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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의 흔적 (갈 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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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흔적 (갈 6:17)


‘교회에서 발견되는 나와 남이 다른 점’ 에 대한 글입니다. 남이 손바닥 만한 성경책을 가지고 다니면 경건치 못한 것이고, 내가 작은 성경을 가지고 다니는 이유는 활동적인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남이 새벽기도 못나오는 것은 게으르기 때문이고, 내가 새벽기도에 못나오는 이유는 워낙 사회적 활동이 많아서입니다. 남이 눈물로 기도하면 유별난 신앙이고, 내가 눈물로 기도하는 것은 간절한 마음 때문입니다. 남이 기도를 길게 하면 주책이 없는 까닭이고, 내가 기도를 길게 하는 까닭은 정성을 다하기 때문입니다. 남이 ‘주시옵소서’ 기도하는 것은 기복신앙이고, 내가 ‘주시옵소서’ 기도하는 것은 성경의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남이 헌금을 적게 하는 것은 인색하기 때문이고, 내가 헌금을 적게 하는 것은 하나님은 과부의 엽전 두 푼을 칭찬하셨기 때문입니다. 남이 타협하면 야합이고 내가 타협하면 정당한 양보입니다. 남이 결혼식 참석을 위해 주일을 지키지 못하면 신앙이 자라지 못한 때문이고, 내가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가문의 평화를 위한 까닭입니다. 남이 예배에 참석치 않는 것은 신앙이 없기 때문이고, 내가 예배에 빠지는 것은 ‘하나님은 어디나 계신다’ 는 성숙한 신앙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남이 예배 시간에 늦으면 ‘5분만 일찍 출발하지’ 내가 늦으면 ‘설교가 중요하지’ 말합니다. 남이 교회에서 직분을 받으면 ‘아니 벌써?’ 내가 직분을 받으면 ‘이제서야’ 라고 말합니다. 

남이 넓은 집으로 이사를 하면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으셨는데’ 하며 내가 넓은 집으로 이사를 하면 ‘네 지경을 넓히리니’ 라고 말합니다. 남이 교회에 올 때 화장을 하는 것은 사치하기 때문이고, 내가 교회에 갈 때 정성 들여 화장을 하는 것은 최소한의 에티켓이라 합니다. 남이 예배시간에 졸면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는 말씀이 생각나고, 내가 졸면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어쩌면 이렇게 나와 남이 다릅니까? 과연 이러한 이기적인 신앙의 모습에서 예수의 흔적을 칮아 볼 수 있습니까?

유대인들은 육체의 흔적인 할례에 대하여 많은 무게를 두며 할례를 받지 않으면 이방인이나 버리운 자 같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할레를 받거나 받지 않거나가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받았느냐가 문제라고 강조합니다. 즉 예수 믿고 거듭나 새로운 사람이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새롭게 된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의 흔적이 있는 사람입니다

본문 17절입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여기의 ‘흔적’은 헬라어로 ‘스티그마’ 입니다. 즉 소유의 흔적입니다. 소나 양에게 찍는 낙인(烙印)을 의미합니다. 당시 노예나 포로에게도 낙인을 찍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예수의 소유를 나타내는 스티그마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편하게 믿으려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집니다. 손해 안 보고 믿으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으면 손해 보고 힘든 일이 생깁니다. 상처가 남습니다. 복음을 위해 살다가 생긴 흔적입니다. 바울은 예수를 위한 수 없는 고난이 자신에게 주신 흔적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습니까?  

첫째로 나의 손에 

사랑의 원자탄이라 불리는 손양원(孫良源) 목사는 여수 애양원에서 나병 환자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정상인이 그곳에 출입할 때는 마스크를 썼고, 손에는 소독한 장갑을 끼고, 발에는 장화를 신었습니다. 그러나 손목사는 맨손으로 나병환자를 만졌습니다. 대화하였습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나환자들이 놀라며 경계의 눈빛으로 보았습니다. “이것이 대체 무엇인가? 피를 나눈 부모 형제도 나를 꺼려해서 쫓아냈는데, 백년해로를 하겠다고 약속한 아내와 남편도 함께 살지 못하겠다고 버렸는데, 자식도 더럽다고 나를 쫒아냈는데, 저 사람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내 그들은 손 목사의 진실한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손 목사를 거절하며 나환자들이 도망칩니다. “목사님, 가까이 오지 마세요. 목사님도 나병에 걸려요. 멀리서 기도해주세요.” 나환자들의 그런 모습을 보며 손양원 목사가 고백한 말입니다. “차라리 내가 나병에 걸렸으면 좋겠다. 그리되면 저들처럼 가까이 오지 말라고 뒷걸음치는 환자가 없지 않겠는가? 언제라도 그들과 함께 웃고 떠들고 뛰놀 수 있지 않겠는가?” 그는 오히려 나병에 걸리기를 원했다고 전해집니다. 

마가복음 1장 42절입니다.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나환자를 만지는 것은 율법이 금하는 범법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에게는 위생상의 문제나 율법의 문제보다 민망히 여기는 마음이 우선이었습니다. 민망히 여김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예수의 손은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손이었습니다. 문둥병자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께서 만지시며 병을 깨끗이 고쳐주셨습니다. 약한 자를 보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긍휼을 베푸시는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도 예수의 손처럼 어려운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는 손이 되어야 합니다. 

뇌세포는 세월이 갈수록 파괴의 과정을 거치면서 기능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흔적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가는 것은 말이 아니라 몸의 흔적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을 베푸는 예수의 손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손에 사랑과 섬김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나누어 주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고통과 질병에서 자유하게 하신 예수의 손처럼 긍휼히 여기며 사랑을 베푸는 흔적이 손에 나타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나의 어깨에 

인도의 성자로 불리우는 선다 싱(Sundar Singh)이 추운 겨울 날 동료 수도사와 함께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수도원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가던 길에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함께 가던 수도사가 “저렇게 죽는 것은 운명이니 우리 갈 길을 갑시다,” 하지만 선다 싱은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이 길을 지나가게 하신 것은 저 사람을 도우라고 하는 부르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라며 쓰러진 사람을 업었습니다. 혼자 가기도 힘든 산을 등에 사람을 업은 채 죽을 고생을 다해 수도원 가까이 왔습니다. ‘이 살았구나’ 하며 안도의 숨을 내쉬는데 무엇인가 발에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보니까 앞서 갔던 동료 수도사였습니다. 그는 혼자 가다가 얼어 죽었던 것입니다. 

그 후 선다 싱은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게 되면 “지고 가야 할 짐이 없을 때 나는 가장 어려웠습니다” 라고 답했습니다. 선다 싱은 쓰러져 있는 사람을 도와야겠다는 마음에서 업고 갔지만, 사실은 그 사람 때문에 추위를 견디며 살 수 있었고, 선다 싱 때문에 그 사람도 살 수 있었습니다. 남에게 작은 도움의 손길을 펼치는 것은 그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짐을 나누어지는 것은 자신을 살리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깨에 메고 가는 짐이 결국 나를 살리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의 말처럼 십자가를 어깨에 메고 가면 언젠가 그 십자가가 나를 인도할 것입니다. 

본문 2절입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예수는 우리의 짐을 대신 지시기 위해 생명까지 내어 놓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그 사랑을 기억하고 우리도 서로의 짐을 져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어깨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명예와 계급장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사명과 직분의 짐을 메어야 합니다. 그 짐이 결국 자신을 무겁게 누르는 짐이 아니라 위로 올라가게 할 디딤돌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어깨로 메는 일은 하고 싶다고 하고 하기 싫다고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피곤하고 힘들어도 어깨로 메는 일이 가장 명예롭고 거룩한 일임을 믿고 묵묵히 순종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섬김의 흔적이 어깨에 나타나야 합니다. 어깨에 메는 희생이 없이는 어떤 영광도 기약할 수 없습니다. 축복을 기대하기 전에 먼저 멍에를 멘 흔적이 어깨에 있는 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어진 사명을 어깨에 메고 예수의 뒤를 좇아가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나의 무릎에 

허드슨 테일러(J. Hudson Taylor) 선교사는 기도의 사람입니다. 혈혈단신으로 중국에 들어가서 전무후무한 선교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까닭은 엎드려 기도하는 일에 전력했기 때문입니다. “중국에 해가 떠오를 때면 언제든지 테일러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누군가 테일러를 찾아와 질문합니다. “선교사역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테일러가 대답했습니다. “오직 기도로 사람을 움직였을 따름입니다.” 그 뜻이 무엇이냐 물었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사람을 움직이시도록 하였습니다. 당신도 자신의 힘으로 사람을 움직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도록 하십시오” 이어서 허드슨 테일러는 권면합니다. “어떤 반대를 만나더라도 그때마다 무릎의 힘으로 이기십시오.” 

누가복음 22장 41절입니다.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육신을 입고 오셨기 에 십자가를 져야하는 일을 놓고 고민 하셨습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무릎을 꿇는 자는 실패하지 않습니다. 치욕을 당하는 것 같지만 영광으로 바뀌게 하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무릎에 기도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초대교회 당시 무릎을 보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알 수 있었습니다. 경건한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었습니다. 

AD 325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소집된 니케아 종교회의(Councils of Nicaea)에 모인 목회자의 숫자가 3백명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참석한 이들은 대부분 오른 눈이 뽑힌 사람, 양손이 다 잘려 버린 사람, 두 다리가 잘려 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복음을 전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때문에 잡혀가 고문을 당하고 고초를 당하다 눈이 뽑히고 팔과 다리가 잘렸으며 온 몸에 흉터 자국으로 가득했던 것입니다. 성찬식을 집례 하는 감독이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위해 박해를 받다가 온 몸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고난의 흔적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했던 사랑의 흔적이요, 주 앞에서 칭찬받을 가장 영광스런 흔적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님을 사랑했기에 승리를 얻지 않았습니까?”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들이 영향력이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죽으려고 예수를 믿지 않고 살려고 믿기 때문입니다. 섬기려고 믿지 않고 섬김 받으려고 믿기 때문입니다. 모름지기 예수 때문에 손해 본 흔적이 필요하고, 예수 때문에 고통당한 흔적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이 소유한 거룩한 흔적 ‘스티그마’ 입니다. 

우리는 극심한 박해 시대에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팔다리가 잘리지 않는다 할지라도 예수의 흔적을 몸에 지녀야 합니다. 예수의 흔적은 자랑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며 견고히 서는 그리스도인의 마지막 보루입니다, 가는 곳마다 위대한 예수의 흔적을 제시할 수 있어야 참된 그리스도입니다. 그리할 때 예수의 흔적은 마지막 날에 상급으로 바꾸어질 것입니다. 부디 예수의 흔적이 손에, 어깨에 그리고 무릎에 나타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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