입니다. 고대의 역사를 보면 트로이전쟁이 등장하고 오디세이의 이야기가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모두가 바다에서 벌어진 이야기들입니다. 그리고 흔히 그리스와 로마 중심의 시대를 그레코로만시대라고 하는데 이 시대의 배경이 지중해입니다. 

성경시대도 마찬가지로 고대이므로 지중해 중심의 이야기들입니다. 근대는 대서양시대입니다. 대서양시대에는 영국과 에스파냐 그리고 프랑스 등이 바다로 진출하고 바다를 장악하던 시대입니다. 이 시대는 바이킹의 활약도 지나칠 수 없습니다. 이 시대에 러시아는 바다를 지배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러시아는 유럽에서 가장 문화적으로 낙후되었다고 합니다. 가장 열등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열등의식을 감추기 위하여 일으킨 것이 공산주의혁명이라는 문화비평도 있습니다. 현대는 태평양시대입니다. 태평양을 중심으로 세계의 힘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환태평양시대는 태평양 연안국들이 세계를 움직입니다. 그래서 아시아태평양경제회의(APEC)이 중요한 모임이 되고, 아시아국가들의 모임인 아세안(ASEAN)도 주목을 받습니다. 미국에서는 대서양시대에는 뉴욕이 무역의 중심항구였지만 1995년 이후로는 태평양을 끼고 있는 로스앤젤레스가 중심항구가 되었습니다. 이 시대는 태평양을 지배해야 세계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바다는 풍요의 상징입니다. 바다에는 온갖 것이 함께 삽니다. 큰 고래부터 작은 멸치까지 한 바다에 삽니다. 바다에는 알지 못하는 것까지 함께 삽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온갖 생물들이 바다에 함께 삽니다. 바다에는 생물뿐만 아니라 다양한 자원들이 풍성합니다. 식량이나, 광물이나, 에너지 자원이 풍부합니다. 미래세계에 가장 요긴한 자원이 바로 바다입니다. 우리나라가 세계최고의 조선국입니다. 조선 수주량이 세계에서 최고입니다. 바다를 정복할 중요한 기술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물이 가진 일곱 가지 덕(水有七德)이 있습니다. 첫째는 만물을 소생케 하는 생명력입니다. 둘째는 바위도 뚫는 물방울의 끈기와 인내입니다. 셋째는 흐르고 흘러 바다를 이루는 대의입니다. 넷째는 어떤 그릇에나 담기는 융통성입니다. 다섯째는 구정물도 받아주는 포용력입니다. 여섯째는 막히면 돌아갈 줄 아는 지혜입니다. 일곱째는 낮은 곳을 찾아 흐르는 겸손입니다. 바다는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서 어떤 것보다 넓은 것이 바다입니다. 
  
바다는 자기를 떠나갔다가 와도 받아주고, 왔다가 가도 보내줍니다. ‘스몰트화’(smoltification)라는 말이 있습니다. ‘스몰트’는 바다로 나갈 준비가 된 어린 연어입니다. 어린 연어가 몸의 색깔이 변하고 다시 바다로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강에서 바다로 가서 다 큰 고기가 되면 다시 바다에서 급류를 거슬러 모천으로 돌아옵니다. 연어는 강에서 바다로, 바다에서 강으로 왕래하지만 이 모든 것을 다 용납하는 것이 바다입니다. 
  
일본인 해양학자인 다까하시 마사유키가 쓴 ‘미래자원 바다에서 건진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바다 에너지와 자원에 관한 책입니다. 바다의 귀중한 자원인 해수의 이용법을 특히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바닷물은 그 자체가 귀중한 자원입니다. 요즘에는 깊은 땅의 물도 오염이 되어 믿을 수 없다고 하여 깊은 바다 속의 심층수, 심해수를 식수로 사용합니다. 심층수는 상당히 비싼 걸로 알고 있습니다. 
  
21세기의 보고(寶庫)는 바다입니다. 미래의 자원의 보고는 바다입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북극이나 남극을 개발하려고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바다에 진출하여 바다 속에 있는 자원을 개발하려는 ‘신 바이킹 족’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일전에 아내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제가 아내에게 잔소리를 좀 했습니다. 그랬더니 “여긴 교회 아니잖아? 당신이 집에서도 당회장이야?” 그래요. 그래서 저는 웃으면서 “지아비가 하늘이잖아. 당신은 땅이야!” 했더니 아내가 “요즘 땅값이 얼마나 비싼데!” 그럽디다. 그래서 그 한방에 제가 졌습니다. 요즘 땅이 많이 비싸지요. 그러나 사실은 바다가 보물입니다. 바다가 가장 비쌉니다. 얼마나 비싼지 팔고사고 하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일본이 독도가 자기의 것이라고 우겨댑니다. 돌섬인 독도를 보고 억지 부리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독도가 있는 그 바다가 욕심나는 것입니다. 
  
세계 최초로 비행기를 조종하며 대서양을 횡단한 린드버그의 부인인 앤 모로 린드버그는 ‘바다의 선물’이란 책을 썼습니다. 그녀는 여름휴가를 맞아 외딴섬에서 바다에 대한 잔잔한 단상들을 썼습니다. 조개껍데기를 통해 자신의 생활, 주변과의 관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섬세한 통찰력으로 기록하였습니다. 그녀는 세상을 살면서 너무 조급하지 말 것, 백사장을 파헤치면서 우연의 보물을 찾지 말 것, 참된 삶의 의미를 발견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바다에서 보물을 찾는 것이 아니라 바다 그 자체가 보물입니다. 바다는 가장 좋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Sea Lion’이 뭔지 아십니까? 한국 사람은 바다사자란 이름을 두고도 물개라고 합니다. 미국사람들은 바다사자라고 합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미국인의 눈에는 바다사자이지만, 한국인의 눈에는 개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한국인의 생각이 훨씬 더 큽니다. 왜냐하면 사자를 개로 보니까요. 한국 사람들은 작은 사람들이 겁도 없고 아주 큰 생각을 많이 합니다. 이 작은 나라가 세계에서 경제, 문화, 교육 그리고 요즘은 예술까지 세계 최고를 자랑합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교육을 얘기할 때마다 한국을 예로 듭니다. 

요즘에는 젊은이들의 K-pop이 또 세계를 흔들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 노르웨이의 대학살 테러의 용의자인 브레이빅은 한국을 단일민족주의가 살아 있는 가부장적 나라라고 추켜세웠습니다. 뭘 잘 모르고 한 말 같지만 어쨌든 한국은 세계적으로 이제는 작은 나라가 아니라는 느낌입니다. 사자를 개로 보는 민족이니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나라에 삼면을 바다로 주셨으니 이 또한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다를 통하여 풍성하게 하신 부요하신 우리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결론 

성표기의 기원에 대해 아십니까? 왜 ♂은 남성, ♀은 여성으로 표시하시는지 아십니까? 이 표시는 의학(해부학)적 표현이 아닙니다. 그리스 신화와 관련된 상징입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여성을 ‘♀’로 표시한 것은 여성이 손거울을 들고 있는 모습입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사랑과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Aphrodite)는 바다의 거품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아프로디테는 그래서 바다에서 태어나서 에로스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남성을 ‘♂’로 표시한 것은 그리스의 전쟁의 신 아레스와 관련된 것인데 창과 방패를 표시합니다. 그리스의 신들은 걸핏하면 바다에서 나고, 바다에서 죽고, 바다에서 싸우고, 바다에서 삽니다. 그리스는 바다를 빼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삶은 바다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그리스는 세계적인 선박 국가입니다. 많은 선박 왕들이 그리스인들입니다. 
  
그리스 신화를 그렇게 만든 것은 인간의 삶이 바다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바다 없이 못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못 사는 사람입니다. 바다의 하나님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되기를 바랍니다. 

시편 65:7에는 “바다의 설렘과 물결의 흔들림과 만민의 소요까지 진정하시나이다”라고 합니다. 바다의 하나님은 지금도 바다를 조정하고 계십니다. 요한은 밧모섬에서 험한 파도 소리를 듣고 바다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우리도 바다를 보고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을 듣고, 하나님을 느끼고, 한 없이 넓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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