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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적당하게! (신 11: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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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하게! (신 11:13-17)  

<어제 내린 비, 지나친 비>

지난주에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가히 물폭탄이라는 말이 무엇인지 알 정도로 쏟아 부었습니다. 가끔씩 멈춘 적이 있었지만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또 내렸습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게릴라성 집중호우”라는 말일 것입니다. 게릴라는 멈춘 듯하다가 갑자기 기습공격을 잘 하지요. 이번 장맛비도 그랬습니다. 멈춘 듯 하다가 갑자기 무서운 기세로 내렸습니다. 불과 몇 시간 동안 굵은 소나기가 집중적으로 한 지역에 내리다보니 인명피해가 많이 났습니다. 특히 부자동네인 강남지역에 수해피해가 심했습니다. 우면산 자락 여러 곳에 산사태가 일어나 막대한 인명피해를 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인천지역에 있는 인하대학교 학생들이 봉사활동을 갔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수해로 인해 아까운 목숨과 재산을 잃고 망연자실, 슬픔에 빠진 모든 분들께 하나님의 위로가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어서 빨리 슬픔을 딛고 재기하고 복구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있는 인천 내동지역에는 비나 눈이 상대적으로 적게 오는 곳으로 압니다. 제가 이 지역에 사는 동안 큰 폭우나 폭설을 만난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물폭탄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비가 내렸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비가 왔을 때 제가 한 가지 깨달은 진리가 있습니다. 뭐든지 “적당히”가 좋은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비도 적당히 와야지 너무 많이 오면 참 위험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적당히”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아름다운 말, “적당”>

적당(適當)이라는 말은 정도에 알맞다는 뜻이지요. “적당하다”라는 말과 비슷한 말을 떠올리면 이 말의 뜻을 더욱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좋다.” “알맞다.” “적합하다.” “합당하다.” “걸맞다.” “온당하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꼭 들어맞는 상태를 말합니다. 비도 적당히 오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그 적당한 비가 만물을 풍요롭게 합니다. 생명을 만들어냅니다.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아 논밭이 쩍쩍 갈라진 모습을 보십시오. 비가 안 와서 가뭄이 들면 사람이나 짐승이나 식물이나 논이나 밭이나 자연만물 모두가 다 죽습니다. 비는 꼭 와야 합니다. 하지만 적당히 와야 합니다. 지나치게 많이 오면 그 비는 사람과 자연을 죽입니다.

햇볕도 그렇지요. 인간이 매일 생활할 때마다 일정량의 햇볕을 쬐어야 한다고 합니다. 지하철역에서 상가를 운영하는 분들은 하루 종일 햇볕을 받지 못합니다. 이러다보니 직업병이 찾아오는데 뼈가 굽는 구루병이나 뼈의 양이 줄어드는 골다공증에 걸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루 종일 지하에서 일하면서 햇볕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분들이 쉽게 걸리는 구루병이나 골다공증을 고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하루에 무조건 30분 정도만 밖에 나가서 산보를 하면서 햇볕을 받기만 하면 됩니다. 햇볕이 비타민 D를 만들어주어서 자연치유가 일어나게 하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햇볕도 적당히 받으면 건강유지에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과도하게 받으면 일사병에 걸립니다. 게다가 오랫동안 비가 안 오고 뜨거운 햇볕만 내려쬐면 가뭄이 일어나 농작물이 타 죽습니다. 햇볕도 적당히 받아야 합니다! 


<천재(天災) 앞에 선 인간>

그런데 인간은 비나 눈을 적당하게 오게 할 재간이 없습니다. 햇볕을 적당하게 받게 할 능력이 없습니다. 인간의 과학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비나 눈을 적당하게 오게 만드는 기술은 개발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가뭄을 막을 기술을 개발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홍수나 가뭄, 폭설, 태풍, 지진, 쓰나미 등의 자연재해로 입는 재앙을 “천재”(天災)라고 하지요. 사람의 실수로 인해 생기는 재난인 “인재”(人災)와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일본에서 일어난 대지진이나 쓰나미, 또 이번에 우리나라에서 집중호우로 일어난 재앙은 모두 천재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재앙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발 비가 오더라도 좀 적당히 와야 할 텐데 이것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햇볕도 적당히 받았으면 좋겠는데 우리 뜻대로 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천재지변은 하나님께 맡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인류의 소원은 오늘 봉독한 본문 14-15절 말씀처럼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또 가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이른 비, 늦은 비가 적당한 때에 내려서 농사가 잘되는 것, 즉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고 가축도 풀을 잘 뜯어먹게 되어서 배부르게 먹고 사는 것, 인류의 한결같은 소망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되는 것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비나 눈이나 햇볕이나 자연기상을 적당하게 조절하는 것, 인간의 능력 밖에 있는 일입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한 때가 내리는 것,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적당하게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이 해야 할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13절을 봅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내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기면.” 늦은 비와 이른 비가 적당한 때에 오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명령을 청종해야 합니다.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인재(人災)를 예방하려면 적당하게!>

그런데 오늘 우리의 관심은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자연재해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천재가 아닙니다. 인간의 실수와 범죄로 인해 일어나는 인재입니다. 

이번 수해로 인해 사망한 숫자가 71명이나 됩니다. 전국적으로 총 8,805세대 16,192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비극이 일어난 이면에는 사람의 잘못이 크다는 주장이 분분합니다. 가령 춘천의 산사태로 큰 인명 피해가 일어난 것, 서울 서초구 우면산 일대의 산사태로 사망자가 속출하게 된 것은 다분히 인재라는 주장이 많습니다. 지나친 난개발로 지반이 약해진 나머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사태가 온 것뿐이라는 것이지요. 적당히 해야 하는데 지나친 난개발을 하다가보니 산의 저항력이 약해졌고, 결국 그 화가 고스란히 사람에게 되돌아왔다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개발이라는 것도 자연을 살리면서 하는 적당한 개발이 되어야 합니다. 요즈음 우리나라에 참 아쉬운 부분은 논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천에도 이제는 농경지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옛날 논이나 밭이었던 지역에 아파트 단지나 신도시가 들어섰습니다. 이러다가 세계적인 곡물위기가 갑자기 찾아오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될 때가 있습니다.

지난 번 노르웨이에서 일어난 연쇄 테러사건도 “적당”을 넘어서 과격하다는데 문제가 있지요. 테러범이 극우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유럽 기독교의 우월성을 전세계에 알릴 목적으로 이런 끔찍한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그는 노르웨이의 다문화 이민정책에 깊은 혐오감을 가졌습니다. 특히 이슬람교인들의 인구유입에 대해서 뿌리 깊은 증오심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노르웨이를 비롯한 유럽전역이 경제가 급격히 쇠퇴하고 높은 실업률과 문화적 정체성의 위기 등등의 위기감이 팽배한데 이 모든 문제가 무슬림들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이민정책의 결과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테러범은 이슬람교를 뿌리 뽑으려고 일어났던 중세의 십자군을 동경하는 기독교 원리주의자가 되었고 자신의 정치종교적 이념을 전세계에 알리기 위해 결국 엄청난 학살극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테러를 일삼는 것은 이슬람 원리주의자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렇게 기독교 원리주의자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번 노르웨이 테러 사건은 극좌도 문제이지만 극우 역시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최근에 신천지 사람들로부터 편지를 세 통이나 받았습니다. 아마도 상부에서 신천지 교인들을 대상으로 목사님들에게 편지를 보내라고 시켜서 보낸 것 같습니다. 손으로 직접 쓴 편지인데 내용이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습니다. 당신의 교회는 은혜가 없으니 신천지로 빨리 오라는 것이지요. 시대가 험하다 보니 이런 이단종파들이 더욱 기승을 부립니다. 그런데 “이단”(異端)이라는 말에서 “단”은 한문으로 끝 “단”(端)자인데 “극단”(極端)이라는 말의 “단”이 이 끝 “단”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결국 이단은 극단적으로 치우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건전한 상식 안에서 알맞게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데 극단적으로 믿는다는 것이지요. 
  

<극단을 넘어 중용으로!>

결국 정치이든 종교이든 극단적인 것이 문제입니다. 모든 것을 알맞게 해야 합니다. 먹는 것도 알맞게 먹어야 합니다. 잠자는 것도 알맞게 자야 합니다. 일 하는 것도 알맞게 해야 합니다. 노는 것도 알맞게 놀아야 합니다. 운동도 알맞게 해야 합니다. 저는 당뇨로 고생하던 분이 혈당을 조절한다며 운동을 지나치게 하다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경우를 알고 있습니다. 헬스클럽을 다니고 수영을 하고 지나치게 운동을 하다가 어이없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극단적으로 하면 화가 일어납니다! 적당히 해야 합니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알맞게 해야 합니다. 알맞을 때 아름답습니다. 적당할 때 건강해집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을 적당히 조절하십시오! 

조류학을 공부하는 대학 2학년생이 있었습니다. 아주 깐깐하기로 악명 높은 교수 밑에서 공부를 하느라고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드디어 학기말 시험을 치르게 되었는데 시험 문제가 기가 막혔습니다. 4지선다형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논술형도 아니었습니다. 교실벽에다가 25개의 새 사진들을 쭉 걸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진이 새 전체 모양을 찍어놓은 컬러사진들이 아니라 새의 발만 흑백으로 살짝 찍어 놓은 사진들이었습니다. 시험 문제는 사진에 찍힌 발만 보고 어떤 새인지 새 이름을 알아맞히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학생은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이 문제는 풀 수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학생은 시험을 치르지 않고 교실문을 뛰쳐나가기로 결심했습니다. 학생이 나가려고 하자 교수가 물었습니다. "자네는 시험은 안 보고 어디를 가나?" "이 문제는 도대체 풀 수가 없습니다. 기권하고 저는 밖으로 나가겠습니다." "그래, 이 시험이 학기말 시험이라는 것을 자네는 모르는가? 자네가 만일 이 시험을 치르지 않으면 자네는 내 과목에서 과락(科落)을 하게 될 것이네. 그래도 좋은가?" "좋습니다. 저를 과락 시키려면 한 번 그렇게 해 보세요. 저는 도저히 이런 시험을 치를 수가 없습니다!" 

학생이 교실문을 나서려고 하자 교수가 물었습니다. "자네 이름이 무엇인가?" 그러자 학생은 갑자기 자기의 바지밑단을 걷어 올리고 신발을 벗은 채 자기의 발을 교수에게 내보였습니다. "교수님, 제 발만 보시고 제 이름을 한번 알아 맞혀 보세요!" 

여러분, 참 통쾌한 복수가 아닙니까? 교수님이 낸 시험문제는 아무래도 지나친 감이 있지 않습니까? 적당해야 합니다. 만사가 알맞아야 건강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말씀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것 아닙니까? 

중용의 길을 가야 합니다. 중용(中庸)이 무엇입니까? 국어사전을 보니까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고 한 쪽으로 치우치지도 아니한, 떳떳하여 변함이 없는 상태나 정도”를 의미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중용지도(中庸之道)를 가야 합니다.

비가 지나치게 많이 오니 인간이 고통을 받습니다. 적당히 와야 합니다. 때로 햇볕을 지나치게 받으니 가뭄이 옵니다. 적당히 받아야 합니다. 천재나 인재를 막론하고 지나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적당할 때가 좋습니다. 알맞을 때가 아름답습니다. 더도 덜도 아닌 딱 들어맞을 때가 건강합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꼭 이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일상생활이 꼭 이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극단적인 것이 되어서 화를 입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개역성경은 고린도전서 14장 39절에서 사도 바울이 하신 말씀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극단적인 기상현상으로 자연과 인간이 고통을 받습니다. 극단적인 정치세력들로 인해 테러가 그치지 않습니다, 극단적인 이단종파 때문에 진리가 오염되고 세상이 혼탁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여러분은 만사를 적당하게 하십시오! 질서대로 하십시오! 거기에 생명과 건강과 안전과 평화가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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