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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초청 (마 11: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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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초청 (마 11:28-30)


성경은 참으로 방대한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하나하나가 모두 영감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마음에 더 와 닿고 가까이 대하게 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말씀이 바로 그런 말씀입니다. 이 본문은 신약의 대표적인 성구로 주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을 초청하시는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이 누구일까요?.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오늘의 사람들은 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어린이부터 장년까지 예외가 없습니다. 

오늘 청소년들에게는 입시가 가장 무거운 짐입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마음껏 뛰어 놀지도 못하고 공부에 매달린 모습을 보면 안쓰럽습니다. 초등학교 중급반만 되어도 학교가 끝나면 이 학원 저 학원으로 바쁘게 돌아다닙니다. 벌써부터 입시라는 무거운 짐을 질 준비를 합니다. 안쓰러운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무거운 짐이 대학에 갔다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대학생들은 졸업 후의 직장문제로 고민합니다. 그리고 미래가 불투명하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두려움의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가장 무거운 짐입니다. 

또한 중년층은 현실의 두려움의 멍에를 메고 살아갑니다. 너무 일찍 일터를 떠나게 되면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이 생깁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에는 용기가 없습니다. 본의 아니게 무능한 남편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자녀들 앞에서 아내 앞에서 무한히 작아집니다. 노년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노년의 가장 무거운 짐은 각종 질병입니다. 노년이 되면 각종 무서운 질병들이 그들을 노립니다. 오늘은 암이라는 병이 무섭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이 건강하게 살아왔지만 언제 암이 우리에게 찾아올지 모릅니다. 그보다 더 무서운 병은 치매입니다. 이 치매는 몸은 건강한데 기억장치가 고장 나는 병입니다. 

병원에 계신 부모님을 찾아갔는데 아버지가 아들을 보고 “누구십니까?” 하고 말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찔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치매는 근래 것은 모르지만 옛날 일을 잘 기억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근래 매일같이 싸우던 부부가 어느 날부터인가 다정하게 손을 잡고 다닙니다. 그것은 남편이 치매에 걸린 것입니다. 아내가 옛날 애인인줄 알고 말입니다. 상황은 웃기지만 이것도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무거운 짐은 항상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 우리들은 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짐들보다 더 무거운 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정적 사고” 입니다. 이 부정적 사고를 가지고 일평생 살아가는 일입니다. 이 부정적 사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 삶이 늘 어둡습니다. 현실이 더 고되고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다 거스르게 보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것입니까? 그런 분은 본인도 큰 짐을 지고 있지만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큰 부담을 줍니다. 그래서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문제가 생기곤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안에 들어와 받은 복은 소망스럽게 세상을 살아가는 복입니다. 

예수 안에 들어와 살면서 긍정의 복을 누리며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 복은 생각이 긍정적으로 변하고 소망적으로 전향적으로 미래적으로 변하게 되는 복입니다. 그래서 현실의 상황과 상관없이 천국의 소망과 부활의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죄인인 내가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만도 감사한 일인데 내 생각과 의식이 긍정적으로 바뀌어서 그 가운데 천국의 소망과 부활의 믿음을 갖게 되니 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이 긍정의 생각은 예수님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 들어가게 되면 이와 같은 긍정의 복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다 긍정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안에 들어와 살면서도 여전히 부정적인 생각에 머물러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 분들은 공동체를 불화하게 만듭니다. 회의를 하면 여러 사람들을 불편하게 합니다. 믿음의 생각은 간데없고 자꾸만 안 된다고 실패율만 생각하며 염려만 합니다. 이렇게 예수 안에 들어와 산다고 다 긍정적 믿음과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참 무거운 짐입니다. 정작 본인도 그것을 알고 이 짐을 벗으려고 하지만 잘 안됩니다. 그래서 이것이 무거운 멍에인 것입니다. 

우산장수와 소금장수를 아들로 둔 어머니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그 어머니는 날마다 걱정입니다. 비가 오면 소금장수 아들 걱정이고 날이 맑으면 우산장수 아들 걱정입니다. 이것이 오늘 보통 사람들의 일반적 유형입니다. 예수 안에 살면서도 이렇게 매일 걱정의 끈을 놓지 못합니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매일 감사 할 수 있습니다. 비가 오면 우산장수 아들이 우산을 많이 팔 것을 생각하고 날이 맑으면 소금장수 아들이 소금을 많이 팔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가 오는 날도 날이 맑은 날도 모두 행복한 날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조금만 바꾸면 일 년 내내 행복할 수 있는데 그렇게 생각을 바꾼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왜 어렵습니까? 그것은 변화를 받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이것은 말처럼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전히 이 무거운 멍에를 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주님께서 “다 내게로 오라, 내 멍에를 메라, 내 멍에는 가볍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은 내가 예수 안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내 생각이 예수님의 생각으로 바뀌게 되어 예수님처럼 긍정의 생각을 갖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둡게만 보이던 세상과 현실과 미래가 환하고 밝게 보이게 되고 무거운 멍에들이 순간적으로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내가 예수 안에 깊이 들어가는 삶이 복되고 은혜를 받는 삶입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님을 만나면 그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예수를 만나고 예수 안에 깊이 들어간다고 어려운 오늘의 현실이 순식간에 다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의 현실과 상황은 그냥 그대로 있습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전과는 다르게 내 생각이 달라집니다. 그러니까 그동안 무겁게 생각되던 환경과 상황이 소망적으로 보여 지게 되는 것 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무겁던 멍에들이 어느 날 갑자기 가볍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주시는 가벼운 멍에로 갈아 메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내게로 오라, 내가 주는 멍에는 가볍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내 인생에서 예수를 만난 것이 가장 큰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예수를 만나서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내가 예수님의 생각을 품고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생각이 바로 긍정의 생각, 긍정의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내 삶이 언제나 밝고 희망적이고 긍정적이 되었고 미래를 늘 소망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이 세상을 주관하시고 내 운명까지도 주관하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철두철미한 보험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그렇기에 밤에 잠이 달고 미래는 밝고 내일은 소망스럽게 생각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예수를 알고 난 후에 주어진 복이고 은혜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옛사람의 부정적인 자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몸은 신앙생활 속에 있으면서도 정신은 여전히 구태 속에 살아갑니다. 이 사람들이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멍에를 거부하고 부정적인 멍에를 메고 허덕거리는 것입니다. 바울 시대 유대교에서 개종한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이미 구속받은 주의 자녀가 되었지만 내심 율법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 할례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렸습니다. 그 가운데 할례주의자들은 그들을 자꾸 이간질하여 옛날을 회상시켰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나 마음에 평화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삶이 무거운 멍에를 진 삶입니다. 바울이 이 모습에 참 속상해했습니다. 그래서 할례주의자들을 책망한 것입니다. 

이렇게 진정으로 내가 예수 안에 들어가게 되면 거듭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면 내안에 새로운 자화상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긍정의 생각을 품는 신앙입니다. “나의 삶은 주님이 주관하신다”는 이 믿음이 내 삶의 중심에 흐르게 됩니다. 그러니까 매사가 감사하고 기쁨이 있고 즐거움과 기대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려면 몇 가지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 방식대로 생각 

예수를 믿으면 어느 날 갑자기 생활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어도 현재 내가 처한 환경과 처지는 그대로 있습니다. 달라지는 것이 있다면 내가 예수를 알면서 생각의 기준이 바뀌고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전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방법으로 생각하고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환경에 따라 근심하고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그 환경에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세상적으로는 직업이 변변치 못하고 보잘 것 없는 어리석은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늘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늘 실패합니다. 의심합니다. 후퇴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그 성령이 채워지자 그들의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패배의식이 사라지고 용기와 담대함이 채워졌습니다. 그래서 용기 있게 나아가 복음을 증거 하게 되었습니다. 환경은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생각과 사고가 하나님의 방법으로 달라진 것입니다. 즉 내가 주님의 제자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내가 하나님 자녀라는 자화상 갖게 되고 그 자화상이 그때부터 내 인생과 미래를 디자인하여 나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긍정의 믿음 

똑같은 환경이라도 보는 관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현실을 긍정적으로 환경을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나는 건강하다, 잘 할 수 있다, 나는 행복하다” 이런 그 긍정의 생각과 믿음에 따라 나의 처한 환경이 긍정의 환경으로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가나안을 정탐했던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10명의 사건이 이런 경우입니다. 그들은 모두 같은 것을 보았지만 그들의 시야, 생각, 기준은 서로 달랐습니다. 그래서 서로 다른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다른 생각과 기준은 서로 다른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결국 여호수아와 갈렙은 축복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지만 그 나머지 10명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내 안에 부정적인 사고에 기준을 삼으면 나타나는 현실이나 미래가 다 부정적인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리고 평생 무거운 멍에를 벗을 수 없습니다. 반대로 긍정적인 믿음의 눈으로 기준을 삼으면 지극히 소망적인 환경이 내 앞에 펼쳐지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지고 있는 현실의 멍에들이 가볍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이고 은혜입니다. 가나안과 같은 천국은 이 눈이 뜨이지 않으면 절대로 갈 수가 없습니다. 보고 믿지도 못한 사람이 어떻게 갈수가 있겠습니까? 

신발 만드는 회사에서 두 직원을 시장 개척을 위해 아프리카로 파견을 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아프리카를 살피고 돌아와서 보고서 냈는데 그 보고의 내용이 정반대였습니다. 한 사람은 “신발수출 불가능, 가능성 0%, 아프리카 사람들 전원 맨발임”이라고 보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사람은 “아프리카는 황금시장임, 가능성 100%, 아프리카 사람 전원 맨발임”이라고 보고했습니다. 둘 다 맞습니다. 누구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단지 생각과 관점이 다른 것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고의 차이는 당장은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10년이 지난 다음에는 엄청나게 다른 결과를 초래합니다. 

우리들이 예수를 깊이 알게 되면 이 믿음의 눈이 뜨이고 암담한 현실 속에서 가능성을 보게 되고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됩니다. 이 확신이 믿음의 자산입니다. 이렇게 확신을 하는 사람은 기쁨과 행복이 넘치고 현실과 미래에 대한 기대가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무거웠던 멍에들이 가볍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은 현실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함이 늘 자신을 지배합니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막연함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니 그 멍에가 얼마나 무겁게 느껴지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내가 주는 멍에를 메라, 내가 주는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하시며 강권하여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부정적 생각을 대적 

자꾸만 긍정적인 생각과 믿음을 가지라는 이유는 그 결과가 엄청나게 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긍정의 믿음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내가 오늘부터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해도 그것이 잘 안됩니다. 왜냐하면 내안에 부정의 쓴 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쓴 뿌리들이 오늘 현실을 더 어둡고 실망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정적이 되고 결국 믿음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원래 악합니다. 그래서 배우지 않아도 거짓말을 하고 욕망과 시기와 질투가 솟아나옵니다. 아이들이 얼마나 천진하고 깨끗합니까. 천사와 같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에게 동생이 생기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질투심에 사로잡힙니다. 몸살을 앓습니다. 엄마는 네 동생이니 예뻐하라고 말하지만 아이도 그렇게 하려해도 잘 안 됩니다. 

그래서 동생을 할퀴고 때리고 심하게 투정부리기도 합니다. 그러다 안 되면 아이가 몸살을 앓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 자신도 하려고 노력하는데 그것이 잘 안됩니다. 왜냐하면 내 속에 쓴 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에 더 노력해야 합니다. 내가 주님 안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때 내 안에 긍정의 믿음이 싹이 트고 그때 내 안에서 긍정의 믿음이 뿜어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을 꾸준히 내 안에 정착시켜 내 안을 채워야 합니다. 그 때 내 안에서 순종과 믿음의 자질이 채워져 가는 것입니다. 

이런 긍정의 믿음과 생각은 내 신체에도 지대하게 영향을 끼칩니다. 그것을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라고 합니다. 에밀 쿠에라라는 약사에게 밤 늦게 손님이 찾아와서 병원에 갈 수 없으니 약을 달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거절을 했으니 그 손님은 계속 졸라대는 바람에 인체에 아무 영향도 없는 포도당류의 알약을 주어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그 사람이 찾아와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 약을 먹고 금방 나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병에 대한 아무런 영향이 없는 약임에도 불구하고 약사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약이 되어 효과를 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플라시보 효과입니다. 그런데 이것과는 반대인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생각이 불길할 때가 있습니다. 

기분이 영 좋지 않다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진짜로 안 좋은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내 이럴 줄 알았어하고 말합니다. 즉 안 좋다고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면 그렇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옛 선조들은 꿈을 반대로 해석하곤 했습니다. 나쁜 꿈을 꾸면 좋은 일이 있으려나하고 말입니다. 이것을 플라시보 효과에 반대되는 개념인 노시보 효과(Nocebo effect)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나를 도우신다, 나는 승리한다” 하고 믿는 믿음이 전제되면 그 길이 힘이 있고 좋은 결과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예수를 만났다고 해서 그 다음날부터 내 환경과 처지가 바뀌어 지는 것은 아닙니다. 병든 몸이 갑자기 나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달라지는 것입니까? 내 생각과 마음과 판단 기준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내안에 예수님을 향한 자화상이 마련됩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하나님 방법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여 그곳에 마침내 소망스런 결과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현실의 내 삶에 긍정적 효과가 미쳐서 새 길과 새 방법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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